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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무언동자경 상권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ㆍ수행을 생각함ㆍ현성의 바른 견해]
이에 무언보살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말씀드렸다.
“세존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바른 견해를 닦는 되는 데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남에게서 음성을 듣거나 그 수행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대성(大聖)이시여, 원하옵건대 여래ㆍ지진ㆍ정각께서 이것을 분별하여 잘 말씀해 주소서.
보살이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란 어떤 것이고
그 수행을 생각함이란 어떤 것이며,
또 현성(賢聖)의 바른 견해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무언보살에게 대답하셨다.
“족성자여,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이제 분별하여 해설할 것이다.
마치 보살이 남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으로 인해 생각함으로서 현성의 올바른 견해를 받들어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훌륭하십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는 무언보살이 법회의 대중들과 함께 가르침을 받아 들였다.
부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만약 어떤 보살이 다른 중생을 힘써 교화하여 불도에 들어오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가령 불도를 향한 마음을 평등하게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한 불도의 법에 유순하여서 듣고서 잘 살핀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부처님 불도의 이치를 받들어 간직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보살의 도를 받들어 행함으로서 법인(法忍)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니라.
또한 무언보살이여, 만약 미묘한 지혜와 위없이 바르고 참된 도를 듣고서 들은 그대로를 선설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령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 이치를 통달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의지와 성품이 청정하여 아첨하는 일이 없이 넓은 업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이치를 들은 그대로 수순하여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온갖 공덕의 근본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그 소행이 미묘하여 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전일한 마음으로 받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아주 뛰어난 이치를 구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도와서 언제나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유순한 생각으로서 응하는 대로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돕되 현성을 평등하게 관찰하여 아예 그만두거나 물러서지 않고, 모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놓아버리는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지고 있는 모든 소중한 물건을 과감히 모두 다 보시하되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보시하고 나서 그 과보를 바라지 않고 도를 탐하거나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대승에 이른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계율의 드넓고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계율을 지키되 계율로 말미암아 관습에 젖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계율을 수행함이 없이 지진(至眞)을 독실하게 믿어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에 인욕하는 마음으로 인의(仁義)를 닦고 대자비를 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러면서도 중생을 가엾이 여겨 해치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끝까지 한가롭고 고요해서 모든 법을 믿되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에 정진을 다하여 수순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그 마음이 게으름이나 더러운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합쳐짐도 없고 흩어짐도 없으며 어겨서 잃는 것도 없이 정성껏 정진하여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선정과 세 가지 해탈문을 들음으로서 그 삼매에 든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마음이 하는 일에서 얻을 수 없는 마음의 뿌리를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선정을 닦으면서 잘못 뒤바뀐 생각에 떨어지지 않고 불도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지혜를 듣고서 그 지혜를 몸의 뿌리로 삼아 꽃과 열매를 무성하게 키운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법을 듣고서 본말(本末)에 귀의하며 나아가 갈래를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모든 생사의 흐름과 온갖 열반의 언덕을 다 버리고서 중생을 열어서 교화하는 마음의 근원에 다다른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네 가지 은혜[四恩]를 보이고 들은 것을 모두 다 거두어들이지만 조금도 집착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네 가지 은혜의 가르침을 버리거나 없앤 적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구제해야 할 중생들에게 은혜를 베풀되 이 평등한 이치에 따라 온갖 지혜에 입각해서 제도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자심[慈]ㆍ비심[悲]ㆍ희심[喜]ㆍ사심[護]의 네 가지 범행(梵行)을 닦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사랑함으로서 파괴하거나 훼방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의 명성을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공무(空無)한 이치를 따라 즐기기는 하지만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닦고 법을 위해 기쁜 마음을 내는 이 두 가지 과보를 생각하여 도덕을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듣고 살피는 모든 일을 네 가지 분별하는 뛰어난 말재주로써 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모든 법을 관찰하여 위의와 예절을 갖춘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평등한 법의 이치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불도를 향한 마음을 힘써 일으키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미묘하여 중생을 이롭게 인도하는 일을 듣고서 당연하게 받들어 행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수순하는 행을 잘 다스려 기억하며 그 행을 멀리 여의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수행을 생각함이며,
법문의 장구(章句)와 불도의 자취[道跡]에 따라 그 처소마다 불도를 선포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37정각(正覺)의 법을 듣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의지(意止:念處)를 수행함으로서 모든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단의(斷意:意斷)를 수행하여 일찍이 한번도 착하지 않은 것을 따라 미혹되지도 않으며
항상 덕의(德義)의 뜻에 순종하여 그 신족과 정진ㆍ선정의 힘을 얻어 겁내거나 약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이 같은 독실한 신심으로 법문의 구절을 분명히 알아 물러나지 않으며
그 지혜로써 낱낱이 관찰하여 대할 수 있어서 마음이 법력을 말미암아 번뇌에 끌리지 않고
법의 깨달음에 들어가 도심(道心)과 더불어 평등하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다.
가령 의지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어 그 4의지(意止:念處)에서 일어나지도 없어지지 않고
4의단(意斷)으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4신족(神足)으로 진리[眞諦]와 같이 살피고
이같이 환히 깨달아서 이와 같이 올바르게 나아가되
지혜의 칼을 잡고 온갖 번뇌를 끊어 그 정욕(情慾)에 끄달리지 않고
바른 법에 들어가서 각의(覺意)에 두 가지 일이 없음을 평등하게 관찰하여
모든 귀착하는 지름길마다 도심(道心)을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4성제(聖諦)를 듣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5음(陰)의 괴로운 환란과 사랑[恩愛]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인연의 습기를 모두 없앰으로서 올바른 지름길로 들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비록 모든 괴로운 환란에 처해 있더라도 그 지혜를 일으킴이 없고,
모든 훈습을 하더라도 지혜는 훈습됨이 없고
모든 다함이 있는 것에도 지혜는 구경에 다하며
모든 지름길에도 지혜로서 집착하지 않고 큰 도(道)를 힘써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세 가지 해탈문을 듣고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공(空)을 돈독하게 믿고 상(相)이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원(願)이 없음에 마음으로 구하는 곳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공한 수행을 생겨나게 하지도 않고서 모든 소견을 열어서 교화하고 상(相)없는 마음을 일으켜 일체 중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모든 상에 원 없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여 지극한 정성을 자라나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처음 발심할 때부터 큰 대업에 순종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보살행을 닦아서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물러서지 않는 지위에서 정각(正覺)을 성취하게 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선지식을 얻어 그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세존을 뵙고서 스스로 성인의 길을 묻고 따라 나아간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입으로 말한 그대로를 실행하여 말에 어긋남이 없어서 몸과 입의 행이 서로 걸맞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강설하는 법을 듣고서 미혹함과 어지러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모든 법의 이치가 귀결(歸結)됨을 관찰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법의 이치를 받들어 행함으로서 불도의 가르침을 잃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여래에게 친근하여 그 선설하시는 말씀을 받들어 묻고서 간직한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불도의 마음을 분별할 줄 알아서 큰 가르침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열어서 교화해야 할 일을 다 받들어 행하여 그대로 성취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8만4천의 모든 도품법(道品法)을 듣고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8만4천의 모든 부처님의 수행문을 분별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제각기 근기가 다른 8만4천의 중생들에게 그들에게 맞도록 설법한다면 이것이 바로 현성의 올바른 견해이다.
또 어느 곳에서나 아무런 탐하고 집착하는 일 없이 공덕심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바로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가령 공덕을 일으키고 나서 마음에 항상 공덕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이러한 공덕심으로서 오롯하게 일체의 지혜를 힘써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성현의 바른 견해이니라.
족성자여, 이와 같이 수순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는 오래 살 것이고, 끝나지 않는 수명을 누리면서 성현의 올바른 견해를 얻을 것이니라. 왜냐 하면 성현의 바른 견해로서 다섯 갈래[五趣]에 자유로이 맴돌기 때문이라.
그 다섯 갈래에 맴도는 것이 마치 허깨비[幻化]와 꿈과 그림자와 메아리와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과 파초와 같으므로 이것을 훤히 깨닫는 것이 곧 남의 음성을 이어받음이고,
일체의 법이 모두다 평등하여 치우침과 삿됨이 없으므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곧 그 수행을 생각함이며,
여기에 평등함을 이룩해야 할 것을 깨닫는 것이 곧 성현의 바른 견해이니,
이를 사유(思惟)라 하느니라.
높고 낮음이 없이 일체의 법에 대해 호응하는 것도 호응하지 않는 것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나아가지 않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것도 머물지 않는 것도 없고,
행하는 것도 행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기억하는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뜻하는 것도 뜻하지 않는 것도 없고,
관찰하는 것도 관찰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마음도 의식도 가르침도 없는 그것을 상대적 차별 없는[不二] 법문에 드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동일한 법품(法品)을 환하게 깨달음으로서 모이는 것도 흩어지는 것도 없고, 어기는 것도 따르는 것도 없이
본래 성품이 청정한 것을 환하게 깨달아서 깊이 생각하고 널리 강설하되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으며 흐림도 없고 맑음도 없을 것이니라.
어떤 단계나 차례[品第]도 없는 그러한 이치를 분명히 나타낸다면 법계는 파괴되지도 않고 법의 근본경지에서 흔들리지도 않으며,
나아가서는 근본 없는 경지에 들어가 3세에 머물러도 머물 곳도 없으므로 나[我]ㆍ사람[人]ㆍ수(壽)ㆍ명(命)이라는 생각도 없고
모든 음성과 문자를 벗어나 그 이치에 아무런 얻을 것이 없으며,
어떤 재업(財業)도 없고 끝나는 곳도 없어서 모든 꾀하는 것을 얻을 것이니라.
일체 행하는 것에 있어서 그 온갖 기억도 없고 모든 생각을 여의어 게으른 일을 모두 끊어버림으로서 어떠한 행에도 집착함 없이 뛰어나고 내지 여래의 칭찬을 받을 만큼 무위(無爲)의 경지에 들어가 온갖 생각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을 평등이라 하느니라.
이것은 어떠한 모양도 없이 한결같이 진리에 응함에 따라 사유하느니라.
가령 어떤 수행하는 이가 삼매로부터 일어나 이러한 법으로써 중생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설한다면,
그는 곧 이 법의 근본을 추구(推求)하여 호응하는 그대로 생각하여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되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큰 자비심을 세우는 현성의 바른 견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현성의 바른 견해를 말씀하실 때에 1만의 보살들이 곧 현성의 올바른 견해를 얻었다.
이에 사리불이 무언보살에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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