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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2권
3. 승보론[2]
3.5. 입론품(立論品)
지금부터 부처님의 법문을 논하여 세간을 이롭게 하려고 한다.
부처님은 큰 자비심을 가지고 일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려는 까닭으로 이 법문을 연설하셨고 아무런 한계도 없으셨다.
어떤 사람은 바라문만을 위하여 해탈경(解脫經)을 설명하였지마는
부처님이 연설하신 경전은 네 가지 중생과 내지 축생까지라도 다 제도하여 해탈시키기 위한 것이므로 또한 한정을 두지 않는다.
[문] 논을 지어 부처님의 말씀을 평론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만일 부처님 스스로가 논설하셨다면 그거야 논설이 될 수 있겠지만, 만일 부처님이 논설하지 아니한 것이면 다른 사람으로는 논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지인(一切智人)의 이치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의 뜻을 얻지 못하고서 망녕되이 말한 바라면 무엇을 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말하는지 모르므로 스스로를 훼상하는 것이니,
마치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두 사람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니,
한 사람은 믿지 않으면서 미워하기 때문에 비방이 되고,
둘째 사람은 비록 믿기는 하나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로 받아 드리지 못했으므로 또한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라 한다”고 함과 같다.
설사 참다운 지혜가 있을지라도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을 논평할 수 없겠거든,
더군다나 알지도 못하는 이로서 논(論)을 지어서까지 부처님의 뜻을 논평하려는가?
왜냐하면 이론경(異論經) 중에서
“부처님은 해석을 위하여 그와 같은 일을 설명하시는데, 여러 비구들은 가지가지로 달리 논하면서 모두가 부처님의 뜻을 얻지 못한다”고 함과 같기 때문이다.
또 장로(長老)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이 여러 비구에게 말하기를
“큰 나무를 베는데 뿌리와 줄기를 버리고 가지와 잎만 차지하는 것처럼 그대들도 또한 그렇다. 여래를 여의고서 나에게 묻는구나”고 함과 같다.
마하가전연도 논의(論議) 중에서 스스로 가지와 잎에 비유했거든, 하물며 그 밖의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의 말씀을 능히 풀이할 것인가?
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물으셨다.
“어떤 것이 배우는 사람이며, 무엇을 수법인(數法人)이라 하느냐” 하고 세 번 물으셨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또 부처님은 일체 모든 법의 근본이므로 오직 부처님만이 해설할 수 있고, 그 밖의 사람은 할 수 없다.
또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면 도를 얻게 되는 중에서 반절의 이익이 되겠나이다” 하였다.
역시 도리가 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인연으로 바른 소견이 나게 되기 때문이니,
첫째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는 것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다만 선지식이라야 구족하게 도를 얻고 자기를 이롭게 하느니라”고 하셨다.
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에 내가 남을 위하여 설명한 것이 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은 나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다툼이 생기리라”고 하셨다.
지금 여러 논사(論師)는 각기 자기 소견에 집착되어서 혹은 과거(過去)와 미래(未來)의 법이 있다 하고, 혹은 없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이 모든 논사들은 여래께서 방편에 따라 알맞게 설법하신 것을 알지 못하므로 말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또 아난이 삼마제(三摩提)에게 모든 느낀 바를 설명하면서 모두가 괴로움이다고 함과 같다.
그때에 부처님은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아난이 방불하게 말한 그 이치를 관찰할지니라”고 하셨다.
또 여러 논사들은 말하기를
“아라한이 응당 공양을 먼저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비구는 그 일을 알지 못하고 바로 부처님에게 가서 물었더니,
부처님은 말씀하기를
“나의 법에서는 먼저 출가(出家)한 사람이 당연히 공양을 먼저 받는다”라고 하셨다.
하찮은 음식에 대한 일에도 잘 알지 못하거든, 더군다나 여래의 뜻으로 연설하신 미묘한 법이겠는가?
이러한 점으로 보아서 논을 짓지 아니해야 한다.
[답]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연이 있기 때문에 남의 뜻을 알게 된다.
게송 중에서 설명함과 같다.
말한 분의 뜻 가는 데를 능히 알며,
말하는 분의 무슨 일을 말하려 함도 안다.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성도(聖道)와 세간도(世間道)이니,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이러한 도에 맞추어 봐서 말한 분의 뜻을 안다.
또 이론경(異論經) 중에서 부처님은 다 허락하셨으며, 또 가전연 등의 큰 논의사들도 부처님 뜻을 얻었기에 부처님은 다 “잘한다”고 칭찬하셨다.
또 우타이(優陀夷) 비구와 담마진나(曇摩塵那) 비구니가 불법에 대한 논을 지은 것도 부처님은 듣고 곧 허락하셨다.
또 불법은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는 이는 논을 짓고, 모르는 이는 그만둔다. 그와 같이하여 그 나머지에 대해서도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것들의 질문을 부처님은 다 통틀어 대답하셨다.
또 당연히 논을 지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경전에 대하여 논을 지으면 뜻을 이해하기 용이하며 불법이 오래 머무르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논 짓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부처님이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지은 논에 따라서 잘 받아 지녀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수다라 중에서 뜻을 취하여 논을 세우고 따로 다른 부질(部帙)을 만들게 된 것이니, 때문에 논을 지어야 한다.
또 부처님은 가지가지로 제도할 만한 중생을 위해서 세간 등의 여러 가지 논의문(論議門)을 연설하셨으니, 마치 사제(莎提) 등이 해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이 미혹하고 어지러웠던 것과 같다.
사제 등 비구는
“나고 죽고 가고 오는 것이 항상 하나의 식(識)이다”라고 설명하므로,
부처님은 이와 같은 갖가지로 설법하셨으나, 만일에 논의가 없었다면 어떻게 해득하겠는가? 이러한 인연 때문에 논을 지어야 한다.
3.6. 논문품(論門品)
논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세계문(世界門)이요,
둘째는 제일의문(第一義門)이다.
세계문으로써 나[我]가 있음을 설명한다.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나를 항상 스스로 단속하라. 선을 지으면 선을 얻고 악을 지으면 악을 얻는다” 함과 같다.
또 경전 중에서 “심식(心識)은 항상한 것이다”고 하였고,
또 말씀에 “오래도록 마음을 닦으면 사후에 천상에 가 난다”고 하셨으며,
또 말씀에 “짓는 이가 업을 일으키고 짓는 이가 스스로 받는다”고 하셨고,
또 말씀하기를 “아무 중생은 아무 곳에서 난다” 하는 등의
이러한 문제는 다 세계문으로 말한다.
제일의문이라 함은 “모두가 비어서 없다”고 말한다.
경전에서 말씀하되
“이 다섯 가지 쌓임(陰) 중에는 나도 내 것도 없으며, 마음은 마치 바람과 아지랑이 같아서 생각생각에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며, 비록 모든 업과 업의 과보에 짓는 이와 받는 이가 있다 하나, 다 얻을 수 없다”라고 함과 같다.
마치 부처님이
“다섯 가지 쌓임이 서로 이어가는 인연 때문에 생사가 있다”고 말씀함과 같다.
또 두 가지의 논문(論門)이 있다.
첫째는 세속문(世俗門)이오,
둘째는 현성문(賢聖門)이다.
세속문이라 함은 세속에서 쓰는 말 그대로 따라 말하는 것이니,
“달(月)이 다했다” 하나 달은 실로 다한 것이 아니다.
마치 마가라(摩伽羅)의 어미가 며느리에게 어미라고 말하였지만 그 실은 어미가 아님과 같다.
경전 중의 말씀에 “혀는 능히 맛을 안다”했지만 혀의 식으로 맛을 아는 것이요, 혀가 능히 알지는 못한 것과 같고,
“창이 사람을 찌르면 사람은 고통을 당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식이 고통을 아는 것이요, 사람이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님과 같으며,
비천한 사람을 부귀(富貴)라고 이름 붙이면 부처님도 또한 남을 따라 부귀라고 부르심과 같다.
또 부처님은 외도를 “바라문”이라 또는 “사문”(沙門)이라 부르시며,
또 찰리(刹利)바라문을 들을 부처님도 또한 세속에 따라 존귀(尊貴)하다고 말씀함과 같다.
또 하나의 그릇이 나라에 따라 이름이 다르면, 부처님도 또한 그 이름에 따름과 같다.
또 부처님은 “나도 최후에는 비야리(毘耶離)를 관람하리라”고 말씀함과 같다.
모든 이러한 등의 세속의 말에 따르는 것을 세속문이라 한다.
현성문이라 함은
경전 중의 말씀에 “인연에서 생긴 알음[識]과 눈 따위의 모든 감관은 마치 큰 바다와 같다”고 하심과 같다.
또 경전의 말씀에 “다만 음(陰)과 계(界)와 입(入)은 뭇 인연이 화합할 뿐이어서 짓는 자도 없고 또한 받는 자도 있지 않다”고 함과 같으며,
또 “모두가 고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경전 중에서 “세간이 즐겁다고 말하면 성인은 괴롭다 말하고, 성인이 괴롭다 말하는 것은 세간에서 즐겁다고 말한다”고 말함과 같다.
또 말한 것과 같이 비고 형상이 없는 것들을 현성문이라 한다.
또 삼시론문(三時論門)이 있다.
만일 이 일 중에서 물질(色)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한다면 이 물질이 전에 있었거나 장차 있게 되거나 현재에 있건 간에 다 물질이라 한다.
알음[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이 알음이 전에 알았거나 장차 알게 되거나 현재에 알거나 간에 다 알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삼시론문이라 한다.
또 약유론문(若有論門)이 있다.
만일 닿임(觸)이 있으면 반드시 여섯 가지 감관(入)을 인(因)으로 하나 온갖 여섯 가지 감고나이 다 닿임의 인에 되지는 않는다.
만일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느낌을 인으로 하나 온갖 느낌이 다 욕망의 인이 되지는 않는다.
혹은 구족한 인임을 말하는데, 닿임이란 인은 느낌을 반연함과 같다.
혹은 구족하지 못한 인임을 말하는데, 느낌의 인이 욕망은 반연하나 수명을 말하지 아니한다.
혹은 다시 달리도 말한다.
경전 중에서 “마음이 기쁘면 몸이 편안하게 된다”고 말씀하였으나 삼선천에는 기쁨이 없어도 역시 몸의 편안함이 있는 것과 같다.
또 편안함이란 쾌락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4선에서는 편안한 것은 있으나 쾌락의 느낌은 없나니, 이것을 달리하는 말이라 한다.
또 통하고 막히는 두 가지 논문[通塞二種論門]이 있다.
경전 중의 말씀에 “만일 사람이 집을 떠나 탑에 공양을 드리다가 중간에 목숨을 마치면 다 천상에 가 난다” 하였으니
그것은 통합의 것이다.
또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거역하는 죄를 지은 자는 천상에 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막힘의 것이다.
또 경전에 말씀하되, “모든 욕심을 느끼는 자는 악업을 짓지 아니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통합의 것이다.
“수다원(須陀洹)인 사람은 비록 모든 욕심을 받으나 역시 악도에 떨어지는 업을 일으키지는 아니한다”고 함은
그것을 막힘의 것이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눈은 물질을 반연하므로 인하여 눈 알음을 낸다”고 말하였다.
그것을 통합의 것이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응당 온갖 물질을 다 반연하여 눈알음을 내야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 또
“귀는 소리를 반연하므로 인하여 귀알음을 내나, 눈알음을 내지는 못한다”고 말씀하였으니,
그것을 막힘의 것이라 한다. 또 통하고 막힘의 말에는 다 도리가 있어서 법상(法相)을 무너뜨리지 아니한다.
또 두 가지 논문(論文)이 있다.
첫째는 결정(決定)이요,
둘째는 불결정(不決定)이다.
결정이라 함은
“부처님은 일체지인(一切智人)이요, 부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미묘한 법이며, 부처님의 제자들은 바른 수행을 하는 이들이다”라고 말함과 같다.
또 “온갖 조작으로 된 것(有爲)은 모두 다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공(空)하고 나가 없는 것(無我)이어서 고요히 사라짐(寂滅)의 열반(涅槃)이다”라고 말하는
이러한 등속의 문을 결정이라 말한다.
불결정이라 함은
만일 “죽는 자는 다 난다” 하면 그것은 결정이 아닌 말이니, 애욕이 있으면 나지마는 애욕이 다하면 열반한다.
또 경전 중에서 “만일 마음의 선정을 얻으면 다 진실한 지혜를 낸다”고 말하나, 그도 또한 결정이 아닌 말이다.
성인으로서 선정을 얻으면 능히 진실한 지혜를 내지만, 외도로서 선정을 얻으면 진실한 지혜를 내지 못한다.
또 경전에서 “구하면 다 얻는다”는 말씀 같은 것도 결정이 아닌 말이다. 혹 얻기도 하고 혹 얻지 못하기도 한다.
만일 여섯 가지 입(入)은 반드시 닿임을 낸다 하면 그도 또한 결정이 아닌 것이니 혹은 내기도 하고 혹은 내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을 부정문(不定門)이라 한다.
또 위불위논문(爲不爲論門)이 있다.
“마치 기이한 풀과 아름다운 꽃이 바람을 거슬리면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말하고
구비라(拘毘羅) 꽃은 바람을 거슬리면서도 맡을 수 있다”고 말함과 같다.
“인간의 꽃이기 때문에 바람을 거슬러 풍기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천상의 꽃이기 때문에 바람을 거슬러 풍긴다”고 말한다.
또 세 가지 느낌(受)은 “괴로운 느낌과 즐거운 느낌과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아니한 느낌”이라 말하는데
또 그와 다른 경전에서는 “온갖 느낌은 다 고통이다”라고 말하나니,
세 가지의 고통인 고고(苦苦)와 괴고(壞苦)와 행고(行苦)가 있는지라,
때문에 “온갖 느낌은 모두가 다 고통”이라고 말한다.
또 말하였다.
“이 고통의 세 가지에는 새것과 묵은 것과 중간의 것이 있어서 새로운 느낌을 즐겁다하나 오래되면 싫증이 나서 고통이 되며 그 중간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捨]이라 한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도를 얻었기 때문에 도인(道人)이라 하는데, 도를 얻지 못하였어도 또한 도인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와 같은 등의 모습이 서로 인연하여 이름이 붙여진다.
또 근논문(近論門)이 있다.
부처님은
“비구야, 너희가 실없는 언론을 끊으면 바로 열반을 얻으리라”고 하심과 같아서,
비록 아직은 얻지 못했을지라도 다만 가깝기 때문에 또한 얻었다고 한다.
또 동상론문(同相論門)이 있다.
한 가지 일을 말하면 그와 서로 같은 나머지 일은 벌써 다 말한 것이 됨과 같다.
또 부처님이
“마음은 경솔하고 조급한 것이다”라고 말씀하면 나머지 심수(心數)의 법도 싸잡아 말씀한 것이 됨과 같다.
또 종다론문(從多論門)이 있다.
부처님의 말씀에
“만일 사람이 두 가지 소견인 생멸하는 모습을 알지 못하면 다 탐욕이 있다고 하고, 만일 능히 알면 여의었다고 말하리라”고 하심과 같다.
수다원은 두 가지 소견의 생멸하는 모습을 알면서 탐욕이 있되, 다만 아는 이는 대부분이 이욕인(離欲人)일 뿐이다.
또 인중설과론문(因中說果論門)이 있다.
만일 음식을 보시하면 다섯 가지 일인 목숨[命]과 빛깔[色]과 힘[力]과 즐거움[樂]과 말재주[辯才] 등을 준다고 말하나, 실은 목숨 등의 다섯 가지 일을 주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의 원인만을 주는 것과 같다.
또 “돈을 먹는다”고 말함은 돈을 먹을 수는 없되 돈으로 인하여 먹을 것을 얻기 때문에 돈을 먹는다는 것과 같다.
또 경전에서 “여자가 때 묻었다”고 말씀함과 같은 것도 실로 때가 묻은 것이 아니다. 그 탐착 등의 번뇌 때의 원인 때문에 때 묻었다는 것이다.
또 다섯 가지 티끌을 탐욕이라 말하나 실지로는 탐욕이 아니다. 능히 탐욕을 내게 하므로 탐욕이라 한다.
또 즐거움의 인연을 즐겁다고 말하는 것은, 법을 쌓은 사람이라 그 사람을 즐겁다고 말함과 같고
또 괴로움의 인연을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과 동거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함과 같나니,
마치 “불은 괴롭고 물은 즐겁다”고 말함과 같다.
또 목숨의 원인이 되는 것을 목숨이라고 말함과 같나니 게송에서 말함과 같다.
생활을 도와주는 기구는 그것이 바깥의 목숨이니,
남의 물품 빼앗음을 목숨을 빼앗었다고 말함과 같다.
또 번뇌의 원인을 번뇌라 말한다.
칠루경(七漏經)에서 말씀하되,
“그 가운데 두 가지는 실지의 번뇌가 되나, 그 나머지 다섯 가지 일은 그것이 번뇌의 인연이다”라고 함과 같다.
또 결과 중에서 원인을 말한 일도 있다.
부처님이 말씀하기를
“나는 마땅히 전생의 업을 받아야한다”고 하심과 같은 것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와 같은 등속의 여러 가지 많은 논의의 문을 모두 알아야 한다.
3.7. 찬론품(讚論品)
응당 이 논을 익혀야 한다. 왜냐하면 이 논을 배워 익히면 슬기로운 이의 법을 얻기 때문이다.
경전 중의 말씀에서
“세간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첫째는 슬기로운 사람이요,
둘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일 음(陰)과 계(界)와 모든 입(入)과 12인연의 인과(因果) 법 들을 잘 알지 못하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고
만일 음과 계와 입 등을 잘 분별하면 그를 슬기로운 사람이라 한다”라고 함과 같다.
지금 이 논 중에서는 바르게 분별해서 음과 계와 입 등을 해석하므로 이 논으로 인하여 슬기로운 이의 법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배워야 한다.
또 이 논을 익히기 때문에 범부라 말하지 않는다.
또 두 가지 사람이 있다.
하나는 범부요, 하나는 범부 아닌 이다.
아무리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부처님의 위엄스러운 거동을 본뜬다 할지라도 불법에는 아직도 요원한 것이니 믿음의 뿌리(信根)들을 성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요,
만일 믿음의 뿌리들을 성취하면 비록 마음에 거처하더라도 범부라 말하지 아니하리라.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스님의 위의는 갖추었으나 스님의 수에 들지 못한 이요,
스님의 수에는 들었지만 스님의 위의가 아닌 이요,
스님의 위의에도 알맞으면서 또한 스님의 수에도 들은 이요,
스님의 위의도 아니고 스님의 수에도 들지 않은 이다”라고 함과 같다.
첫째를 출가한 범부라 하고, 다음을 재가한 성인이라 하고, 셋째 번을 출가한 성인이라 하고, 넷째 번을 재가한 범부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믿음들의 뿌리를 여의면 스님의 수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 등의 모든 뿌리를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행해야 하며, 믿음 등을 얻으려거든 부처님의 법문을 들어 받들고 외고 읽어서 말씀대로 닦아 행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불법의 논을 읽혀야 한다.
또 이 논을 쫓으면 두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자기도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기는 이익되게 하면서 남을 이롭게 하지 못한 이요,
남을 이롭게는 하나 자기를 이롭게 하지 못한 이요,
다 함께 이롭게 한 이요,
다 함께 이롭게 하지 못한 이다”라고 함과 같다.
만일 자기만 계행 등의 공덕을 갖추면서 남을 계중에 머물도록 하지 못하면 이것을 자리(自利)라 한다.
이와 같은 네 종류는 만일 사람이 비록 자리로 남으로 하여금 보시들을 행하여 큰 과보를 믿게 하면 그 때문에 또한 이타(利他)라 한다 하겠으나,
여기에서 부처님의 뜻은 그 이익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이 오직 다른 사람만을 위하여 법문을 말해주면 그것을 이타라 하며,
이 사람은 비록 자기는 법에 따라 행하지 못할지라도 남을 위하여 설법하였기 때문에 자기도 또한 이익을 얻는 것이 된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남을 위하여 설법하면 다섯 가지 이익을 얻는다”고 함과 같다.
여기에서도 부처님의 뜻은 또한 이익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이 중에서는 다만 가장 첫째가는 이익만을 말씀하셨으니, 말씀대로 행하여 모든 번뇌가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문을 설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함과 동시에 자기의 이익을 겸하기 때문에 인간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한다.
마치 여러 가지 맛 중에서 제호(醍醐)와 같다.
또 이 사람은 금생에도 밝은 곳에 살려니와 후생에도 밝은 곳에 들어간다.
세간의 중생들은 다분히 어두운 데로부터 어두운 데로 들어가고 밝은 데로부터 어두운 데로 들어가나,
만일 조그만큼이라도 불법을 행하면 그 사람은 또한 능히 어두운 데로부터 밝은 데에 들고 밝은 데로부터 다시 밝은 데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보시를 행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듣는 것과 같은 이익을 얻지 못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통달한 지혜를 얻어서 모든 쇠뇌(衰惱)를 부수고 한량없는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두운 데로부터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이와,
어두운 데로부터 밝은 데로 들어가는 이와,
밝은 데로부터 밝은 데로 들어가는 이와,
밝은 데로부터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이가 있다”고 하셨다.
또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흐름(流)을 따르는 자가 있고,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있고,
중간에 멈추는 자도 있고,
다 건너간 자도 있다.
만일 사람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의 법을 들으면 그 사람은 다섯 가지 번뇌(蓋)를 끊어 없애고 일곱 가지 각의(覺意)를 닦으리니, 그러므로 이 사람이 생사의 흐름을 끊으면 흐름을 거스르는 이라 하고 또 멈춘다 하고 또 건넜다고 한다.
다시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항상 빠져 있는 자도 있으며,
잠깐 나왔다 도로 빠지는 자도 있으며,
나와서 둘러보는 자도 있으며,
다 건너간 자도 있다.
만일 열반을 수순하는 믿음 등의 공덕을 내지 못하면 이것을 항상 빠졌다[常沒]하고,
혹 세간의 믿음 등의 공덕을 지녔다가도 견고하지 못하여 도로 다시 물러나면 그것을 잠깐 나왔다 도로 빠짐(暫出還沒)이라 하고,
열반을 수순하는 믿음 등의 공덕을 일으켜서 선악을 분별하면 그것을 나와서 둘러봄(出觀)이라 하고
열반을 수순하는 믿음 등의 공덕을 구족히 닦아 익히면 그것을 다 건넜다(淨度)고 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불법의 바른 이치를 알면 마침내 항상 빠져 있지 않을 것이요,
설사 다시 잠깐 퇴타한다 할지라도 또한 영구히 잃어버리지는 아니하며 또는 이 사람을 가르쳐서 공덕을 닦는 사람이라 한다.
만일 사람이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조그마한 악업을 지었더라도 역시 악도에 떨어지지마는
만일 사람이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를 닦아 익혔으면 비록 많은 죄악을 지었을지라도 악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몸을 닦는다함은
듣는 지혜(聞慧)로써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身ㆍ受ㆍ心ㆍ法)을 닦는 것이니,
몸을 닦기 때문에 점차로 계와 정과 혜(戒ㆍ定ㆍ慧)를 내고 모든 업을 끊으며, 모든 업을 끊기 때문에 나고 죽음도 또한 없어진다.
또 경전 중에서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였으니,
“번뇌가 날카롭기는 해도 깊지 아니한 이가 있고,
깊기는 해도 날카롭지 아니한 이가 있고,
깊고 또한 날카로운 이가 있고,
깊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아니한 이가 있다”고 하였다.
처음은 뛰어난 번뇌(增上結)가 있어서 때때로 온다 하고,
다음은 부드러운 중간 번뇌(軟中結)가 항상 와서 마음에 있다고 하고
셋째는 혹 뛰어난 번뇌가 항상 와서 마음에 있다고 하고,
넷째는 혹 부드러운 중간 번뇌가 이따금 온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불법의 바른 논의를 얻어 들으면 두 가지 번뇌의 깊고 날카로운 것을 끊는다.
또 불법의 이치를 알면 벌써 스스로가 괴로워하지 아니하고 또한 남을 괴롭히지 아니한데
외도는 계를 가짐으로써 바로 자신을 괴롭히고 만일 삿된 소견에 떨어지면 곧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나니, 죄와 복의 업과 과보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혹시 보시를 행하여도 역시 자신을 괴롭히고 또한 남을 괴롭히는 것이라 하나니,
마치 하늘에 제사하는 동안에 많은 소와 염소를 살해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만일 불법의 이치를 알면 이익만을 얻기 위함이라, 스스로 제 몸을 괴롭히지 아니할 뿐 아니라 역시 남까지도 괴롭히지 않나니,
마치 선정을 얻어서 자비를 행하는 이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 불법의 논을 익혀야 한다.
또 이 논을 익히는 이를 함께 말을 할 만한이라 하나니, 바른 이치를 아는 까닭이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만일 논의할 때에는 응당 이것은 함께 말할 만한가 이것은 함께 말하지 아니할 만한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만일 사람이 슬기로운 이의 법(智者法) 가운데거나, 처와 비처(處非處)의 가운데거나, 혹은 분별(分別)의 가운데거나, 도(道)의 가운데 머무는 분이 아니면,
그러한 사람과는 다 함께 이야기 하지 않아야 하고
그와 반대되는 사람이면 함께 말하여야 한다”고 함과 같다.
지혜 있는 이의 법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논의하는 사람이란 바른 지혜로 이치를 잘 해득한 연후에 고집하고 이용해야 하는데 이 사람은 이치를 알지 못한지라 이 때문에 고집하지 못하나니,
마치 니연자(尼延子)의 무리는 자칭 말하기를
“우리 스승은 믿을 수 있는 분이리라”고 주장하면서 다만 그의 말만을 따름과 같다.
처비처에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인(因)을 이용하는 중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외도들은 공통되는 인(共因)과 각기 따로 지닌 인(異因)의 두 가지에서
만일 다른 상대자가 공통되는 인을 설명하면 개별적인 인으로 대답하고
만일 상대자가 개별적인 인을 설명하면 공통되는 인으로 대답하면
이와 같은 두 가지인 가운데에 두 가지 인에도 머무르지 않은 것이다.
분별하는 가운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비유(譬喩)하는 가운데에 머무르지 아니한다는 것이요,
도의 가운데 머물지 아니한다 함은 도리를 논의하는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논의하는 사람은 나쁜 말씨를 쓰지 말아야 하고 이치와 주장하는 법(義宗)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다만 진실한 이익만을 설명하면서 방편으로 권유하고 깨우쳐서 알고 깨닫도록 하여 자기 마음이 기뻐짐을 성인의 말씀하는 법이라고 말함과 같다.
이 중에서 누구라도 바르게 불법의 논을 알면 곧 함께 말할 만하거니와 그 밖의 사람은 상대할 것이 아니다.
또 함께 언론할 만하지 못하다 함은
결정적인 말로써 대답해야할 물음에는 결정이 없는 말로 대답하며 분별하여 대답해야 할 물음에는 분별이 없는 말로 대답하며 반문(反問)해야 할 물음에는 반문이 없는 말로 대답하며 대답하지 않아야 할 물음에는 가만있지 아니하고 대답하는 일이 있다.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함께 논의할 만하다고 한다.
결정적인 말로 물음에 대답한다 함은
오직 하나의 일이 있을 뿐이니, 부처님 세존과 같은 이는 세간에서 대등할 이가 없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것이 비유가 되리라.
당연히 분별하여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함은 다시 인연이 있나니, 마치 생사가 서로 이어간다는 따위와 같다.
당연히 반문하는 대답으로 상대자의 물음에 대답해야 한다 함은
상대자가 묻는 말 그대로 도로 묻는 대답이다.
당연히 묵언으로 대답한다 함은
법은 실다운 체성이 없어서 다만 이름뿐인 것을
만일 이런 법을 물으면서 “같은가 다른가 항상한가 무상한가” 따위로 묻는다면
그것은 대답하지 않는 것이니, 그 이치는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곧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응당 이 불법의 논을 익혀야 한다.
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정정(正定)이요, 사정(邪定)이요, 부정(不定)이다.
정정이라 함은 반드시 열반에 드는 이요,
사정이라 함은 반드시 열반에 들지 못하는 것이요,
나머지는 부정이라 한다.
만일 누구라도 불법의 이치를 해득하면 반드시 정정에 들게 된다.
또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순죄(純罪)와 다죄(多罪)와 소죄(少罪)와 무죄(無罪)이다.
순죄라는 것은 사람이 착하지 못하기만 하고 한 가지의 착한 일도 없는 이요,
다죄라는 것은 죄악이 많고 선행이 적은 이요,
소죄라는 것은 선이 많고 악이 적은 이요,
무죄라는 것은 다만 선한 일만 있을 뿐 불선한 일은 없는 이이다.
사람이 만일 불법의 바른 이치를 안다면 반드시 소죄나 무죄의 두 가지에 들리라.
또 사람이 만일 불법의 이치를 안다면 고통을 받되 한량이 있고, 장차에는 반드시 열반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3.8. 사법품(四法品)
만일 이 논을 익히면 으뜸가는 포섭법을 얻는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되
“네 가지 포섭하는 법이 있다.
보시(布施)ㆍ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리(同利)가 그것이다.”라고 함과 같다.
보시라 함은 옷과 음식 등의 물질로서 이러한 재물의 보시로 중생을 안아 당기는 것이지만 도리어 실패할 수 있다.
애어라 함은 뜻을 순종하면서 말을 하는 것으로서 이도 또한 허물이 있는 것이니, 상대자의 뜻을 좇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행이라 함은 남을 위하여 이익을 구하다가 만일 인연이 있으면 남을 도와 일을 성취하는 것이나 이것도 무너질 수 있다.
동리라 함은 함께 한 배를 탄 것 모양으로 걱정과 기쁨을 같이하게 되는 것이나 이것도 무너질 수 있다.
만일 법으로써 보시하고 애어하고 이행하고 동리하여 중생을 안아 당긴다면 무너뜨릴 수 없으리라. 법으로 껴안는다 함은 이 논을 익히는 것이다.
또 이 논을 익히면 으뜸가는 의지(依止)를 얻게 된다.
경전 중에서 말하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말함과 같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나는 부처님에게서 들었다하거나, 아는 것이 많은 비구에게서 들었다거나, 두 서너 비구에게서 들었다거나, 대중에서 들었다거나, 대덕(大德)ㆍ장로(長老)ㆍ존숙(尊宿)에게서 들었다고 말할지라도
그 사람을 믿기 때문에 그 말을 받아들일 것이 아니요,
그 말이 수다라 중에 넣어도 불법의 체상에 어긋나지 않고 비니(毘尼)에 수순한 연후에 받아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수다라에 넣는다 함은 요의수다라(了義修多羅) 중에 넣는 것을 말함이오,
요의수다라는 그 이치가 법의 모습에 어긋나지 아니함을 말한다.
법의 모습이라 함은 비니를 수순하는 것이며, 비니라 함은 적멸함을 말한다.
만일 유위의 법은 상락아정(常樂我淨)임을 관찰하면 탐욕을 없애지 못할 것이나
만일 유위법이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관찰하면 탐욕들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무상 등을 아는 것이 법의 모습이라 하며, 이것은 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만일 법에 의지한다고 말하면 온갖 법을 총괄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다음에 “요의경에 의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아니한다”고 설명한다.
요의경은
곧 셋째 번의 의지로서 말하자면 진리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일 그 말의 뜻이 수다라 가운데 넣어서 법의 모습에 어긋나지 않고 비니에 수순하면 바로 의지가 된다.
지혜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아니한다 함은 식이란 물질 등의 법을 분별하여 아는 것을 말함이니,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능히 앎으로 식이라 한다”함과 같고
지혜란 실지의 법을 통달함을 말함이니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여실하게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알음(識)을 알기 때문에 지혜라 한다”함과 같다.
여실(如實)이란 곧 공(空)이다.
그러므로 식은 얻는 바가 있는 것이요, 의지하지 아니해야 한다.
만일 지혜에 의지하면 그것이 곧 공에 의지하는 것이니, 이 으뜸가는 의지(依止)에 통달하려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 논을 익혀야 한다.
또 경전 중에서
“하늘과 사람의 네 가지 바퀴는 착한 법을 더욱 늘린다”고 말하였으나,
첫째는 착한 곳에 머무르고,
둘째는 착한 사람에게 의지하며,
셋째는 스스로 바른 서원을 내고,
넷째는 전생에 착한 뿌리를 심은 것이다.
착한 곳에 머무른다 함은 중국(中國)에 살면서 다섯 가지 난(難)을 여읜다는 말이요,
착한 사람에게 의지한다함은 부처님 계시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요,
전생에 착한 뿌리를 심었다 함은 귀머거리나 벙어리 따위가 되지 않는 것이요,
스스로 바른 서원을 낸다 함은 이것은 바른 소견을 말한 것이니 바른 소견은 반드시 불법을 듣는데서부터 생긴다.
그러므로 이 불법의 바른 논을 익혀야 한다.
또 이 논을 외고 익히면 수명 안에서 크게 견고한 이익을 얻을 것이니 진리를 통달함을 말한다.
경전 중에서 말씀하기를,
“네 가지 견고한 법이 있다. 설견(說堅)ㆍ정견(定堅)ㆍ견견(見堅)ㆍ해탈견(解脫堅)이다”라고 하였다.
설전이란
“일체 유의는 다 무상(無常)하고 고(苦)이며 온갖 것은 무아(無我)요 적멸 열반(寂滅涅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을 설견이라 하며, 이것은 들음에서 얻는 지혜가 만족한다.
이로 인하여 선정을 얻으면 이것을 생각함에서 얻는 지혜가 만족하다 하며,
이 선정을 인하여 유위법은 무상하고 괴롭다고 관찰하여 능히 바른 소견을 얻으면 닦아서 얻는 지혜가 만족한다 하는 것이니,
세 가지 지혜가 과보를 얻음을 해탈견이라 한다.
또 만일 불법의 바른 논을 들으면 큰 이익을 얻는다.
경전 중에서 네 가지 큰 이익되는 법을 말씀한 것과 같다.
착한 사람을 친근하고 바른 법을 들으며 스스로 바르게 기억하고 법의 행에 수순하는 것이라.
만일 착한 사람을 친근하면 바른 법을 듣는 것이니, 이 바른 법은 착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른 법을 들은 다음에는 바른 생각을 내서 무상 등으로써 바르게 모든 법을 관찰한다.
이 바른 관찰로부터 법의 행을 따르는 것이니, 이것을 샘 없는 소견(無漏見)이라 한다.
또 이 논을 들으면 네 가지 공덕을 갖추게 된다.
지혜의 덕[慧德處]ㆍ진실의 덕[實德處]ㆍ버림의 덕[捨德處]ㆍ적멸의 덕[寂滅德處]이다.
법문을 듣고 지혜를 내면 그것이 지혜의 덕이고
이 지혜로써 참 이치의 공을 보면 그것을 진실의 덕이라 하며,
참 공[眞空]을 보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게 되므로 버림의 덕이라 하고,
번뇌가 다하기 때문에 마음에 적멸을 얻으면 그것이 적멸의 덕이다.
또 사람이 불법의 바른 논을 듣게 되면 열반에 수순하는 네 종류의 착한 뿌리[善根]를 심는다.
이른바 난법[煖法]과 정법[頂法]과 인법[忍法]과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무상 따위의 행으로 다섯 가지 쌓임을 관찰할 때에
열반에 수순하는 하품의 연약한 선근을 내어 마음을 뜨겁게 하나니, 이것을 난법이라 한다.
난법이 더 자라서 중품의 선근을 이루면 그것을 정법이라 한다.
정법이 더 자라서 상품의 선근을 성취하면 그것을 인법이라 한다.
인법이 더 자라서 상상품의 선근을 성취하면 그것을 세간의 법이라 한다.
또 네 종류의 선근이 있다.
퇴분(退分)과 주분(住分)과 증분(增分)과 달분(達分)이다.
모든 선정을 떠나서 예배 공경하며 외고 읽으면 이들의 선근을 물러남의 갈래라 한다.
선정 등을 얻는 선근을 머무름의 갈래라 한다.
듣고 생각하는 등으로부터 내는 모든 선근은 바로 통달함의 갈래라 한다.
만일 부처님의 법을 들으면 영구히 퇴분을 여의고 세 가지 갈래의 선근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