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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복, 애통하는 자의 복, 위로
(마 5:4)
오늘 인터넷 신년 사경회 8복, 제2복을 함께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말씀 보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8복은 여러분, 예수님께서 복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복을 우리들에게 교훈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복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복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관점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되지요. 새로운 복을 가지고 오신 것이고 예수님 자신이 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무관한 제 삼의 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복을 주님은 말을 하실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큰 틀을 우리가 잊지 않으면서 오늘 제2복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의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애통함이라는 것이 복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에 애통함에 대한 이해를 많은 경우에 보면 더 치중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복의 진짜 내용은 위로거든요. 위로 자체가 도대체 어떤 복이냐를 분명히 알면 애통함에 대한 이해도 또 분명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연구소들을 보면 애통함의 일반론을 펼칠 때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애통할 일이 없으면 인생이 사막과 같이 된다. 햇볕만 내리쪼여 봐라. 그러면 햇볕만 내리쬐는 곳은 사막이 되지 않느냐. 애통하는 일이 생길 때 사람의 인격도 성숙해진다. 애통함이 있을 때 어떤 교만함이 깨진다.’ 이런 식으로 애통함에 치중하다 보니까 애통함의 아주 일반적인 총론을 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애통함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라고 하는 복의 내용에 연결돼있는 것이에요. 그냥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생의 경험상 얻을 수 있는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슬픔과 애통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로가 도대체 뭐냐 라는 것부터 우리가 먼저 생각을 해보자 이거에요. 복의 내용인 위로.
여러분!
이 위로라고 하는 말은 복으로 지명되기에는 복의 리스트에 등록되기에는 조금 약한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위로! 위로가 중요하지만 그게 뭐 그렇게 복에까지 더군다나 여덟 개 복 중에서 두 번째로 등장을 합니다. 천국 다음에 등장하는 복이 위로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위로와는 이젠 다르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위로는.
그럼 이 위로가 도대체 뭐냐?
헬라어를 보면 parakalevw(3870, 파라칼레오) 라고 하는 단어를 써서 위로라는 말을 표현합니다. 이 파라칼레오 라고 하는 말은 두 단어의 합성어예요. 파라(para)라는 말은 접두어로서 ‘~곁에’‘~과 나란히’ 영어에서도 parable 하면 ‘비유’아닙니까? 비유라는 게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 옆에 나란히 갖다 대서 이 일을 더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 ‘파라’라는 말은 ‘곁으로’라는 뜻이고, ‘옆으로 나란히’라는 뜻이고,
칼레오(kalevw)라는 단어는 ‘부르다’입니다. 야! 아무개야 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럼 합치면 무슨 뜻이 되냐 하면 위로라는 말 파라칼레오 라는 말은 내 옆으로 불러내는 겁니다. 내 옆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 그 옆으로 가주는 것이 되겠지요? 그게 또 뭐 효과는 똑같은 것이니까. 내 옆으로 오라고 부르는 것이나 내가 그 옆으로 가주는 것이나 하여간 내 옆에 그가 있고 그 옆에 내가 있게 되는 상황 이게 바로 위로라고 하는 겁니다.
이 상황을 좀 쉽게 하기 위해서 내 옆으로 부른다 이 말이 위로라는 말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하면 제가 교육전도사 때 여러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하게 됩니다. 교육전도사를 하게 되면 대부분 12월달에 가서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고 당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당에서 결정이 되고 그럼 이제 1월부터 교육전도사로서 교회를 섬기게 되지요.
그런 경우에 12월이 되고 성탄절이 되고 연말이 되면 꼭 당회에서 당회원들이 무슨 잔치를 합니다. 그 당회원들이 잔치를 하게 되면 새로 온 교육전도사도 다른 모든 교역자들이 다 참여를 하니까 당회원들하고 전임 전도사님하고 같이 식사를 할 만한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그럴 때 대부분 당회장 목사님과 당회원 장로님들 당회원 장로님들의 사모님들 그리고 전임 교역자들과 교육전도사 새로 부임하게 된 사람들도 같이 다 이렇게 함께 그래서 당회원 가족들이 새로 부임하는 교육전도사를 먼저 보게 되지요.
그러면 그런 잔치자리가 제일 부담스러운 거예요. 어디에 서야 될지 잘 몰라요. 교육전도사 주제에 당회장 목사님 옆에 가 있기도 그렇고 난생 처음 보는 장로님들 옆에 가 있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센스있는 장로님 사모님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아유~ 전도사님! 새로 오신 분이구나. 이리 오세요. 이리 오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면 저는 성격이 왜곡되어서 그런지 성격이 꼬여서 그런가 봐요. 내가 얼마나 지금 쭈뼜거리고 어색하게 보이고 민망해 보이면 저렇게 장로님 사모님 중에 권사님이 나를 이렇게 특별히 챙기고 오라고 그럴까 그런 마음이 또 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전임 전도사님들 전임 부목사님들한테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담임 목사님에게 어떻게 가까이 갑니까? 말도 안 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그때 장로님 중에 한 분이 부르세요. “전도사님 이리 오세요.” 그러면 목사님 눈치가 보여요. 왜냐하면 당회장 목사님보다 다른 교역자가 당회원 장로님하고 더 친하면 안 돼요. 그것은 담임 목사님의 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목회자 윤리상 그래선 안 되지요. 더 친밀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좋은 의미에서 더 친밀하면 안 되는데 눈치가 보인다는 거예요.
이때 담임 목사님이 “아무개 전도사 이리 오게. 이리 와. 이리 와.” 담임 목사님 옆에 앉히십니다. “앞으로 수고해 줘야겠네.” 그때의 그 감격 속으로 그러는 거예요, ‘이 한 몸 다 바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여러분? 불러서 내 옆에 있게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위로라는 거예요. 파라칼레오.
이 위로가 우리들이 말하는 보험회사 광고도 있더만요. <당신이 어려울 때 항상 옆에 있겠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나 우리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시는 위로는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불러서 당신 옆에 있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게 이런 일이 어디 있지요? 성경에서?
예수님께 들어와서 예수님 누워 계실 때 발밑에서 옥합을 붓고 머리로 닦고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의 먼지를 닦던 여인을 모든 사람이 비난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의 그 옥합에 든 향유를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면 얼마나 좋을 뻔 했냐고 막 윽박지릅니다. 그리고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그러면 창녀였을 수도 있으니까 안 그래도 손가락질을 받는 여자가 주님의 몸에 손을 대고 옥합을 깨서 삼백 데나리온의 엄청난 값어치의 나드를 허비한 것 같아서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께서 “그 여자를 놔둬라.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이 여자의 이야기가 함께 전달되리라.” 주님께서 그 여자를 불러서 그 옆에 세운 거 아닙니까? 복음이 전달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한 일이 함께 전달되리라. 옆에 세운 거예요.
구약으로 넘어가버리면 이 위로가 어떻게 됩니까?
위로. 하나님께서 파라칼레오, 나를 불러서 당신 옆에 세우십니다. 이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여러분?
기고만장(氣高萬丈)이라고 하는 단어는 일이 너무나 잘 될 때 뽐내는 그 뽐냄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얘기입니다.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아요. 기고만장이라는 말은 대부분 나쁜 뜻으로 쓰여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이 옆에 있을 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운을 받는 겁니다. 담임 목사님이 당회원 파티에서 불러서 당신 옆에 앉혀 놓으면 그 당에서 담임 목사님의 기운이 내 마음으로 들어오면서 아~ 이 감격! 그리고 정말 어깨를 펼 수 있는 이 당당함 그 고마움과 감사 느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옆에 두시게 될 경우에 정말 그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어요. 기고만장해지는 겁니다. 교만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들 앞에서, 이 세상의 권세들 앞에서 내가 조금도 마음 자체가 오그라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예를 들면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을 하나님께서 불렀습니다. 칼레오 했어요. 그래서 신을 부어 주었어요. 신을 부으셨다는 게 뭐에요? 하나님이 파라 옆에 두셨다는 거예요. 파라칼레오 했습니다.
이 다윗이 하나님이 옆에서 지지자가 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의 지지자가 된다는 거예요. 마음에다 하나님이 기운을 넣어주시는 거지요.
이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거듭거듭 말씀드리지만 블레셋 군대 앞에서, 골리앗 앞에서 사울 왕과 그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의 기세 앞에서 팍 쪼그라들었습니다.
다윗은 혼자였어요. 앞으로 전진한다고 그래서 군대가 다윗의 명령을 들을 것도 아니고, 다윗이 검법을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양 치던 목동입니다. 나이도 어리고. 군대 갈 나이도 안 돼서 양 치고 있었던 자예요.
그런데 그 다윗이 파라칼레오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서 옆에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이 조그만 다윗이 천방지축 하니처럼 기고만장해서 골리앗 앞에 서가지고 한다는 말이 “너 오늘 내가 공중의 새의 밥이 되게 해주겠다.” 이러고 달려든 거예요. 조약돌 다섯 개 들고.
이게 바로 파라칼레오 위로의 복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여러분, 5복을 찾는 이유가 뭐예요? 세상의 5복을 그렇게 추구하는 이유가 뭐예요? 한번 기 펴고 살겠다는 거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 기가 살잖아요. 자식이 일류대학이라도 들어가야 기가 살잖아요. 남편이 번듯하게 있어야 기가 살지 않습니까? 잘생긴 남편이 아주 최고의 기업에 정말 무슨 CEO라도 될 때 기가 살잖아요. 떡 하니 재벌까지 안 가도. 그런데 그런 남편 고사하고 남편조차도 없는 여자도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기가 살 수가 없잖아요.
5복의 이유가 기 살기라 이겁니다. 5복을 가짐으로 기가 사는 거예요. 명품백 하나라도 들어야 동창회에 떳떳하게 나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몇 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껴야 되지 않아요? 그게 다 기 살기 아닙니까?
저는 제일 힘든 게 서울 시내에서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길 때 교인들이 식사 대접을 하는데 차라리 남대문 시장에 걸터 앉아서 먹는 데가 편해요. 신라호텔로 오라고 그러고 하얏트호텔로 오라고 그럴 때 그 교회에서 가깝거든요. 제일 힘들어요.
교회에서 부목사에게 준 차가 너무 고맙거든요. 너무너무 고맙고 나한테 과분한데 그런데 신라호텔 앞에 가고 하얏트호텔 앞에 가면 내가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옴츠러들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렇다고 제가 무슨 벤츠 차를 원한다든지 BMW 차를 원하게 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준 차를 타고 덜덜덜 하고 가면 쪼그라드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희한한 경험을 했어요. 어느 회사에서 잘 나가는 중소기업입니다. 중소기업이라고 하기에는 꽤 매출이 큰 회사죠. 1년에 600억 정도 매출이 일어나니까. 작은 회사는 아니에요. 그 회사의 직원예배를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드려주도록 약속이 되어 있어서 첫날 가는데 지하실에 있는 수위아저씨가 그 지하 차고를 관리하시는 분이 어떻게 왔냐 그러고 이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이냐고 그러고 아, 사람 민망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 직원이 뛰어 내려왔어요. 그래가지고선 사장님 차 옆에 있는 그 옆에다 세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지하실 주차관리를 담당하는 아저씨가 태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후덜덜거리고 간 자동차가 사장님 차 옆에 세우니까. 그때 여러분 제가 느끼는 느낌이 어떠했겠어요?
이런 겁니다. 차도 사장님 차 옆에 서면 권세가 나한테 미치는 거예요.
이 위로가 어떤 위로인지 아세요? 여러분?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내 옆에 오셔서 내 마음에 지지자로서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넣으신다는 겁니다. 이때 나타나는 일은 지구를 밀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기는 거예요. 지구를 손으로 들고 통통통 공놀이하듯이 테니스공 튀기듯이 그렇게 놀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지구를 통통 들어서 뭐하겠습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그럴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 당당함과 호연지기와 이 세상 그 무엇이 그 사람의 마음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5복 하나도 없어도 돼요.
파라칼레오! 하나님이 부르셔서 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복이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이 애통함이라는 것은 여러분, 헬라어 ‘펜수네테스’ 이 단어를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다시 말하면 70인역이라는 성경이 있거든요? 이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는데 히브리어로 쓰여져 있는 것을 그리스어로 바꾼 성경이 70인역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애통 이 펜수네테스라고 하는 단어가 어떨 때 쓰였나 하고 보니까 대표적인 데가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잖아요. 특별히 사랑해서 그 12형제 중에서 색동옷을 입혔습니다. 아주 마음 놓고 편애를 했어요. 그렇게 사랑한 아들이 형들이 팔아먹은 다음에 거짓말로 그 색동옷을 다 찢어놓고 양을 잡아가지고 양 피를 묻힌 다음에 요셉의 피라고 거짓말을 해서 아버지한테 색동옷을 줬을 때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 이리에게 물려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색동옷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 울던 야곱. 그때 그 야곱의 울음을 애통이라 표현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야곱이 뭐라고 그래요? 차라리 요셉이 내 옆에 없다면 내가 음부로 내려가 죽은 자로서 이 울음을 운다.
그리고 또 어떤 표현이 있냐 하면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 왕이 어떻게 웁니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차라리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사람의 슬픔 중에 남편과 아내의 죽음보다 더 지독한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더 지독한 죽음이 생때같은 자식이 먼저 죽는 죽음일 거예요.
이 애통하다는 말은 이러한 죽음 앞에서 나오는 애통을 말한다는 겁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이 파라칼레오 불러서 옆에 있게 하시겠다 아니면 하나님이 오셔서 내 옆에 계시든지 내가 하나님 옆에 가든지 하여간 하나님 옆에 있는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복은 우리 것이 안 됩니다. 여러분 살면서 말입니다. 이런 정도의 애통 야곱이 요셉이 이리에 찢겨 죽었을 거라고 믿고 슬퍼했을 때 그 애통함을 사람이 살면서 실제로 몇 번 경험하겠습니까? 경험할 수가 없어요. 이 정도의 애통함은 몇 번 안 돼요. 그것도 애통함이 엄습하는 게 아니에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애통함이 사로잡은 거지요. 애통하지 않을 수 없게끔 야곱의 마음을 움켜쥔 거고, 압살롬이 죽었을 때도 다윗의 마음이 그렇게 사로잡힌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애통하라는 능동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능동형 현재분사예요.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애통해야 되는데 가끔 배우들을 보면 하나도 안 슬프다가도 배우들이 우는 걸 보면 같이 울 때가 있어요. 얼마나 자기 역할과 자기 상황에 몰입하는지 진짜 콧물이 막 나와요. 배우는 배우지요? 그들이 돈 많이 버는 이유가 있더라구요. 그거 어떻게 그렇게 웁니까? 콧물이 막 나와서 눈이 퉁퉁 부어서 울어요. 그런데 배우가 애통해하듯이 그렇게 애통하면 되는 겁니까? 우리는 배우처럼 애통해할 수도 없지만…
그러니까 목사님들이 아니면 주석가들이 이 부분을 연구할 때 너무 사람들한테 큰 부담을 주는 거예요.
이런 얘기 들었어요.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인도에 갔을 때 인도에 반경 90km의 해일이 일어났대요. 그래서 정부관리가 헬리콥터에 목사님을 태워가지고 그 상황을 다 보여줬대요. 그리고 나서 곧바로 미국에 왔더니 그 인도 해일에 대해서 정말 당신이 보실 때는 원자폭탄 천 개가 터진 것 같다고 표현을 하신 거예요. 천 개가 터지면 지구가 남아나겠습니까? 그분이 그렇게 느꼈다는 거겠죠. 너무 참담하게 느낀 거지요. 90km면 180km직경에 해일이 다 덮쳐버렸으니까 엄청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미국에서 신문을 보니까 두세 줄로 간단하게 기사가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이 나라가 애통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랬다는 겁니다.
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상해요. 그분은 확실히 훌륭하신 분이었던 것 같아요. 또 직접 보셨으니까 참담함에 더 사로잡혔겠지요. 그러나 180km 직경에 해당되는 넓이의 해일이 덮쳐서 정말 어마어마한 재난이 인도를 덮침으로 이재민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해도 내 아들이 감기 걸려서 열이 40도 올라갔다는 것보다 심각하지 않은 게 사실 아닙니까? 그게 인간 아닙니까?
어떻게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을 때 야곱이 느꼈던, 압살롬이 죽었을 때 다윗이 느꼈던 그런 애통함을 1년 365일 24시간 중에 몇 번이나 우리가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애통해 할 수 있겠냐 이거에요.
그렇게 애통하려면 진짜 내 아들이 실제로 죽어야 돼요. 내 딸이 죽어야 되고, 내 아내와 내 남편이, 내 부모님이 죽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사람뿐만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의지하고 있던 내 사업이 하루아침에 멸망해야 돼요. 그래야 애통함이 나오지요. 그런데 그 애통함을 말씀하시는 거겠어요? 그렇게 하라고? 능동적으로 의식적으로? 아니지요.
그럼, 이 애통함은 뭡니까?
자,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는데 애통합니다. 이 야곱의 애통함이 기가 막힌 모델이 되는 거예요.
자, 내 자식이 멀쩡히 살아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위로라는 복과 연관 지어서 내가 마음에서 내 옆에 두고 그로부터 내 마음이 힘을 받아 사는 사람들이 옆에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자들이 있어요. 사람은 정말 타이트하게 밀접하게 관계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것이 가족이든지 간에 아니면 돈에 대한 관계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은 돈을 쥐고 있는 그 틈 사이로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가 옆에 있을래도 옆에 있을 수가 없어요. 이미 단짝들이 다 있기 때문에. 단짝들이 다 서 있는데 누가 옆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단짝이 없어질 때 예를 들어 애인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같이 성탄절 날 연말연시 때 정말 마음 둘 사람이 필요할 때 찾는 애인이 있어요. 둘만 있으면 아무도 없어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서로에게 마음의 에너지를 뿜어주고 있으니까. 파라칼레오 위로가 되니까. 마음이 서포트가 되니까. 그대만 있으면 돼. 그런데 그대가 배신해서 나갔습니다. 이때 애통 찢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애통함이라는 것은 실제 죽어야 나타날 수 있는 애통함을 어떻게 내가 마음속에서 능동적으로 합니까?
마음속에서 여러분, 죽었다고 인정하라는 거예요.
내 옆에서 요셉이 죽었다고 믿었던 것처럼 야곱은 정말 믿은 거예요. 죽은 거로 믿어버린 겁니다.
그렇게 믿은 거처럼 내 마음속에서 실지 살아 있지만 마음에서는 죽었다고 믿고 마음에 기운을 받고 있잖아요. 정말 사업하기 어렵고 장사하기 어렵고 돈 벌기 어려워서 지치다가도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천진난만하게 활짝 웃고 놀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아빠들이 힘을 내잖아요. 그 아이가 마음에서 죽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애통합니까? 그 아이가 죽었는데. 애인이 죽었는데 얼마나 애통합니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쫓아가면 도움의 손길을 내주시던 엄마 아빠가 죽었는데 얼마나 애통합니까? 마음에서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하라 이겁니다.
이게 바로 애통하라는 말이 능동적으로 쓰인 이유에요.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그런 애통이 실지로 지금 찾아오잖아요. 그런데 실지로 죽기 전에 네 마음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라 이게 애통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옆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내 마음의 서포터, 그가 있음으로 내가 살았고 그것이 있음으로 내가 살아야 될 의미가 있었던 모든 서포터, 그것이 물건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그 모든 게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내 마음에 애통함을 가지라는 거예요. 다 죽었구나! 내 자식이 죽었구나! 내 애인이 죽었구나! 내 사업이 죽었구나! 죽었다고 생각하라는 겁니다.
이때 내 마음이 끊임없이 그것이 죽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음성이 들린다는 겁니다. “아무개야 이리와라. 내가 유일한 너의 서포터가 돼 줄게.”
그러니까 이 애통함이라는 건 뭐냐 하면 복의 내용인 위로라는 말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스스로 내 마음에 서포터가 돼줄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끊어내는 애통함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내 마음에 힘을 주고 있고 내 마음에 살아야 할 이유를 주고 있는 내 마음의 서포터들, 내 마음에 기운을 불어줘서 내가 그래도 당당하게 힘을 내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모든 내 옆에 있는 서포터들을 지지자들을 다 끊어내는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거부하는 겁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지지도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다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애통함이에요. 마음의 영역에서 죽이는 거예요. 죽은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겁니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내 마음의 지지자가 내 마음이 옆에 가 붙어서 힘을 받고 있고 옆에 있고 싶어 하는 모든 세상의 지지자들, 옆에 있는 자들을 다 몰아내는 겁니다. 이게 애통하는 겁니다.
스스로 지지자를 거부하는 마음, 이 태도와 이 인격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시는데 이리 와라. 내 옆에 서라. 내가 네 옆에 네가 내 옆에 있게 되는 이 놀라운 축복의 현실을 이루어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제 삼의 복, 복이라는 일반론을 얘기하시는 게 아닙니다. 당신과 무관한 복은 얘기하지 않으세요. 복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복의 주관자이신데 당신을 빼고 무슨 복을 얘기한단 말입니까?
그러면 도대체 이 애통함이 어떻게 실현이 되겠습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다시 말해서 너희 마음에 너희 옆에서 너희를 지지하도록 되어 있는 관계 그 모든 관계가 죽은 자로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께서 영원히 너의 지지자가 되어 주실 것이다. 이게 바로 이 말을 번역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이 복을 위해서 주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뭡니까?
애통함을 현실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내 옆에 있는 모든 내 마음의 지지자들, 내 마음의 서포터들을 다 죽은 자로 여기게끔 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으로서 그자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내가 죽음으로서 그자가 내 삶에 대해서 죽는 겁니다. 내가 죽으면 나에 대해서 그가 죽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에서 수많은 지지자들과 지지하는 물건과 지지하는 일, 내 마음이 힘을 받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죽어나가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애통해하는 겁니다.
내가 자식에 대해 죽었다. 자식과 나의 관계가 끊어졌다. 아내와 나의 관계가 끊어졌다. 애인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사업의 관계가 끊어졌다. 모든 관계가 끊어졌다. 다 끊어졌다.
이게 애통 아닙니까? 끊어지면서 애통이 나오는 거 아닙니까? 애통의 내용이 끊어짐이라는 거예요. 실제로. 끊어짐, 내 마음의 지지자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 이럴 때 하나님의 지지하심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이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너희와 함께하리라는 말이 그냥 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어느 교회에서 부사역자로 일하고 있을 때 남선교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맨 주변에 남자들이 드글드글 해요. 그런데 교회에는 권사님들도 있고 집사님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이 가까이 오시지를 못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항상 옆에 남자 집사님들 안수집사님들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마찬가지에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하리라 이보다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큰 복이 그냥 주어집니까?
내가 내 옆에 자식 그대로 끼고 있고, 애인 끼고 있고, 사업 끼고 있고, 내 마음의 인생에 어떤 서포터가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다 끼고 있는데 주님이 내 옆에 오실 수 있을 거 같아요?
우린 너무 쉽게 생각해요. 자식 끼고, 가정 끼고, 사업 끼고, 모든 걸 옆에다가 다 끼고 있으면서…
파라칼레오, 옆에 나란히 내 옆에 다 끼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틈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끼어 들어가시지요. 다 끼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들어오질 않아요. 하나님으로부터 힘이 들어오면 5복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가 되는 거예요. 기고만장하는 거예요. 그 마음이 붕붕 뜬다니까요.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가라앉고 마음이 쭈그러지고 마음이 우울하지요? 하나님께 틈새를 열어주지 않는데. 꽉 붙잡고 있어요. 내 자식 하나님, 잘 되게 해주세요. 하나님을 부르면서 내 자식을 위해서 밤새도록 기도했다 그러면 내 자식과의 관계가 점점 더 밀착되니까 하나님이 옆으로 끼어 들어갈 수 없는데.
그래서 좋은 예가 있어요. 오늘 본문과 맞아떨어지는 아주 좋은 예가 있어요. 종합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예가.
나인 성 과부. 과부 아시죠? 여러분? 요즘 과부하고 다르다고 그랬어요. 옛날 과부는 먹고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있으니까 구걸이라도 해서 먹고 살았겠지요. 정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나기 힘들 때 그 아들 하나 보고 일어났어요. 온몸에 몸살기가 도져서 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플 때도 아들 보며 일어나 시장에 나가서 물건 팔아서 시래기 삶아서 팔아서 끼니 때우며 살았어요.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 옆에 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 생을 살도록 힘을 실어주는 그 누구 어떤 서포터 어떤 지지자도 한 사람도 없어요. 아들은 죽어서 관에 실려 공동묘지를 향해 나갑니다. 그 옆에서 울고 가는 이 여인의 애통함이 바로 그 애통함 아니겠습니까? 지지하는 자가 죽어버린 애통함. 내 마음에 살아야 될 이유가 되었던 자의 죽음 그 애통함.
이렇게 아들과 엄마의 사이가 벌어진 틈새로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아들을 다시 살렸어요. 아들을 다시 살렸을 때 이 여인이 마음에 어떻게 움직였겠습니까? 아들에게 다시 붙었겠어요? 도대체 그토록 귀한 나의 아들을 죽음에서 다시 살려낸 저분은 누구냐? 저분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거에요. 여러분. 죽었다 살아났어요. 그렇죠? 내 마음에서 죽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 마음에서 붙잡고 있는 모든 지지자들이 다 죽는 겁니다. 이때 그 틈새로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주님이 들어가시고 하나님이 들어가시고 우리 옆으로 당신을, 당신의 보좌 옆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로 성령을 보내시고 하나님과 함께 옆에 나란히 있게 되는 파라칼레오 위로의 복이 임하게 될 때 갑자기 내게서 솟는 이 기운, 이 늠름함, 세상을 향해 5복을 가진 모든 자들을 향해서 이 당당함.
여러분, 5복 있어서 당당한 것 하고 5복이 없는데도 당당한 거 하고 뭐가 차이가 날까요? 5복이 없는데도 당당한 건 세상을 이긴 겁니다. 세상을 이긴 거예요. 입시에서 이긴 게 복이지요. 오래 살기 위해서 이기는 걸 장수라고 그러지요. 돈 벌기 위해서 이기는 걸 부자 된다 그러지요.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신다는 게 지구를 이기는 거예요. 지구를 이기는 거. 돈 버는 데 이겨서 부자 되는 거 아니에요. 재벌 된 게 아닙니다. 지구를 이기는 거예요. 지구를… 이 복을 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애통함!
내 마음의 지지자들 내 마음의 삶에 기운을 불어넣는 것들 그 모든 것들 표본적으로 야곱의 요셉관계, 다윗의 압살롬 관계,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 관계 그거 아니더라도 애인의 배반도 있을 수 있고, 어렸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일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내가 이 세상을 살아야 되는 이유를 형성해주는 서포터 내 옆에 있는 것들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자발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애통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겁니다.
‘죽었다. 내 마음에 대해서 그가 죽은 자다. 내 자식이 죽었고 내 애인이 죽었고 내 남편이 죽었다.’ 이렇게 십자가 붙잡고 애통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모든 자들에게 주님이 “아무개야! 이리 와. 내 옆에 서라.” 그래서 이제 주님과 함께 나란히 붙은 자로서 가정을 대하고 이 세상을 대하면서 한번 살아보세요.
세상을 이긴 자로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기운을 받아가는 자로서 이 세상을 한번 살아보세요.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 totally new world가 될 거예요. 완전히 다른 세상이…
제2복 엄청난 복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복을 가져오셨는데 주님이 가져오신 새 복 다 놔두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낡은 복 세상의 5복을 쫓아다니며 정말 오금 저리며 살았습니다.
이제 내 마음의 모든 지지자들에 대하여 내 마음에서 죽은 것으로 여기는 애통함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시험하게 하시고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그 아름답고 놀라운 하나님 옆에 있는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