불설초일명삼매경 상권
4. 보살의 성품
[보살과 성분과 연각의 배움]
그때 이구목(離垢目)이라는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무엇을 보살의 배움이라 하고, 무엇을 성문의 배움이라 하며, 무엇을 연각의 배움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끝이 없고[無限] 걸림이 없으면서[無礙] 그 마음이 태연한 것을 보살의 배움이라 하는 것이요,
한계가 있고 걸림이 있으면서 그 마음에 치우침이 있는 것을 바로 성문의 배움이라 하며,
대승(大乘)을 바라고 사모하면서도 나아가고 물러감에 지혜가 없어 마음이 중간에 머뭇거리는 것[中跱]을 바로 연각의 배움이라 하느니라.”
[끝이 없다, 걸림이 없다, 태연하다]
이구목이 또 물었다.
“무엇을 끝이 없다 하고, 무엇을 거리낌이 없다 하며, 무엇을 마음이 태연한 것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의 뜻을 내어 온갖 것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기어 다니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과 만물을 제도하고자 하며,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와 선권방편을 행한다.
다만 모든 중생을 위할 뿐 자기 몸은 생각지 않으며,
4등(等)의 마음인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를 따르고,
또한 4은과 지혜로써 어짊과 사랑을 베풀며 사람을 이롭게 하되,
온갖 것에 평등하고 이롭게 하면서 위액(危厄)과 궁핍을 구제하며,
그들을 교화하여 도(道)를 닦게 하고 지혜를 닦게 하면서 보살도를 배우게 하는 것이니라.
스스로 제 몸의 허물을 반성하면서 다른 이의 결점은 살피지 않고 공경하는 것을,
마치 부모와 같이 하고 자식과 같이 하고 제 몸과 같이 하면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게 하며,
몸소 공경하는 덕으로써 온갖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고, 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온갖 사람들을 가엾이 여긴다.
원수나 친한 벗에 따라 특별히 다른 마음이 없고, 몸이 공(空)하여 중생의 어느 곳에나 처하며,
나 자신도 그러할 뿐[自然]이요, 모든 법 또한 자연 그대로이며 도의 법[道法]도 자연 그대로요, 부처님 법도 자연 그대로이며,
온갖 것은 본래부터 없어서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는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끝이 없는 것이니라.
생사의 근원에서 열반을 구하여 찾되 열반을 보지 않고,
열반의 근원에서 생사를 구하여 찾되 역시 생사를 보지 않고,
생사를 미워하지도 않고 열반에 머물지도 않으면서 머무를 바 없는[無所住] 데에 머무르는 것이,
마치 햇빛이 두루 비추면 모든 것에 빠짐없이 이르되 역시 가고 오는 것이 없고 광명도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이와 같아서 온갖 것에 두루 들어가되 역시 들어가는 바가 없고, 또한 가고 오고 돌아다닌다는 생각이 없느니라.
비유하면 큰 바다에 7보로 된 명월주(明月珠)가 있으면 용ㆍ신ㆍ교룡ㆍ뱀ㆍ자라ㆍ거북ㆍ고기 등이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는데도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그 물도 하나의 맛이어서 또한 더러워짐도 없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현재의 생사의 3취의 재난에서 설령 열반의 무위(無爲)의 경계에 이르게 되어도 일찍이 더하거나 덜함이 없어 마음은 마치 명주(明珠)와 같고 또는 맑은 물과 같아서 끝내 더럽거나 흐리지 않느니라.
널리 중생을 구제하여 모든 신통과 지혜와 평등으로 들어가 그로써 중생에게 보이는 것은,
마치 허공 가운데 독이 있는 나무와 약이 되는 나무[藥毒樹]가 생겼을 때에,
그 독이 있는 나무가 허공을 해치지 못하고,
그 약이 되는 나무가 허공을 치료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생사의 3독(毒) 가운데 있다 하여도 더러워지는 바도 없고, 가령 열반의 청정한 곳에 있다 하여도 역시 청정해시는 바가 없나니, 다 같이 중생을 제도하면서 구제하지 않는 바가 없느니라.
비록 들어감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나고 들고 오고 가고 돌아다님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걸림이 없다[無礙]고 하느니라.
도의 마음[道心]은 한계가 없어서 일정한 곳에 있지 않고 사람도 없고 마음도 없으며 또한 중생을 제도한다는 마음도 없어, 마음은 일체법과 같아서 그 나아가는[趣] 데와 같은 것이니,
이렇게 되면 곧 평등한 데로 나아가고, 그 평등한 데로 나아가면 곧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아 삼계도 없느니라.
성문의 자리[聲聞地]도 없고 연각의 처소[緣覺處]도 없으며 보살의 머무름[菩薩住]도 없어서,
유위(有爲)에 처하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처하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으며, 또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처소도 없다.
제도하되 제도하는 바가 없고, 생(生)하되 생하는 바가 없으며,
도적(道跡)도 본래 없고 왕래(往來)도 본래 없으며,
돌아오지 않음(不還)도 본래 없고 집착하지 않음(無著)도 본래 없으며,
연각도 본래 없고 삼계도 본래 없으며,
중생도 본래 없고 불도(佛道)도 본래 없으며,
이 본래 없다는 것도 없어야 비로소 진실로 본래 없는 것이요 좋아하거나 싫어할 바도 없나니,
이것을 바로 그 마음이 태연하다고 하느니라.”
[한계, 걸림, 치우침]
이구목이 또 물었다.
“무엇을 한계[限]가 있다고 하고 무엇을 걸림[礙]이라 하며, 무엇을 그 마음에 치우침이 있다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고 죽는 삼계의 우환을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열반이 제일이라고 말하며,
그대로인 법과 몸을 싫어하는 괴로움을 분명히 모르고 수없는 겁 동안 진로(塵勞)에 돌아다니는 것을 꺼리며, 보시ㆍ지계ㆍ인욕ㆍ일심ㆍ정진과 지혜를 배우면서 게으르지 않고 머리ㆍ눈ㆍ귀ㆍ코ㆍ골수ㆍ뇌ㆍ살과 팔다리 등 있는 바를 베풀어 주는 것이 한이 없어야 비로소 부처님이 된다고 하는 이런 마음을 미리 품고서,
곧 물러나 보살의 법을 배우지 않고 몸을 없애려고 하는,
이것을 바로 한계가 있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미 아라한이 되어서 제도할 삼매(三昧)와 선식(禪息)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의 마음을 보게 되는데,
온갖 근본을 미리 볼 수가 없고 병에 따라 약을 주지도 못하며,
오랫동안 머무르고 싶어도 더러운 것이 흐르는 이 깨끗하지 못한 몸을 관찰하고는 즐거운 것이라고 보지 못하는 것이,
마치 원수나 도적과 같고 살무사와 같고 독과 같다고 하면서 일찍 열반을 증(證)하려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걸림[礙]이라 하느니라.
열반에 머무르면서도 광명을 좋아하고 어둠을 싫어하며,
모든 법에는 도무지 근본이 없음을 알지 못하여 입장을 밝혀서 공의 지혜[空慧]를 모르니,
이것을 바로 그 마음에 치우침이 있다 하느니라.“
[중간에 머뭇거리는 것]
이구목이 또 부처님께 물었다.
“무엇을 중간에 머뭇거리는 것[中跱]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의 뜻을 냈으면서도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일심ㆍ지혜가 모두 허망한 생각하며,
세존의 32상과 80종호를 얻고자 하면서도 위신과 거룩한 덕은 중생과 매우 다르다고 여기며,
본래부터 여래의 교화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모르면서 몸과 목숨을 나타내 보이며 도리어 여래의 교화를 구하고 있다고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이 나를 제도하려 하면서도 본래 공함을 알지 못하면서 4등심을 행하고 4은에 집착하는 것이요,
공(空)에 이르러서도 소견[見]이 없고, 인(因)을 위하여 그침이 없으며,
진퇴(進退)를 알지 못하고 공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서도 선권방편과 법신의 밝음이 없으면서 제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연각의 배움이라 하느니라.”
이 법문을 말씀하실 때에 수없는 하늘과 사람들은 모두 위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향해 발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