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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 혁명”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
오세철
1.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이다.
흔히 1990년대와 달리 21세기의 10년을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03년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좌파인 네스토르 키르크너의 대선 승리, 2004년 우르과이 로자스의 대선 승리, 2005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의 대선 승리를 통한 ‘볼리바르 혁명’의 강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의 대선 승리, 브라질의 룰라에 이은 노동당의 대선 승리, 칠레의 중도좌파 베케레트의 승리로 라틴 아메리카의 인구 중 4분의 3이 이른바 “좌파” 정권 아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미의 하이티, 니카라과, 멕시코까지 포함하여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전선이 세워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변화는 맑스주의 혁명가들에게 몇 가지 당면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 째, 지난 수십년간 생활수준이 극도로 저하된 이 지역에서 좌파 정권이 노동계급과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무엇인가? 둘 째, 지난 20년간 미국 헤게모니가 부과했던 신자유주의를 거부할 것인가? 셋 째, 미제국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가? 넷 째, 자본주의와 그 지배법칙에 ‘급진적’ 도전이 될 수 있는가? 이다.
라틴 아메리카는 수십년간 보호주의, 경제적 민족주의, 그리고 좌우의 민중주의적 독재가 노동계급과 대중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가난을 극복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중도우파 정권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부르주아권력이 연합한 「워싱턴 컨센서스」가 결국 노동자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과 빈곤 퇴치에 실패함으로써 대중투쟁과 파업, 그리고 다양한 사회투쟁이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70년대까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주의 좌파정권은 수입대체산업, 보호주의, 국유화, 그리고 외국인 투자에 대한 장벽으로 대표되는데, 21세기 좌선회는 이러한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헤게모니에 어떤 위협이 될 수도 없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아옌데 정부 이후 칠레에 부과된 구체적 경제정책과 연관된 80년대와90년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아니다. 다시 말해 미국 투자를 촉진시키는 국유 기업의 사유화나 엄격한 재정금융정책의 부과가 아니다. 오늘날 미국 헤게모니의 본질은 IMF가 마련한 표준인 국가의 재정적 “책임”, 자본과 상품을 위한 자유시장에 대한 기본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은 무자비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정부는 가치생산의 제약과 사회적 폭발을 방지할 필요 사이에서 운신할 여지가 적기 때문에 자본주의 지구화의 기본규칙과 규범에 도전할 수 없다. 더구나 민중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와 대중은 코카를 씹는 것이 배고픔을 달랠 수는 있어도 근본적 문제 해결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신스탈린주의 「Monthly Review」는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당선을 ‘세계의 역사적 사건’으로 칭송하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1) 또한 챠베스는 사회주의와 반(反)양키의 수사학을 넘어서서 자신의 모델을 ‘시장 사회주의’의 하나로 주장하지만 그가 수장으로 있는 남미 자유무역지역(Mercosur)2)는 사실상 반(反)양키를 위장한 자본주의 지구화의 핵심적 요소를 암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따라서 한 마디로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는 미국자본의 경제 헤게모니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국의 경제 헤게모니가 아닌 군사·정치적 헤게모니에는 도전할 수 있을까? 미국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반과 군사·정치적 기반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의 위협과 도전 역시 실질적이 되지 못하고 수사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일지라도 미제국주의와 그 전략적 목적에 대한 반대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보기를 들어 히틀러와 스탈린이 미국의 지구적 비재를 반대했어도 세계의 맑스주의 혁명가들은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차베스, 모랄레스, 오르테가 등의 수사가 반미의 경제적이고 군사·외교적 정책의 진정한 주도권을 가지고 변화될지라도 지금의 조건 아래에서는 그러한 정책 전환은 반(反)자본주의적이지도 않고 혁명적이지도 않으며, 좌파 정부의 의제도 아니다. 여전히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무역 파트너이며 투자 자본의 가장 큰 원천이다. 반자본주의가 때때로 미제국주의 반대, 볼리바르주의, 민족주의, ‘자유시장’의 거부, 자주경제와 동일시되고 부의 분배 양식의 급진적 변혁과 동일시되지만 자본주의 구조의 혁명적 전복과는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동계급과 대중에 대한 통제를 유지하는 것뿐이며, 그것은 양키 악마에 맞서는 대중을 동원하여 라틴 왕국을 꿈꾼 부르주아 혁명의 노예주이며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닮는 것이다. 이는 <연재 4>의 마오주의의 환상과 비슷하다. 늘어나는 실업자와 빈민에게 복지와 공공사업을 통한 시혜는 자본주의의 동전의 양면인 강제노동과 같다. 이것이 라틴 아메리카의 좌선회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이며, 오히려 이에 맞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국가를 다룰 수는 없으므로 부르주아 혁명의 대표적 보기로서 쿠바 혁명과 억압, 그리고 선거 사회주의의 대표적 보기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주의를 검토하려고 한다.
2. 쿠바, 카스트로, 체 게베라, 그리고 억압
1931-33년 임시 대통령 쎄스페데스에 쿠데타를 일으킨 바티스타는 1940년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1952년 다시 쿠데타로 집권한 뒤, 지방 인민사회당의 지지를 받았다. 쿠바 경제는 급성장했으나 도시와 농촌 사이에 빈부 격차가 벌어졌다. 1958년 하바나에는 성매매 여성이 11,500명에 달했으며 부패가 극심했다.
멕시코에서 「7월 26일 운동(M-26)」이라는 게릴라를 결성한 카스트로는 1958년 11월 7일 체 게바라와 함께 하바나로 진군하여 1959년 1월 8일 수도에 입성한다. 5개월 동안 바티스타 지지자 6백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광장에서 로마식 공개 처형으로 이루어져 전체주의적 테러의 양상을 띄었다. 혁명 직후 카스트로는 뉴욕 타임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권력에 관심이 없다. 승리 후에 고향 마을로 가서 변호사를 하고 싶다”고 했지만, 1976년까지 대통령령으로 지배했으며 정적에 대한 탄압이 지속되었고, 혁명 동지들을 교체했고, 1976년 소련 모델의 헌법을 제정했다.
노동자는 억압받는 또 다른 대상이었다. 1962년 8월 설탕 노조 지도자인 살바도르가 체포되고, 12년 동안 수감되었다. 교육과 예술 분야의 민주인사들에 대한 탄압도 지속되었는데, 1961년9월 17일 131명의 신부가 국외로 추방되었다. 산업부 장관과 중앙은행장을 역임한 체 게바라는 쿠바에 소련 모델을 이식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 혁명의 숭앙자였다. 1960년 쿠바에 노동수용소를 창설한 사람은 카스트로가 아니라 체 게바라였으며 ‘새로운 인간’의 숭배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쿠바 청년을 군사화한 기술자였다.3)
카스트로 반대 그룹에 대한 조사와 파괴, 게릴라 운동을 해체하고 강제 노동수용소와 감옥을 운영하는 「붉은 게슈타포(DGCI)」가 1959-1962년에 창설되었는데, 천 명의 정보원을 고용하고 있다. 1995년에는 5만의 군인으로 구성된 특수타격부대(DSP)가 창설되었다. 1960년대 억압기간 동안 7천-1만명이 학살되었고, 3만여 명의 정치범이 수용되었다. 1959년 이후 쿠바에는15,000-20,000명의 양심수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혁명 당시 혁명군이었거나 반 바티스타 운동을 벌인 학생들이었다. 1986년에는 12,000-15,000명의 정치범이 있었는데, 50개의 지역에 분산 수용되어 있고, 나머지는 50명, 100명, 200명 단위로 자유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1959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10만 이상의 쿠바인이 수요소, 감옥, 자유지역에 수용된 경험이 있으며, 15,000-17,000명이 총살되었다.4)
여기서 우리는 쿠바 혁명의 주력부대인 게릴리와 그 지도자인 카스트로와 게바라의 신화를 벗겨볼 필요가 있다. 게릴라 부대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이며 그들이 내건 “맑스주의”는 그들이 스스로 “맑스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반(反)양키저항의 편리한 덮개에 불과하다. 이 게릴라 그룹은 결코 농민 봉기의 표현이 아니었고, 노동계급의 봉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다른 분파를 전복하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군사적 표현이었다. 카스트로의 게릴라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어떤 ‘민중봉기’도 없었다. 피착취계급과 빈민은 권력을 쥔 새로운 주인에게 환호할 뿐 주요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바티스타 군대의 약한 저항에 대항하여 게바라는 결단력과 카리스마로 카스트로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용맹스런 게릴라처럼 보였다. ‘혁명 법정’을 통해 이른바 민중적 정의를 실현하면서 체는 “우리는 총살했고, 아직도 총살시키고 있으며 필요한 한 계속해서 총살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무력에 의해 다른 분파를 제압하는 부르주아지 분파의 전형적인 방법일 뿐이다.5)
카스트로 민족주의 정권은 재빨리 자격을 갖춘 ‘공산주의’로 치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카스트로 정권은 소련이 이끄는 제국주의 진영으로 나아갔다. 주요 군사요원과 민간인이 있고 동구 블록 국가의 비밀 활동이 있는 섬 쿠바의 스탈린주의화는 1962년 미사일 위기로 그 정점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진영’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이들 국가를 방문하는데 여기서 그는 아낌없이 소련을 찬양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사상의 자유가 지배하는 곳”, “자유의 모국”이라고.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열정에 차 있고 모든 사람이 근무시간을 넘어 일하는‘특별한’ 북한과 마오의 중국”을 찬양하고 이어서 동구의 모든 나라들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국가의 성취가 특별하다. 그들의 삶의 체제, 발전의 체제와 자본주의 국가의 삶과 발전 체제를 비교할 수가 없다”라고 추켜세웠다.6)
체 게바라에게서 소련과 그 블록은 ‘사회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진영이었고, ‘하나, 둘, 여러개의 베트남을 만들자’는 슬로건은 “국제주의적” 표어가 아니라 러시아 블록에 우호적인 민족주의적 슬로건일 뿐이었으며, 미국에 대한 증오였다. “민족해방”은 인민의 군사적 동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 이념적 신비화였다. 노동계급이나 다른 피착취계급 어느 것도 이러한 전쟁으로부터 얻을 것이 없었다. 워싱턴의 비밀활동과 각종 마피아가 통제하는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로부터 스탈린주의 블록으로 넘어간 쿠바는 ‘민족해방투쟁’의 비극적인 축약도엿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어하는 국제주의 정도를 벗어난 쿠바의 길은 부르주아 방법인 테러와 국가 자본주의, 다시 말해 자본주의 착취의 가장 잔인하고 전체주의적인 표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스탈린주의와 다른 변동(마오주의로부터 카스트로주의까지)의 공통적 특징 중의 하나는 대중의 뇌 속에 의식을 ‘주입’하는 지식인이 이끄는 ‘힉명의 주체’를 신화적 빈농으로 만들면서 노동계급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이비 혁명가들의 저술 속에서 누구도 계급권력기관인 소비에트를 스스로 조직하는 노동계급에 대한 어떠한 참조도 발견할 수 없다.
체 게바라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대중은 주장하는 것처럼 양떼처럼 행동하는 … 같은 유형의 요소의 합이 아니다. 지도자들, 기본적으로 피델 카스트로를 주저하지 않고 따르는 것은 옳다.…” 피상적으로 보면 국가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다. 대중은 비길 데 없는 열정과 규율로 정부가 정한 과업을, 경제, 문화, 국방, 스포츠 분야에서 수행한다 … 일반적으로는 주도권은 피델로부터, 혁명적 지도부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것으로 만드는 인민에게 설명된다. (「쿠바에서의 사회주의와 인간」, 1965)
쿠바에서 노동계급을 통제하는 주요기관 중의 하나는 놀랍게도 노동조합이다. 쿠바노동조합총연맹(CTC)은 이미 미국식의 노동조합이었으며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그 부패로 완전히 통합되어 있었다. 쿠바 지도부는 이들은 1960년에 관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 모형에 기반한 스탈린주의 노동조합으로 재빨리 전환시켰다. 카스트로 정권의 첫 번째 결정은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는 책임을 지게하고 회사에서 파업금지를 강제하는 것이었다. 노동계급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미제국주의 반대와 ‘쿠바인민의 방어’로 정당화되었다. 쿠바에 있는 미국회사에서 임금 삭감에 대항하는 파업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카스트로 정권의 지도자들은 파업 노동자를 파괴자로 낙인찍었다.
게바라는 다른 누구보다 더 과감한 민족주의적이고 스탈린주의적인 지도자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아직도 카스트로주의라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열대지역의 변종의 대표이기도 하다.
3.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부르주아지 전술과 노동계급에 대한 억압
2006년 12월 3일에 실시한 선거에서의 압도적 승리는 앞으로 6년 동안 부르주아지의 차베스 당파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 전체의 승리를 대표하고 있다. 2005년 의회선거에 참여를 거부한 부르주아지이지만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 착취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인 민주와 선거에 대한 신비화를 강조한다. 차베스는 상대 후보가 조지 부시라는 악마의 볼모라고 주장하면서 대중적 관심을 집중시켰다. 상대 후보가 당선되면 ‘혁명’의 성과를 훼손하고 ‘사회정의’의 정책을 제도화하는 사명7)을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적으로 배제된 대중을 부르주아 당파 사이의 싸움의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고, 석유 수익을 좌익과 최빈곤층을 위한 민중주의적 정책을 지원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인 차베스에게 희망을 걸게 했다. 실제로 차베스주의는 불안정한 관리, 즉 중간 계급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최빈곤층을 더 가난하게 하고 하향 평준화하는 평등주의를 의미했다.
그러나 차베스주의의 승리는 단지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다른 분파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이 아니라 ‘볼리바르 사회주의’, 즉 베네수엘라 국경을 뛰어넘어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가 지역 권력으로 재확인되는 국가 경영의 모델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좌파와 극좌파 사이에서 민간 및 군사 분파가 이끄는, 부르주아지의 차베스 분파는 카라카스와 주요 도시 주위의 빈곤 도시와 농촌 지역의 빈곤층을 이루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대중, 피착취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구층은 2021년까지 그들이 빈곤을 극복할 것이라는 환상을 지니고 있다.
차베스주의의 승리에 대한 민중적지지 뒤에는 선동적인 민중주의 전략이 있다. 차베스주의가 “사회주의”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사이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 본질적 차이가 있다. 국내적, 국제적 수준의 선전에 따르면 베네수엘라는 2021년(그 해는 구세주 차베스가 초월적 의미를 부여한 해이다)까지 가난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혹사기의 선전 뒤의 현실은 매우 다르다. 우리는 이러한 연막 뒤에 있는 진정한 가난을 보기 위해 카라카스 동쪽 끝과 서쪽 끝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아야 한다. 셀 수 없는 빈민, 그 중 대다수는 거리와 다리 밑, 그리고 (도시에서 사용하는 물이 모이는 거대한 화장실인) Guaire 강가에서 살고 잠을 자는 젊은이들이다. 쥐와 병이 확산된 온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이른바 비공식 경제를 이루어 수만의 거리 행상이 넘쳐난다.8)
매우 높은 범죄율은 카라카스를 가장 위험한 도시로 만들고 베네수엘라를 콜럼비아를 능가하는 범죄율의 국가로 만들었다. 또한 말라리아, 뎅기열, 영아 사망, 산모 사망 등이 증가해 왔다. 정부는 이러한 빈곤을 숨기려 조치를 취하고(보기를 들어 거리의 어린이와 빈민을 골라내고 창녀를 협박하며 행상을 옮기는 등) 그들을 반대파나 미제국주의의 악의 행위로 비난했지만, 가난의 징표를 숨길 수 없다.
노동조합과 협동체의 선전에 따르면 불안정노동자들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 특히 공공 부문에서의 단체 협약은 연기되어왔고, 임금 인상은 법령에 따라야 하고, 대부분 사회보장과 관계없으며 늦게 지불되는 상여금의 형식이다. 그리고 “미션”과 기타 정부계획을 통하여 서비스망이 보건, 교육 등의 공식 부문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노동조건을 침해하고 있다. 불안정 노동, 육아노동, 그리고 임금에 대한 공격은 차베스주의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가장 “반자유주의적”인 것일지라도 부르주아지의 모든 부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배제된 대중뿐만 아니라 임금 소득자는 2004-2006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인플레(2003:11.2%, 2005:14.4%, 2006:17%)를 통해 차베스주의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중단없는 공공지출의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국가의 경제 정책의 결과인 이러한 증가는 전체 인구 특히 빈민의 삶의 조건을 악화시켜왔다. 이들은 식품을 사려고 소득의 70%를 사용하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에 따르면 이 시기의 누적인플레는 152%였다.9)빈곤의 가속화는 우파이건 좌파이건 정부의 잘못된 관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사회전체를 끌고 나가는 정도이다. 그리고 차베스 정부는 “혁명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 정권이다.
2007년 5월 말에 베네수엘라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졌는데, 차베스는 이를 “제국주의 추종자”, “조국의 반역자”, “부유한 아이들”로 매도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의 주체는 빈민층 출신이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이 앞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새로운 혁명 세대인 그들은 한 편으로는 실업과 범죄, 버려진 어린이와 어머니, 빈곤에 대한 반대를, 다른 한 편으로는 거짓말, 부도덕, 불관용,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를 뚜렷이 밝혔다. 이는 사회주의로 ‘위장한’ 국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착취’없는 사회를 세울 수 없다는 정확한 문제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베네수엘라 혁명”이 지닌 뜻은 무엇인가. 2004년 베네수엘라의 사회경제 장관의 고문을 했고 2006년 「지금 건설하자, 21세기 사회주의를」이라는 책을 쓴 좌파 연구자 레보위치(Michael A. Lebowitz)는 그의 책에서 차베스가 메자로스(I. Mesáros)의 「자본을 넘어」에 영향을 받았고, 2005년 [세계사회포럼]연설에서 사회주의의 새로운 유형으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의 논리를 거부하는 논리적 연속성을 띄고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 개념을 공동체, 연대, 사회주의적 도덕으로 정리하면서, 사회주의는 목적이 아니라 인간 잠재성의 충만한 발전의 과정인 체 게바라의 맑스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대립물이 ‘스탈린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인 것처럼 선전하는 것은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인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혁명’도 차베스가 계승하고자 하는 볼리바르 혁명, 즉 집합 생산자에 의한 민주적 의사결정과 미제국주의 반대를 뜻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혁명과 관련 없는 민주혁명, 부르주아 혁명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국제주의 원칙을 벗어난 어떠한 민족주의 운동도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과 양립할 수 없음을 역사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는 제3세계주의와 민족해방 신화의 전성기였다. 좌파와 자유주의자는 베트남 전쟁을 미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베트남 인민의 영웅적 투쟁으로, 체 게바라, 카스트로, 벤 벨라 등에 대한 숭배로 나아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황금시대’ 자본주의가 위기에 부딪치자, 이러한 신화는 더는 이어지지 않고 그 빛이 바랬다. 경쟁하는 민족국가와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부르주아지는 세계전쟁으로 내몰리고 사회적 부의 생산자인 노동계급은 자신의 생활수준을 방어하는 투쟁, 즉 전쟁을 향한 움직임을 막고 공산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향한 투쟁으로 나아갔다.
세계자본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어떠한 독립적 자본주의도 나타날 수 없다.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년이 지난 뒤에도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환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두 가지 다른 형태로 이탈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반세계화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의의 복원을 통한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이다. 그런데 반세계화운동은 ‘자본주의를 오직 하나의 가능한 체제이고 그 개혁이 하나 뿐인 대안이다’와 같은 부르주아지의 이념적 선전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미제국주의 반대운동은 반미라고 하는 민족주의 정서와 빈곤화되는 농민과 도시빈민과 노동자의 사회 불만을 밑거름으로 삼은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주의 경향이다. 바로 이러한 두 흐름의 결합이 이른바 ‘차베스주의’이다.
‘21세기 사회주의’를 말한 레보위츠도 베네수엘라의 「국가발전계획(2001-2007)」을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모델로 여기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동아시아(일본, 한국)의 발전전략과 사람을 결합한 라틴 아메리카식의 신구조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는 1999년 제정된 헌법에 나온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조항을 보기로 들면서 베네수엘라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는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주변, 즉 주변부 자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나라는 빈민층(비공식부문 노동자)이 인구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고, 오직 석유자원 하나에 의존해 경제를 끌고 나가고 있는 특수한 사회이다. 이 나라의 민족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석유자본을 밑천으로 삼아 다른 제국주의 국가(미국, 영국, 중국 등)의 부르주아지와 손을 잡고 있지만, 베네수엘라 인민이 처한 빈곤조차 풀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주변부 자본주의의 반미 민족주의 세력은 몇몇 좌파 지식인과 혁명가들의 도움을 받아 전세계에 베네수엘라를 ‘21세기 혁명의 상징’으로 추켜세우면서 ‘사회주의’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차베스주의야말로 사회주의를 위장한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의 민족부르주아 분파의 생존전술일 뿐이다.
최근에 이르러 차베스정권은 전투적인 소수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더욱 공격적이 되자, 이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는데, 전략적 산업에서의 파업금지를 법제화하여2,200명을 범법자로 기소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저항을 범죄화하고 있다.
2005년 이후 300여명의 노동운동의 지도자가 살해되었고, 그 이상이 살해위협을 받고 있으며, 상해를 입은 노동자의 숫자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보기로 2008년 아라구아주의 전투적 노동조합인 c-cura의 세 명의 지도자는 Colombian Transnational에 맞서는 점거 투쟁에 연대하다가 살해당했다. 또한 2009년 1월 안조아테구이주의 미쓰비시 공장에서는 경찰이 점거 농성 중인 두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는데 노동자들의 피가 땅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동부 장권은 점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차베스는 이에 대한 최종책임을 피할 수 없다.10)
또한 베네수엘라에는 작업장의 군사화가 시작되었는데, 2009년 10월 군사법의 개정으로 「Bolivarian Militias」가 설치되었고, 이 기구는 국민방위대의 부속기구로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는 억압기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유가하락 등의 경제침체로 제국주의와의 친선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압박하고 있다. 차베스는 노동자의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항상 부정해 왔으며 단지 민족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의 친차베스 부문과의 동맹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민중주의적 의제만을 선택하고 있다. 차베스의 전략은 석유 이윤으로 전체 산업발전을 기하고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재투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전략은 아무리 사회주의의 수사를 쓰더라도 계급 협조에 기반 할 수 밖에 없다. 석유가격의 하락과 한발에 의한 전력과 물의 부족은 주요 산업의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으며, 도시와 농촌 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차베스 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불가피하게 제국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권력은 노동자와 빈민을 통제와 착취 아래 두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기본적 이해는 자본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고 오직 그들 자신의 권력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차베스는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을 방어하기 때문에 노동대중을 배반하고 그들의 투쟁을 불구화시킬 것이다.
유일한 길은 투쟁을 통하여 차베스주의 이데올로기를 분쇄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와 모든 세계의 노동자는 혁명 투쟁을 통하여 이러한 부르주아 정권을 타도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그 곳엔 반제국주의라는 독약이 있다. 영구적인 “양키반대” 수사는 베네수엘라 부르주아지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의 지지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차베스주의의 승리로 베네수엘라와 그 지역의 노동계급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계급적 관점에서 차베스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적 요소 사이에 일정 정도의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노동계급의 의식과 전투성에 영향을 미치지만 계급의 소수파 사이에 진행되는 성찰의 과정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선거는 계급투쟁을 측정하는 진정한 온도계가 아니다.
앞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노동계급이 투쟁하지 않는다면 더욱 무정형의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차베스보다 관료들을 비판하면서 폭력적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한 배제된 대중(특히 빈민)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 투쟁을 촉발시키고 맑스주의 관점에서 차베스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것을 베네수엘라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체가 인식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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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Monthly Review」, vol.57, No.9, Feb. 2006, 여기서 이들은 이를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마오의 ‘대약진 운동’, ‘문화혁명’에 버금간다고 칭송한다.
2) 1986년에 설치된 국가 소유 석유 회사의 컨서시움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우르과이가 회원국이나 볼리비아와 칠레는 준회원국이다.
3) Pascal Fontaine, “쿠바: 열대에서의 끝없는 전체주의”, Stephane Courtois, et al.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s,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651-2쪽
4) 윗 책, 664쪽
5) 오세철,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 2010, 167-8쪽
6) 윗 책, 169쪽
7) 이러한 미션을 통하여 국가는 식품 분배, 교육, 보건, 실업자와 임시 고용인에 대한 보조 등에 책임을 진다. 2003년 이래 여러 가지 미션이 세워졌다. 그 중 상당수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의 허울에 불과했다.
8) 오세철(편저), 「좌익공산주의」, 빛나는 전망, 2008, 397-8쪽
9) 윗 책, 399쪽
10) LRP, “Venezuela: Support Dwindling for Chávez’s Fake Socialism, Workers’ Revolution is the Answer for Workers and The Poor”, 「Proletarian Revolution」, no.83, Fall 2010, 29-32쪽
<출처 :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5&document_srl=1696 국제코뮤니스트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