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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진론 상권
[승의제의 입장]
지금 이 논에서는 승의제의 입장에서 유위의 경계에 대하여 치우친 상주(常住)의 견해를 피하고 또한 ‘있음의 속성’을 부정한다. 이렇게 나머지 곳에서도 단견(斷見)을 피하려고 ‘없음의 속성’을 부정한다.
더불어 두 치우친 견해를 피하려고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속성’을 부정한다.
나머지 망집의 과실을 피하기 위하여, 마침내 일체 심소(心所)의 작용을 모두 다 부정한다.
심소의 작용이 소멸하면 마음도 바로 따라 소멸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아난다(阿難陀)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있음의 속성’에 집착하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없음의 속성’에 집착하면 곧 단견에 떨어진다.”
이와 같이 나머지 곳에서 가섭파(迦葉波)에게 말씀하셨다.
“있음은 치우친 견해이고 없음은 다른 치우친 견해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아급마(阿笈摩)[아가마, 아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이고, 또한 말이 모든 도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내가 세운 주장은 저촉됨이 없으니, 마치 똥처럼 견해의 과실이 없다.
[다른 주장들]
자기주장에 오류나 곤란이 생기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은폐하기 위해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성공론자(性空論者)는 항상 무분별혜(無分別慧)를 원하지만 항상 일체 유위나 무위의 공성(空性)에 관해 분별하면 변계소집(遍計所執)과 허망분별을 세워 스스로 즐거움[樂]의 주장을 잃는다.”
이와 같이 또 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는 없다.
그밖에 사람이 다시 말한다.
“공하다는 이유는, 세속 혹은 승의제의 자기주장이나 다른 주장에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두 주장을 모두 허락하여 차별을 드러내지 않는다. 총상(摠相)의 법문(法門)에서 바른 이치를 밝히는 것은 이유로 삼는 것을 용인하기 때문이니,
그대가 세운 힐난은 불성(不成)의 오류와 비슷하나 실제로 불성의 오류는 아니다.
승론자는
“소리는 무상하다.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성상론자(聲常論者)는 그 오류에 대해 말한다.
“목 등의 작용 혹은 막대기 등의 작용을 이유로 들어 분별하나 이와 같은 분별에는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수론자가 주장한다.
“듣는 주체인 다섯 유정근(有情根)은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색(色)은 아니다. 근(根)의 속성이기 때문이니, 마치 의근(意根)과 같다.”
눈 등의 다섯 감관은 사대(四大)에 의해 만들어진 색이라 말을 하는 논자(論者)는 그 오류를
“‘근(根)의 속성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말하고, 만약 사대에 의해 만들어진 속성 혹은 즐거움 등의 속성이 자기주장과 다른 주장에서 이와 같이 이유명제를 분별하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그 두 설은 불성의 오류와 비슷해도 실제로 불성의 오류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가 아니며 이 역시 그와 같다.
다시 다른 논사가 총명하나 자기주장에 오만하게 탐착하여, 지혜의 눈이 흐려진 자가 진귀한 자기 논과 천한 우리의 논(論)의 때[穢]의 득과 실의 차별을 관찰하여 알맞게 말하지 정도로 미망하여 세우는 비유의 과실을 드러내며 말한다.
[復有餘師以聰明慢, 貪自宗愛, 眯亂慧目, 不能觀察善說珍寶, 自論鄙穢, 德失差別, 妄顯所立譬喩過言.]
“주술 약의 효력에 꽃과 과실과 벽돌 등의 사물을 첨가하여 다양한 코끼리ㆍ말ㆍ토끼 등의 물질의 형상으로 현현시킬 때, 우리 주장에서는 그것의 자성이 공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동법의 비유가 또한 빠져 주장의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마치 환상의 코끼리나 말 등의 모습에, 실제의 코끼리 등의 속성이 있지 않은 것에 공하다는 명칭을 붙이는 것처럼 눈 등도 또한 그러하다. 다른 것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공을 세운다면 다시 주장에 오류가 생기니, 다시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힐난은 옳지 않다.
주술이나 약의 효력에 꽃ㆍ열매ㆍ흙벽돌 등의 사물을 첨가한 뭇 연에서 발생한 코끼리ㆍ말 등의 현상에는 코끼리ㆍ말 등의 속성이 공함을 비유로써 들기에 세우는 주장은 성립한다.
만약 그대가 다시 환술로 만든 코끼리ㆍ말 등의 사물에 다른 실제의 코끼리ㆍ말 등의 속성은 없다는 말을 하면 그 속성은 공하기 때문에 속성도 공하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어찌 그 형상[相狀]이 현현(顯現)하지 않는데,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의 자성이 있겠는가?
그대가 용납하는 꽃ㆍ열매 등과 같다는 말을 하면 그렇게 환술이 만들어낸 코끼리와 말 등의 사물에 실체로서 코끼리나 말의 속성은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않다.
일체 환술이 만들어낸 코끼리ㆍ말 등의 사물의 자성이 모두 공함을 안다. 이 까닭으로 실체로서 있다.
세운 비유처럼 세운 주장도 성립하고 또한 이미 설립한 것을 세우는 과실도 없다. 자성이 공함에 의래 눈 등의 유위의 공함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다시 공혜(空慧)가 다른 자가 있어 다른 비유로서 오류를 드러내 말한다.
“모든 허깨비 장부는 실제의 장부가 아니기에 공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그 허깨비는 자성이 공하지 않다. 허망한 현현하는 허깨비 장부의 상체(相體)가 있기 때문이니, 이 도리로 인하여 앞서 세운 구절과 같은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도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힐난해야 한다.
“이 허망하게 현현하는 허깨비의 상체(相體)는 연에서 발생하는가?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한다.
“이것은 연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시 허망하다는 말을 하는가?
현현하는 대로 이와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 눈 등도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가?
마치 현현하는 대로 이와 같이 있지 않아 동법(同法)의 비유가 성립하기 때문에 속설이 공하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그대는 믿어야 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믿어서는 안 된다.”
허깨비 사물이 실제의 사물이 아니듯이, 실제의 장부를 상대하는 것을 깊이 관찰하면 이것이 허망하기에 공하다는 말을 한다.
그대들은 앞에서 말한 눈 등의 유위를 떠나 달리 눈 등이 있음을 깊이 관찰하여 그것을 상대하여 이렇게 눈 등의 속성이 공함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달리 눈 등이 있지 않아도 그러나 이와 같은 속성은 공하여 연으로부터 발생하여 주장의 목적과 그 내용이 성립한다. 다만 이 비유만으로도 능히 비유를 증명하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지금 법과 비유를 구별하여 분별하므로 다시 분별상사과류(分別相似過類)를 이룬다.
적론자(敵論者) 자신의 지혜가 경미함을 드러내려 승론자(勝論者)가
“소리는 무상하니 작용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 등처럼”이라고 말할 때,
힐난하여
“병 따위나 진흙덩어리로 만든 수레 등을 태우고 막대기를 격파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무상한 것이겠지만 소리는 그렇지 않아 무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 역시 법과 비유를 구별하여 분별하기 때문에, 또한 분별상사(分別相似)의 오류를 이룬다.
그러므로 눈 등의 속성이 공함을 믿어야 한다. 속성이 공한 것은 연하여 발생하는 원인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형상이 현현하면 곧 자성이 있듯이, 앞에서 이미 논파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말은 자기주장의 오류를 회피할 수 없다.
[수론]
수론(數論)논사가 다음과 같은 힐난을 한다.
“우리들은 ‘사대(四大) 등이 전변(轉變) 화합하여 현현하는 속성이 된다’는 주장을 세우고,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들기에 불성(不成)의 오류가 생긴다.
일체에는 다 일체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고, 모든 근은 모든 곳에 편재하기 때문이니, 저 허깨비 장부 속에도 이 실체가 있다. 이 속성이 공함을 주장하면 동법(同法)의 비유가 없다.”
여기서 또한 ‘색을 깨달음’에 의하여 이른바 모든 색의 깨달음이 연에서 현현하는 것이 아님을 관한다. 저 다른 연을 따라 변이(變異)하기 때문이다.
진흙덩어리ㆍ수레바퀴ㆍ도공ㆍ마음의 욕락 등의 차별된 뭇 연에 따라 크고 작은 물항아리가 있는 것처럼,
이와 같이 눈 등의 뭇 연의 차별은 색을 앎에 따라 다양하게 변이하고, 눈의 시력[明昧]에 따라 깨달음의 예리함과 둔함이 있기 때문이며, 푸른 색 등에 따라 경계의 차별이 있고 깨달음은 푸른 색 등과 비슷하나 다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 현현된 사물이 현재 보이나 저 연의 차별에 따라 전변하지는 않는다. 마치 빛ㆍ등불ㆍ약ㆍ구슬ㆍ해 등이나 현현하는 다양한 팔찌 등의 사물처럼, 색에 관한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 색에 관한 깨달음을 관하는 것처럼, 눈 등도 또한 그렇다. 이 뜻은 실제 세간 모두가 요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한 이유에는 불성의 오류가 없다.
또한 그대의 ‘일체에는 다 일체의 실체가 있다’는 말은 현현하는 사물에 의탁한 것인가? 은폐하는 일에 의탁한 것인가?
만약 현현하는 일에 의탁하여 일체의 실제가 있다는 집착을 한다면 병이 있는 곳에 병이 현현하는 일이 있듯이, 물동이 등이 있는 곳에도 마땅히 편재해야 한다. 이 병이 현현하는 일에는 편재하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 병이 곧 헤아릴 수 없는 백천 유선나(踰膳那) 동안에 편만해야 한다. 병 등이 있는 곳에도 또한 함께 있어야 한다.
물항아리의 현사는 병의 현사가 아니다. 은은히 비취지기[隱映] 때문에 물항아리 등의 현사 또한 비춰지는 것이다. 형태와 양이 크기 때문이다. 형태와 양이 크다면 마땅히 큰 형태와 양으로 비춰져야 한다.
병 등이 현현하는 일에 물항아리 등이 현사가 비춰지기 때문에, 일체 장소와 시간은 성립할 수 없다. 이 까닭으로 그대의 주장이 그 현사에 의탁하여 일체에 다 실체가 있다는 주장을 하면 도리가 아니다.
만약 은은히 비춰지는 작용[隱用]에 의탁하여 일체에 실체가 있다는 집착을 한다면 이러한 집착은 자세히 관찰해야 바야흐로 실체와 비실체를 알 수 있으나 문장이 번쇄하면 아마 오류를 자세히 관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의 주장은 허깨비 장부가 드러나는 곳에서는 실제의 장부의 현현이 공하다는 것을 용인하므로, 내가 세운 비유에는 불성(不成)의 오류가 없다. 이 까닭으로 속성이 공하다는 주장의 뜻은 성립한다.
그대 수론사(數論師)는 오류[非處]를 남에게 돌린다.
또한 모든 근은 모든 곳에 편재하지 않는다. 원인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마치 근(根)이 의지하는 곳과 같다.
이와 같이 능히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ㆍ깨달음은 발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여러 증인(證因)도 자세히 말해야 한다. 모든 근이 모든 곳에 편재함을 논파하기 때문이다.
허깨비 장부 속에는 모든 근의 실체가 없어, 세우려는 공도 없고 동법의 비유도 없다.
이 까닭으로 그대는 허망분별을 이룬다. 도깨비에게 흘려 이와 같은 계탁을 한 것이다.
[상응론]
상응론사(相應論師)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그대는 ‘진성에서 유위는 공하다’는 주장을 하고,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만약 이 주장이 유위법은 뭇 연에서 발생하며, 자연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에 무성(無性)에서 발생하는 그것을 주장하여 공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곧 상응론사의 주장이 정리(正理)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로 인하여 공하여 그 실체는 없다. 이것에 의하기 때문에 공하여 이 실체는 있다.”
이처럼 공성(空性)은 곧 천인사(天人師)가 여실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의 뜻은, 변계소집에는 의타기성의 자성이 본래 없다. 그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세우는 내응에 세운 내용의 속성이 있지 않은 것처럼, 세운 내용에 세우는 내용의 속성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타기성이 있는 곳에는 변계소집성이 본래 없다.
‘그것으로 인하여 공하다’면 곧 허망한 계탁으로서 그 자성은 없다.
‘이것에 인하여 공하다’면 곧 연하여 발생하는 일로서 이 자성은 존재한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단멸이 된다.
무슨 사물에 대해 무엇이 공하다는 것인가?
이 연하여 발생하는 일은 곧 의타기성이라고 한다. 이것에 의하여 색(色)ㆍ수(受)ㆍ상(想) 등의 자성을 차별하여 속성의 전변을 가립하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가법(假法)도 역시 없다.
다시 무견(無見)을 이루어 같이 말해서도 안 되고 함께 머물러서도 안 된다. 스스로 악취(惡趣)에 떨어지고 또한 다른 것도 떨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이 변계소집성의 공하고, 의타기자성이 존재한다면 정리(正理)에 계합하게 된다.
만약 이 뜻이 의타기성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는 주장을 하면 그대는 곧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과실의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고 다시 세존의 성스런 가르침을 비방하는 과실을 이루게 된다.”
여기 다른 승(乘) 및 여러 외도(外道)라도 인색함과 질투가 없는 사람에게 잘 말하기 위하여 자세히 쟁론을 일으키는데, 어찌 하물며 똑같이 일승(一乘)으로 나아가는 논사(論師)일 때랴.
논의할 때 적어도 이 일을 함께 결택하여 널리 진실의 감로에 들어가 이미 모두 분별하였기에 거듭 변론하지 않겠다.
상세한 문장을 두려하는 자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택(決擇) ① 산스크리트어 nirvedha 결단하고 가려서 사유한다는 뜻.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모든 의심을 끊고 사제(四諦)를 사유하는 성자의 경지를 말함. ② 논쟁에서 어느 것이 바른 말인가를 확정함. ③ 가장 뛰어난 것을 선택함. |
유위법은 뭇 연에서 발생하며 자연히 있는 것은 아니기에 무성에서 발생하는 그것을 공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 뜻이 눈 등의 유위는 의타기성의 원인에서 발생하지 않고 소멸이 항상 없는 눈 등의 자성은 궁극적으로 없기에 공이라 말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 된다. 같은 부류인 승론학파나 승론학파의 주장에서도 모두 다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눈 등의 작용이 없어 공하고, 자성은 공하기 때문에 마땅히 발생이 없다고 말해야 한다.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공하다. 마땅히 ‘무(無)의 속성에서 발생하는 그것이 공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생기할 때 승의제에서 자성이 발생한다면 어째서 발생에 자성이 없는 것인가?
실제 발생이 없다면 이 실제가 없기 때문에 마땅히 유식(唯識)이 실제의 속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자기주장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의타기성은 자연히 발생하여 속성이 공하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이라는 말을 한다면 이미 세운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이미 의타기성은 뭇 연에서 발생함을 허락하여 실제로는 공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공이라 이름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미망된 상응론사의 뜻이 성립하겠는가?
또 마치 “그것들로 인하여 공하니, 그것은 실제로 없다. 이것에 의탁하기 때문에 공하며 이것은 실제로 있다고 하는 등과 같다.
만약 인연력에서 발생한 눈 등이 일체 세간에서 모두 실체로서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생각[覺慧]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자성이 현현하는 것 같으나, 승의제의 깨달음으로써 살펴 구하면, 마치 허깨비 장부와 같이 모두 실체의 속성은 없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인하며 공하며 저것은 실체로서 없다’는 말은 치우친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버리기 위해 그것이 없다는 말을 하듯이, 또한 단멸의 견해에 떨어지는 오류를 버리기 위해 이것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른바 인연의 힘에서 발생하는 눈 등은 세속제에 섭수되며 자성이 있다.
허공의 꽃처럼 모든 사물은 전혀 있지 않으며, 다만 진성에서 이것은 공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이것에 의탁하기 때문에 공하고 이것은 실제로 있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공성(空性)은 곧 천인사(天人師)가 여실(如實)하게 말한 것이다.
만약 이 주장에 대해 의타기자성이 있다는 말을 하면 잘 말한 것이다.
이러한 자성은 우리들도 용인하기 때문이고, 세간의 언설에 포함되고 복덕(福德)과 지혜(智慧)의 두 자량이 되기 때문이다.
세속에서 가립하여 의지하는 것이기에 가법(假法) 역시 있다.
그렇지만 다시 ‘이것이 없다면 가법도 없어 다시 무견(無見)을 이루니, 말에 상응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류는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또 만약 ‘의타기자성은 세속이기에 있다’는 말을 주장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이 속성은 승의제에 있다’는 주장을 세우면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다.
속성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집착을 부정했듯이, 무성(無性)이 또한 반드시 있다는 집착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의타기자성은 증익과 손멸을 한다’는 비방을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우리가 주장한 허깨비 등에 말과 무관한 실체로서의 속성이 있다는 주장을 한다면 동법의 비유가 없기에 주장의 내용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면 ‘말과 무관한 실체로서의 속성이란 이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류는 있지 않다. 만약 그렇다면 외도들이 언어의 실상을 떠났다는 집착을 할 때, 자아 등을 무엇으로써 부정하겠는가?
그들도 또한 ‘실성이 있다. 자아 등에는 지혜와 말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만약 뭇 연의 힘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의타기자성이 승의제에서 자성이 있다면 허깨비 사대부는 실체로서 사대부의 자성이 있어야 한다. 타성(他性)이 있어도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소에 당나귀의 속성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작용과 비작용의 속성, 실체의 유무(有無), 속성의 유무 둘 모두에 포함된다면 이와 같이 세우는 주장에는 동법(同法)의 비유는 없고 또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두 오류에 물들었기 때문에 이치가 아닌 것이다.
또한 연하며 발생하는 일체 유위법의 속성이 승의제에서 있음을 용인한다면 ‘작용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는 그 속성의 공함을 증명하고 그 속성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세우는 주장이 비량(比量)에 위배되는 오류가 생긴다.
일체 연에서 발생하는 것은 모두 다 알게 된다. 세속의 존재의 속성이 승의제에 반드시 있다는 집착을 하면 이 이치로써 저 주장을 부정해야 한다.
또 그것이 논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승의제에서 두 가지로 분별하면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주장의 내용에는 주장의 목적의 속성이 있지 않듯이, 주장의 목적에는 주장의 내용의 속성이 있지 않다’는 말처럼,
적론자(敵論者)는 여기에 대해 의심이 없기에,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오류라며 부정한다.
또한 ‘의타기자성이 있는 곳에 변계소집자성은 본디 없다’는 말처럼,
이 또한 다른 논에서 이에 대해 의심하지 않기에, 이미 세운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라며 부정한다.
만약 ‘주장의 내응과 그 목적으로서의 변계소집자성에 집착하여 힘이 온갖 번뇌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부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이 또한 옳지 않다.
금수들은 주장의 내용과 그 목적이 상응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경계에 대해 이치대로 이해하지 않고 집착하여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양한 의요(意樂)가 있고, 또한 여러 가지의 미묘한 성인의 말이 있어, 변계소집자성이 공하다는 가르침은 일체에 전혀 편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만이 이것을 공이라 주장한다. 다만 부수적인 논의를 그치고 마땅히 바른 논의를 변론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앞에서 도리대로 눈의 자성이 공함이 이미 다 성립하였다.
[또 다른 논]
다시 다른 논사가 있어 다음과 같이 힐난하며 이 자성이 있음을 부정하여 말한다.
“만약 이것이 실체로서 있다면 세우는 주장을 상실하여 이유는 부정인을 이룬다.
만약 실제로서 있지 않다면 곧 자성이 없는 것이고 논파의 주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이 역시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