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대구미술의 재조명 -20세기 대구 한국화의 재조명- 손성완 1. 머리말 새 천년을 맞이하는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 한다. 문화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거울임과 동시에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으로써 그것은 하루아침에 소생된 것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계승·발전되어 온 것이다. 한국화 역시 그 중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웅장한 고분벽화와 고려시대 至高한 색채의 고려불화를 이어 조선시대 선비정신 속에서 싹튼 격조높은 書畵와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 장인 기질에서 출발한 意匠 裝飾畵, 토속적인 민화들로 이어지면서 전통을 이어왔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는 비현실주의적인 중국 산수화풍을 배격하고 조선의 산하와 일상적인 생활주변의 삶을 현장감 넘치게 그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전개되면서 한국적인 화풍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추사 김정희는 문인사대부들의 문기를 바탕으로 필묵의 정신성을 강조한 문인화풍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20세기는 문인화풍과 화원화풍(장승업화풍)이 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일제가 식민 문화정치를 표방함과 동시에 서양화가 적극적으로 수입되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民展으로서 조선서화협회와 이에 대립되는 官展으로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 : 1922-1944)와 같은 근대식 전람회가 개최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한국화는 1945년 광복과 함께 현대화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면 20세기 대구 한국화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대구는 영남사림의 학문숭상과 함께 조선의 유교문화가 꽂피었던 곳이다. 학문과 예술이 숭상되어 시·서·화 일치사상에 바탕을 둔 문인화가 20세기의 전통을 이어왔다. 이러한 전통은 해방이전 전통한국화의 맥을 이어오던 계승기를 거쳐 해방후 부터 60년대 말까지 식민지 문화의 잔재와 서구문화의 무분별한 수용과 제도적 미비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전통한국화의 모색기 그리고 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대학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각 대학교에 부임함으로써 대구 현대한국화가 형성되었던 전개·발전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그 동안 대구 한국화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시도는 《대구예술30년사》와《대구예술70년역사전》을 통해 결실을 보았으며 그 흐름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 해방이전의 대구화단(전통한국화의 계승기) 대구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내륙 도시로서 예절과 학문을 숭상하여 '鄒魯之鄕'이라 불려 영남 문화를 대표하는 도시로 발전되어 왔다. 예로부터 고령권의 가야문화와 경주권의 신라문화 그리고 안동권의 유교문화가 꽃 피었던 곳이다. 특히 영남 사림권에서 선비문화가 지역의 주도적인 문화로 정착되면서 詩·書·畵를 근본으로 하는 문인사대부의 고아한 품격을 서예와 문인화를 통해 시류에 편승하기보다는 전통을 고수하고 환기하는 쪽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 맥을 계승하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서석지(팔하, 1829-1906)가 나오고 한 세대 뒤에 석제 서병오가 출현하여 영남 서화계의 명승을 전국에 떨쳤으며, 동시대에 석강 곽석규, 경제 서상하 등이 있었으며 지석 김진만, 기석 허섭 등에 영향을 주어 향토화단을 빛내었다. 서병오(석제, 1862-1936)는 한국의 5대가로 詩·書·畵·文·琴·棋·碁·藥 팔능이라 불리었다. 書는 당시의 대가인 서석지에게 왕희지, 김생, 조맹부의 서체를 익혔으며 또한 선산의 거유 허방산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사대부로서의 기초를 닦기도 하였다. 畵는《개자원화보》《십죽제화보》등으로 自習 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을 알게 되면서 운현궁 생활을 하게 되고 추사의 제자인 이하응에게 빼어난 난 솜씨뿐만 아니라 추사의 예술정신과 서화법도 배우게 되었다. 중국 유학시절 당대 중국의 대가인 제백석, 오창석, 손문, 포하 등과 당시 망명중인 민영익과의 교유는 종전의 화보에서 벗어난 文氣爲主의 문인화로 전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귀국후 1918년 5월19일 민족 서화가 13인에 의해 창립된 '서화협회'의 회원으로 곽석규, 서상하와 함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창설된 '조선미술전람회'「선전」(1922-1944) 서도부 초대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선전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대구지역 작가로는 배효원, 서동균, 박봉수, 최근배 등이다. 선전은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관전이며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문화정책을 통해 동화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일제 식민정책의 일환이었지만 여기를 통해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던 것 또한 현실이었다. 1922년 「嶠南書畵硏究會」는 후진양성을 위한 서화전문 교육기관으로 종래의 여기나 교양의 입장에서 벗어난 근대적 교육방식의 시초였다. 곽석규는 嶺南三石중의 한 사람으로 수묵 산수화를 잘했으며, 박기돈은 경제인으로 행서에 특히 뛰어났다. 글씨가 힘이 있고 깨끗하며 활달하여 그의 성품을 잘 말해주고있다. 김진만은 대구가 낳은 박식한 학자요 애국지사로서 사군자, 기명절지 등 문기있고 단아한 작품을 남긴 서화가로 直剛淳厚한 성격은 사군자 중에서도 대나무를 즐겨 그렸다. 배효원은 행서와 사군자에 능하였으며 선전에서 수차례 수상한 바 있다. 황기식은 후진 양성과 서예 보급에 전력하였다. 서동균(죽농, 1902-1977)은 근대 5대가의 한사람으로 서병오를 이어 문인화의 맥을 지켜온 서화가이다. 교남서화연구회에 들어가 본격적인 서화의 기량을 닦았으며 서와 사군자, 산수, 화조, 기명절지, 영모,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 함을 보였다. 협전(조선서화협회 전람회)과,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통한 수차례 수상과 대구, 경남, 부산 등지에서 개인전 25회를 개최하여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또한 교남서화연구회를 1951년 영남서화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많은 후진 양성에 힘쓰기도 했으며, 1930년「鄕土會」결성에 동참 그해 10월17일에서 20일까지 조양회관 2층에서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1946년「경북미술협회」의 발기인의 한사람으로 참가 광복이듬해 장영복, 백팔용, 박인채, 주경, 서석규, 변종하, 김창락 등과 첫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75년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그의 예술세계가 전국적으로 인정받았으며 향토 서화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서화가의 한 사람 이다. 홍순록은 1916년 고령 출생으로 산수, 사군자 등 대구 지역에서 독특한 서화의 예술세계를 펼친 서화가로 알려져 있다.
교남서화연구회는 대구 최초의 서화전문 교육기관으로서 시대 변화에 따른 서화전문 교육기관과 근대적 교육제도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 서울·평양·대구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문화도시의 서화가와 그 분야의 애호인사들에게 자극을 주면서 '조선문화 창달' 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서화운동의 하나였다. 1922년 1월 15일 대구의 서화 애호인사들이 대구 동성정 이영면의 집에 모여 '교남서화연구회'를 결성했는데, '교남'이란 '영남지방'을 뜻하는 고칭으로 후진 양성을 위한 목적과 강습소 설치, 서화전람회 개최, 및 도서관 설립 등으로 정하였다. 1월 22일 제1회 총회를 통해 회장 서병오, 부회장 박기준, 강사 정용기, 서병주, 이영면, 김재환, 이사 김홍기, 회계 서창규를 선출하였다. 서화 실기 지도에 있어서는 석제가 선봉장을 맡게되었다. 1922년 5월 14일 부터 16일까지 대구 뇌경관(賴慶館)에서 영남일대의 이름 있는 서화가들이 회원으로 참가하여 제1회 교남시서화전를 개최하였다. 당시「동아일보」는‘각지 대가들의 소장하였던 고대 명작 서화와 근대 화백의 서화 등이 진열되고 관람자가 많아 성황을 이루었다.’고 발표하였다. 제2회 교남서화연구회전은 1923년 11월 23일부터 17일까지 노동공제회관에서 열렸다. 서병오와 서상하, 서병주, 허섭, 박기돈 등의 사군자와 서예, 산수작품 43점과 서양화가 이여성, 이상정, 박명조 등의 유화작품 43점을 출품한 대규모의 전시회였다. 동아일보는‘눈에 띄는 가작이 의외로 많아서 대구에서 이만한 미술가가 있었던가를 의심할 만큼’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이 전람회에서는 고서화부를 설치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비롯한 30여점을 걸기도 했는데 매일 500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 대성황을 이룬 전시회로 기록하고 있다. 교남서화연구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대표적 화가로 곽석규(석강,1858-?), 서상하(경제,1864-1949),박기돈(회산, 1873-1948), 김진만(지석, 1876-1933), 허섭(기석, 1878-1934), 정용기(예제,1880-1936),배효원(운강,1898-1942), 서병주(태당,1884-1956), 서동균(죽농,1902-1978), 황기식(희제,1905-1972), 홍순록(해정,1916-1983) 등이다.
3. 해방이후 대구한국화단 1) 1950∼1960년대 (전통한국화의 모색기) 1950년와 1960년대는 한국화단은 전쟁의 잔상속에서 새로운 물결과 융합의 사조로 서서히 그 부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가 남기고간 인위적 회화관념을 하루빨리 청산해 보려는 작가들의 시도 이기도 하였지만 물밀 듯 유입해오는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급격한 개방의 교차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의 뿌리와 교육기관이 미약하여 서양화에 비해 그 모습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또한 영남 선비문화는 순수회화의 천시와 함께 전문적인 화가가 등장하기 어려웠던 시대로 화가의 숫자 또한 손에 꼽힐 정도였다. 이 시기에 개인전을 발표한 사람으로는 최근배(4회), 이윤제, 박봉수, 장우홍, 김창진, 김종철, 김대규, 박대성, 성기열로 전시회는 12회에 불과 했다. 개인전 발표 외에도 강신철, 김신현, 박영근, 국명웅, 강선동 등이 활동하였는데, 대부분의 화가들은 전통회화를 바탕으로한 수묵위주의 산수, 영모, 화훼, 동물화 등을 그렸으며 최근배는 채색화를 지향하였다. 이 시기에 그림을 그린 대부분은 아마추어 내지는 상업주의 작가란 인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근배(목랑, 1910∼1979)는 함경남도 태생으로 동경의 미술학교 회화과에서 서양화를 전공 3학년때 일본화로 전향했다. 선전에 입·특선 및 무감사 수상을 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의 화풍은 가는 선과 고운 채색의 사실적인 채색화로 한복 입은 인물, 농악 등 한국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향토성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일본화의 느낌이 강해 시대적 흐름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대구 한국화단에서 전통을 탈피하여 현대적 회화로서의 이행과 효성여자대학에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이바지한 점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차지한다. 개인전 15회(1945-1975) 개최와 단체전인 63美展 등에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과 전개하였다. 박봉수(지홍,1916∼1991)는 경주 태생으로 섬세한 필치와 수묵의 발묵으로 실험적인 추상화를 지향한 독자적인 작가로 대구에서 몇 차례의 전시회를 가지면서 대구화단에 영향을 주었다. 선전에서 18회, 21회, 22회 입선과 1968년 일본과 이태리 국제미술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83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김신현은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경북대 사대부중 등에 근무하면서 '63美展' 창립전을 통해 활동 하였다. 박영근은 조선대 미술과 수료후 대구에서 작품활동에 정진하였는데, 전통적인 수묵담채화풍의 산수화와 사실적인 영모화풍을 추구하였다. 김영목은 전통산수화를 구사하였으며 강신철은 서울대 미대 출신으로 경북 사대부고 교사로 재직하면서 墨林會 창립회원과 한국화회 회원(1971-1993)으로 활동하며 작업은 추상화를 지향하였다. 김대규는 14년간 초중학교 교직에 있으면서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개인전 9회 개최(1963∼1971, 서울,부산,대구)와 1968년∼1969년 일본, 동경, 북해도 에서 회외전 3회를 가진 바 있으며 주로 화조, 산수, 인물, 사군자, 미인도, 잉어 등을 즐겨 그렸다. 국명웅은 경기도 태생으로 그의 스승인 당시 유명한 模山大觀(요꼬하마 다이깐)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해방이후 대구에 정착하면서 국명웅 한의원을 개원하여 작품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북화풍의 산수화와 속필을 즐겨 다루었다. 김창진은 사실적인 작품을 추구했으며, 성기열은 문인화풍의 작품을 추구했다. 실경산수화를 추구한 박대성은 현재 서울에서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이외에도 이윤제, 장우홍, 김종철, 강선동, 서제섭, 나지강, 박근술, 이광남 등이 활동하였다.
2) 1970년∼1990년대(현대한국화의 전개와 발전기) (1)1970년대 대구한국화단 1970년대 대구 한국화단은 중요한 시기로 경제성장의 발전과 생활의 변혁, 경제적 풍요로 국민의 의식과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평준화되면서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 한 예로 교육계에서는 각 대학교마다 한국화 전공을 두어 계명대에 정치환 이어서 김전, 영남대에 서울대 출신의 민경갑, 장선백, 이정 이어서 정종해, 효성여대 정태진, 유황 등이 교수로 부임함으로써 본격적인 교육과 함께 서·화 분리 현상이 표면화되었다. 이로 인한 도식화된 '동양화'는 서서히 밀려 퇴색하게 되었다. 개인전 회수의 증가와 함께 대구 최초의 한국화그룹이 결성되면서 전시회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 향토 작가들의 개인전으로는 60년대 12회에서 70년대 92회로 엄청난 발전을 보였다. 단체전으로 영남대 출신 동문들로 구성된 '영남한국화회'(1974∼ )의 결성과 계명대 출신 동문이 모인 '韓木會'(1978∼ :현 계명한국화회) 창립되었다. '韓畵會(1977∼1993) 및 '慶北東洋畵'(1975)의 창립으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한국화가 자리를 잡게 된다. 한화회는 1976년 9월15일 전통의 표피적 관념화에 대한 과감한 부정과 시대적 회화관에 부응하는 현대적 조형 이념을 주장하며 영남지방의 한국화단에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겠다는 의욕과 사명감을 가지고 모인 단체다. 종래의 한국화라는 일반적인 인식에서 느낄 수 있는 답습과 모방의 차원에서 과감히 벗어나 젊고 패기있는 작가들에 의해 창작의 영역으로 발돋움함으로써 새로운 대구한국화단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갈구했던 문제는「전통양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 위에 시대의식에 맞는 미를 표현하는 작품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선동, 권수현, 김기훈, 김효애, 문정자, 박근술, 서제섭, 신정주, 이정, 이준일, 이천우, 유황, 윤형자, 정재훈, 정치환, 정태진, 최천순 등이 창립회원으로 여기에 김원세, 정종해, 김전, 신현대, 박상호, 서무진, 백무현, 안병덕, 권정찬, 박혜경, 최명순, 이응춘, 조홍근, 전병화, 김미아, 한명분, 홍성애, 장재규, 금대연, 김성복, 김재성 등이 합류하면서 창작열을 더욱 증폭시켰다.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국립역사박물관에서의 2차례 전시회와, 81년 서독 콸른시 동양박물관에서 전시회 등 국내외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85년, 그간의 연륜을 통해 각자의 조형감각과 변모된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이영석, 김인숙, 홍원기, 박남철 등 젊은 세대의 대거 참여로 표현경향은 더욱 다양성을 띠게 되었다.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작가군 형성으로 세대간의 의식 편차를 극복한 독창적인 한국미와 현대적인 조형방식을 통해 구심체 역할을 하는 등 대구 현대한국화 태동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1975년 '경북동양화회'가 김경수, 김기훈, 김진국, 서제섭, 손연희, 윤형자, 이정, 이직조, 정재훈, 정치환, 권수헌, 주수일에 의해 결성 창립전(3.12∼17, 대구백화점B화랑)을 개최하나 무산되는 좌절을 겪기도 했다.
(2)1980년대 대구한국화단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화 전반기의 흐름은 묵선에 의한 형상 파악으로 인물, 거리풍경 등 가시적 세계를 담채로 표현하기도 했다. 후반기에 이르러 과감한 색채도입과 색 자체로 형상의 운동감을 표출한 추상적 경향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또한 전통정신에 대한 탐구로 당시 중앙화단에서 주도한 수묵운동은 현실적인 소재를 찾으려는 데에서 그 돌파구를 마련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먹의 재질에 대한 실험이 끊임없이 시도 되었으며 신세대 작가에게서는 시·서·화 일치적 조형관이 더욱 설득력을 잃으면서 왜곡과 변형에 의한 대상의 단순화, 과감한 색채구사, 추상적이며 표현적인 비형상성 등 시각적인 조형성 측면으로 많이 치우치기도 했다. 한편 각 대학에서 배출된 젊은 세대들에 의해 의욕적인 실험과 진지한 탐구로 대구 한국화단의 위치를 확보해 갔다. 개인전은 123회로 증가되었으며 젊은 작가들에 의해 결성된 그룹 또한 70년도 4개의 단체에서 9개의 단체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진전을 보인 시기였다. 대구한국화회(1983∼ :수묵화의 현대화를 모색), 묵소회(1985∼ :계명대 여류모임), 四人向(1987∼1988), 청묵회(1988∼ :계명대출신모임), 생땅(1988∼1989 : 영남대출신모임), 新한국화회(1989∼1991), 미인회(1989∼ :계명대출신 여류모임), 靑世代(1989∼1988), 非形會(1989∼1995), 소소(1989∼1990 : 효성여대재학,졸업생모임) 등으로 단체로서의 조형이념이나 특색을 지니기에는 부족하였다. 四人向은 여류화가 단체로 사실적인 인물화와 발묵에 의한 영모화, 비형상화를 추구하면서 의욕적인 모습을 선보여왔으며, 靑世代는 말 그대로 20대 중반의 신진 그룹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한국화의 양식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조형적 시도와 실험을 위해 발족해 한국화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新韓國畵會는 1988년 '대구한국화신진작가전'후 5개 대학교 출신이 모여 의욕이 넘치는 실험과 모험으로 새로운 장에 도달코져 노력을 한 그룹으로 전통의 계승과 함께 한국화의 현대화를 갈구했다. 非形會는 비구상 회화의 추구를 목적으로 발족된 그룹으로 '한국적 회화로서의 새로운 양식 정립'을 위해 문자향과 서권기를 갈구해 왔던 선각자들의 정신적 바탕을 지주로 심상의 현대적 추구를 모색 하고자 하였다. 현 시대 상황에 부응하는 재료와 기법의 다양성, 먹과 채색이 번지고 스며드는 과정에서 생성 되어지는 새로운 형상을 표출하는 실험정신을 선보였다.
(3)1990년대 대구한국화단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구 한국화단은 많은 발전을 보였다. 그것은 개인전 267회(99년9월기준)로 80년도에 비해 대폭적으로 증대하였으며, 단체의 결성 또한 80년도 9개의 단체에서 크고 작은 23개 단체로 증대 되었다. 이러한 증대는 소재, 재료, 표현방법 등에 의해 더욱 다양해 졌다.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채색의 사용이 더욱 표면화 되었으며 오브제적인 실험성, 재료와 기법의 확대 등 현대성이 강한 방법을 취하였다. 단체의 성격 또한 여류모임, 산수화모임, 채색화모임, 수묵화 모임, 비구상모임 등으로 세분화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80년대에 비해 더욱 발전된 모습이라 하겠다. 1993년도 대구예술대학교가 설립되면서 대구한국화단의 영역을 보다 확대시켰다. 단체로는 丹墨여류한국화회(1990∼), 畵야회(1991∼), 韓國畵- 그 同質性의 回復展(1991∼), 열림전(1991∼, 계명대 91년 졸업생 여류모임), ㅊ·ㅁ회(1992∼ :계명대 92년 졸업생 여류모임), 우리그림전(1993∼ :경북대 동문 모임), 재현과표현전(1993∼ :대구대 89학번 동기모임), 대구현대한국화회(1994∼), 한모임(1994∼ :경북대,계명대,영남대 출신들로 한국화의 전통을 확보하면서 한국적인 미감을 표출하고자 결성된 모임), 묵취회(1994∼ :계명대 94년 졸업생 여류모임), 소양회(1995∼ :계명대 95년 졸업생 여류모임), 검댕이(1996∼ :계명대 96년 졸업생 여류모임), 경북여성한국화회(1996∼ :경북대 출신 여류모임), 묵의회(1997∼ :수묵화로 한국의 전통성 확보와 개성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국적 미감을 창조하고자 구성), 山前水前(1997∼ :퇴색 되어가는 산수화의 위상을 확립하고 산수화의 현대적 작업을 지향하는 산수화모임), 채색의새물결(1998∼ :채색화 모임), 효목회, 90전(효대 90학번 모임), 수미강(1997∼ :경북대 비구상모임), 96전(1996∼ :경북대 96년 졸업생모임), 구연한국화회(1997∼ :대구대 동문모임), 연각회(계명대 96년도 졸업생 모임), 203-9인전(경북대 93학번 모임), 백운회(1998∼ :대구예술대 동문모임) 등이 있다. 90년에 창립된 단묵여류한국화회는 남성위주의 상황에서 탈피하여 여류화가들의 저력을 위해 단합된 모임으로 학연이나 지연을 떠나 순수한 작품성을 추구하자는 모임이다. 대구 여성 한국화의 활로와 모색에 주안점을 두면서 여성 특유의 정체성 확립에 노력하였다. 대구현대한국화회는 한화회가 쇠퇴되어 가는 상황에서 대구 한국화의 중심 단체로서 구심점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창립되어 한국화의 독자성 확보 및 바람직한 방향제시를 강조했다. 권원순은 '대구문화'에서 대구현대한국화의 의의를 두 가지로 보고 있는데 첫째는 미술자체의 측면으로 세계화라는 추세 속에서 경시되기 쉬운 민족 미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고, 둘째는 미술 외적인 측면으로 지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학연·인맥에 의한 파당적이고 편파적인 병폐를 타파하는 것이라고 피력했다. 3,40대 젊은 작가로 구성된 대구현대한국화회는 '올해의 작가상'을 제정 비방과 질시와 권위주의를 불식하고 서로에게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자 노력했다. 한국화-그 동질성의 회복전은 「지역성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는 시각에 기반을 두고, 광주, 대구, 대전의 3개 지역 작가들이 합세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참여작가 모두가 지역에 연고를 두고 활동하는 작가들이면서 그중 상당수는 지역적인 개념과 상관없는 중앙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명도 있는 작가들이다. 또한 지역 화단의 연대라는 점은「지역성」을 중앙에 대한 변방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중앙을 뛰어넘은「세계성」에 상응하고자 하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인식의 교류와 각 지방 한국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의 확인, 나아가서는 한국화의 양식 정립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91년 대전 五園 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진 이래 대구, 중국, 광주, 대전, 서울에서 전시회를 개최 하면서 중국, 부산, 전주의 작가들도 대거 참여, 지역의 독특하고 다양한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등 한국화의 동질성을 추구하고 있다. 채색의새물결회는 시대적 조류에 따라 채색화 인구의 확대로 결성된 단체다. 채색화는 1920년대 이전은 '墨主色補'의 차등적 관계로 수묵은 감상물 그림에서 채색은 실용물 그림에서 주로 사용했던 기능을 달리하는 매채였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채색화는 수묵화와 대립적 관계로 변모되었다. 채색화는 일제시대 일본의 영향으로 팽창·발전하였으나 해방이후 왜색시비의 거센 배척을 받는 등 그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으며 특히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신세대 작가들의 새로운 감각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최근들어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4. 20세기 대구한국화의 회고와 전망 80년대로 접어들어 한국화가 침체 상태에 빠져 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제기되면서 한국화의 저변 인구 또한 서양화에 비해 다소 소외되고 있음이 가시화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몇 가지 짚어 보면서 앞으로 다가올 21세기 대구 한국화의 위치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첫째 '전통'과 '현대'의 문제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오늘의 문제만이 아닌 개화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근 1백년간 지속해 온 문제인 것이다. 전통적인 양식을 취하려는 경향은 현대성이라는 가치의 문제로 의문이 제기되어 왔고 현대적인 양식 개념을 도입하려는 경향은 '전통성'의 상실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전통과 현대성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전통이라는 정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자각과 이해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현대'라는 입장에 있어서 서구적인 것을 흉내만 내면 현대성이 해결된 것처럼 착각은 없었는지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어느 한쪽으로만의 경도로는 그 정체성을 확보하기 힘들며 상호 보완작용에 의해 발전되어진다고 본다. 둘째. 재료기법에 대한 재인식이다. 재료기법은 다양하지만 그중 용필과 용묵으로 귀결 시켜보면 정신주의 확립은 완숙한 용필과 용묵에 있으며 필묵의 원활한 운용이 따르지 못하면 정신은 치졸해지고, 정신이 따르지 못한 기능주의는 공허하게 될 것이다. 용필과 용묵의 이해는 결국 우리것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모태가 될 것이다. 셋째. 수묵과 채색의 관계다. 수묵은 그 나름대로 깊이와 표현의 영역을 지니고 있다. 유구한 역사 속에 수묵의 뉘앙스는 시대마다 작가마다 독특한 개성을 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현대 작가가 수묵을 사용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없다. 버리기 보다 계승·발전시켜 현대적 수묵화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필묵의 절대적인 이해와 기술 습득을 위해 많은 고민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채색화 역시 올바른 역사관과 냉철한 비판으로 한국적인 미감이 담겨 정서와 색채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교육기관의 교육문제를 들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서양재료와 서양화적인 표현 방법밖에 몰랐던 세대들에게 화선지의 민감한 번짐, 생략하고 함축하는 필획, 빛에 의하지 않는 채색법의 경험은 여간 당혹스럽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용필과 용묵이 내재해 있는 중요한 정신적 의미는 하루아침에 교육되어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한국적인 재료의 습득과 정신에 대한 교육부족에서 우리 것이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있다 하더라도 형식적인 교육에 불과 할 것이다. 또한 한국화를 전문적으로 가르칠 교육자의 절대 부족으로 서양화 위주의 수업이 진행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로 인해 초·중·고생에게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유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각 미술대학교의 학부제 도입으로 인한 탈장르화는 대학이란 본령의 목표보다는 '경제'의 논리로만 대학을 경영하겠다는 의지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서구미술사조의 무비판적 수용을 들 수 있다. 서구문화의 유입에 따른 지나친 관심은 소묘위주의 기능교육으로 흘러 우리의 전통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고 보아진다. 그로 인한 동양적인 철학적 사색이 빈곤하게 되고 표현에 있어서 경직성이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70년대 이후 사회전반에 만연된 현실주의는 생활 주변을 확인하려는 노력을 낳게 되었다. 도시풍경, 공장지대, 판자촌, 포장마차, 시장풍경 등 뒷거리의 모습이나 사생위주의 풍속화 등등 소재들의 범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현실 모습을 담은 소재들은 단순한 서구 풍경화나 소묘화의 범주에서 머무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회화의 독특한 시각과 내면적 정신주의을 간과하자 못한 데에 원인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평론의 부재로 대구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에 비해 평론가의 숫자는 극히 부족한 것이 현실이며 제대로 된 비평문화를 기대한다는 것 역시 희망사항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한국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비평가를 찾기란 더욱 힘든 일이다. 이러한 평론빈곤의 원인은 비단 평론가 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가, 교육기관의 교육제도, 언론의 지면부족 등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올바른 비평문화의 정착을 위해 모두가 노력할 때이며 21세기를 내다보는 위치에서 새롭게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5. 맺는말 이상으로 20세기 대구 한국화의 변천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바 해방이전인 전통한국화의 계승기와 해방후인 전통한국화의 모색기를 거쳐 전개·발전기로 변모 되었다. 대구 한국화는 전통의 뿌리와 교육제도 등의 미비로 인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70년대 본격적인 대학교육을 통해 실질적인 현대한국화의 1세대로 자리 메김 하면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는 시기로 보아 불과 30년만에 많은 발전을 이룬 것으로 이는 우리 것을 찾으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은 21세기 세계 미술 속에 한국화의 위상을 확립 시켜 줄 것으로 기대된다. 끝으로 연구가 미흡하고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 많은 관심과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지길 바란다. (대구미술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