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11/17 07:38 정운현
- 도봉리 집으로 찾아든 식객들
비단 집안일 만이 아니었다. 부친의 이름을 앞세워 찾아오는 식객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김장도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부친은 서울생활을 접고 도봉리로 내려왔다. 부친이 귀가한 후 2, 3일이 지나면 그 때부턴 나그네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여름철이면 그래도 서울서 비비고 지내기라도 하지만 추운 겨울이 닥쳐오면 이들은 갈 데가 그리 마땅치 않았다. 요즘처럼 지하철에서 노숙을 할 형편도 못됐다.
종철은 “식객 가운데는 한 사람인 박갑동씨는 그곳에서 겨울을 여러 해 보냈는데 무위도식했다”고 기억했다. 박씨 외에도 여러 해 머문 식객으로 김석지 ․ 석종 형제가 있었는데, 김씨 형제는 농사일도 거들어주었다. 특히 석종은 흙벽돌로 집을 지을 때 거의 혼자서 도맡아 일을 했다고 역시 종철은 기억했다.
(* 순화는 식객 가운데 ‘김국태’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는데, 그 사람에 대한 종철의 증언은 다르다. 종철은 “김국태는 우리 밭 1천 평 정도를 빌려 양계사업을 하던 사람으로, 당시 우리집은 서원내(書院川)-현재 도봉동 한신아파트 자리-에 있었고, 김국태씨 양계장은 성균관대 야구장 서쪽 끝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도봉리 시절 가족 사진. 왼쪽부터 경화(중1), 한 사람 건너 모친, 신화, 순화
식객들은 추운 겨울 동안 도봉리 집에서 그런대로 편안한 생활을 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해동하고 봄이 돌아오면 제일 먼저 서울행 바람을 잡는 사람은 그의 부친이었다. 부친은 모친에게 ‘여보, 서울 가게 여비 좀 주오!’ 하고 손을 벌렸다. 이미 그 시대 남정네들에게 염치라는 건 없었던 것 같다. 궁벽한 시골에 현금이 있을 리 만무하다.
결국 봄부터 여름까지 뙤약볕에서 어린 딸년들 데리고 농사지어 재여 놓은 콩 팔고, 깨 팔아서 몇 푼 장만 하면 남편이란 작자는 그걸 받아들고는 휑하니 서울로 가버리곤 했다. 사랑방 주인이 떠난 마당에 식객들이 남아 있기란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면 그 넓은 토지엔 다시 모친과 종철 ․ 종한 형제와 어린 딸년들만 내팽개치듯 남겨졌다. 그 무렵 큰아들은 공부한다고 서울로 나가 있었다. 장남 종국이 경성사범과 음악학원을 전전하던 바로 그 무렵이다.
천도교 일 본답시고 도봉리 집과 서울을 오가며 거지반 ‘반(半) 건달’처럼 지내던 부친은 모친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늘 재만 저지르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해동하면 아내 졸라 여비 얻어서 서울 간 부친이 다시 집으로 오는 때는 ‘하지감자’를 캘 무렵이었다. 모친은 그걸 팔아 몇 푼 목돈이 생기면 그걸로 겨우 가용을 쓰곤 했다.
그런데 꼭 그 때쯤이면 다시 부친이 찾아와 손을 벌리는 것이었다. 돈이 필요하면 아내가 챙겨줄 때까지 가만이나 있든지 하지 감자 시세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서더니 중간상인에게 속아 싼 값에 밭떼기로 팔아 치운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는 집안엔 한 푼도 안주고 그 길로 돈을 갖고 서울로 가버리곤 했다.
집에 남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은 대체 뭘 먹고 살라는 건지.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는 남편과 큰아들에게 정성을 다했다. 아들은 서울서 하숙하느라 고생한다고, 남편은 나라일 교회일 하느라 고생한다고 닭 삶고 떡 해서 머리에 이고 비포장길 30리 길을 걸어 서울로 향하곤 했다. (*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도봉리 집에는 모친과 2남 3녀가 살았다. 종국도 경성사범 시절에는 더러 기차통학을 하기도 했다)
해방이 되자 정당과 정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에 자극받아 천도교에서도 포덕 86년(1945년) 9월 14일 천도교청우당을 부활하였다. 천도교청우당은 단지 종교적 활동만이 아니라 ‘신국가 건설’과 같은 정치적 활동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천도교청우당 본부는 같은 날 각 부서 책임자를 선정하였는데 임문호는 12명의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천도교 내 신-구파간의 갈등 끝에 구파가 분립을 결정한 이듬해 5월 천도교청우당 확대중앙위원회에서 임문호는 다시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이 무렵 천도교청우당은 170개 당부와 15만 당원을 갖고 있었다. 천도교청우당은 정치이념으로 계급해방을 주장했다. 즉 대지주와 자본가를 본위로 한 구경제제도를 개혁하고, 그 토대 위에 전 민족의 생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만한 신경제제도를 수립하자 주장했다. (<천도교청년회80년사>, 천도교청년회중앙본부, 2000)
이런 가운데 1946년 초 천도교 구파가 이승만과 제휴하여 미군정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천도교 신파가 주도하던 천도교청우당 내 일부 청년들은 사회주의자와의 제휴를 모색하였다. 그해 2월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33개 단체, 398명의 대표가 참석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을 때 천도교청우당 대표 10명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1947년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기도하자 천도교청우당은 성명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지원 하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2월 26일 천도교청우당은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정리, 해체되었다. 이로써 천도교청우당 간부로 있던 임문호는 잠시 대외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 거의 전역을 전장터로 만들었던 6.25 전쟁은 이 집안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다행히 가족 중에 희생자는 없었지만 삶의 터전이 크게 망실되고 그로 인해 이후의 사람에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 이 집안의 상황을 종철의 증언으로 들어보자.
“6.25 발발 당일 형(종국)을 제외한 2남 3녀 모두 집에 있었다. 부모님은 서울 (천도)교당에 가셨다가 오후에 귀가하셨다. 26일(월) 막내를 제외하고 모두 등교했다. 서울로 학교 갔던 남형제들은 모두 일찍 귀가했다. 모친은 낮부터 피난 가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부친은 ‘국군의 해주 점령’ 라디오 방송을 이유로 피난을 거부하고 있다가 집 근처에 박격포탄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피난을 가기로 결심하셨다. 그날 밤 경원선(창동), 경춘선(월곡)을 따라 피난하던 우리 가족들은 월곡역에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서울에 도착했다. 경운동 천도교당에 들른 다음 와룡동 부친 친지 댁에서 1박 했는데 그날까지 도강편(渡江便)을 못 얻었다.
28일 새벽 탱크 굉음에 깨어 창덕궁 앞으로 가보니 인민군 탱크병이 ‘총독부가 어느 방향이냐’고 시민들에게 묻더라. 부모님이 교당에 다녀오신 후 점심을 먹고 우리 가족은 와룡동-원남동 로터리-명륜동-돈암동-길음동-수유리-창동을 거쳐 도봉동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인민군 시체는 안보였다. 모두 치운 것 같았다. 그러나 전사자나 부상병들의 것으로 보이는 검붉은 핏자국이 여럿 있었다. 반면 국군의 시체는 도처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가장 처참했던 것은 수유3거리에서 본 것인데, 상체는 탱크에 치여 흔적도 없고, 골반 이하 두 다리만 붙어 있었다. 또 집 근처 웅덩이 물속에 마치 배에 바람 든 개구리처럼 불어 있던 국군 시체를 본 적도 있다”
6.25 전쟁이 나기 1년 전 쯤의 일이다. 여동생 순화는 종국이 오빠가 평소 애지중지하던 첼로를 산산조각 내고 집을 뛰쳐나간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아마 종국이 음악학원을 다니다 때려치우고 진주 큰집으로 보따리를 싸서 내려가던 시점인 것 같다. 그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순화는 큰오빠로부터 부모님에게 온 반가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고향 창녕에 가서 지내다가 경찰에 들어가 잘 근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는 내용이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그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입수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을만한 것은 그가 경찰 재직시절 자필로 쓴 이력서였다. 이 이력서는 경찰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입수했는데, 상태도 좋을 뿐더러 그 자신이 자신의 지난 행적에 대해 날짜까지 자세히 기록한 것이어서 그의 궤적을 따라잡는데 큰 보탬이 됐다. 그가 자필로 기록한 경찰 근무 당시의 기록을 옮겨본다.
종국이 자필로 쓴 이력서. 끝 부분에 경찰 근무 기록이 보인다
1949. 7. 29 경남 경찰국 경찰학교 입학
1949. 8. 29 경남 경찰국 경찰학교 수료
경상남도 순경을 명함
합천경찰서 근무를 명함
1949. 9. 20 합천경찰서 대병지서 근무를 명함(20호봉)
1950. 6 직할외근 근무를 명함
1952. 4. 6 의원면직
이력서로 보면 그는 3개월 모자라는 3년간 경찰 근무를 한 셈이다. 당시에는 지방 경찰국에서도 경찰관 양성을 했던 모양이다. 교육기간은 불과 1개월이었다. 첫 발령은 합천경찰서였으나 이내 관할 대병(大幷)지서로 옮겨 근무하다가 6.25가 나자 외근을 한 것으로 돼 있다. 실지로 그는 공비토벌에 참가했었다. 동생 종철은 “형이 카빈총 들고 공비 잡으러 다닌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력서에는 없지만 종철에 따르면, 종국은 인근 삼가(三嘉)지서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삼가지서에서 형이 순찰을 나갔는데 정복차림이었다. 그런데 미 공군이 형을 인민군인 줄 알고 폭격을 했다. 그런데 용케 화를 면해 지서로 복귀했더니 지서에서는 ‘임 순경이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 왔네’라며 반기고는 ‘조상묘를 잘 써서 살았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 6.25 와중 경남 합천서 3년간 경찰관 생활
그의 경찰 입문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 자신이 기록으로 남긴 바도 없고, 그의 주변사람들에 경찰 경력을 말하길 꺼려했다. 부인 이 여사는 “남편이 남 앞에 대놓고 과거에 경찰관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말하길 꺼려했다. 6.25 전쟁이 동족간의 싸움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빨갱이 토벌에 나선 것이 말하기가 좀 그랬던 모양”이라고 증언했다. 3남 정택은 부친이 경찰관을 지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천안 시절 그가 막내여동생 경화에게 들려준 경찰관 시절 얘기 속에서 그런 것을 겨우 추측할 뿐이다. 대략 요약하자면, 음악공부 때문에 모친과 갈등 끝에 큰집으로 ‘피신’을 했는데 그곳에서조차 정을 붙이지 못하자 그 괴팍한 성격에 경찰로 ‘도망’을 간 것이 아닐까 싶다. (* 해방 직후 친일경력자들이 가장 많았던 집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찰이었다.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친일연구가’로 일생을 바친 그가 한 때나마 경찰에 자진해서 찾아가 근무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의 육십 평생에서 3년간의 경찰관 경력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다만 거머리가 무서워 모심기조차 힘들어 했던 그가 해방직후 격동기에 경찰관을 ‘징집’도 아닌 ‘자원’을 했다는 점은 그의 또 다른 면모 하나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그의 경찰관 경력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입문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종국이 경화에게 들려준 경찰 시절의 일화는 적지 않다. 여름밤이면 그는 툇마루에서 경화를 앉혀 놓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경찰근무 시절 얘기를 자주 들려주곤 했다. 이 분야의 유일한 증언 같아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오빠는 꿈에 인민군만 보면 현실에서도 꼭 인민군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정찰을 나갈 때면 간밤 꿈에 인민군을 보았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고는 보았으면 비번으로 빠지고 안보았으면 아주 용감하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정찰을 했다고 했다. 어느 날 또 수색을 나간다고 하는데 몸도 안좋고 꿈자리도 안좋아서 지붕 위에 올라가 잠을 잤는데 한참 자다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깨어보니 수색나간 동료들이 머리가 터지고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왔더란다.
산 밑 도로를 따라 수색을 했는데 바로 위에서 빨치산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해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또 어느 날 (지서)서장과 같이 마을 순찰을 나갔는데 서장이 왔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닭 잡고 술을 내 와 아주 잘 먹고 밤에 자는데 (왠지 불안해서) 오빠는 이집 저집 장소를 바꿔 잤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꽝! 하는 폭발소리가 나서 달려가 보니 서장이 자는 방에 빨치산이 수류탄을 던져 서장은 머리가 터져 골이 밖으로 나왔는데 그 양이 엄청나더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게 있다. 막내여동생 경화가 이런 내용을 들은 건 그렇다고 치고 어떻게 이렇게 소상히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그건 경화가 종국 오빠한테 들은 얘기를 그날그날 일기로 메모를 해두었기 때문이다. 일전에 수원 집으로 찾아갔을 때 경화는 내게 그 때 메모한 여러 권의 노트를 보여 주었다. 경화의 증언은 계속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고 했다. 인민군이 총공격을 해오자 너무 무섭고 떨려서 방공호에 들어가 하늘에다 총 한 방을 쏘고는 동료들과 같이 들고 뛰었다는 것이다. 밤이 되자 산속은 칠흑같이 어두운데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을 찾아 산길을 내려오자 그 때는 이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저 앞에 사람이 오길래 동료인줄 알고 암구호를 댔는데 알고 보니 인민군이어서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산으로 끌려가 인민군 대장 앞에 무릎을 꿇였는데 대장이 순경노릇 한 것이 잘한 것이냐고 묻기에 잘못했다고 했더니 밥을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얘들이 밥이나 먹이고 죽이려나 싶어 죽기 전에 밥이라도 맘껏 먹어두자며 식사를 했더니 다 먹고 나자 죽이기는커녕 그냥 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안죽이냐고 했더니 빨리 가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냅다 뒤도 안돌아보고 달렸다는 것이다. 그 길로 밤에는 길로, 낮에는 산속에서 잠을 자며 걸어서 고향 창녕까지 오는데 그 때는 병도 안나더라는 것이다. 목이 말라 논물을 마시려고 보니 군데군데 소똥이 둥둥 떠 있는데도 깨진 사발을 주워 그 물을 떠먹었는데도 이질은커녕 배앓이도 없었단다. 고향에 오니까 죽은 줄 알았던 조카가 살아서 돌아왔다며 (성산면 큰집에서) 닭을 고아 먹이고 쌀밥을 해줘 그걸 먹고 병이 나서 한 달을 아팠다고 했다”
대 초반 3년간 경찰로 근무했던 합천을 다시 찾은 종국(왼쪽). 당시 이곳은 합천댐 공사중이었으며, 뒤로 보이는 정자는 용문정(1984년 촬영)
노골적으로 자신이 경찰관이었다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가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에서 당시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 그는 글 속에서 ‘피난’을 ‘패주(敗走)’라고 적고 있다) 그는 피난길에서 죽어나자빠진 젊은이들의 시체를 보면서 위정자들에게 분노를 느낀 나머지 “나라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을 찾아내서 간이라도 씹기 전에는 죽어도 눈이 안 감길 것 같은 분노였다”고 격분해 했다.
아마 당시 군부의 부패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국민방위군사건’ 같은 권력층의 부패와 비리를 두고 한 얘기가 아닌가 싶다. 나중에 그는 대학갈 때 정치학과를 지망했는데 이는 고시를 봐 판검사나 벼슬을 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피난길에서 목격한 처참한 장면을 보고 자기가 위정자가 되어 세상을 바로잡아 보겠다는 야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 피난길에 싹튼 ‘고시공부’의 꿈
“판검사를 향한 나의 꿈은 원래 6.25 피난길에서 싹튼 것이었다. 전북 장수군에서 경남 함양군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육십령 고개가 있다. 남덕유산과 북덕유산을 가르는 곳으로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수기 ‘남부군’에도 등장하는 험한 곳이다. 나는 그곳에서 인민군에게 잡혀 안의(安義)로 가는 수 십리 내리막길을 그들의 짐을 진 채, 행렬을 따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밤길을 걸을 때는 몰랐는데, 동이 트면서 드러난 눈앞의 광경은 처참하였다. 7월의 푸른 벼 포기 사이로, 논물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내 나이 또래의 젊은이가 죽어 자빠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시체라 머리칼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끼면서 발을 옮기는데, 열 발자욱을 못가서 또 하나의 시체와 맞닥뜨렸다. 간밤 육십령 고개에서 저항하던 아군의 군경 부대원이었다. 지프차로 추격하면서 기총소사를 해댄 바람에 신작로를 따라 패주하던 엄청난 숫자의 아군들이 무우청 잘리듯이 죽어 자빠졌다고 했다.
열 걸음이 멀다하고 늘어선 시체를 보고 심장이 얼어붙는 공포를 느끼던 것도 처음의 몇 구에서였다. 그 수가 여남은에서 스물을 넘기자 공포는 어느새 이글거리는 분노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국방과 정치를 어떻게 다루었기에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못돼 이곳 경상도까지 밀린단 말인가? 점심을 평양, 저녁을 신의주에서 먹는다더니, 누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죄 없는 청춘들만 저렇게 죽어 자빠져야 하는 것인가? 안의에 이르러 인민군 여덟을 무우밭에 끌어 묻어준 후 나는 인민군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낙동강을 넘으면 고향인 창녕 땅. 가도 가도 황토길,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나는 줄곧 분노로 가슴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라꼴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을 찾아내서 간이라도 씹기 전에는 죽어도 눈이 안 감길 것 같은 분노였다.”
-- (‘술과 바꾼 법률책’, <한국인>, 1989년 1월호)
그의 태(胎)자리 창녕을 돌아본 나와 3남 정택은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창녕에서 60km를 달려 오전 11시경 우리는 한 때 그가 근무했던 합천경찰서 대병지서(현 대병파출소)에 도착했다. 행정구역상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 위치한 대병파출소는 그곳으로 치자면 신도시였다. 합천댐 공사로 일대가 물에 잠기면서 댐 상류지역에 새로 형성된 면 소재지에 위치해 있었다.
파출소로 들어가는 도로 양쪽에는 면사무소, 농협, 보건지소, 우체국, 초중등학교 등 이른바 시골 면소재지에서 만날 수 있는 하급단위 공공기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마는 천안 가는 길에 간판 사진이라도 하나 찍을 요량으로 우린 그곳으로 향했던 것이다.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다. 먼저 볼일부터 보기로 하고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무실 안에는 소장을 포함, 3인이 근무하고 있었다.(전체 직원은 9명) 우린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파출소장 강경수(1961년생) 경위는 친절하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강 소장에 따르면, 대병지서는 합천댐 조성으로 수몰지구 속으로 사라졌고, 현 대병파출소 청사는 1986년 11월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옛날 직원들 자료 같은 게 보존돼 있느냐고 물었더니 파출소 관련 자료는 3년마다 상급기관인 합천경찰서로 이관한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강 소장은 “대병지서는 6.25 때 합천군 내에서 유일하게 인민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곳으로, 이 때문에 면사무소의 호적자료 등도 온전하게 보존돼 있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다. 지역주민들도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 강 소장은 입구 안쪽 벽에 걸린 옛 대병지서 청사 사진을 알려주었다. 사진속의 건물은 시골 면 소재지에 있었음직한 그런 낡고 작은 지서 건물이었다. 강 소장은 “과거 일제 때부터 사용돼 온 대병지서 청사”라며 “선생님들이 찾는 그 분이 이곳에 근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옛 대병지서의 청사 사진 한 장에 만족해야 했다.
수몰되기 이전의 대병지서 청사
1986년에 새로 지은 대병파출소 청사
종국이 경찰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동생 종철의 대학 진학이 계기가 됐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의 가족들은 고향 창녕으로 피난을 가 생활하고 있었다. 그 때 종철은 1952년 3월 보성고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준비 중이었다. (* 종철은 3월초에 대학시험을 보았고 입학식은 4월 6일이었음)
그의 모친은 둘째 아들 종철이 대학을 가게 되자 그러면 첫째 아들도 대학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장남 종국을 경찰에서 데려오자고 설득했고, 부친은 곧 합천으로 가서 그를 데려왔다. 종철이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것이 1952년 4월이고, 종국이 경찰서에 의원면직한 날이 같은 해 4월 6일이니 시기적으로도 일치한다. 이로써 종국은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한편 당시 그의 일가족은 창녕 읍내 ‘산정집’으로 불리는 하곤양씨 댁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다. (* 당시 하곤양씨 댁 주소는 ‘창녕군 창녕면 신당동 65번지’일 가능성이 크다. 종국은 가족들이 피난시절 대학에 입학했는데 그의 고려대 학적부에는 이 주소가 종국의 ‘주소지’로 나와 있다) 이 집은 큰 마당이 세 개, 마당의 연못에는 작은 섬과 정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집이었다. 훗날 경화가 커서 이 집엘 다시 가보았더니 그 자리엔 군청, 유치원이 들어서 있더라고 했다.
당시 이 집에는 그의 가족들 말고도 경산댁 가족 등 네 가구가 살고 있었다. 경찰 생활을 정리하고 3년 만에 귀가한 종국오빠의 모습은 어린 여동생 경화의 눈에는 낯선 모습이었다. 그는 긴 머리에 검정바지, 회색 잠바 차림이었다. 그리고 손에는 검은 가방을 하나 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반가운 마음에 경화가 마당까지 쫓아나가자 그는 ‘들어가자!’며 경화의 손을 잡았다. 그가 들고 온 가방에는 송이버섯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말하자면 탕아의 ‘귀가 선물’이었다고나 할까.
비록 피난살이였지만 창녕 시절 집안엔 모처럼 화기가 돌았다. 전쟁통이니 부친도 서울 일보러 간다고 할 일이 없어져 늘 집을 지켰고, 장남 종국의 귀가로 더욱 집안 분위기가 좋았다. 그 와중에 차남 종철은 서울대 전체수석(* 당시 전체 2등은 남재희 전 의원)으로 입학해 집안에 경사가 겹쳤다. 그의 가족들은 모처럼 한데 모여 한솥밥을 지어먹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저녁이면 종국의 기타 반주에 맞춰 온 가족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더러는 친교하고 지내는 동네 유지의 집을 방문해 기타 반주와 노래를 선물하기도 했다. 순화는 “그 시기가 우리 가정으로선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피난지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은 여전히 그의 모친이었다. 모친은 현지 부인회 총무로 일하면서 당시 제2국민병으로 소집돼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던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군내 읍, 면, 동을 다니며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부친은 그 와중에 잠시 민선 창녕면장 (* 혹자는 ‘창녕읍장’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창녕읍은 1960년 1월 1일부로 창녕면에서 승격했다. 초대 창녕읍장은 하성도이며, 그의 재직기간은 1959. 4. 24~1960. 12. 1일이다)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재임 중 판공비 집행 등을 제대로 영수증 처리해두지 않은 탓에 도중에 면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친의 끈질긴 진상규명 노력 덕택에 부친은 혐의를 벗고 명예도 회복하였다.
고향친구인 화가 하인두와 종국의 부음을 전한 신문기사
‘한많은 피난살이’는 3년간의 전쟁이 끝나서야 막을 내렸다. 남북간에 휴전협정(1953. 7. 27)이 맺어진 1953년 가을 그의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3년 만에 찾아온 집은 옛집이 아니었다. 집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피난가면서 묻어놓고 갔던 세간도 군대 주둔으로 다 파헤쳐져 사라지고 없었다. 농장 대부분을 군대가 주둔해버려 졸지에 생활의 터전을 잃게 됐다. 식구들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집안에 식객이 하나 있었다. 종국의 친구인 서양화가 하인두였다. 그는 종국과 같은 날(1989. 11. 12) 타계했다. 두 사람은 고향친구였고, 하인두가 종국보다 한 살 아래였다.
이 집안 식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상경한 사람은 종철이었다. 당시는 도강증(渡江證)이 있어야 서울에 갈 수 있었는데 임시수도인 부산에 있던 국립대학인 서울대생들에게 도강증이 우선적으로 발급되었기 때문이다. 1953년 8월경 서울에 도착한 종철은 우선 도봉리 집을 둘러보고는 창녕으로 내려가서 가족들과 같이 상경하였다. 이들이 상경해서 머문 곳은 도봉리 집이 아니라 성북동 58-19번지였다. 그곳 문간방 한 칸을 빌려서 식구들이 일시 체류했었다. 종국은 대구에서 올라와 고아원(부친의 지인이 경영하는 곳인 듯)에서 사무보조원 형식으로 고아원에서 기식(寄食)하면서 지냈다. (* 종철도 부산서 대학 다닐 때 부친 지인의 소개로 초량(草梁) 소재 제3부두 노동자합숙소에서 합숙소 일을 봐주며 기식하면서 1년 반을 지내기도 했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