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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선사께서 보신 경허화상 행장(行狀)
'금강경'에 이르기를 '앞으로 돌아오는 세상 후5백세에 중생이 있어서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을 내리니,마땅히 알거라,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였느니라'하였고,
대혜화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 중간에 복잡한 가운데서라도 몇 사람이 타성일편(打成一片 - 정신 집중하여 정력(定力)의힘을 얻는 다는 말)하여 얻지 못하였을 것 같으면 불법이 어찌 오늘에까지 이르리오' 하니, 대개 용맹스런 뜻을 발하여 법의 근원에 사무친 이가 말세의 불법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요, 또한 그러한 사람이 너무 드물어서 혜명을 보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는 것이니 누가 능히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자성을 철저히 깨닫고 그 제일 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광명의지를 저 5백세 후까지 광대하게 유통하리요.
나의 선사(先師) 경허화상은 이런 분이다.
화상의 휘는 성우이니 처음 이름은 동욱이요 경허는 그 호이며 성은 송이니 여산 사람이다.
부친은 두옥이요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
철종 8년 정사년 4월 24일 전주 자동리에서 탄생하셨다. 분만 후 삼일까지 울지 않다가 목욕을 시키자 비로소 아기 소리를 내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일찌기 부친의 상을 당하고 9살 때 모친을 따
라 상경하여 광주군 청계사(지금의 청계산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스님을 은사로 머리를 깍고 계를 받았다. 속가의 형이 한 분 계셨는데 공주 마곡사에서 득도하고 있었으니 이 모두 그 모친이 삼보(三寶)에 귀
의 하여 염불을 정성 들여 하였으니 두 아들 모두 출가 한 것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뜻은 큰 사람 못지 않았고 비록 고달픈 환경이라도 피곤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이 나무하고 물긷고 밥을 지으며 은사를 모셨다.
열네 살이 되도록 글을 배울 기회가 없었는데 어느 날 선비 한 분이 와서 한 여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선비가 함께 소일꺼리로 곁에 불러 앉히고 천자문을 가르쳐 보니 배우는대로 똑바로 외우는지라 다시
통사(通史) 등의 글을 가르쳐보니 하루에 대 여섯장씩 외우기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로다, 옛 사람의 이른바 천리를 달리는 말이 백락(佰樂 - 말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피곤하게 소금짐이나 끄는구나.
뒷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모든 사람들을 제도 하리라.'하더라.
얼마되지 않아서 은사인 계허스님이 환속하자, 은사가 그 재주에 더 배우지 못하게 됨을 애석하게 여겨 계룡산 동학사 만화화상에게 추천하는 글을 써서 소개하여 보내니 화상은 당세의 큰 강사였다. 경허의 영걸스러운 기상을 보고 기뻐하며 붙들어 가르치니, 몇 달이 안 되어 문장을 구상하여 잘짓고 교의(敎義)를 토론하였다. 그 날 일과의 경소(經疏)를 한번 보고는 다 외워 마치고는 하루종일 잠만 자고 그 이
튼날 논문강(論問講)을 할 때는 글뜻을 해석하는 것이 마치 장작을 쪼개듯 촛불을 잡은듯 명확하였다.
강사가 잠만 자는 것을 꾸짖고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특히 원각경 가운데서 소초까지 대 여섯 장 내지 십여 장을 일과로 정하여도 여전히 졸고 여전히 외우는지라 대중들이 일찌기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더라. 이로부터 재주와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영호(嶺湖 - 경상도와 전라도)의 강원에 두루 참석하여 학문이 날로 진취되고 널리 들어서 유교와 노장학(노, 장자)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며 밖으로 꾸밈이 없어서 무더운 여름에 경을 볼 때 대중들은 모두 옷을 입고 바로 앉아서 땀을 줄줄 흘리는데 혼자서 훌훌 벗어버리고 태연하게 형상과 거동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으니, 일우강사가 보고는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참으로 대승법기(大乘法器) 로다. 너희들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느니라' 하였다.
23세에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개강(開講)하니 교의를 논하매 큰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학인들이 사방에서 몰려 들었다.
하루는 전날 은사 계허스님이 권속으로 아껴주던 정분이 생각나서 그 집에 가서 한번 찾아 뵈오려고 대중에게 이르고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 홀연히 폭풍우를 만나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내쫒는지라 다른 집으로 갔으나 역시 똑 같았다. 그 마을 수십 가구를 다 가보아도 다 쫒기를 매우 급히하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이 곳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아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는 판인데 너
는 어떤 사람이기에 죽는 곳에 들어 왔느냐!'라고 했다. 화상이 그 말을 듣자 모골이 송연하고 심신이 활홀하여 마치 죽음이 당장 도달한 것과 같고 목숨이 참으로 호흡하는 사이에 있어서 일체 세상 일이 도무지 꿈 밖의 청산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금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되지 않고 조도(祖道)를 찾아 삼계(三界)를 벗어나리라'하고 발원을 마치고 평소의 읽은 바 공안(公案)을 생각해보니 이리 저리 의해(義解 - 머리로 이해)로 배우던 습성이 있어서 지해(智解 - 지혜의 마음으로 -이해)로 따져지므로 참구(參究)할 분(分 - 몫)이 없으나 오직 영운선사의 들어보인 바 '노事未去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 왔다'는 화두는 해석도 되지 않고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딛친 듯하여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고 참구하다.
산에 돌아온뒤에 대중들을 흩어 보내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따라 잘들 가게나, 나의 지원(志願)은 이에 있지 않다네'하고 문을 폐쇠하고 단정히 앉아 전심(專心)으로 참구하는데 밤으로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혹은 칼을 갈아 턱에 괴며 이와 같이 3개월을 화두를 순일 무잡하게 들었다.
한 사미승이 옆에서 시중을 드는데 속성이 이씨라 그의 부친이 좌선을 여러 해동안 하여 스스로 깨달은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 이처사라고 부르는데, 처사가 말하기를 '중이 필경에는 소가 된다'하니 그 스님이 말하기를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된다'고 했다.
처사가 꾸짖어 이르기를 '소위 사문의 대답이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
니까?' 그 스님이 이르기를 '나는 선지(禪旨)를 잘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하니 처사가 이르기를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고 이르지 않는고?'
그 스님이 묵묵히 돌아가서 사미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 사미가 이르기를 '지금 주실(籌室)화상이 선공부를 심히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먹는 것도 잊을 지경으로 하고 있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를 알지라, 사부께서는 가서 물으소서'
그 스님이 흔연히 가서 예배를 마치고 앉아서 이 처사의 말을 전하는데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말에 이르러 화상의 안목이 정히 움직여 옛부처 나기전 소식이 활연히 앞에 나타나고 대지가 꺼지고 물질과 나를
함께 잊으니 곧 옛 사람의 크게 쉬고 쉬는 경지에 도달한지라, 백천 가지 법문과 헤아릴 수 없는 묘한 이치가 당장에 어름 녹듯 기와가 깨지듯 하니 때는 고종 16년 기묘 동짓달 보름께였다.
마음밖에 다른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히 눈과 달빛이요, 높은 뫼 소나무 아래로 물은 흘러가니 긴긴밤 맑은 하늘 아래서 무엇을 하랴. 참으로 이른 바 저개(這箇 -그냥 '이') 도리는 너의 경계가 아니요 도가 같아야 비로소 아는 도다.
방장실(方丈室)에 높이 누워 사람들의 출입을 상관하지 않았다. 만화강사가 들어와서 보아도 또한 누워서 일어나지 않으니 강사가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고?'하니 '일이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고 대답하자 강사가 말없이 나가고 말았다.
그 이듬해인 경진년 봄에 연암산 천장암으로 옭겨 주석하니 형님인 태허선사가 모친을 모시고 이 곳에있기 때문이다.
계송과 노래로 그 깨달아 증득한 곳을 발휘하니 높고 높기는 천길 낭떠러지요 드넓기는 이름과 말이 함께 끊어졌으니 실로 저 옛 조사의 가풍에 양보하지 않겠다.
계송에 이르기를,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에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 길에
일 없는 들 사람 태평가를 부르네'
노래가 있으니,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네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랴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랴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 없네'
이 네 글귀 머리 귀절을 끝에 맺어놓은 뜻은 사우(師友)와 연원(淵源)이 끊어져서 서로 인증(印證)해 줄 곳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일찌기 대중에 들어 이르기를
'무릇 조종(祖宗) 문하에 들어 마음법을 전수하여 줌에 본(本)이 있고 증거가 있어서 가히 어지럽히지 못하리라. 예전에 황벽은 마조의 할을 하던 것을 들어 말함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잇고, 흥화는 대각의 방망이 아래서 임제의 방망이 맞던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지만 임제의 법을 이었고, 우리 동국에는 벽계가 중국에 들어가서 법을 총통에게 얻어 와서 멀리 구곡에게 법을 잇고, 진묵은 응화성(應化聖) 으로 서산이 멸한 후 법을 이으니 그 사자(師資)가 서로 계승함의엄밀함이 이와같은 것은 대개 마음으로써 마음을 인(印)하여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을 치기 때문이다.
오호라, 성현이 오신지 오래되어 그 도가 이미 퇴폐된지라,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가 일어나 살활(殺活)의 화살을 쏴서 한개나 반개의 성인을 얻기 때문에 은밀스럽게 정종(正宗)을 부지하니 암흙속의 등불이요 죽음속에 다시 삶과 같도다.
내가 비록 도가 충실하지 못하고 성(性)을 점검하지 못하였으나 일생동안 향할 바는 기어이 일착자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더니 이제 늙은지라 뒷날 나의 제자는 마땅히 나로써 용암장로에게 법을 이어서
그 도통(道統)의 연원을 정리하고 만화 강사로써 나의 수업사(受業師)를 삼음이 옳도다'
이제 유교(遺敎)를 좆아 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본즉,
화상은 용암, 혜언을 잇고, 언은 금허, 별첨을 잇고, 첨은 율봉, 청고를 잇고, 고는 청봉, 거애를 잇고 애는 호암, 체정을 잇고, 청허는 편양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에게, 풍담은 월담에게, 월담은 환성에게 전하니, 경허화상은 청허에게12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7세손이 된다.
호남 지방에 20여년 계시니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와 홍주의 천장사가 모두 길들여 살면서 도를 연마할 만한 곳이다. 기해년 가을에 영남 가야산 해인사로 옮기니 때는 고종 광무 3년이라, 칙지(勅旨 - 왕의 지
시 서류)가 있어서 장경을 인출하고 또 수선사(修禪社)를 건립하여 마음 닦는 학자를 살게 하니 대중이 모두 화상을 종주(宗主)로 추대 하였다. 법좌에 올라 거량(擧場)함에 본분을 바로 보이고 백염(白염)의수단을 사용하여 살활의 기틀을 떨치니 가위 금강보검이요 사자의 완전한 위엄이라, 듣는 자가 모두 견해와 집착이 사라져 말끔하기가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결재 때 법좌에 올라가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한번 치고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과 노화상들이 모두 따라오느니라'
또 법상을 한획 긋고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과 노화상들이 모두 따라 갔느니라 대중은 도리를 알겠는가?'
대중이 아무 대답이 없자 주장자를 던지고 법좌를 내려왔다.
어느 스님이 묻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얼굴을 움직이며 옛길에 드날려 맥없는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 했으니 어떤 길이 옛 길입니까?'
답하기를 '옛 길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과 하나는 험한 길
이다. 어떤 것이 험로인가? 가야산 아래로 천갈래 길이 사람과 말들이 왕래한다.
어떤 길이 평탄한 길인가? 천길 절벽 사람이 올라 갈 수 없는 곳에 오직 원숭이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렸도다'
여름 해제날 법좌에 올라 동산의 시중(示衆 - 예)을 들어서 이르기를 '초가을 여름끝에 형제들이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가는데 모름지기 만리에 풀 한포기 없는 곳을 향하여 가거라 함을 들어
말하기를 나는 그렇지 않아도 초가을 여름끝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는데 곧 모름지기 길 위의 잡초들을 일일이 밟고 가야 옳도다.
그러니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 대중이 대답이 없자 조금
있다가 '대주이 이미 답이 없으니 내가 스스로 답하리라'하고는 갑자기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으로 돌아가니 그 바로 끊어서 들어보임이 보통 이런 종류였다.
영축산 통도사와 금정산 범어사와 호남의 화엄사, 송광사는 모두 화상께서 계시던 곳이다. 이로부터 사방에서 선원을 다투어 차리고 발심한 납자 또한 감격스럽게 구름 일 듯하니 이 기간처럼 부처님 광명이 빛나 사람의 안목을 열게 함이 이와같이 번창함이 없었다.
임인년 가을 화상이 범어사 금강암에 계실 때 읍내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 개군불사가 있어서 화상을 청하여 증명법사로 모시는데 밤이 저물어서 절 입구에 다다르니 길이 어두워 걷기가 어려운데 마침
그 절 주지스님이 앉아 조는데 어떤 노스님이 말하기를 '큰 스님이 오시니 급히 나가 영접하여드려라'
주지 스님이 꿈을 깨자 횃불을 들고 동구 아래로 내려가니 과연 화상이 올라 오는지라 비로소 나한의 현몽인줄 알고 대중에 말하니 다들 놀라며 전날 훼방하고 화상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참회하였다.
계묘년 가을 범어사로부터 해인사로 가던 도중 한 구절 읊으니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졌고
세상은 험한데 어느 곳에 이몸 숨길까 알 수가 없네
어촌과 술집은 어디엔들 없으랴만은
이름을 숨길수록 더 드러나는구나'
대개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라 가히 그 뜻이 당신의 자취를 감추는데 있는 것이나 오직 명리를 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해인 갑진년 봄에 오대산으로 들어 갔다가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군 석왕사에 도착하니 때마침 오백 나한 개군불사를 하면서 제방의 석덕(碩德 - 학식과 덕이 풍부한 사람)들이 법회에 와서 증명법사로 참석하였는데 화상이 증명단에 올라가 독특하고 능란한 변재로
법을 설하니 대중들이 합장하고 회유하다가 감탄 하였다.
불사를 회향한 후 자취를 감추니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수월화상으로부터 예산군 정혜선원으로 서신이 왔는데 내용인 즉 화상께서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차림으로 갑산, 강계 등지로 다니시며 혹을 시골 서당에서 훈장도 하며 혹을 시
장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임자년 봄 갑산 웅이방 도하동 서재에서 입적하였다 하여 혜월과 만공 두 사형이 곧 그곳에 가서 난덕산으로 운구(運柩)하여 다비(茶毘)를 하고 임종게를 얻어 가지고 돌아오니 곧 입멸하신 그 이듬해 계축년
7월 25일이었다.
그 동네 노인들에게 들으니 화상이 하루는 울밑에 앉아서 아이들이 풀 뽑는 것을 구경하다 갑자기 눕더니 일어나지 못하며 말하기를 '내가 피곤하구나'하기에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으로 모셨으나 먹지도 않
고 말하지도 않고 신음도 없이 누었다가 그 이튿날 해뜰 무렵 갑자기 일어나 앉아 붓을 잡아 게송을 썼다.
마음 달이 외로이 둥글게 빛나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쓰고 끝에 원(圓)을 그려놓고 오른쪽으로 누어서 천화(遷化)하니 임자년 4월 25일이라 우리들이 예를 갖추어 어는 산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렵거늘 비록 잠시 친견하였으나 우리들은 오래 모시고 참선을 배우지 못하고 귀적(歸寂)하시던 날도 후사를 참결(參決 - 참여)하지 못하
였다.
고도인(古道人)의 입멸 때 처럼 한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