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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경 상권
4. 염승품(念僧品)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룩한 무리]
“세존이시여, 무엇을 거룩한 무리라 합니까?”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능히 믿고 이해하여, 일체 모든 법의 생이 없음과, 멸(滅)이 없음과, 일어남이 없음과, 상(相)이 없음에 통달하고 이와 같은 인가를 성취한다 하여도 아직 나[我]를 얻지 못한다. 하물며 수다원(須陀洹)과 아나함(阿那含)을 얻겠느냐, 하물며 아라한을 얻겠느냐?
어찌 또 법을 얻고 어찌 남자와 여자를 얻고, 어찌 도를 얻고, 어찌 이와 같은 일들을 얻겠는가?
이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하는 이것도 역시 얻지 않는다.
또 다음으로 사리불아, 중생으로서 조금이라도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 혹은 능히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는 법을 믿고 이해한 자는 마음에 전도(顚倒)됨이 없고 서로가 함께 알고 이해한다.
법으로 해서 화합하여 다음의 존재를 받지 않는다. 모든 세간은 다만 허망함에 인연해서 일어남을 안다. 이 사람은 곧 다시는 이 몸에 머물지 않는다.
이 인연으로 해서 설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이 사람은 이 언어에 있어서 다시는 이름과 상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상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는 일을 모은다.
이것을 승보(僧寶)공양을 받음에 합당하다고 이름한다.
이에 어긋남이 없는 진실한 뜻을 얻기 까닭이다.
이 사람이 이 방편(方便)으로 승(僧)을 염하여도 이 일도 또한 공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는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의 언어의 길을 끊는 것]
사리불아, 일체의 언어의 길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거룩한 법 중에 있으면서 언어에 의지하여 진실한 뜻을 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언어도 역시 불가득(不可得)이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언어를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승가]
사리불아, 혹 사람이 있어서
‘만약 이 가운데 언설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다면, 무엇을 이름하여 승(僧)이라 할 것인가?’고 말한다면,
사리불아, 나는 이 가운데서 이와 같은 답을 한다.
승(僧)의 무리를 이름하여 여실한 일을 나타내고자 한다.
이 일은 결정적이며 또 불가득이다.
한가지로 모두가 하나의 배움이며 하나의 참음이며 하나의 맛이다.
이 일도 또한 세속의 말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는 아니다.
제일의 중에는 실로 이름하여 승법(僧法)은 항상하고 무너지지 않는다고 이름하여 정해진 일이 없다.
만약 성인(聖人)이 설하여 이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을 곧 잘못이라고 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불별을 짓고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용(龍)이다, 이것은 야차(夜叉)이다. 이것은 건달바(乾闥婆)이다, 이는 구반다(鳩槃茶)이다,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 라고 이러한 분별을 짓기를 마치고서 여러 가지 일을 얻고 여러 가지 일을 얻는 까닭에 이러한 말을 한다.
이는 앉음이고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고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성인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는 까닭에,
또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며,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을 얻지 않는 자는 능히 이 설(說)을 지어 이는 앉음이며 이는 눕는 것이며, 이는 가는 것이며, 이는 머무는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지 않는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사람으로서 이는 남자이다, 이는 여자이다, 이는 하늘이다, 이는 용이다, 내지 이는 법이다, 이는 법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이 한 짓은 허망하지 않는가?”
“허망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만약 이 허망함에 들지 않으면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전도되지 아니한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것이다.
사리불아, 선하지 않은 모든 것, 알아야 한다는 모든 것, 얻어야 한다는 모든 것, 이 같은 일체의 모든 선하지 않은 법은 모두가 명상(名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현성(賢聖)의 법 중에서는 모든 명상을 끊는다. 또 명상을 염하지 않는다. 명상을 얻지 않는다.
어찌 이것은 거룩하고 이것은 거룩한 무리라고 마땅히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명상을 끊는 것을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법에 계속한 대상으로서의 경계[處]가 있다면 깨트려야 하고 끊어야 한다.
현성의 법 중에는 이름도 없고 상도 없으며 언어도 없다.
모든 언어가 끊겼으며 합하고 흩어짐도 없다.
만약 승(僧)이 없으면 곧 거룩한 무리를 깨트린다고 말하나 이도 또한 얻지 못한다. 이른바 이름과 상의 허망한 생각 때문이다.
여러 가지 삿된 견해에 집착하고 이 삿된 견해에 의지하여 다시 후세에 몸을 받는다. 모든 견해에 탐착하면 곧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생한다.
사리불아, 다섯 가지 쌓임은 이 모두가 허망한 탐착(貪著)이다.
이를 악도(惡道)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에게는 이 일이 없다.
다만 허망한 인연 때문에 3계(界)가 일어나는 것을 안다.
이 일을 아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허망한 음성들의 견해]
사리불아, 무릇 소유한 견해는 거룩한 무리 중에서는 불가득이다.
이른바 아견(我見)ㆍ중생견(衆生見)ㆍ수명견(壽命見)ㆍ인견(人見)ㆍ남견(男見)ㆍ여견(女見)ㆍ천견(天見)ㆍ지옥견(地獄見)ㆍ축생견(畜生見)ㆍ아귀견(餓鬼見)ㆍ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에 대한 견해와,
온갖 소리를 갖추었다고 하는 주장과, 북소리에 대한 견해와,
땅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물과 불과 바람 소리에 대한 견해와,
지계(持戒)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계를 깨트리는 소리에 대한 견해와,
바른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삿된 길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때묻은 소리와 깨끗한 소리와,
선정(禪定)과 삼매(三昧)와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의 소리와,
수다원(須陀洹)의 과위(果位)와 사다함(斯陀含)의 과위와 아나함(阿那含)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해탈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과위를 얻은 소리에 대한 견해와,
부처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법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승(僧)의 소리에 대한 견해와 멸(滅)의 소리에 대한 견해이다.
사리불아, 이를 허망한 음성들의 견해라고 이름한다.
현성의 무리는 제일의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를 얻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음성이 일상(一相)임을 통달한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으로서 어김이 없고 다툼이 없으며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을 성취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 무상(無相)]
사리불아, 이 전도되지 아니한 법인(法忍)이라고 함은 이는 곧 무상(無相)이다.
상이 없는 까닭에 취(取)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거슬림도 없고 순종함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다.
이 중에 자연히 없어져 닿음도 없고 무너짐도 없으며, 일어남도 없고 얻음도 없다.
이것이다 저것이다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마음은 항상 평등하고 떠나 있다.
무슨 까닭인가?
이 인(忍) 중에는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도 업고,
분별도 없고 분별이 아닌 것도 없으며,
상이 없음에 통달하여 이 인을 성취하는 것,
이를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화합(和合)을 깨트리는 까닭에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여래를 보는 것]
사리불아, 나는 다른 경에서
‘만약 사람이 법을 보면 이는 나를 보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여래는 법이 아니고 또 법 아님도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어리석은 사람과 여러 외도(外道)를 조달(調達)하기 위하여 모두가 색신(色身)으로써 부처를 보게 한다.
사리불아, 여래를 마땅히 색신으로써 보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음성으로써 보지 않아야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색신으로써 부처를 보면 이는 부처를 떠나감이 멀다.
무슨 까닭인가?
부처란 색을 보아서 이름하지 않기에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능히 모든 법의 무상(無相)을 보면,
이름도 없고 감촉도 없고, 기억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무익한 의론도 없어,
일체의 법을 생각[念]하지 않으며, 열반을 생각하지 않으며, 열반으로써 생각[念]을 삼지 않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모든 법을 믿고 이해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이다.
이른바 상이 없는 상이다.
사리불아, 이것을 참다운 견해라고 이름한다.
부처란 일체의 법에 구함이 없고 무익한 의론이 없고 생이 없음을 말한다.
이 일 중에서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
이를 부처를 본다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있어 이 법 중에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이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탐함도 없고 어김도 없고,
생각도 없고 생각의 업도 없고, 언설을 탐하지 않고,
법의 거짓 이름을 알아 모두가 소유함이 없고 언설의 길을 끊고, 차별함이 없고, 또 무익(無益)한 의론이 없으면,
이를 생이 없고 생각이 없는 수행자(修行者)라고 이름한다.
세간에서 이름하여 거룩한 무리라고 한다.
사리불아, 무슨 법을 보는 까닭에 부처를 본다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생각이 없고, 분별이 없고, 희론(戱論)함이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법을 느끼지[受] 않는 것이다.
혹은 공의 문(門), 혹은 적멸의 문, 혹은 떠남의 문으로써도 견해를 생각하지 않고 견해를 얻지 아니하고 이 일도 또한 얻지 않으며, 이른바 이름이라고 하는 이 처소 또한 얻지 않는 이른바 열반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나는 오히려 열반을 염하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너희들에게는 마땅히 열반을 염하고, 열반을 얻으라고 설하겠는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열반을 얻으면 이 사람은 여래를 따르지 않는 출가자(出家者)로서 6사(師)를 따르는 출가자이다.
사리불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곧 법의 도적으로서 나의 법 안에 들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의 법을 더럽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큰 도적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마치 큰 성읍(城邑)에 큰 도적이 있는 것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와 사람[我人]이겠느냐?
사리불아,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나의 손으로써 막을 것이다.
나의 제자가 아니며 무리의 수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며 나는 그의 스승이 아니다.
사리불아, 만약 모든 법의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념(無念)ㆍ무상(無想)함을 알면 이는, 법인(法忍)을 얻은 것이지만 아직 열반은 얻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나와 사람이겠느냐?
사리불아, 부처도 이같이 설하여 법을 본다고 이름한다.
능히 이 일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를 본다고 한다.
사리불아, 무엇을 이름하여 부처라고 하는가?
일체의 법은 같아서[如] 다르지 아니하고 무너지지 않는다. 이를 여래(如來)라고 이름한다.
만약 사람이 이 법 중에서 의심하고 뉘우침이 없으면 이를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
[외도]
사리불아, 과거세(過去世)에 한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숭이를 알지 못하였는데, 어떤 큰 숲에 들어가 원숭이의 무리가 떼를 지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일찍이 도리천(忉利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곧 말하길 이것이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라고 하였다.
곧 숲을 나와 자기의 마을에 돌아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일찍이 도리천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뭇 사람이 다하여 말하였다.
‘아직껏 보지 못하였소.’
그 때 그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보았소. 당신들은 보기를 원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
곧 대중(大衆)을 이 끌고 그 숲을 찾아가 원숭이의 무리를 가리켜 말하였다.
‘당신들은 보시오. 이는 도리천의 여러 하늘이오.’
여러 사람 모두가 도리천이 아니라 이는 곧 원숭이가 숲 속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며 당신은 어리석고 전도되었기 때문에 원숭이를 알지 못하며 또 도리천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헛되이 대중을 이끌고 그 숲 속을 찾아 온 것이다.
이같이 사리불아, 미래세(未來世)에 있어서도 마땅히 비구가 있어 속인(俗人)의 집에 이르러 이 말을 해야 한다.
‘당신은 부처님의 제자인 거룩한 무리를 보고 부처님의 법을 듣고 받기를 바라는가, 바라지 않는가?’
그 중에 속인으로서 불법을 믿는 자가 있어서 모두가 보고 부처님 법을 듣고 받아 지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사리불아, 그 가운데 속인이 있어 언어에 탐착하고 즐겨 절에 들어온다.
여러 비구가 있어 언설을 좋아하고 능히 여러 가지 경에 통달해 있다. 언어에 의지하여 글을 꾸미기를 즐긴다.
이 여러 사문은 수순하여 설하고 이를 참다운 길이라고 말한다.
다만 무리의 수를 채움이 놓아먹이는 소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다만 경을 읽는 것을 즐길 뿐 진리의 경계에는 들지 못한다.
다만 사람의 뜻을 기뻐하고 명리(名利)를 귀하게 여긴다. 세속 일에는 훌륭하나 깨끗한 설법은 못한다.
다만 능히 말하여 세간의 도를 행한다. 위덕(威德)이 없어 열반의 인(因)은 깨어졌다.
거룩한 침묵을 버리고 선정을 즐기지 않으며, 밤낮으로 항상 담론(談論)하고 다투기를 좋아한다.
두터운 잠자리에 눕고 더욱 한 생각도 선정(禪定)에 수순함이 없다. 하물며 능히 사문(沙門)의 과위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 사람은 자면서도 항상 속된 마음과 상응한다.
초저녁과 새벽에 순인(順忍)을 닦지 않고서 하열한 법을 즐긴다.
이 사람은 또 많은 의복과 음식의 공양을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이 사람은 항상 악마에게 포섭되어 천박한 말을 즐긴다.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배울 수가 없다.
제일의 깊은 경을 독송하고 지닐 수가 없다.
들으면 곧 놀라고 두려워 맛좋은 국물을 버리고 술찌꺼기를 취한다.
여러 범부가 있어 이익을 얻는 것을 보고는 탐착하는 마음을 내고 이러한 생각을 하고 말한다.
‘우리들도 또 마땅히 이 말을 익혀야 한다.’
사리불아, 이 사람은 위없는 법보(法寶)를 버리고서 삿된 견해에 떨어져 있다.
이는 사문(沙門)의 전타라(旃陀羅)이다.
여러 속인이 와서 그곳을 찾아오면 이 같은 악인(惡人)은 그럼에도 설법을 한다.
이익 때문에 부처와 법과 승(僧)을 칭찬한다.
다만 목숨이 살기를 구하여 재물의 종이 되고 의식을 탐하고 귀중히 여겨 자기가 즐기는 것을 칭찬한다.
‘만약 보시를 행하면 천상(天上)에 남을 얻는다. 불법 중에서는 보시를 낮은 법이라고 한다. 칭찬하는 것이 가장 으뜸이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말을 한다.
‘큰 보시의 인연은 천상에 남을 얻는다.’ 말을 모르고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처음으로 들어온 천박한 낮은 법을 알 뿐 나[我]와 사람을 탐착하여 제일의를 버린 것이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설법은 혹 그 때, 사람이 있어 믿음이 생겨서 출가한다 하여도 여러 나쁜 사람과 화합하여 제일의의 깊은 뜻을 부지런히 닦을 수가 없게 한다.
소득이 있는 자는 나[我]와 사람과 수명이 있다고 설하고,
소유가 없는 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아비담(阿毘曇)과 수투로(修妬路) 중에서 스스로 의론을 하고 혹은 단상(斷常)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있음을 설하고 혹은 지음이 없음을 설한다.
사리불아, 나의 법은 그 때, 외도의 법이 많아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의 마음이 무너지지 않게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나의 청정한 법은 이 인연으로 해서 점점 멸하여 없어진다.
사리불아, 내가 오래도록 생사(生死)의 세계에 있으면서 온갖 괴로움을 받으면서 이룬 보리(菩提)도 이 여러 악인(惡人)들이 그 때 깨트릴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비구가 있어 이 얻음이 있는 견해인 아견(我見)과 인견(人見)을 버리지 못하면 여래가 기쁘게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 결정적으로 나[我].0와 사람의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서는 내가 곧 하나의 마시는 물도 받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혹은 이 때 이 사람이 공의 법을 들을 수가 있어 마음이 청정하여 놀라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곧 도리어 뭇 사람을 마땅히 인도하여 실상(實相)의 뜻에 들게 한다.
곧 마땅히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比丘戒)를 받아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 같은 견해를 버리지 않으면 이를 외도라고 이름한다.
사리불아, 내가 세속의 인연을 빌어 나[我]가 있다고 설하지만 제일의가 아니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말한다.
‘나도 또한 세속(世俗)의 인연을 가져 나[我]가 있다고 설한다.’
이 사람이 만약 능히 무생(無生)과 무멸(無滅)과 무상(無相)에 통달하면 나의 설하는 바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 자로서 이가 나의 제자인 것이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여래는 무슨 까닭에 세속의 인연에 따라서 무아(無我)의 법이 있어 사람이 있다고 설하시는가?
여래는 마땅히 세간을 위하는 까닭에 부실(不實)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여러 경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있다고 설하였다.
부처의 설한 바는 마땅히 거짓이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사리불아, 마땅히 이 사람에게
‘부처가 모든 법은 공하여 주인이 없고 성품이 없다고 못하는 것은 다만 이는 허망한 것으로서 제일의가 아니며,
여래는 제일의로써 하지 않으므로 나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성인의 말에는 탐착하는 곳이 없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부처와 같을 수 없고 또 지나치는 자도 없다’고 답해야 한다.
사리불아, 여래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써 이 지혜로써 중생의 마음을 안다.
사람이 있어 마땅히 부처와 같다면 부처는 큰 용인 대법왕(大法王)을 위하여 마땅히 어지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어느 사람에게는 일체의 세간은 항상 나와 함께 싸운다 하고, 나는 항상 세간과 싸우지 않는다고 설한다.
사리불아, 자아(自我)가 있다고 설하는 자는 매우 가엾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이 중에는 법도 없고 자아도 없다.
많은 중생이 있어도 여래가 기꺼이 설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법보(法寶)에 거역함이 많아 악의 한계에 떨어진다.
사리불아, 나는 삿된 견해를 알지만, 그러나 삿된 견해라고 하지 않는다. 능히 삿된 견해를 아는 것, 이는 곧 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삿된 견해는 끝내 바른 견해가 되지 않고 견해는 견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의 보리는 믿기 어려운 곳이다]
사리불아, 모든 부처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일체의 세간이 믿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모든 하늘과 일체의 세간에서 보다 가장 믿어야 하며 믿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리불아, 나의 설하는 법은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역시 저 언덕에 이르는 것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행(行)을 다하기 위한 것이지만 이 중에 또한 모든 행을 다함도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적멸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적멸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해탈을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해탈이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모든 지혜를 위한 까닭이지만 이중에 또한 모든 지혜란 없다.
나의 설하는 법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지만 이 중에 또한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하늘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하늘이 없고,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사람이 없으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나 또한 중생은 없다.
사리불아, 여래는 밝음[明]과 해탈을 설하지만 이 중에 밝음과 해탈은 없다.
내가 염불(念佛)을 설하나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내가 공의 행을 설하지만 공의 행을 행하지 말고 또 염하지도 말아라.
사리불아, 이를 여래의 설하는 바인 경과 법의 구절이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 설하는 자는 없다.
여러 악인(惡人)들이 구절을 얻어 남을 위하여 설하고 또한 나를 부처라 하여도 여래와 거룩한 부처의 공덕은 없다.
더욱 스스로 승(僧)에 속한다 함은 사리불아, 비유컨대 원숭이의 무리가 도리천과 비슷한 것과 같다.
이 같은 뭇 악인은 나의 거룩한 무리와 비슷하지 않다.
사리불아, 이 여러 악인은 다만 음성과 말로써 스스로 사문(沙門)이라고 말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원숭이의 무리를 보고서 도리천(忉利天)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닮았다.
사리불아, 그 중에 출가한 사람이 있어 어려운 물음을 기뻐하고 즐긴다.
좋은 스승의 명색(名色)을 설함에 적멸하여 언어의 길을 끊고 그에 합당함을 얻어 일어남이 없고 잃음도 없고 무상(無相)에 통달하여 이같이 무생(無生)과 무멸(無滅)ㆍ무상(無相)의 법을 들음을 얻어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이미 일찍이 무량(無量)한 모든 부처를 공양하였고 능히 나의 법을 알아서 거룩한 무리라고 이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