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아비담경출가상품 상권
[4성제]
만약에 이러한 인연으로 12인연의 음이 생겨날 때에 생겨남이 있는 것[有生]과 생겨남 없는 것[無生]을 안다면,
바로 이때 이 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식(識)으로 네 가지 진리를 닦아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고(苦)는 지혜로 깨닫고, 집(集)은 수명으로 깨달으며, 멸(滅)은 바로 앞에 나타난 것으로 깨닫고, 도(道)는 관하여 깨닫는다.
이와 같이 바른 제자들이 네 가지 바른 진리를 보게 되면 이는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만약에 법을 보게 되면 이는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
지혜로운 행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와 같은 인연으로 음이 생겨날 때 생겨남 없이 생겨나는 것을 알면 곧 두 가지 진리를 볼 것이니, 이른바 고제(苦諦)와 집제(集諦)이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만약에 능히 함께 보게 되어 앞의 두 진리를 본다면 곧 뒤의 두 진리도 보게 되니, 곧 멸제(滅諦)와 도제(道諦)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의 진리[四諦]를 보게 되면 바른 제자들은 곧 부처님을 보게 되며, 곧 지혜도 따르게 되므로 심념(心念)을 일으킨다.
이것을 비유로써 말하자면,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 놓은 단정한 모습의 인물상을 보고는 바로 분별을 내어 “이 화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구나”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바른 제자들이 네 가지의 옳은 진리를 보게 되면 생각이 일어나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께서는 능히 이러한 법을 설하시어 중생들의 고통을 끊으시는구나” 하고 말하면서
즉시 부처님에 대해 비할 바 없는 신심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저절로 말하기를
“이 성문(聲聞)의 법은 아주 깊고 미묘해서 능히 평안하게 머무르게 한다”고 말하면서,
곧 이 법에 대해 견고한 믿음을 얻는다.
다시 저절로 말하기를
“이 『아비담경(阿毘曇經)』은 일체의 고통을 끊어주니, 만약에 이것을 능히 따른다면 좋은 일들도 따라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곧 승가[僧]에 대해 비할 바 없는 믿음을 낸다.
그리고 이미 진실한 진리를 보았기 때문에 청정하고 결백한 계품(戒品)을 얻어 신견(身見)과 계취(戒取)를 벗어나서 모든 의혹을 여읜다.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이와 같이 바른 제자들이 네 가지 진리[四諦]를 보고, 네 가지를 갖추어 비할 바 없는 믿음을 내게 되면 바로 세 가지의 번뇌[纏]를 벗어나 수다원(須陀洹)을 이루며, 결정된 법[決定法]을 깨닫고 바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최초의 과위에 머무른다.
다시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엷어지는 까닭에 사다함(斯陀含)을 이루어 둘째 과위 머무른다.
다시 다섯 가지 음의 얽힘[五種陰纏]과 아홉 가지로 불어나는 번뇌[九增上結]를 여의며, 힘써 수행하고 도를 닦아 마침내 모든 번뇌의 결사를 벗어나 아나함(阿那含)을 이루고 세 번째 과위에 머무른다.
다시 물질의 욕망과 교만과 무명 등을 여의고 가장 뛰어난 네 번째 사문의 과위를 얻어 아라한(阿羅漢)을 이루고 유여열반(有餘涅槃)에 머무른다.
다시 일체의 존재를 점차 여의고 기다리던 시절을 따라 몸이 무너져 목숨이 끝나게 되면 바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신음(身陰)이 생겨나는 모습을 살펴 네 가지 옳은 진리를 분명히 알게 되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의 과위를 얻으며,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얻는다.
이와 같이 몸이 생겨나는 모습을 여러 가지로 살핀다면 네 가지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되겠지만, 몸이 생겨나는 모습을 살피지 않고 또 네 가지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해탈도(解脫道)를 얻지 못한다.
만약에 해탈도를 구하고자 하거나, 네 가지 진리를 구하고자 하거나, 비할 바 없는 믿음을 구하거나, 사문과를 성취하고자 하거나, 『아비담경』에서 설하는 무여열반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힘써 음(陰)이 생겨나는 모습을 살필 것이니, 위없는 바른 깨달음으로 이끄는 가르침은 이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