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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2권
2.1.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음
[물러나지 않음]
[문] 무슨 이치 때문에, 물러나지 않음[不退轉]이라 하는가?
[답] 모든 보살이 증득하는 초지는 마침내 틀림없는 원인[因]이기 때문이니,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은 때까지는 언제나 깊은 마음으로써 사실대로 닦고 행하여 차례로 보리심을 더 자라게 하며, 그 다스리는 법이 방해할 수 없기 때문에 물러나지 아니함이라 한다.
[문] 또 무슨 이치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하는가?
[답] 물러나지 않음을 이루게 되는 원인은 깊은 마음 등의 여덟 가지의 법이기 때문이며,
또 물러나지 않는 마음과 서로 어긋나는 법인 몸에 대한 소견과 탐냄 등의 온갖 번뇌는 견도(見道)의 힘으로써 모두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또,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가 끝없는 세상으로부터 무지(無智)를 따라 나서 멀리 여읠 수 없었고 나[我]와 즐거움 등을 지니는 원인으로 방편반야를 떠나서 모든 세간의 괴로움에 핍박을 받았으며, 일체 중생 이롭게 함을 버리고 열반을 좇았다.
그러므로 보살은 사랑함과 가엾이 여김의 깊은 마음을 얻어서 나와 즐거움 등에 집착하는 원인을 멀리 여의고 방편반야를 지니며,
비록 세간의 괴로움이 핍박하더라도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버리지 않고 몸에 대한 소견 등의 번뇌의 근본을 끊나니, 그때에 물러나지 않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무진의보살은 말씀하기를
‘그 마음은 온갖 번뇌를 여의는 데서 생긴다’고 하였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문] 만약 몸에 대한 소견 등을 여읨으로써 물러나지 아니함의 원인이라 하면, 보살과 수다원(須陀洹) 은 다 같이 몸에 대한 소견 등의 번뇌를 여의었거늘,
무엇 때문에 보살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수다원 등은 물러나게 되는가?
[답] 마음과 행이 차별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과 성문은 마음을 낸 이래로 마음과 행 등의 형상이 모두 차별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차별되는가?
성문승의 사람은 남을 이롭게 하는 인연을 닦고 익힐 수 없으므로 중생을 이롭게 함을 버리고 스스로 열반을 구하며,
삼계 중에서 탐냄 따위의 번뇌의 불에 타게 되고 무상의 핍박을 받아서 삼계를 싫증내며 여의려 함이 마치 몸과 옷이 불타는 것 같이 여기며,
무상 따위의 다섯 가지 쌓임과 함이 있음의 행을 자세히 살피고 삼계의 번뇌를 여의는 데에 이르며,
그런 뒤에는 탐냄 따위의 번뇌를 없애되 점차로 엷어져서 삼계를 넘어 벗어난다.
보살승의 사람은 깊은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언제나 일체 세간을 이롭게 하기 좋아하고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되는 행을 지으며,
비록 세간의 괴로움이 핍박한다 하더라도 방편지혜를 성취하며,
비록 사실대로 성문의 도를 수행하더라도 성문의 도를 증득하지 않나니, 먼저 장애가 되는 성문의 지위를 취하는 법을 끊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성문의 지위를 취하는 법인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크게 가엾이 여김 등의 행을 더욱 자라게 할 수 없는 그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이라면, 깊은 마음 따위를 얻어서 보리심의 권속이 되는 법을 닦고 행하여 보리의 지위가 되는 인연을 증득하게 된다.
그때의 보살은 온갖 법을 보았기 때문에 보리심의 힘을 더욱 자라게 할 수 있고 방편으로 일체 중생의 이익되는 일을 추구한다.
그때에 곧 사실대로의 법계(法界)를 보며, 법계를 보았기 때문에 즉시 견도(見道)에서 다스리는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의면서 바로 마지막의 큰 보리심을 얻는다.
『십지경(十地經)』에서의 말씀에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마음을 내나니, 이 마음은 크게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써 우두머리를 삼느니라”고 하는, 이와 같은 등과 같다.
그 보살은 이와 같이 견도를 증득한 뒤에, 방편으로 일체 중생 이롭게 함을 추구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깊은 마음 따위의 법을 잘 배움으로 인하여 나[我]와 즐거움 등을 여의어 번뇌의 불에 타지 않으니, 원인이 서로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항상 깊은 마음으로써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닦고 행하기 때문에, 곧 견도하는 때에 삼계 중의 온갖 번뇌를 끊지만,
성문들은 먼저 사랑함과 가엾이 여김의 방편을 닦고 모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 없으며, 점차로 번뇌를 끊은 뒤에는 아라한이 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대해혜보살경(大海慧菩薩經)』에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먼저 이미 선한 뿌리와 서로 응하는 번뇌를 닦고 모았나니, 이른바 크게 가엾이 여김의 바라밀 등이니라. 이 모든 선법을 번뇌라고 하며 그 밖의 것은 번뇌가 아니니라.
그 번뇌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세간에서 머무르니, 그 구하는 것이 아직 구경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비록 다 같이 그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여의었다 하더라도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지만 성문(聲聞)은 물러나게 된다.
『아뇩대지성자용왕경(阿耨大池聖者龍王經)』에서 부처님께서 용왕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살마하살이 증득하게 되는 지위는 바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이면서도 세간을 여의지 않느니라.
용왕아, 방편반야와 거룩한 지혜의 삼매를 지니면 이를 보살마하살의 세간을 벗어나는 지위라고 하느니라.
용왕아, 마치 성문이 성문의 지위에 들면 이름을 수다원(須陀洹)이라고 하고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용왕아,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보살의 지위에 들면 물러나지 않는 보살이라 하고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용왕아, 성문승의 사람은 번뇌가 끊어지지 않고 성문의 지위를 취득하나니, 그는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법에 자재하지 못하면서 처음 과위를 얻었기 때문이니라.
용왕아, 보살마하살은 성문의 지위를 넘어서고 보살의 지위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고 도량의 큰 보리 과위를 취득하느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성문은 한량이 있고 보살은 한량이 없느니라.
용왕아, 마치 어떤 두 사람이 다 함께 높은 산에서 떨어졌지만 그 한 사람은 용감하고 씩씩하면서 힘이 많으며 먼저 이미 갖가지 재주를 익히고 배웠으므로 방편지를 써서 도로 산꼭대기로 올라왔지만,
그 둘째 사람은 몸의 힘이 미약하고 먼저 갖가지 재주를 익히고 배우지 않았으며 방편지가 없으므로 그 산 아래로 떨어져서는 도로 올라갈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용왕아, 그와 같아서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이 공(空)하고 형상 없고 소원 없고 함이 없음을 자세히 살피며, 반야의 힘에 의하여 중생을 자세히 살피면서 일체 종지의 산꼭대기에서 머무느니라.”
또, 어떤 경전에서 말씀하였다.
“‘대덕 수보리(須菩提)여, 보살마하살은 몸에 대한 소견 등의 한량없는 번뇌를 끊고서 저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고 이에 모든 부처님의 큰 보리 과위를 취득합니다.
온갖 부처님 법을 자세히 살피고 크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기며, 보살의 행을 닦고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끊나니,
그러므로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고 이에 모든 부처님의 큰 보리의 결과를 취득합니다.’
수보리가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문수사리여, 이 일은 있기 드문 일입니다. 이 큰 방편을 지닌 보살승의 사람은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끊고서도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대덕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큰 방편을 지녔고 지혜의 성품을 거두어들이고 있어서, 그 때문에 보살이 비록 사실대로 그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알았다 하더라도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덕 수보리여, 마치 큰 역사(力士)가 얇고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서 사라수(娑羅樹)를 끊었으나 그 사라수는 그대로 서서 넘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대덕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큰 방편반야의 지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그 때문에 보살은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끊었으면서도 성문의 작은 과위를 취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덕 수보리여, 그 사라수가 다시 다른 때에 비가 와서 적셔지면 곧 다시 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나서 완전히 본래대로 되어 중생들이 수용하게 되는 것처럼,
대덕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크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비로 적시는 것이 되면, 비록 몸에 대한 소견 등의 모든 번뇌를 끊었다 하더라도 도리어 삼계에 들어가 방편으로 나타내 보이면서 세간의 집에 태어나며 일체 중생의 수용을 따릅니다.
대덕 수보리여, 다시 뒷날에 그 사라수는 큰 바람이 불자 움직여지면서 곧 땅에 넘어지면 다시는 소생하지 않는 것처럼,
대덕 수보리여,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큰 지혜의 매서운 바람에 불려 도량의 땅에 있으면 영원히 스러져서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마음을 내서부터 온갖 마음과 행이 성문ㆍ벽지불 등과는 같지 않으며, 모든 보살마하살의 마음과 행 등의 법은 본래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모두가 같다고 하면, 으레 성문은 보살이 되어야 하고 보살은 성문이 되어야 하리라.
[문] 성문과 같은 분은 먼저 견도(見道)의 번뇌를 끊고 그런 뒤에 점차로 수도(修道)의 번뇌를 끊거늘,
보살은 무슨 까닭에 성문과 같지 않게 먼저 견도의 번뇌를 끊으면 그런 뒤에 수도의 번뇌가 끊어지는가?
견도(見道) 산스크리트어 darśana-mārga 사제(四諦)를 명료하게 주시하여 견혹(見惑)을 끊는 단계. 이 이상의 단계에 이른 사람을 성자라고 함. 초기 불교에서는 예류향(預流向), 유식설에서는 통달위(通達位), 보살의 수행 단계에서는 십지(十地) 가운데 초지(初地)에 해당함. 수도(修道) 도를 닦음.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애고 청정한 마음을 지키며 수행 정진하는 것. |
또 묻는다.
보살 같은 이는 한량없는 세상 동안 머무르고 한량없는 선한 뿌리를 닦아 모으거늘,
수다원 등은 무슨 까닭에 한량없는 세상 동안 머무르지도 않을뿐더러 한량(限量)없는 선한 뿌리도 닦아 모으지 않는가?
[답] 수다원 등은 언제나 번뇌를 끊기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며,
번뇌가 없도록 다스리는 지혜[對治明]를 얻기 때문이며,
차츰차츰 모든 세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을 내거늘 언제 온갖 고통을 여의고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涅槃]을 얻게 되겠는가?
그 때문에 수도 중에서 나머지 번뇌가 자연히 점차로 다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성문은 한량없는 세상 동안 머무르지 않고 또한 한량없는 선한 뿌리를 닦아 모으지도 않는다.
보살승의 사람은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되는 인연을 짓고 중생들을 위하여 이익되는 일을 지으며, 이와 같은 등의 마지막 마음을 얻는다.
또, 진여(眞如)와 단 이슬[甘露]과 법계(法界)를 보고 온갖 중생들의 몸을 자세히 살펴서 실로 자신이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보살은 견도ㆍ수도 중의 온갖 번뇌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장애하기 때문에, 곧 견도 중에서 한꺼번에 모두 끊는다.
또, 일체 중생들을 이롭게 함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훌륭한 열반의 즐거움을 즐긴다.
그러므로 보살은 한량없는 세상 동안 세간에 머무르면서 온갖 행인 살바야의 지혜를 닦기 때문에 밝게 볼 수 있으며,
한량없는 보리의 선한 뿌리를 닦아 모아서 큰 보리의 이익을 얻나니, 그러므로 한량없는 선한 뿌리를 닦아 모은다.
[문] 보살이 만약 견도ㆍ수도의 번뇌가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을 장애한다는 그런 이치 때문에 견도 중에서 곧 끊어 없앤다고 하면,
어떠한 이치 때문에 곧 견도 중에서 세간의 지혜로써 수도의 번뇌를 조복시키지 않는가?
[답]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읨을 물러나지 않는 원인이라 하나니 만약 샘이 없는 도를 여의고서 법을 보며 샘이 없는 도를 여의고서 온갖 번뇌를 끊는다면,
이와 같은 힐난을 할 수 있겠지만 무엇 때문에 세간의 도가 수도의 번뇌를 조복시키지 않는가?
만약 세간의 도가 세간의 도와 같다면, 이와 같은 힘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물러나지 않음이라 말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 보살이 곧 견도하는 때에 온갖 다스려야 할 법을 영원히 끊고 크게 가엾이 여김을 얻는 등의 마지막 보리심을 내면, 물러나지 않는 보살이라고 한다.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사실대로 법을 보고 방편을 성취하며,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를 취득하지 않고 사실대로 온갖 세간의 갖가지 허공과 근심을 알고 보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세간의 행을 행하고 세간을 버리지 않으며, 세간의 허물과 근심에 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문수사리가 천자에게 말하였다.
“천자들아, 보살마하살은 함이 있음에 머무르지 않고 함이 없음에도 머무르지 않으니, 그 때문에 보살은 복밭이라 하느니라.
왜 그러한가?
보살은 함이 있음의 법을 여의고 함이 없음의 법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함이 있음에 허물이 있음을 알고 함이 없음에 허물이 없음도 아느니라.
온갖 허물을 알기 때문에 함이 있음에 머무르지 않고 함이 없음의 법을 알므로 함이 없음에도 머무르지 않느니라.
천자들아, 마치 큰 역사(力士)가 허공을 우러러 보면서 활을 쏘면, 그 화살은 허공 가운데 의지하거나 머무를 데가 없는데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천자들아, 이 일이야말로 어려운 일이니, 다시 어려움이 있겠는가?’
천자가 문수사리에게 아뢰었다.
‘그와 같은 일은 있기 드문 일로서 가장 어려우며, 다시 더 어려움이 없겠습니다.’
문수사리는 천자에게 말하였다.
‘보살마하살이 하는 일은 어려운 일로서 다시 이보다 더하나니,
보살마하살은 함이 있음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함이 없음을 증득하며,
함이 있음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함이 있음에 떨어지는 이를 교화할 수 있느니라.’”
[문] ‘마침내 결정코’라 함은 여래께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마침내 결정코 성문승의 사람이 세 가지 번뇌[三結]를 멀리 여의면, 수다원이 되고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으며 인간과 천상으로 일곱 번 오가면서 영원히 모든 고통을 여의고서 마침내 아라한의 도를 증득하느니라”고 하셨으니,
보살도 그러하여 세 가지 번뇌 등을 끊거늘 어떤 이치 때문에 성문과는 같지 않게 한량없는 세상에서 머무르게 되는가?
[답] 그 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마침내 결정코’라고 함은 성문승의 수다라에 의하였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행에 의하며, 일체 종지를 구하고 깨끗하게 세간의 길을 벗어나고 살바야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에 의함이니, 대승의 수다라 중에서 말씀하셨다.
이 이치 때문에 보살은 한량없는 세상을 따르면서[攝取] 머무르게 된다.
[문] 그 이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초지의 보살마하살이 온갖 다스림의 법을 여의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가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치이기 때문인가?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에서 말씀하시기를
“처음 마음을 내면 성문의 지위를 넘어설 수 있고,
둘째 행(行)의 마음을 내면 벽지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있고,
셋째 물러나지 않음[不退]의 마음을 내면 부정지(不定地)를 넘어서고,
넷째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마음을 내면 정지(定地)에 편안히 머무르느니라”고 하셨다.
[답] 그 경전 중에는 승진지(勝進地)를 증득함에 의하고 원중(遠中)의 멀리 여의는 다스림의 법에 의하고 상상지(上上地)에 의하여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말하였나니, 그러므로 이 설명은 그 경전과 어긋난 것이 아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초선(初禪)에서 다스리는 법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가?
소승의 사람이 미래의 선정 중에 부정인(不定因)과 욕심세계의 수도 번뇌를 끊고,
나아가 제4선(禪) 중에서도 또한 수도 번뇌를 끊는다고 말하나니,
원중의 멀리 뛰어나는 다스림의 법으로써도 서로가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다스림의 원인[對治因]과 같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초지 중에서 보리심과 서로가 어긋나는 물러남의 원인[退因]인 몸에 대한 소견 등의 온갖 번뇌를 끊고 깊은 마음 등을 성취하여 닦고 행할 수 있음으로써 마침내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되는 원인을 여의기 때문이다.
이에 8지(地)에 이르러서야 그 안에서 승진(勝進)ㆍ원중의 멀리 뛰어나는 다스림의 법을 얻으면,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한다.
정지에 편안히 머무름은 다스림의 법이 같기 때문이며, 정인(定因)이기 때문에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하는 이치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또 부정지를 넘어선다 함은 부처님의 보리와 큰 열반의 마음을 구하면서도 아주 끊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으키는 것의 모든 행과 공용(功用)이 고달픔을 부정인이라 한다.
그러므로 8지의 이상에서 비로소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곳에서 고통을 넘어선다 하는 따위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치 소승 중에서 싫어하여 욕심세계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과 같나니,
비록 싫어하여 욕심세계의 고통을 넘어선다 하더라도 초선의 자리에서 아직 의식 등의 괴로운 원인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스려야 할 법(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제2선(禪) 중에서 괴로움을 넘어서느니라”고 하셨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근심의 뿌리[憂根]는 어디서 없어지나이까?”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초선 중에서 없어지느니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괴로움의 뿌리는 어디서 없어지나이까?”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2선 중에서 없어지느니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기쁨의 뿌리[喜根]는 어디서 없어지나이까?”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3선 중에서 없어지느니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즐거움의 뿌리[樂根]는 어디서 없어지나이까?”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4선 중에서 없어지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온갖 형상[色相] 등을 넘어선다.
싫어하면서 초선의 때에, 곧 온갖 빛깔 등의 모든 형상을 넘어서고 제4선 중에서 싫어하여 원인을 넘어서기 때문에 제4선에서 넘어선다고 말한다.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초지에서 이미 부정지를 넘어서지만 2지에서 7지에 이르기까지에는 부처님의 보리와 큰 열반을 구하는 마음이 아직 끊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으키는 것의 원인과 행에 고달픈 공용을 부정지라고 한다.
그러므로 아직 그 만족하지 못한 마음의 부정인 때문에 8지 중에서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서로가 어긋나지 않는다 함은 또 마지막 보리심을 얻은 인연이 두루 갖추어져서 화합하기 때문이다.
[보리심]
처음 마음을 내면 성문의 지위를 넘어선다 함은 『법인경(法印經)』에서 여래의 말씀과 같다.
“미륵이여, 보리심을 내는 데는 일곱 가지의 원인이 있느니라.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 모든 부처님의 교화로 보리심을 냄이며,
둘째 법이 없어지려 함을 보고서 보리심을 냄이며,
셋째 모든 중생들에게 크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보리심을 냄이며,
넷째 보살의 교화로 보리심을 냄이며,
다섯째 보시 때문에 보리심을 냄이며,
여섯째 다른 이에게 배워서 보리심을 냄이며,
일곱째 여래의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몸매와 여든 가지 잘 생긴 모습 말함을 듣고서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라.
미륵이여, 모든 부처님의 교화로 보리심을 내는 것과
법이 없어지려 함을 보고 보리심을 내는 것과
모든 중생에게 크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보리심을 내는,
이 세 가지 내는 마음은 바른 법을 보호할 수 있고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느니라.
그 밖의 네 가지 내는 마음은 참된 보살이 아니므로 부처님들의 바른 법을 보호하여 지니거나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없느니라.”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어떤 보살이 깊은 마음을 성취하여 마침내 물러나지 않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큰 용맹스런 힘을 얻으며,
모든 세간의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음의 화살에 맞는 것을 위하고 중생을 자세히 살펴서 크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김을 일으키며,
모든 선한 뿌리를 껴잡아 모으고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에 처음 마음을 내는 때에 성문의 지위를 넘어선다고 한다.
둘째의 마음을 내면 벽지불의 지위를 넘어선다 함은 벽지불승의 사람은 성문승의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마침내 다른 이의 몸을 위하지 않고 끝내 자신을 위하여 적멸과 열반을 구한다.
만약 보살이면 처음에 법성품의 맨 위의 것을 자세히 살피고 생멸 없는 법의 지혜를 자세히 살필 때에 아직 부정도(不定道)를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온갖 나는 마음은 모두 다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둘째의 마음을 내면 벽지불의 지위를 넘어선다고 한다.
셋째의 마음을 내면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함은 초지 중에서 부정인(不定因)을 여의고 정인(定因)을 얻었으므로, 온갖 나는 마음은 부정지를 넘어섰기 때문에
셋째의 마음을 내면 부정지를 넘어선다고 한다.
넷째의 마음을 내면 정지에 편안히 머무른다 함은 2지 이상에서는 온갖 다스려야 할 법을 멀리 여의므로 마지막의 정지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넷째의 마음을 내면 정지에 편안히 머무른다고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음]
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함은, 이른바 보살로서 보리심을 내는 것과 서로 어긋나는 법을 여읠 수 있을 때에 물러나지 않는 보살이라고 하나니,
『보녀경(寶女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보녀야, 보살마하살에게 보리심을 내는 데에 걸리는 구덩이[塹路]로서 서로 어긋나는 법이 서른두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이 서른두 가지인가?
첫째 성문승을 구함이며,
둘째 벽지불승을 구함이며,
셋째 제석ㆍ범왕의 처소를 구함이며,
넷째 날 데를 의지하고 집착하면서 맑은 행[梵行]을 깨끗하게 닦음이며,
다섯째 한결같이 변하지 아니한 덕의 근본을 바로 내 것이라고 함이며,
여섯째 만약 재보를 얻으면 탐내며 아낌이며,
일곱째 한 편에 쏠리는 마음으로써 중생에게 베풂이며,
여덟째 계율을 가볍게 여겨 행하지 않음이며,
아홉째 도의 마음으로 오로지 정진하는 행을 생각하지 않음이며,
열째 성내는 일로써 명성을 삼는 것이니라.
열한째 그 마음이 방일함이며,
열둘째 마구 내달음이며,
열셋째 널리 들으려 하지 않음이며,
열넷째 지었던 것을 살피지 않음이며,
열다섯째 떠받들며 잘난 체 함이며,
열여섯째 몸ㆍ입ㆍ마음의 행을 깨끗이 할 수 없음이며,
열일곱째 바른 법을 보호하지 아니함이며,
열여덟째 스승의 은혜를 등지고 버림이며,
열아홉째 나쁜 짓을 버리지 아니함이며,
스무째 견고하고 요긴한 법을 여의는 것이니라.
스물한째 나쁜 벗들과 사귐이며,
스물둘째 여러 음침한 종류들을 따름이며,
스물셋째 부지런히 도를 돕지 아니함이며,
스물넷째 착하지 않은 근본을 생각함이며,
스물다섯째 내는 도의 뜻에 권도 방편이 없음이며,
스물여섯째 은근히 3보를 찬탄하지 아니함이며,
스물일곱째 모든 보살을 미워함이며,
스물여덟째 아직 듣지 못했던 법을 듣고서 비방함이며,
스물아홉째 일을 깨닫지 아니함이며,
서른째 세속의 법전을 익히며 지님이며,
서른한째 중생들에게 권하며 교화하려 하지 않음이며,
서른둘째 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니라.”
또, 물러나지 않고 옮아가지 않는 까닭은 모든 보살이 끝내 물러나지 않는 법을 받아 지니기 때문이니,
『사가라용왕경(娑伽羅龍王經)』에서의 말씀과 같다.
“용왕아, 보살마하살은 마침내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물러나지도 않고 옮아가지도 않는 보살로서의 숫자에 들 수 있다고 하느니라.
무엇이 여덟 가지 법인가?
이른바 말씀대로 수행하면서,
첫째 자기 허물은 자세히 살피고 남의 허물은 살피지 않음이며,
둘째 제 몸과 목숨 때문에 싫은 것을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음이며,
셋째 혹은 이양을 얻어도 그 마음에 높은 체하지 않으며 또 이양을 잃었을지라도 역시 못난 체하지 않음이며,
넷째 모든 중생들에게 복밭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며 나쁜 마음을 내지 않음이며,
다섯째 지닌 재물을 모두 일체 중생에게 주되 똑같이 함이며,
여섯째 모든 법 중에서 혼자 아는 것을 남에게 모르게 하려 하지 않음이며,
일곱째 남이 얻는 즐거움을 보고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며 자기의 즐거움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내지 않음이며,
여덟째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에 그 마음이 평등한 것이다.
보살은 이 여덟 가지 법을 갖추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옮아가지도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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