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심범천소문경 제1권
4. 해제법품(解諸法品)
부처님께서 다시 지심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이미 세간의 경계를 건넜기에 세속을 보여 주고, 세속에 대해 습기[習]와 즐거움[樂]을 가르치며, 또한 세속의 즐거움을 건너고 세속을 멸진하고자 한다.
이것을 일컬어 세간의 5음(陰)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세간과 자아를 벗어나야 세간을 멸진하니, 5음을 구해야 한다’고 하며,
도(道)에서 노니는 자가 있다면 이름하여, ‘두 가지 어긋난 길을 걷는 자[二所慕之徑]’라고 한다.
다시 범천아, 이렇게 5음이라 이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5음이란 세속의 말일 뿐이다.
여러 견해를 구하는 까닭에 세속을 버리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니, 그 보는 견해는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멸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멸진을 향하는 도는 여러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속의 욕망을 멸하는 것이며 바른 도를 향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범천아, 부처님은 이에 대해 이르시길,
‘세간에는 삼자(三刺)의 문과 삼중(三重)의 부담이 있으니, 세간에서 풍속을 익히는 것과 세간을 멸진하는 것과 세간을 멸진하여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셨다.”
그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가령 여래께서 4제(諦)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진리란 무엇에 귀착됩니까?”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진리[苦諦]이며, 집기에 대한 습제(習諦:集諦)라고 하지만, 그것이 성스러운 진리[聖諦]는 아니다.
이것이 멸진에 대한 진리[盡諦]이며, 멸진을 향하는 도에 대한 진리[向道之諦]라고 하지만, 그것도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온갖 괴로움이 곧 성스러운 진리라면 일체의 소ㆍ말ㆍ당나귀ㆍ개ㆍ돼지 등의 축생도 모두 마땅히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만일 온갖 갈애(渴愛)와 집착이 곧 성스러운 진리라면 5취(趣)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마땅히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만일 괴로움의 멸함이 성스러운 진리라면 일체의 중생이 단멸하는 일을 보거니와 그들은 모두 마땅히 멸함의 성스러운 진리를 지닌다고 해야 한다.
만일 도가 곧 진리라면 일체 유위(有爲)의 도에 의존하는 자도 모두 빠짐없이 마땅히 현성의 도라는 세력 있는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한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범천아,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성스러운 진리로 관찰할 때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곧 괴로움이란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환히 아는 이것을 일컬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며, 그 사람이 갈애와 집착을 행하는 것은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멸진의 법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의 제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이 모든 길에 동등하게 대한다면 이것이 슬기롭고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진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허위가 없다는 것인데 무엇을 일컬어 허위라고 하는가?
스스로 몸이 있다고 헤아리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영혼이 있다고 집착하고 목숨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집착하고 3유(有)에 의지한다.
소유한 것을 떠난다 해도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멸하는 것에 의지하고 생사를 수용하고 열반을 믿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허위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수용되는 것은 여러 가지 수용되는 것에 있어 의지하는 바가 없고, 또한 구하는 바도 없다. 이것을 일컬어 진리라고 한다.
괴로움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허위라고 한다.
집기한 것을 멸하고자 한다면 이것도 역시 허위이다.
‘나는 마땅히 모두 증득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허위이다.
도를 수행한다고 하여도 이것 또한 허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교화하시기 위해 세운 여덟 가지 도의 품목이 있는데, 예를 들어 4의지(意止)라면 이것도 역시 허위라고 일컫는다.”
범천이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부처님의 교화이며 마땅히 사유하는 바라고 하는 것입니까?”
“뜻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니, 일체의 제법도 그와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교화이며 마땅히 사유하는 바라고 하는 것이다.
4의지는 곧 머무는 바가 없으니, 여러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의 생각에도 이미 머물지 않는다면 곧 궁극적인 진실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실에 머문다면 이것은 곧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며, 뜻에 거처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뜻에 머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곧 실제가 아니니, 이름하여 허위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실제도 없고 허위도 없는 것이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리고 관찰하는 것이 진리인데, 이른바 진리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진리다운 것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비록 출현하였다고 하나 일어난 바가 없으니, 여래는 법의 성품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또한 항상 진리로서 관찰하여 정해진 생사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스러운 진리에는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에 순응하는 바가 있을 때에는 이 4제(諦)를 증득할 것이니, 이름하여 바른 진리라고 한다.”
다시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내세에 어떤 비구가 있으리니,
그는 능히 몸을 삼가지 못하고, 금기와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능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밀한 지혜를 갖추지 못하면서 버젓이 강설하기를,
‘발생하는 것이 괴로움의 진리이고, 여러 갈래로 나아가는 것을 일컬어 집제(集諦)라고 한다.’고 하며,
또 ‘이곳에서 달리고 뛰며 여러 중생이 생하는 장소인 3유(有)를 파괴하는 것과 마땅히 길을 구하여 행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두 가지 진리라고 하니, 그 행상에서 달리고 뛰어야 한다.’고 설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나는 그를 이름하여 외도의 무리라고 하니,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나의 성문도 아니다.
그 뜻은 나쁜 길로 나아갔으며, 바른 진리를 파괴한 것이며, 스스로 방일한 것이다.
내가 도량에 있는 불수(佛樹) 아래 앉아 있을 때 참된 진리[誠諦]에 귀착하지 못하였으나 허망함이란 없었다.
그리고 부처님은 여러 법에서 또한 나아가는 바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여래의 법을 구하되 두 가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물며 두 가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겠느냐?”
범천이 말하였다.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이시여.”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도되고 미혹된 길이다. 능히 일체의 나아가는 바를 제거할 수 없다.”
이에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여래의 법에는 전도된 것이 없으며 또한 얻는 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성불(成佛)에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호칭을 ‘절대 평등한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자[平等覺者]’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렇게 일컬었던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범천아,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보이느냐?
내가 설한 법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실제의 것이냐, 허위인 것이냐?”
대답하였다.
“허위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또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에 편안히 이르러 머무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셨다.
“범천아, 그 허무한 법에는 머무는 바가 있다고 하느냐, 머무는 바가 없다고 하느냐?”
대답하였다.
“천존이시여, 그 허무한 것에는 머무는 것도 없고 머물지 않는 것도 없습니다.”
다시 질문하셨다.
“범천아, 어찌하여 제법에는 머무는 것이 있지도 않고 머무는 것이 없지도 않은가?”
대성인(大聖人)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또한 어떻게 도를 얻는가?”
대답하였다.
“도를 얻는 것이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가 나무 아래에 앉아 도량에서 머무를 때, 애욕은 전도된 것일 뿐 본래 항상 청정한 것이며, 공이며, 저절로 본성이 없다고 환히 알았다.
그런데 환히 알았다는 것은 환히 안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또한 환히 알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로 내가 환히 안 법과 체득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은,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수용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고, 또한 자취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일체의 모든 성품을 초월함으로써 말도 없고 언사도 없고, 글자도 없고 구절도 없으며, 또한 말로 가르치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범천아, 제법은 허공과 같은데 제법을 얻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또한 다시 세존이시여, 위대한 성인이신 여러 부처님은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성실한 진리의 법을 구족하셨습니다.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는 큰 자비[大哀]를 지니시고, 고요한 법을 분별하고 환히 깨달으시어 문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십니다.
그리고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을 즐거이 믿는 자는 여러 덕의 근본을 세우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구족하였던 자입니다.
이 중생들은 여러 부처님에 대하여 죄 되는 것이나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세간이 빠짐없이 함께 그를 믿는다 해도 그의 뜻에는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세간의 사람들은 법을 믿는데 법은 곧 자아의 소유입니다.
세속에 의지하고 법에 집착하지만 법에는 실제도 없고 허위도 없으며,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속의 사람들은 열반에 의지하고 기대지만, 이것을 관찰해 보면 끝도 없고 처음도 없으며, 또한 열반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선한 것과 덕스러운 것에 기댑니다. 그러나 선한 것도 없고 덕스러운 것도 없으며, 아울러 선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안락한 것에 기댑니다. 그러나 괴로운 것도 없고 즐거운 것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부처님에 기대고 부처님의 출현에 기댑니다. 그러나 역시 생하시는 일도 없고, 멸도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다시 법이 있고 마땅히 세심하게 살피고 드러내고 선양하는 성스러운 대중이 있다고 설하지만, 그렇게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무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경전을 세간에서 가히 믿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물에서 불이 일어나고 불에서 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티끌 같은 애욕이 곧 부처님의 도를 이룬다는 것을 깨닫고 요지해야 하니, 이는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번뇌와 괴로움을 깨닫고 요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지만 그러면서도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없다.
이미 설한 것이 있다 하더라고 그 형체를 보지는 못하고 또한 생각하는 바도 없다.
또한 두 가지를 만들지도 못하고 증득하는 바도 없고 멸도를 얻지도 못하고 고요함도 없는 것이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족성자와 족성녀가 이와 같은 법을 환히 알고 믿는 자가 있다면 여러 견해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을 얻을 것이니, 이와 같은 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하고 예를 올릴 만한 사람입니다.
과거의 부처님 여래를 받들었으니, 이미 여러 가지 행을 실천한 자입니다.
그리고 선한 벗들이 보고 섭수하고 보호하니, 그의 의지는 즐거우면서도 미묘합니다. 온갖 덕의 근본을 심고 나서 안온한 진리의 곳간을 얻은 자입니다.
온갖 법을 관람하고 간직하여 온갖 죄를 멸한 자입니다.
도의 업을 건립하여 귀한 종성을 성취한 자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것을 다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큰 보시를 삼는 자입니다.
집착과 번뇌를 내버렸으니, 곧 계율을 지키는 힘을 지닌 자입니다.
애욕을 없애는 힘을 지녔으니, 곧 인욕의 힘을 지닌 자입니다.
또한 불길한 것이 없고 화내는 일이 없고 용맹한 정진력을 지녔으니, 나태하거나 싫어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선정의 힘으로 죄업을 내던지고 제거한 자입니다.
지혜의 힘으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여읜 자입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악마가 움직이고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적과 원수가 능히 그를 이길 수 없으니, 끝내 속이고 미혹하게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세간 사람들이 말한 것에 대해 지극한 정성으로 강설하는 자입니다.
제법이 본래 청정함을 환히 아니, 진실한 자입니다.
또한 구경의 법을 설하니, 그는 곧 여래가 섭수하고 보호하는 자이며,
즐겁고 어질고 온화하게 안온한 곳에서 노닐고 거주하는 자이며,
슬기롭고 성스러운 업으로 재물이 많고 부귀한 자이며,
슬기롭고 성스러운 행으로 만족함을 아는 자입니다.
훌륭하게 돌보고 오래 보살피며 은근히 공양하고 섬기니, 곧 마땅히 보고 믿어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뜻으로 벗어나려는 자를 격려하는 자입니다.
즐거이 해탈을 얻으려는 자를 열심히 제도하는 자입니다.
의지할 데가 없는 자로 하여금 기대게 하는 자입니다.
무위를 즐기는 자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하는 자입니다.
도를 즐기는 자에게 넓고 큰 것을 갖추게 하는 자입니다.
초월하는 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자입니다.
여러 방면의 의술에 있어서 의왕(醫王)인 자입니다.
일체의 병든 자에게 좋은 약을 지어 주는 자입니다.
지혜에 이르려는 자에게 힘을 지원해 주는 자입니다.
세력을 얻으려는 자를 즐겁게 하여 그것으로 자재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따르지도 수용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삼가거나 두려워하여 옷이나 털이 곤두서지 아니함이 없는 자입니다.
또한 사자의 걸음과 같이 미묘한 수레를 얻은 자입니다.
천신이나 용과 같이 그 마음이 안온하고 조화로운 자입니다.
비유하면 잘 훈련된 코끼리와 같이 대중들 가운데서 머물고 노닙니다.
마치 신선과 같은 용맹함에 도달한 자입니다.
원한 맺힌 적들에게 항복받고 큰 모임에서 노니는 자입니다.
뜻이 강하여 두려움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뜻대로 하여도 무서워하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바른 진리를 설하되, 그 어떤 것에서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더럽고 수고스러운 법을 제거하여 보름달과 같은 자입니다.
지혜와 광명의 횃불이 멀리 비추는 것과 같은 자입니다.
해가 떠오를 때처럼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온갖 어둠을 멸진하고 제거하는 것이 밝혀 놓은 등불과 같은 자입니다.
또한 여러 집착을 떠나되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온갖 행을 지니되 땅과 같아서, 중생들이 그를 우러르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좋은 밭에 백 가지 곡식을 윤택하게 심어 놓은 것과 같은 자입니다.
일체의 더러운 것을 세탁하는 것은 비유하면 물과 같은 자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멸진하고 제거하는 것이 마치 불과 같은 자입니다.
일체 법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 마치 바람과 같은 자입니다.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니, 수미산과 같은 자입니다.
뜻과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한 것이 마치 금강 철위산과 같은 자입니다.
여러 외도와 이교도가 능히 당해내지 못하는 자입니다.
성문과 연각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자입니다.
법에 대해 동등한 맛이니, 바닷물의 맛이 한맛[一味]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곧 제도하는 스승이 되는 자입니다.
또한 일체의 더러움과 피로함의 갈증을 제거하는 자입니다.
경의 법을 사모하고 구하여 만족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곧 지혜에 있어 흘러넘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곧 성스러운 제왕이 되어 법륜을 굴리는 자입니다.
얼굴과 용모가 수승하고 기이한 것이 제석천과 같은 자이며,
마음으로 자재를 얻는 것이 범천과 같은 자입니다.
법을 연설하는 것이 하늘에서 벼락과 우레가 치는 것과 같은 자입니다.
감로의 법을 내리는 것이 때맞춰 내리는 비와 같은 자입니다.
또한 그는 5근(根)과 5력(力) 그리고 7각지(覺支:覺意)를 능히 더욱 늘릴 수 있는 자입니다.
그는 생사의 근심을 초월하여 건널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에 문득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도에 접근해 도달할 수 있는 자입니다.
마땅히 널리 듣는 것을 획득하였으니, 필적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측량할 수 있는 한계를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한량이 없는 자입니다.
지혜와 변재에 있어서 동등한 반려가 없는 자입니다.
다라니(陀羅尼)를 얻었으며, 뜻과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한 자입니다.
의지가 총명하여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데에 도달한 자입니다.
두루 여러 법을 관찰하되, 그 의도가 결과적으로 선양되는 자입니다.
세간에 사는 사람에게 항상 자비와 불쌍하고 애절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세속의 일을 초월하는 것을 이미 얻은 자입니다.
집착하는 바가 없이 행함이 비유하면 연꽃과 같은 자입니다.
세속 법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자입니다.
밝은 지혜를 가진 여러 사람들이 빠짐없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입니다.
식견이 넓은 사람들이 깊이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온갖 지혜 있는 장부들이 항상 공경하고 순응하는 자입니다.
여러 천신과 세상 사람들이 빠짐없이 받들고 섬기는 자입니다.
선정의 사유에 든 여러 대중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는 자입니다.
슬기롭고 성스러운 여러 대중들이 모두 와서 으뜸으로 모시는 자입니다.
성문과 연각이 함께 흠모하고 축하하는 자입니다.
토지의 행상을 멀리 떠나는 것을 좋아하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없고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 위신이 우뚝 솟아 슬기롭고 성스러운 이의 자취를 밟는 자입니다.
단정하고 수승하고 단아하고 색이 좋은 용모가 미치기 어려운 자입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 궁극적으로 칭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는 상호를 갖추어 스스로 장엄하는 자입니다.
그는 능히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파악하고 간직하는 자입니다.
그는 여러 교법과 교훈과 귀감이 되는 것에 능히 순응하고 보호하는 자입니다.
슬기롭고 성스러운 대중들에게 중생 제도를 장려하는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의 바른 깨달음을 항상 보는 자입니다.
마땅히 여러 부처님의 눈을 속히 성취할 원인을 지닌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께서 보시고 기별[記]을 주게 되는 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세 가지 인[三忍]을 획득하고 구족하는 자입니다.
마땅히 부처님의 나무 아래를 찾아가 앉을 자입니다.
능히 악마와 그 관속을 항복시킬 자입니다.
여러 신통과 지혜를 얻어 법륜을 굴리는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 일을 능히 일으키고 세우고 만들어서 깊은 법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제가 1겁 또는 1겁 이상 그와 같은 바른 장부들에 대해서 묻고 드러내고 선양하여도 마지막까지 그 행한 바로 도달하게 되는 복덕의 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로 여러 부처님의 도가 심오하고 미묘한 것은 그와 같으니,
수용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고, 환히 알기 어렵고, 요지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수용하고 간직하고 읊고 암송하고 읽으며, 또한 받들어 행한다면, 그리고 만일 능히 널리 펴고 두루 시행하게 하고 나누어 베풀며, 다른 사람에게 법을 설한다면, 대중들에게 제일가는 돈독한 믿음을 확립시킬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여러 바른 대장부에 대해 묻고 답한 것에는 그들의 지극히 진실한 덕이 능히 안온하게 궁극적으로 다 파악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파악한 것은 능히 알지 못하고, 그것에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여래는 걸림 없는 지혜로써 그 덕을 펴고 창달한다. 그리하여 그 궁극적인 내용을 모두 통달하고 요지한다.
여래가 설한 구절과 의미와 취지와 의취(意趣)를 그 여러 바른 장부는 빠짐없이 마땅히 요달할 것이다.
그리고 두루 순종하여 거역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바가 지극히 정성스러워 미혹해 하지 않는다.
빠짐없이 바른 의미와 의도를 건립하여 아무 곳으로나 뛰고 달리지 않는다.
장엄하고 장식하는 일에 있어서 밝으니, 상응하는 언사에 있어서와 같다.
곧 여래가 자세히 말하고 가르치는 바와 같아서,, 비유하자면 위대한 성인이 정성스러운 진리의 법을 강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만일 여래가 법을 설하면 다시 이것을 초월하여 문장과 구절을 장엄하고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능히 존재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도 없고, 거스르는 것도 없고, 제어하는 것도 없고, 통달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모두 깨닫거나 요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통달하고 식별하고 불방일(不放逸)하다.
그리하여 장엄하고 장식하는 데 있어 언사로써 알게 된 바를 따르지 않는다.
만일 언사가 없다면 그것이 곧 여래가 설법하는 언사이다.
여래가 가히 강설하는 경이라는 것은 방편으로 법을 선양하는 것이다.
여래는 끝이 없는 슬픔을 일으켜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널리 진술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능히 여래의 5력(力)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치료하는 것에 대해 분별하고 요지한다면 이것을 보살이라고 하니, 능히 여러 부처님의 일을 건립하고 만들 수 있다.”
다시 질문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일컬어 여래께서 5력으로 치료한 것이라고 합니까?”
위대한 성인께서 답하여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법에 관련된 언사가 있고,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설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잘 권하는 방편이 있고, 법을 밝게 드러내어 구절의 의미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도의 자취를 분별하여 큰 자비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 다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여래가 5력으로 치료하는 것이라고 하니, 일체의 성문이나 연각 등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질문하였다.
“세존이시여, 어떤 언사로써 여래께서는 가르침을 연설하십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가르침이 있다.
애욕에 더럽혀진 말이 있고, 전도된 말이 있다.
세속적인 말이 있고, 세속을 건넌 말이 있다.
유루(有漏)에 관한 말이 있고, 무루에 관한 말이 있다.
집착하는 것에 관한 말이 있고, 집착이 없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유죄의 말이 있고, 무죄의 말이 있다.
존재하는 것에 관한 말이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자아와 인간과 수명(壽命)이라는 조작되어 증득된 언사가 있다.
생사윤회 또는 멸도에 관한 언사가 있다.
범천아, 이것이 여러 가지 언설이요, 온갖 언사라는 것이다.
언사를 허깨비와 같이 관찰해야 하니,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사를 꿈과 같이 관찰해야 하니, 실제가 없다고 보는 까닭이다.
언사를 되돌아오는 메아리와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소리에 의존하고 대하는 까닭이다.
언사를 그림자와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인연이 화합한 존재가 드러난 까닭이다.
언사를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비치어서 나타나는 까닭이다.
언사를 흔적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도장을 찍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언사를 불꽃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전도된 채로 보는 까닭이다.
언사를 빈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존재하는 것이 다해 버린 까닭이다.
언사를 말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하니,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이 제법의 언사를 환하게 안다면 이 보살은 제법의 언사를 강설할 수 있다.
또 제법에 대해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없으니, 기대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걸림 없는 변재를 능히 얻게 된다.
걸림 없는 변재를 능히 얻게 됨으로써 그는 여러 걸림이 있는 대중을 위해 평등한 것을 밝게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똑같은 곳에서 경의 법을 강설해도 걸리는 일이 없다.
일체의 언사에 있어서 법의 성품을 부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언사에서 노닐지만 그것은 부서져야 할 것이기에 어느 것에도 기대는 일이 없다.
범천아, 설사 여래가 설한 것이라 하더라도 언사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곧 법을 강설하는 것이 된다.
범천은 어느 곳에서 보살이 여래에 대하여 참된 진리의 일을 행하는 것인지와 그에 대해 선하게 권하는 방편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
범천아, 여래는 번뇌에 결박[結]과 한(恨)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결박과 한에 더러움과 피로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보살은 마땅히 빠짐없이 그러한 거취를 환하게 알아야 한다.
범천아, 무엇을 여래가 더러움에서 결박과 한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느냐?
더러움과 피로함은 자연적으로 평등하여 차별이나 특이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결박과 한에 더러움과 피로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박과 한에 의지하여 은혜와 보시와 열반과 청정함을 행한다.
말하자면 여러 어리석은 자들은 온갖 번뇌가 지닌 근심을 환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보살은 온갖 보시할 만한 일에 대해서 환히 안다.
그것은 나중 세상에서 큰 보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취가 없다.
거취가 없는 것은, 말하자면 무위의 금기(禁忌)이니, 참된 열반이다.
그들에게는 모두 존재하는 것도 없으며, 해당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욕(忍辱)은 무위이니, 허위이며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정진(精進)도 무위이니, 뜻을 준수하고 닦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禪定)도 무위이니, 즐거워할 바가 없는 까닭이다.
지혜(智慧)도 무위이니, 모습을 잡고 얻은 까닭이다.
탐욕에 대해서는 탐욕을 떠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애욕이 없는 까닭이며,
진에(瞋恚)을 여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결박과 한이 없다고 헤아리는 까닭이다.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어리석음이 없다고 헤아리는 까닭이다.
생사가 무위의 본래의 실제라는 것은 생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위라는 것은 생사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정성스러움을 허망함이라고 하는 것은 언사를 본 것에 불과하며,
허망함을 지극히 정성스러움이라고 한 것은 곧 교만함과 방자함에 이른 것이다.
다시 범천아, 여래는 차례대로 진실한 진리를 원인으로 하고, 그 인연을 따르기에 상주하는 것이 있다고 헤아린다.
또한 나의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을 배제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삿된 견해를 가진 자임을 자처하기도 하고 돈독한 믿음이 없는 자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것은 반대되는 업을 일으키고 만들어서 반대되고 되풀이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곧 믿음이 없는 것을 제거하고 소원을 빠짐없이 제거한다.
삿된 견해를 가진 자를 여래는 빠짐없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하여 분별하고 설한다.
상응하는 것을 보는 자가 있으니, 여래는 그를 위하여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설한다.
가령 중생이 버릴 점이 많고 손상된 자이면서 스스로 위대한 일을 하는 자라는 교만을 지니어 스스로를 높이면 여래가 곧 참된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그에게 강설하는 것이다.
범천아, 이것이 여래ㆍ지진(至眞)이 하는 일이니, 지진은 보살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가르친다.
그러면 마땅히 보살은 그 방편의 행을 깨달아 알게 되니, 만일 이 모든 설한 것으로 권화와 방편에 돌아가게 하면 여래를 만난 자는 문득 해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사악하지 않은 일에 대해 돈독하게 믿는 자는 곧 여러 색신의 과보와 상응하는 바를 보아 중생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문득 여래로 인하여 해탈을 얻게 된다.
만일 법신을 연설하면 문득 여래의 진실한 진리[眞諦]의 언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사악한 법에서 해탈하여 강한 믿음을 행하게 된다.
법으로 말미암아 문자를 공경하고 헤아리는 자는 중생의 무리이니,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설할 수 없다.
삿된 견해의 법에서 해탈하고 일찍이 이것을 믿은 적이 없으며, 또한 얻은 바도 없고 차별하는 것도 없다.
열반이 있다고 말하면 곧 잘못된 믿음이 된다.
전도된 더러움과 피로함에 거처하는 것은 무위이며 멸도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믿고 해탈을 얻는 것이다.
생하는 바가 없는 법은 여러 법을 부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잘못된 믿음이 된다.
고요함에 들어가 건너려고 하지만 문득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잘못된 자는 곧 스스로 진실한 진리의 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범천아, 이것에 있어서 보살이 진실한 진리의 언사가 권화(權化)이고 방편(方便)임을 능히 통효하여 알면 일체의 소리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도 무서워하는 것도 없다.
그리고 한량없는 사람과 중생의 무리를 위하여 열어 주고 인도하고 이롭게 한다.
그에 있어서 범천아, 여래ㆍ지진은 어떤 방편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가?
‘보시하는 자는 큰 부귀함을 얻으며,
계율을 간직한 자는 천상에 태어나며,
인욕하는 자는 단정해지며,
정진하는 자는 밝음을 얻는다.
만일 선정에 드는 자는 희열에 도달하고 산란하지 않다.
지혜를 배운 자는 더러움과 피로함과 애욕에의 집착을 멸진하고 제거한다.
많이 들은 자는 빠르게 지혜를 얻고 열 가지 선을 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천상에 있게 되거나 인간에 머물게 된다.
자비와 기쁨과 평정을 실천하여 범천에 오르게 된다.
고요하고 담백한 것을 관찰하여 결과를 획득하고 유학(有學)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아가 무학(無學)의 경지와 연각(緣覺)의 경지와 청정한 부처님 중우(衆祐)의 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설한다.
그리하여 시현한 지혜는 그 끝이 없고 열반에 대해서도 평등하게 대하여 일체의 괴로움을 멸진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나는 곧 그때 훌륭한 권화와 방편을 쓴 것이니, 여러 중생을 위하여 베풀고 알리고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상법(像法)이니, 여래는 일찍이 마음으로 온갖 생각을 품어서 나의 자아와 사람과 수명(壽命)을 헤아린 적이 없는 것이다.
여래가 행한 바는 또한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인색하고 탐착하는 것이 없고, 또한 베푸는 것도 없다.
또한 계율을 간직하는 것도 없고, 금기를 어기는 것도 없다.
또한 인욕하는 것도 없고, 화내는 것도 없다.
또한 정진하는 것도 없고, 게으른 것도 없다.
또한 선정에 드는 것도 없고, 그 뜻이 산란한 일도 없다.
또한 지혜도 없고 어리석은 일도 없다.
또한 도가 있다는 것도 없고, 멸도하는 것도 없다.
안락해 하는 것도 없고, 온갖 근심도 없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중생을 교화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고, 오로지 닦고 받들어 행하게 한다.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고 오로지 닦고 받들어 행하게 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마땅히 이 법에 들어가야 하니, 본래 의도한 서원과 같아야 한다.
혹은 예류과[預流果:道跡, 須陀洹)ㆍ일래과[一來果:往來, 斯陀含]ㆍ불환과(不還果:阿那含)ㆍ무착(無著:阿羅漢)과 연각(緣覺)에 이르기까지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성취하는 데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무위(無爲)에 이르러 건너는 경우도 있다.
범천아, 이것은 여래ㆍ지진의 훌륭한 권화와 방편이니,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부연하고 진술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보살이 마땅히 중생을 위하는 훌륭한 권화와 방편이니,
큰 자비를 일으켜서 항상 바른 법으로 그런 것을 권장하고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
“무엇을 일컬어 여래가 설한 것이라고 합니까?”
“법에는 눈이 없으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다.
귀ㆍ코ㆍ입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으니, 벗어나는 일이란 없다.
왜냐하면 눈은 곧 공이니, 나[我]가 있지도 않고, 또한 나의 소유[我所]도 없어 곧 모두가 본래 청정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이 일체는 모두 해탈의 범주에 돌아간다.
그리고 그 돌아가는 곳은 현혹되는 곳이 아니다.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이 여섯 가지가 또한 그러하다.
일체의 법은 모두 빠짐없이 공이고 무상(無想)이고 무원(無願)이며, 일어나는 것이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또한 머무는 것도 없고 머물지 않는 것도 없다.
말하자면 뜻에 머무는 일이 없이 생하는 것이니, 본래 청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담백한 것이며, 고요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는 일체의 문자로써 해탈의 범주를 연설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문구를 원만하게 제어함으로써 두루 문자에 수순하여 마음으로 마땅히 그것을 관찰하니, 그것이 진실한 진리의 가르침인 것이다.
여래는 일체의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탈에 이르게 한다.
감히 설하셨던 것은 모두 참된 진리의 구절들이다.
여래가 경을 설하면 티끌이나 수고스러운 것이 없다.
연설한 법은 모두 해탈에 들어가고 멸도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여래가 설한 전적(典籍)이다.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ㆍ지진은 어떤 방편에 입각하여 두루 큰 자비를 닦는 것이며, 중생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는 것인가?
여래는 곧 서른두 가지 일로써 일으키고 전달하니, 큰 자비를 더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어떤 것이 서른두 가지인가?
첫째, 나의 자아란 없으니, 일체 법에서 중생의 부류로 하여금 몸이 없음을 이해하고 믿게 해야 한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둘째, 일체 법에서 중생은 사람이 있지도 않은데 반대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셋째, 일체의 제법에는 명근(命根)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명근이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넷째, 일체의 제법에는 수명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수명이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다섯째, 일체의 제법은 무소유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처소가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여섯째, 일체의 제법은 도무지 의지할 바가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의지하고 집착할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곱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허무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즐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덟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나[我]라는 자아가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나라는 자아가 있다고 헤아린다.
아홉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주인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오로지 뜻으로 탐착하고 받아들인다.
열째, 일체의 제법은 수용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모습에 의지하고 기댄다.
열한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생겨난 일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겨나는 것에 집착한다.
열두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사에 탐착한다.
열셋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애욕의 티끌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티끌과 더러움에 빠지고 잠긴다.
열넷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탐착과 욕심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오염되어 있다.
열다섯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성냄과 노여움을 떠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분노를 품고 원한에 맺힌다.
열여섯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어리석음을 떠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미혹하게 된다.
열일곱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온 곳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고 그것에 기댄다.
열여덟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가는 곳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끝과 처음이라는 것에 의지한다.
열아홉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짓고 행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열심히 수행할 것을 건립한다.
스무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방일함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방종하고 방자하게 뛰고 달린다.
스물한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공이며 청정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본 것에 머문다.
스물두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생각함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행하여 그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스물셋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바람이 없는 것[無願]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요행으로 얻는 것에 뜻을 둔다.
스물넷째, 이미 멀리 떠났는데도 몇 가지 일에 집착하는 바가 있는 자에게는 세속은 괴롭고 분노하는 곳이며 원한을 맺는 곳이어서 근심하고 싫어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원수 및 적과 함께하지 않으려고 하나 모이고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러 참을 수 없는 곳에서 어질게 화합해야 한다.
스물다섯째, 전도된 것을 준수하고 닦으니, 세간에서 익히는 것은 사악한 길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에게 능히 태어나야 할 곳을 포기하고 제거하게 해야 한다.
스물여섯째, 그는 길을 살피는 일 없이 나아가니, 세속에서 의지하는 바인 재물과 이익에 의하여 괴롭게 된다.
그러면서도 뜻으로 모든 자산과 사업을 그리워한다.
그를 마땅히 억제하여 욕심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 슬기롭고 성스러운 재화를 구족하게 하고,
믿음[信]ㆍ계율[戒]ㆍ부끄러움[慚愧]ㆍ들음[聞]ㆍ보시[施]ㆍ지혜(智慧)를 건립하여 이에 일곱 가지 재산을 구족하게 한다.
스물일곱째, 나는 중생을 은혜와 사랑의 노예라고 일컬으니,
중생들은 그것들이 견고하지도 요긴하지도 않은데 견고하고 요긴하다는 생각을 한다.
재산과 사업과 집과 거처와 처자가 있어 즐겁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편안한 것이 못된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일컬어 은혜와 사랑의 노예라고 한 것이다.
중생들은 견고하지도 요긴하지도 않은데 견고하고 요긴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을 위하여 강설하니, 상주하는 것이 있다고 헤아리는 자에게 무상함을 드러내어야 한다.
스물여덟째, 중생이란 재산과 이익과 사업을 구하지만 그것은 원수라고 나는 일컫는다.
그러나 중생들은 반대로 그것이 친한 벗이라고 하니, 나는 친한 벗의 행을 건립하고 드러내어 힘들고 괴로운 근심을 제거하고 궁극적인 멸도를 성취하게 한다.
스물아홉째, 중생이란 반대로 사악한 업으로 생계를 꾸려간다고 나는 일컫는다.
그리고 각각 몇 가지 말과 가르침에서 머문다.
이들을 위하여 마땅히 청정하고 미묘한 무업(無業)의 명령을 강설하고 분별하고 설법한다.
서른째, 중생이란 여러 가지 티끌과 더러움에 있으면서 오염된 것을 나타낸다고 나는 일컫는다. 집에서 거주하는 일에는 근심과 손해가 많고 힘든 사무도 많다.
이들을 위하여 삼계를 벗어나고 일제히 함께 건널 수 있도록 설법한다.
서른한째, 일체의 제법이 지어지는 곳에 거처하니, 그것은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고 머문다.
온갖 인연들이 거처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세워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곳에서 닦기를 게을리 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위하여 성스러운 해탈에 이르도록 설법하고 정진을 권하여 견고하고 긴요한 것으로 건너게 하고, 경의 법을 설하여 빠짐없이 안락함을 획득하게 한다.
또한 여기에 더하여 다시 반대로 걸림 없는 지혜를 버린다.
서른두째, 하천한 성문과 연각에 대하여 가장 존귀한 멸도라고 뜻을 둔다.
그리하여 마땅히 이들을 위하여 미묘한 행을 드러내고 보여 주려 한다.
여래는 이로 인하여 중생에게서 큰 자비를 일으키고 천명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이것이 서른두 가지 일이니, 여래가 중생을 열어서 인도하고 수순하고 교화하며 큰 자비를 널리 펴는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여래가 큰 자비를 행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만일 보살로서 이러한 서른두 가지 일을 받들어 행하고 큰 자비를 합하고 모으는 자가 있다면 이러한 보살은 위대한 중생[大士]으로서 이름하여 큰 복전이며 큰 위신력을 지닌 자라고 한다.
그는 우뚝 솟은 것을 좋아하여 불퇴전의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필요한 행을 만들어 세운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큰 자비에 관한 법문의 품을 설하셨을 때, 3만 2천 사람이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에 마음을 일으켰고, 3만 2천의 보살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