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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변론 중권
4. 변수대치품(辯修對治品)
이미 진실함[眞實]을 말하였는지라, 이제 다음에는 모든 다스림 닦음[修諸對治]을 설명하여야겠는데, 곧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는 것이다.
이 안에서는 먼저 4념주(念住)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거칠고 무거움[麤重]과 사랑의 원인[愛因]과
≺나≻라는 일[我事]과 헷갈림 없음[無迷] 때문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들기 위하여
염주(念住)를 닦는 줄 알아야 한다
≪논≫
거칠고 무거움은 몸으로 말미암아 환히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몸은 거칠고 무거운 모든 행이 있음을 모양으로 삼기 때문이다.
모든 거칠고 무거움은 곧 행고(行苦)의 성품인지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모두가 괴로운 것임을 자세히 살피며, 모든 샘이 있는 느낌[有漏受]을 말하여 사랑의 원인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쌓임의 거룩한 진리에 든다.
마음은 바로 ≺나≻라는 집착[我執]의 의지할 바 반연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나≻를 끊어 없앰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여의어지기 때문이다. 법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함의 법[染淨法]에 대하여 어리석고 헷갈림을 멀리 여의어 도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이 때문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도리에 들기 위하여 맨 처음에 4념주관(念住觀) 닦는 것을 설명한다.
이미 4념주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정단(正斷) 닦는 것을 설명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장애[障]와 다스림[治]의 온갖 차별을
이미 두루하게 알았다고 하면
멀리 여읨[遠離]과 닦아 쌓음[修集]을 위하여
네 가지 정단[四正斷]을 부지런히 닦는다
≪논≫
앞에서는 4념주를 닦고 나서 온갖 장애와 다스림의 품류 차별을 두루알았는지라, 이제는 다스릴 바 장애의 법을 멀리 여의기 위하고, 능히 다스림의 도를 닦아 쌓기 위하여 4정단을 부지런히 힘써 닦고 익히나니, 설명하신대로 이미 생긴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已生惡不善法]을 끊게 하기 위한다고 네 가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말한다.
이미 4정단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신족(神足) 닦는 것을 설명힌다.
게송으로 말한다.
감당하는 성품[堪能性]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온갖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허물[五過失]을 없애버려서
여덟 가지 끊는 행[八斷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논≫
앞에서 닦은 바 여읨[離]과 쌓음[集]의 정진에 의하여 마음은 곧 편안히 머물러서 감당할 수 있는지라, 훌륭한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네 가지 신족[四神足]을 닦는다. 이것이 모든 하고자 하는 바 훌륭한 일의 원인[所欲勝事因]이기 때문이다.
머무름[住]이라고 함은 마음의 머무름이니, 이것은 바로 사마아디[等持]이다.
그 때문에 4정단에 이어서 4신족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감당하는 성품은 다섯 가지 허물을 끊어 없애서 여덟 가지 끊는 행을 닦을 수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 허물[五種過失]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게으름[懈怠]과 성인 말씀[聖言]을 잊음과
흐리멍덩[惛沈]하고 들뜸[掉擧]과
행을 짓지 않음[不作行]과 행을 지음[作行]이
바로 다섯 가지의 허물인 줄 알아라
≪논≫
이 중에서는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합쳐서 하나의 허물로 하였는줄 알아야 된다.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더한 행[加行]을 짓거나 이미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끊어 없애고서 다시 더한 행을 하는 것도 다 모두가 허물이 되나니, 이 다섯 가지를 없애기 위하여 여덟 가지 끊는 행을 닦는 것이다.
어떻게 저 행상(行相)을 벌려 세우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게으름을 끊어서 없애기 위하여
하고자 함[欲]ㆍ부지런함[勸]ㆍ믿음[信]ㆍ편안함[安]을 닦음이니
곧 의지할 바[所依]와 능히 의지함[能依]과
원인한 바[所因]와 능한 결과[能果]이며
그 밖의 네 허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기억[念]ㆍ지혜[智]ㆍ생각[思]과 버림[捨]을 닦음이니
말씀 기억함과 흐리멍덩하고 들뜸을 깨달음과
조복의 행[伏行]과 없애서 평등하게 흐름[滅燈流]이다
≪논≫
게으름을 없애기 위하여 네 가지 끊는 행[四斷行]을 닦음이니,
첫째는 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바르게 부지런함[正勤]이요,
셋째는 믿음이요,
넷째는 가쁜함[輕安]이다.
다음과 같이 의지할 바 따위를 알아야 하리니,
의지할 바라고 함은, 하고자 함이어서 부지런히 함의 의지할 바이기 때문이요,
능히 의지함이라고 함은, 부지런함이어서 하고자 함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원인한 바라고 함은, 믿음이 바로 의지할 바이어서 하고자 함이 생기는 가까운 원인이며 만약 그것을 믿어 받는다면, 곧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능한 결과라고 함은, 편안함이 바로 능히 의지함이고 부지런함이 가까이 나는 바 결과인지랄, 부지런히 정진한 이는 훌륭한 선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뒤의 네 가지 허물을 다스리기 위하여 수대로 나머지 네 가지 끊는 행을 닦나니,
첫째는 기억이요,
둘째는 바르게 앎[正知]이요,
셋째는 생각이요,
넷째는 평등이다.
다음과 같이 곧 말씀을 기억하는 따위를 알아야 하리니,
말씀을 기억한다고 함은 기억[念]을 말하는 것이어서 대경을 잊지 아니하고 성인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흐리멍덩하고 들뜸을 깨닫는다 함은, 곧 바르게 앎을 말하는 것이어서 말씀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흐리멍덩함과 들뜸의 두 가지 허물을 따라 깨닫기 때문이다.
조보의 행이라고 함은, 생각[思]이어서 따르며 흐리멍덩함과 들뜸의 허물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는 조복하여 제거시키기 위하여 더한 행[加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없애서 평등하게 흐름이라고 함은, 저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이미 끊어 없앤 뒤에는 마음은 곧 버림[捨]에 머물러서 평등하여지면서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4신족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5근(根)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닦을 바 5근을 어떻게 벌려 세우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미 순해탈(順解脫)을 심었지마는
다시 다섯 가지 더함[五增上]을 닦나니
하고자 함[欲]과 행함[行]과 잊지 않음[不忘]과
산란하지 않음[不散亂]과 생각하여 가림[思擇]이다
≪논≫
4신족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감당하여 냄이 있어서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착한 뿌리가 원만해진 뒤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더함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하고자 함의 더함[欲增上]이요,
둘째는 가행의 더함[加行增上]이요,
셋째는 경계를 잊지 않음의 더함(不散亂增上]이요,
넷째는 산란하지 않음의 더함[不散亂增上]이요,
다섯째는 생각하여 가림의 더함[思擇增上]이니,
이 다섯 가지는 차례대로 곧 믿음[信] 등의 5근이다.
이미 5근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5력(力)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무엇이 5력이며, 차례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곧 장애 없애는 것을 힘[力]이라고 하나니
원인과 결과로 차례를 세운다.
≪논≫
앞에서 설명한바 믿음 등의 5근이 훌륭한 세력의 작용이 있음을 다시 말하여 힘이라고 하나니, 믿지 않음[不信]의 장애 따위를 조복하여 없애고, 또한 그것에게 위압과 뒤섞임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차례는 인과에 의하여 세워지는데, 앞의 원인에 의하여 뒤에 결과를 이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틀림없이 인과가 있음을 믿는다면 부지런히 힘써 나아가게 되며, 부지런히 힘써 나아가고 나면 곧 바른 기억[正念]에 머무른다. 바른 기억에 머무르고 나면 마음이 곧 선정을 얻으며, 마음이 선정을 얻고 나면, 사실대로 알 수가 있다.
이미 사실대로 알았다면 이룩하지 못하는 일이 없나니, 그 때문에 이 차례는 인과에 의하여 세워지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순해탈분이 이미 원만해진 뒤에 다시 5근을 닦는 것이라면,
어느 자리가 순결택분(順決擇分)에서 닦고 익히는 5근의 자리[位]이고 5력의 자리가 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순결택분의 두 가지와 가지는
5근에 있고 5력에 있다
≪논≫
순결택분 중의 난(煖)과 정(頂)의 두 가지는 5근의 자리에 있고, 인(忍)과 세제일법(世第一法)은 5력의 자리에 있다.
이미 5력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각자(覺支: 七等覺支) 닦는 것을 말하여야겠다.
닦을 바 각지를 어떻게 벌려 세우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각지를 요약하면 다섯 가지 있나니
의지할 바[所依]와 제 성품[自性]과
벗어남[出離]과 아울러 이익(利益)이며
그리고 세 가지의 물듦 없는 갈래[三無染支]이다
≪논≫
이 갈래는 깨달음을 돕기 때문에 각지라고 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각지 자리는 견도위(見道位)에 있다. 널리는 일곱 가지가 있고 간략히는 다섯 갈래가 있다.
첫째는 깨달음의 제 성품 갈래이어서 법을 고름[擇法]이요,
셋째는 깨달음의 벗어남 갈래이어서 힘써 나아감[精進]이요,
넷째는 깨달음의 이익 갈래이어서 기쁨[喜]이요,
다섯째는 깨달음의 물듦 없는 갈래이어서, 여기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편안함[安]과 선정[定]과 버림[捨]이다.
무엇 때문에 다시 물듦이 없음이 세 가지라고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인연과 의지할 바와
제 성품으로 말미암아 뜻이 차별되나니
그러므로 가뿐함[輕安]과 선정과 버림을
말하여 물듦 없는 갈래라고 한다
≪논≫
가쁜함은 바로 물듦 없음의 인연이니, 거칠고 무거움[麤重]이 원인이 되어서 모든 섞여 더러움[雜染]이 생기는지라, 가뿐한 이것이야말로 그것의 가까운 다스림[近對治]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바는 선정이요, 제성품은 곧 버림이니, 그 때문에 이 물듦이 없는 뜻에는 따로 세 가지가 있다.
깨달음의 갈래 닦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도의 갈래[道支] 닦는 것을 말하여야겠다.
닦을 바 도의 갈래는 어떻게 벌려 세우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분별(分別)과 가르쳐 보임[誨示]과
다른 이를 믿게 함에 세 가지 있음과
장애 다스림[對治障]에도 세 가지가 있으므로
도의 갈래는 여덟 가지가 된다
≪논≫
수도위(修道位)에서 도의 갈래를 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도의 갈래이다.
널리는 여덟 가지이지마는 간략하게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분별의 갈래이니, 바른 소견[正見]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이 비록 이는 세간의 것이라 하더라도 세간을 벗어난 뒤에야 얻게 되는지라, 전도위 중에서 스스로가 증득한 바를 분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이를 가르쳐 보이는 갈래이다.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말[正語]의 일부분이 같이 일어남[等起]을 말하는 것이어서 말을 하여 다른 이를 가르쳐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다른 이로 하여금 믿게 하는 갈래이니, 거기에는 세 가지가 있어서 바른 말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다.
넷째는 장애를 다스리는 갈래에도 세 가지가 있나니, 바른 노력[正精進]과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이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 갈래가 간략하게는 네 가지이고 널리는 여덟 가지이다.
무슨 일로 뒤의 두 가지는 저마다 나누어져서 세 가지가 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소견[見]과 계율[戒]과 멀리 여읨[遠離]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깊이 믿어 받게 하며
근본과 따름의 미혹[本隨惑] 및
자재의 장애[自在障]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논≫
바른 말 등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이 자기 소견과 계율과 멀리 여읨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다.
바른 말로 말미암아 논의하고 결단하여 가려서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뛰어난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 알게 한다.
바른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를 하지 아니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깨끗한 계율이 있다는 것을 믿어 알게 한다.
바른 생활로 말미암아 양이 알맞고 때에 알맞게 법답게 옷과 발우 등의 물건을 빌고 구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훌륭하게 멀리 여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른 노력 등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이 근본 번뇌[本煩惱]와 따른 번뇌[隨煩惱]의 두 가지와 자재의 장애를 다스리게 된다.
이 다스릴 바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 번뇌이니, 수도위에서 끊을바요,
둘째는 따른 번뇌이니, 흐리멍덩함[惛沈]과 들뜸[掉擧]이요,
셋째는 자재의 장애이니, 이끄는바 훌륭한 품류의 공덕을 장애한다.
이 중에서 바른 노력은 특별히 처음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도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이다. 바른 기억은 특별히 둘째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기억을 매어서 그침[止] 따위의 모양 안에 편안히 머물러서 흐리멍덩함과 들뜨는 것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바른 선정은 특별히 셋째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뛰어난 디야아나[靜慮]에 의하여 빠르게 모든 신통 등의 훌륭한 공덕을 끌어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스림을 닦는[隨治]차별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뒤바뀜 있음에서 뒤바뀜 없음에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있음이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없음이 따름의
이것이 다스림을 닦는 것의 차별이다
≪논≫
이 다스림을 닦음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뒤바뀜이 있는 데서 뒤바뀜이 없음에 따름이요,
둘째는 뒤바뀜이 없는 데서 뒤바뀜이 있음에 따름이요,
셋째는 뒤바뀜이 없는 데서 뒤바뀜 없음에 따름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의 다스림을 닦는 차별을 차례대로 범부[異生]와 배울 것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 없는 이[無學]의 자리에 있다.
보살과 2승(乘)으로서 닦는바 다스림에 차별의 모양이 있음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로서 닦아 익히는 바는
반연할 바[所然]와 뜻 지음[作意]과
증득함[證得]의 자못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2승과는 차별이 있다
≪논≫
성문과 독각은 자기의 상속하는 몸[相續身] 따위로써 대경을 삼아서 다스림을 닦지마는,
보살은 공통하게 자기와 다른 이의 상속하는 몸 따위로써 대경을 삼아서 다스림을 닦는다.
성문과 독각은 몸 따위의 대경에서 무상하다는 등의 행상(行相)으로써 생각하여 다스림을 닦지마는,
만약 모든 보살이라면 몸 따위의 대경에서 얻을 바 없음[無所得]의 행상으로써 생각하여 다스림을 닦는다.
성문과 독각이 염주(念住) 등을 닦는 것은 몸 등이 빨리 매임을 여의게 되기만을 위한 것이지마는 모든 보살이 염주 등을 닦는 것은 몸 등이 빨리 매임을 여의게 되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머뭄이 없는 열반[無住涅槃]만을 증득하기 위해서이니, 보살과 2승이 닦는바 다스림은 이 세 가지 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
다스림을 닦음의 총괄한 뜻[總義]이라 함은, 깨달음을 여는 것의 닦음[開覺修]과 줄어짐의 닦음[損減修]과 밝게 꾸밈의 닦음[瑩飾修]과 일으켜 울음의 닦음[發上修]과 이웃의 닦음[隣近修]이다. 견도위에 이웃이 되기 때문인 것과 증득하여 듦의 닦음[證入修]과 더욱 훌륭함의 닦음[增勝修]과 처음 자리의 닦음[初位修]과 중간자리의 닦음[中位修]과 뒷 자리의 닦음[後位修]과 위가 있음의 닦음[有上修]과 위 없음의 닦음[無上修]이어서 반연할 바 뜻ㆍ지음ㆍ증득함에 이름[至得]의 자못 뛰어난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