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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제법보최상의론 상권
[법의 성품]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건달바 성(城)과 같다.
삼계의 모든 법은 식심(識心)으로부터 생한 것이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삼계는 허깨비와 같다.
만약에 하나의 사물이라도 실체가 있다면, 여기에서 허깨비의 비유로써 설한 것은 이치에 상응하지 않을 것이다.
『삼마지왕경(三摩地王經)』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설하고 있으며, 위와 같은 모든 뜻을 여러 경에서 설하고 있다.
다시 경에 의거하여, 나머지 뜻을 간략하게 주석하면, 묘길상보살의 말과 같다.
보리는 몸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도 얻을 수 없다.
마음이 없으면 곧 몸도 없다. 몸과 마음을 떠났기 때문이다.
됨이 없고 지음이 없으며[無爲無作], 허깨비와 같고 화[化]와 같다.
만일 이와 같이 설한 것을 보리라고 한다면, 모든 부처님은 이것을 설하여 바로 보리가 되고, 능히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경계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곧 지혜의 장엄[智莊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체지(一切智)를 장엄하지는 않는다. 일체지의 성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리는 생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모두 이와 같이 설한다.
또 비유하면 세간의 모든 종자와 능히 생장할 모든 싹과 줄기와 같다.
만일 종자가 없다면 싹과 줄기는 생하지 않는다.
석가보살이 보리장(菩提場)에 앉아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룬, 그 뜻 또한 그러하다.
단지 연(緣)에서 법(法)이 생기할 뿐이기 때문에, 비록 증험한 것이 있을지라도 그 실체는 없다. 이것을 곧 유희신통(遊戱神通)이라 설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밖의 법[外法]은 있지 않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 또한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식을 떠나서는 진실로 하나의 법도 없다. 만일 식을 떠난다면 법은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능히 마음을 생하면 곧 무생(無生)이며, 만일 법이 생한 법이라면 역시 무생이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생함이 없는 마음 가운데에서 보리의 뜻을 설하신다.
부처님께서 식심(識心)은 능히 보리를 생하며, 또한 식심이 아닌 것이 능히 생하기 때문이라고 설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식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묘길상보살이 설한 것은 최상의 진실이며, 스스로 부처님의 경계 가운데에서 여실하게 설한 것이다.
또한 모든 법을 모두 연으로부터 생하여, 그 생한 것은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으며, 허깨비와 같다는 그 말은 여실하게 설한 것이다.
자씨보살은 허깨비와 같은 삼마지 가운데 나투어 머무른다.
그러므로 세존은 이 삼마지 가운데에서 그 수기를 주는데, 드러내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또한 세존은 무수한 경에서 모든 법은 식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라고 설한다.
생함을 떠나고 멸함도 떠나,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두어 갈무리하는 것도 아니다.
일어나 짓는 것도 아니고 그치어 쉬는 것도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단절하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의 성품은 모두 다 허깨비와 같은데, 하물며 다시 모든 법을 분별한 것에 있어서랴.
만약에 단절과 항상이라는 말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바른 행이 아니며 부처님께서 허락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모든 법이 단절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이 바르게 상응하는 것이며 견실이라고 한다.
자분(自分)외에는 법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으며, 또한 법은 마음 작용과 대할 것이 없다.
비록 모든 법에서 여러 가지의 구절을 설할지라도, 다만 모든 법에 따라 나타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식이지 다른 식이 아니다.
밖의 뜻에서는 조그마한 법도 바랄만한 것이 없다.
자신의 식이 성품이 없음과 다른 식의 성품이 없음은 자신에서나 다른 것에서나 또한 성품이 다르지 않다.
그 진실한 지혜를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난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我)의 식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보특가라온(補特伽羅蘊)이라는 말에 포섭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과 모든 법은 모두 자분[自分]에 있다.
만약에 자분을 떠난다면,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즉, 여기서 설한 것은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난 것으로서 깊고 깊은 뜻이다.
모든 부처님은 모두 이러한 미묘한 법을 설하며, 모든 취하여 집착하는 분별을 영원히 떠났다.
이것을 떠나 다시 따로 설하는 것은 없다.
미혹하여 그릇된 자들이 만약에 있음에 집착하면, 곧 선과 악의 세계로 나아가는 두 종의 차별이 있게 된다.
만일 없음에 집착하면, 곧 그러한 생각이 찰나에 생각함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있음에 집착해도 없음에 집착해도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는 자비심으로써 방편으로 이 뜻을 널리 설한다.
즉, 모든 법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난다는 이와 같은 설이 최상의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든 법의 진실이라 한다.
법은 집착할 만한 성품이 없으며[無著性], 모두 관한 바가 아니다.
그 집착할만한 성품이 없음은 있음을 떠나고 없음을 떠난다.
만약에 이와 같이 안다면, 이는 큰 지혜를 가진 자이며, 마땅히 허공은 증감이 없으며 분량(分量)도 없고 끝도 없다고 관해야 한다.
곧, 이 허공은 모든 것을 출생하며, 청정한 식심(識心) 또한 이와 같다. 이 마음은 무심(無心)으로서 모든 것을 출생한다.
또한 맑은 마니구슬[摩尼寶]과 같다. 그것은 무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비추어 드러낸다.
혹 어떤 사람이 묻는다.
“어떤 분위(分位)이기에 능히 취함이 없는가?”
마땅히 이와 같이 답해야 한다.
“그 허공은 끝을 짓지 않기[無作邊] 때문에 곧 능히 취함이 없다.”
만일 그 허공이 끝을 짓지 않는다면, 양(量)을 어떻게 얻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중생계가 마치 미세한 먼지가 모인 것과 같으나, 한 허공이라도 모든 것을 능히 받아들여서 모든 중생이 허공계와 같이 증감하는 것이 없다.
만일 모든 유정과 모든 공간과 시간, 모든 종류와 모든 형상을 하나하나 분별한다면, 이 가운데에는 한 성품도 생기하는 것이 없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하나의 성품도 아니며 다수의 성품도 아니다. 하나와 다수의 중간 또한 성품이 없다.
만일 하나의 성품은 결정코 얻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곧 여러 가지의 성품은 차별이 있게 되고, 차별의 성품이 있다면 곧 분별이 생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품도 다수의 성품도, 이 성품은 평등한 것이다.
만일 밖의 뜻에서 취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지혜에서도 또한 얻는 것이 없다.
만일 밖의 뜻에서 취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 지혜에서도 또한 생기하는 것이 없다.
만일 식심(識心)이 모든 유의 모습[有相]을 떠난 것을 안다면, 밖의 법이 어떻게 분량(分量)이 있겠는가?
만일 식심이 모든 유의 모습이라고 안다면 밖의 법에 또한 어떻게 분량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밖의 법은 실로 하나의 성품이라도 생기하는 것이 없다.
꿈 등의 법이 실로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만일 모든 법이 이러하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상(自相)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법이 저러하다고 말한다면, 저것은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마음에 헤아려 아는 바가 있다면, 곧 이 자신의 마음 또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여실하게 아는 자는 식의 모습을 깨달아 안다고 한다.
일체에 있어서 거칠고 무거운 분별심이 일어나나면, 마땅히 모두가 번뇌의 차별이 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능히 번뇌의 성품은 분별심을 떠난 것임을 깨닫는다면, 곧 생사와 열반 둘은 모두 청정하다.
이 청정한 성품이 곧 모든 법의 성품이다.
이 성품은 또한 진여라 이름하기도 하고, 실제라 하기도 하며, 또한 공이라 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성품 가운데에서 더럽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지만, 참된 지혜로 관하면 모두가 평등하다.
혹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모든 법 가운데 무엇이 무너지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면,
마땅히 “모든 법은 스스로를 인(因)해서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대답해야 하다.
어떻게 해서 무너지지 않는가?
무너지지 않는 인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법이 성품이 있거나 성품이 없거나, 스스로의 성품을 떠나지 않는다.
두 가지 뜻의 끝에서 어떻게 안립할 수 있는가?
만약에 모든 법의 인(因)과 모든 작용이 무너지는 것이 있다면, 모든 곳에서 이치가 상응하지 않는다.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이 어떻게 따라서 전전하는가?
즉, 그 참된 성품은 머무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은 성품이 없는데 어떻게 인(因)이 있는가?
인을 떠나서는 다시 다른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은 무너지는 바가 없어 곧 무너진다고 하는 이름 또한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차별되는 인의 성품 또한 없다. 그 무너짐과 멸함의 성품은 분위(分位)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진실은 항상 머무르는 성품[常住性]이다. 그 항상 머무르는 성품은 항상함이 없는 성품[無常性]이 아니다.
만약에 참된 성품을 떠나 다른 뜻이 작용한다면, 이치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성품은 역시 감소하지 않으며, 또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 진실한 성품은 아니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 어떠한 뜻이 있는가]
진실한 성품 가운데 어떠한 뜻이 있는가?
이것이 작용하는 바는 차별의 성품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으며, 그 모두는 모든 곳에 항상 두루하다.
또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 진실한 성품은 아니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에 모습을 어떻게 얻는가?
진실이 아닌 모든 것에서 이것은 어떻게 세우는가?
모든 다른 성품에서 이것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러므로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사물의 성품 중 자기의 종류[自種]로서 전전한다.
종류가 모여 나타난 것은 차별의 인 때문이며,
하고자 하는 것이 인이 되어 생기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모든 항상함이 없는 성품으로 이 가운데에서 결정하여 설하면, 유식(唯識)의 이치에 상응하지 않는다.
그 항상함이 없는 성품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면, 또한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법이 찰나에 생기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너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항상함이 없는 성품이라고 하겠는가?
만일 무너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인의 성품이라 하겠는가?
과거와 미래의 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사물의 성품이 없다. 반드시 실유(實有)로 분별하므로 모든 법이 따라서 흐른다.
그러한 분위(分位)를 따른다면 다시 어떻게 인이 되는가?
즉, 머무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有爲) 중에서 현전하는 현상이 멸하면, 곧 그 뒤의 현상이 돌아와서 다시 생기한다.
앞의 것은 뒤의 것을 끌어들여 생하게 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으며, 뒤의 것은 앞의 것으로부터 생하는 것을 분별할 수 없다.
만일 모든 법이 여기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이 가운데에서 분별의 인을 일으킨다.
만일 모든 법이 그곳에 얻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곧 그 가운데에서 분별의 인을 일으킨다.
과거와 미래에 머무르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하다.
이 가운데 분별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찰나의 법 가운데 무너지는 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의 끝은 찰나의 법이 아니다.
만일 그 인에서 이와 같이 요지한다면, 앞과 뒤와 중간을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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