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수행보살행문제경요집 상권
3. 유마힐소문경(維摩詰所問經)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조목을 드러내어 설명했다.
불종성(佛種性)을 인연하여 보리가 발기됨을 해설하고, 출가의 인연과 공덕에 대하여 해설했다.
이때에 유마힐(維摩詰) 장자가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여래의 종성을 분명하게 잘 아실 터이니,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떠한 것을 종성이라고 합니까?”
문수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종성이니,
5음(陰)도 종성이고,
무명(無明)으로 나고 죽고 하는 것도 종성입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도 종성이며,
4전도(顚倒) 망상도 다 종성입니다.
5개(蓋)도 종성이며,
6입(入)도 종성입니다.
7식(識)의 번뇌도 종성이요,
9뇌(腦)로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것도 종성이며,
십악불선(十惡不善)도 종성입니다.
선남자여, 요점을 간추려 말하면 62견(見)과 일체 번뇌가 모두 여래의 종성입니다.”
그때에 유마힐이 물었다.
“그대는 무슨 뜻으로 일체 번뇌가 모두 부처님의 종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문수사리가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무위(無爲)를 깨달아 알아서 이미 정멸(定滅)에 머물러 있으면, 이 사람은 당연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또 보살이 번뇌에 머무르면서 지(地)의 자리에 머물러 정위(正位)의 실상(實相)을 보면, 이러한 사람은 보리심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비유하면 육지에서는 연꽃은 자라지 못하고 진흙탕에서만 자라며 꽃을 피우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만약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무위(無爲)의 멸정(滅定)에 머물면,
불종성의 싹은 다시 나는 일이 없고 꽃도 필 수 없으며 번뇌의 진흙탕이라야 보리심을 낼 수 있습니다.
번뇌를 인연해서 불종성의 싹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허공에서는 종자가 자라지 못하지만 비옥한 땅에서는 무성하게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무위의 멸정에서는 당연히 보리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만약 ‘내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수미산(須彌山)과 같아야 비로소 보리심을 내고 불종성을 내어 한량없는 지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선남자여, 비유하면 넓은 사해(四海)에 들어가지 않으면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를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선남자여, 또한 이와 같습니다.
만약 번뇌의 큰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불종성이라는 보배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보리의 종성은 본래 번뇌 가운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때에 장로 마하가섭(摩訶迦葉)이 감탄하면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말하였다.
“정말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진실하고 거짓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불종성은 모두 번뇌의 종성입니다. 왜냐하면 저희 성문들은 보리심을 내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은 삼계(三界)의 번뇌 종자를 태워 없앴습니다.
저희들은 차라리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5역죄[五逆]를 지을지언정 당연히 세간의 번뇌를 끊고 해탈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이 이미 5역죄를 지었어도 죄를 받는 것이 끝나면, 마침내 돌아와 다시 보리심을 발하여 직접 불법을 듣고 불사(佛事)를 드러내지만,
아라한(阿羅漢)과 같은 이는 번뇌가 이미 다하여 다시는 뒤의 존재가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5근(根)이 모두 망가졌다면, 이러한 사람의 식심(識心)은 다시 일으킬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한(羅漢)도 또한 그러하여 번뇌가 모두 괴멸되고 모든 결(結)이 이미 제거되어 힘이 없는 까닭에 위없는 보리를 감당하고 붙들어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범부는 부처님을 친근하게 하지만 성문과 벽지불은 보리를 멀리합니다.
왜냐하면 범부는 자주 삼보(三寶)의 위력과 한량없이 많은 종성을 듣고는 곧 보리심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끊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문과 연각이 비록 일찍이 여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덕[聖德]과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들었으나 보리심을 발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라후라(羅睺羅)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여라.”
라후라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그분께 나아가서 문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옛적을 생각해 보니,
옛날 비사리성(鞞舍離城)에 살고 있던 모든 족성의 사람들이 저의 처소를 찾아와 절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은 부처님의 아들로서 전륜왕(轉輪王)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道)를 닦으시니, 그렇게 출가한 이에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그때에 제가 모든 족성의 사람들에게 법에 맞게 설법을 했는데, 그것은 출가의 공덕과 인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법을 말할 때 마침 유마힐이 저의 처소에 와서 저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말했습니다.
‘라후라여, 당신이 지금 말씀하신 출가의 공덕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출가라는 것은 아무 이익도 없고 아무 공덕도 없으니 이것을 출가라고 합니다.
유위법(有爲法)을 주장하는 이는 이익이 있고 공덕이 있다고 말하지만, 저 출가라는 것은 무위법이기 때문입니다.
무위법은 아무 이익도 없고 아무 공덕도 없으며, 일체 모든 행을 멀리 여의었고, 열반(涅槃)에 지혜로운 이가 나아가 받는 것이며, 성인이 행할 바의 처소입니다.
많은 마군을 항복받고 5도(道)를 벗어나며,
5안(眼)을 깨끗이 하고 5근(根)을 안정하며,
두려움 없음을 베풀고 다른 이를 괴롭게 하지 않으며,
온갖 악에 물들지 않고 모든 외도(外道)를 굴복시키며,
거짓된 이름을 초월하고 계율을 범하는 진흙탕을 벗어나며,
내 것에도 집착이 없고 내 것이 없는 것에도 받을 것이 없으며,
또한 동요하고 혼란함이 없고 몸과 마음을 조복하며,
다른 대중들을 거두어 보호하고 선정(禪定)을 따라 바깥 허물을 여의며,
일체의 처소에서 취할 것이 없어야 하니,
만약 이와 같이 출가하면 좋은 출가라고 이름할 것입니다.’
‘그대들은 정법(正法)에 함께 출가하여 율의(律儀)와 모든 부처님의 교법[法敎]을 잘 배우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렵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신 때를 만나기도 매우 어려우며, 위없는 보리를 일으키기도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에 그들 부족의 사람들이 유마힐에게 말했습니다.
‘저희들은 부처님께서 ≺만약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때에 유마힐 장자께서 여러 동자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다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어 항상 청정한 행[梵行]을 닦으라. 이것이 곧 출가의 공덕이니라.’
이때에 이 서른두 명 족성의 젊은이가 모두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 까닭에 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그분께 가서 문병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