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안으로 날아갔다. 원래는 난주로 갈 예정이었지만 짙은 안개 때문에 목적지를 바꾼 것이다. 마침 구정 명절 전날이라 길거리에는 망년의 분위기가 떠돌았다. 중국의 공식 설날은 양력 1월 1일이지만 우리의 민속 설처럼 구정을 지내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가이드는 거리의 음식이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다면서 일체 사 먹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우리는 구정 명절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호텔 앞 이슬람 포장집에 부탁해서 우리가 가져간 김치로 양고기를 다져 넣어 김치 볶음을 만들게 하고 라면에 고추장을 넣어 라면볶이도 만들게 했다. 중국의 서안에서 우리의 진로소주를 들면서 한국 술안주로 파티를 여는 기분이 그럴 듯했다.
정각 12시, 자정이 되자 포장집 앞에서부터 폭죽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다란 헝겊조각에 감싸인 폭죽이 상점들의 처마에 매달려 있었는데, 붉은 헝겊이 타들어가면서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막대 모양의 푹죽을 들고 나온 사람도 있고 폭죽을 자전거의 체인에 감은 사람도 있었다. 폭죽을 땅에 놓고 터뜨리는 경우도 있고 허공으로 집어 던져서 터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새로운 해를 마지하기 위해서 묵은 해의 귀신들을 쫓아내는 의식이었다. 황하강변인 난주의 폭죽놀이가 특히 유명하다는 소문이었지만 서안의 푹죽놀이도 볼만했다.
서안은 당나라 시대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의 현재 이름이다. 지금의 서안(西安)은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인구는 약 20만 명이며,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서안은 우리의 경주에 해당하는 고도(古都)라 볼거리가 많았다. 우선 성벽의 보존상태가 뛰어나고, 비림(碑林), 종루(鐘樓)등을 비롯한 역사적 유물이 많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만난 화청지(華淸池)도 이곳에 있었다.
시내의 중심부에 위치한 종루(鐘樓)는 외관 3층, 내부 2층의 누각으로, 1384년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청진사(淸眞寺)는 742년에 창건된, 당(唐)의 현종(玄宗) 때부터 존속해 온 유서 깊은 이슬람 사원이다. 서안에는 3만 명 이상의 이슬람교도가 있으며 이 근처에 많이 거주한다. 서안성벽 (西安城壁)은 1368년에 축성되었다. 원(元)을 무찌른 명(明) 왕조가 당의 도읍이었던 장안성(長安城)의 기초 위에 새로이 성을 쌓은 것이다. 1421년 베이징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50년 동안 이곳이 중국의 중심이었다.
비림(碑林)은 1087년 북송 철종 2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한(漢)대 부터 청(淸)대에 이르기까지의 비석과 1천여 개의 묘비가 전시되어 있는데, 비석들이 모여 마치 '숲을 이룬 것 같다'하여 '비림(碑林)'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한 <개성 석경> 이라고 이름한 114개의 석판에 유교경전 13경(655,025자)을 조각한 것의 보존으로도 유명하다. 여기엔 당대 명필 구양순과 안진경, 이양수 등의 친필 석각과 소철, 소식, 조맹부 등 명사들의 진적비등이 집중되어 있다. 비림은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이자 고대 문헌서적과 비석의 조각 도안 등이 집대성되어 있는 곳이다. 섬서성 박물관 안에 있지만, 박물관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이 알려진 건축물로 대안탑(大雁塔)을 들 수 있다. 서안의 남쪽 4㎞지점의 자은사(慈恩寺) 경내에 있는데, 서안시의 상징적인 탑 중의 하나이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당나라의 소승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의 번역과 그것을 소장하기 위해 정부에 건의하여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5층탑이었으나 뒤에 10층으로 증축되었고 전쟁중의 화재로 일부 허물어졌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현재는 높이 64m, 둘레 25m의 7층탑으로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뛰어나다. 대안탑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소안탑을 들 수 있다. 소안탑(小雁塔)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시 운반해온 4백부의 경전을 번역하기 세운 탑이다. 초기에는 15층으로 높이가 45m나 되었다고 하는데 명나라 때 꼭대기 2개 층이 소실되어 높이 42m의 13층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화청지(華淸池)는 서안에서 25㎞정도 떨어진 여산(驪山)산록에 있는 온천이다. 역대 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 휴양했던 곳이며 당나라 말엽 양귀비와 현종이 사랑을 나누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海常湯)은 지금도 섭씨 43도의 온천물이 가득한데 일반인에게 공개되므로 몸을 담가 볼 수도 있다.
서안 관광의 백미는 단연 진시황의 무덤이다. 진시황의 무덤은 서안(西安)에서 37Km 떨어진 교외에 있다. 남쪽으로는 여산(驪山), 북쪽으로는 위수(渭水)와 접해 있는 절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황제의 무덤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왕릉을 상상했다면 큰 실수가 된다. 그야말로 그것은 상당한 크기의 산이다. 낮은 야산처럼 보이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은 역사가 사마천에 의하면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36년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세계적으로 개인을 위한 묘로서는 최대의 크기다.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75m, 남북 약 384m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진시황의 무덤은 모두 11개나 된다고 한다. 진시황은 사후에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꺼려서 유사한 무덤을 중국의 여러 곳에 축조했다. 그런데 서안의 진시황릉이 가장 진짜일 가능성이 큰 이유는 이곳이 진시황의 고향이라는 점이다. 중국인들은 죽어서 고향에 묻히는 것을 가장 큰 소망으로 여겼다. 다음으로는 병마용갱의 발견이다. 진시황릉 바로 옆에서 발견된 병마용갱은 진시황 생전의 친위부대의 모습을 진흙 인형으로 만든 것인데 실물 크기의 정교한 대군단의 모습은 그의 사후세계에 대한 소망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능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수 백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의 양 옆으로 석류나무 과수원이 있다. 그러니 봉분 자체가 야산이고 석류나무 과수원인 셈이다. 이런 거대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무려 70만명의 인부가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거대한 무덤 속에는 황실 보석창고 그리고 거대한 석각중국지도가 있고, 도굴을 막기 위해서 기궁이라는 자동발사되는 화살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을 사후세계의 궁전으로 건축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의 호위 군사와 전차군단을 진흙 인형으로 지하에 배치했는데 이른바 병마용이다. 진시황병마용(秦始皇兵馬俑)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굴했다고 한다.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진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진시황의 사후에 그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것이다. 1974년에 발견된 후로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3개의 갱(坑)이 발굴되었는데, 그 가운데 1호 갱에만 6,000여 병마가 실물 크기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어 금방이라도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고 달려나올 것만 같다.
1호 병마갱은 거대한 돔으로 덮인 갱으로 병마용 박물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갱의 깊이는 5m이고 면적은 14260평방미터이다. 갱내에는 약 6000여 개의 사람모습을 한 토병과 말이 있는데 가운데를 중심으로 동쪽을 바라보며 줄을 지어 정열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남쪽과 북쪽가의 토병들은 동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남쪽의 병사는 남쪽을, 북쪽의 병사를 북쪽을 바라보며 서있다. 또한 동쪽에 있는 가로 3열의 178-187Cm크기의 토병들은 무사토용(武土傭)으로서 손에는 먼 곳을 저지할 수 있는 궁수병기를 쥐고 있다. 그 뒤로 약 6000여명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정열하고 있는데 손에는 창과 극 같은 긴 병기를 들고 서있다. 대체로 중장비한 주력부대로 짐작된다.
2호 병마갱은 규모는 약간 적지만 1호 갱보다 다양한 모습이다. 보병, 기병. 전차 등의 3개 병종을 혼합한 부대의 성격이다. 1호 갱이 일반 주력부대라면 2호 갱은 주력부대를 보조하는 기동력 중심 부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갱내에는 기마병, 보병, 궁병과 전차들이 혼합된 대형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크게 4등분을 하여 나눌 수 있는데 궁병들이 모여 있는 궁병용 부대, 말과 전차가 있는 전차병 부대, 보병, 기마병이 혼합되어 있는 부대. 기마병만 있는 부대 등 4개의 부대가 서로 독립된 단위로 배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병마용은 약 1300여건이며 전차 80여 량과 함께 다량의 금속병기가 출토되었다. 평면은 곡(曲)자 형태로 되어있다.
3호 병마 갱은 3개의 갱중 규모가 가장 작고, 병마용의 수도 가장 적다. 규모는 가장 작지만, 그 역할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2개의 갱은 전투 대열로 진열되어 있지만, 이것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통로 양쪽에 정렬해 있는 모양이 아마 지휘기관을 보위하는 경호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사슴뿔, 짐승뼈 등이 출토되었다. 면적은 520평방미터이다. 이곳은 1호와 2호 갱을 통솔하는 지휘본부로서 6개의 토기 병마용과 4마리의 말과 1대의 전차가 함께 출토되었다. 평면도는 凹자형태로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병마용 갱은 진시황이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의욕에서 나온 것이다. 진시황의 무덤은 그가 황제로 즉위한 열세 살 때부터 시작한 것이며 50세 죽기까지 완성하지 못한 대 역사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가 묻힐 관은 동으로 주조하였으며 무덤 내부는 궁전과 누각 등의 모형과 각종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리고 수은으로 황하, 양자강 및 바다를 본 떠 만들고 수은을 계속 흐르게 하였으며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해와 달과 별들이 반짝이게 하여 지상의 세계를 그대로 펼쳐 보이도록 했다. 아울러 고래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조명시설도 해놓았다. 또한 내부에는 활을 설치하여 도굴자가 침입할 때는 즉시 자동 발사 될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시황이 죽어 시황릉에 매장되자 후궁들도 모조리 생매장되었으며 매장 직후에는 비밀유지를 위하여 능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그어 매장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두 그 안에서 생죽음을 당하도록 하였고, 무덤 위에는 나무를 심어 산처럼 보이도록 위장하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공을 들인 것은 무덤만이 아니다. 살아 생전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궁전을 계획했다. 이른바 아방궁이다. 아방궁의 규모는 동서의 길이가 약 700m, 남북의 길이가 115m로서 1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을 수 있고, 아래층에는 약 11.5m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이나 높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곧바로 남산으로 통하는 고가도로를 만들었으며 위수를 건너 함양으로 연결되는 복도도 만들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아방궁이 완성되기도 전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러한 대 역사를 진행한 진시황이니 만치 폭군으로서의 면모도 유감 없이 발휘된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지 8년째 되던 기원전 213년. 달과 해가 비추는 곳에 사는 모두가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나라의 기틀을 잡고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고심하던 시황제는 ꡐ옛 것을 스승 삼지 않으면 나라가 오래가기 어려운 법ꡑ이라는 충신들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당장 제자백가의 저서를 포함한 모든 저작물을 불태우게 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조상의 지식으로 당시를 비난했던 유생 460명을 교외로 끌고 가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전대미문의 문화적 대란인ꡐ분서갱유(焚書坑儒)ꡑ 사건이다.
이러한 시황제의 광기는 추한 외모로 태어나 사랑받지 못해 겪었던 극심한 우울증에서 비롯됐다는 주장도 있다. 불로장생에 집착했던 것도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였다는 해석이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시황은 어떻게든 미래에 닥쳐 올 죽음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시(徐市)라는 신하에게 어린 소년 소녀 3천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배들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로장생의 약초와 약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서시일행은 끝내 영약을 구하지 못하고 일본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진시황은 그 누구보다 삶에 집착한 인물이다. 살아서 만리장성을 쌓아 그 위엄을 온 사방에 떨치고, 장엄한 크기의 아방궁을 지어 화려한 생활의 극치를 누렸다. 불노초와 불사약을 구하겠다고 광분했고, 죽어서도 황제의 지위를 누리고자 지하 궁전을 지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고작 50세였다. 그 화려한 아방궁은 어디에 있는가? 주지육림의 사치가 생명과 무슨 관계던가? 스스로 영원히 살고자 생매장한 그의 후궁들과 신하들, 그리고 400여명의 유생들의 목숨은 어찌 되었나?
남을 죽여서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 폭군의 어리석음이여. 남의 생명을 지켜주고 가꾸어 주는 데서 자신의 생명도 연장되는 것이다. 생명이란 부와 권력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다. 신선의 삶이란 가진 것이 없어 유유한 것이고 죄를 모르기에 천진한 그대로며 자연의 순리대로 구름처럼 바람처럼 살기에 영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진시황의 광기에 찬 위엄과 권력 그리고 생명에 대한 특별한 애착은 인간 생명의 본질을 알지 못한 폭군의 생명을 단축시킨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 권력의 무상함과 허망함이 인간에 회자됨으로써 후대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
첫댓글 "생명이란 부와 권력으로 윤택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이야기를 들려 주시니,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입니다. 그 위치에 오른 진시황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을 또 누가 깨닫고 아름답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