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말:
문학의 시대적인 특징은 작가가 처한 현실전형화의 성공여하에 의해 귀결된다. 도시의 인정사막화, 농촌의 집거분산화로 성향차별이 양극 황폐화를 음영처럼 던져 와도 변이에 존립한 심층 기저들마다엔 미래지향을 곰바지런히 추진한다. 일종 삶에로의 아름다운 본능인지 모르겠다. 그 미소한 측면을 확대해 발견한 아이디어와 만나는 사실주의수법을 감사할 뿐이다. 검어도 변함없는 흙의 진리는 영겁을 세례하며 미증유의 법열을 혼자 향유해오는 터다. 인간본체는 스스로 소외되어 고개를 쳐든 채 발밑의 계율을 읽을 대신 꽈악 밟고만 있다. 펜 끝의 굴진부역이 그 지하보물을 캐느라 혹사당한다. 나의 천직이요, 시대의 의무로 기왕 접수한 바렷다.
6. 갱도유격전
(지난 호에 이어)제내지(堤內地)란 둑 안쪽에 있어 보호를 받는 땅을 말하는데 누각이 곧 제내지와 같다. 좀생이가 발명하고 창조한 향촌의 아지트인지도 모른다. 기실 시렁집 말고 안에 장치한 함정 내막을 통해 좀생이의 민첩함과 교활성을 알고도 남음이 다분하다.
좀생이는 기존 전통의 다락방보다 더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구조설계와 인테리어를 도입하여 여러 차례 뜯어고치는 작업을 거듭했다. 대부분 깊은 밤중에 남몰래 보수 점검을 해왔기에 방치골에서는 누구도 몰랐다. 좀생이는 그만큼 세심했고 잔혹했다. 사과배를 무참히 털린 후 그는 경각성을 높여 저장고 수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잔인한 방어술을 기괴하게 구축한 좀생이다. 그는 이거야말로 도적을 나포하면 성공자로 표차롭다고 시뚝했다. 좀팽이면서도 윤똑똑인 좀생이에겐 이처럼 본위주의적인 자아보호의식이 아집하게 집착되었다. 갱도에 다락룸에 또 허정(虛穽)무기까지 겸비한 과수원지기는 짜장 게릴라지휘관이기도 했으며 참모장으로 고문을 집행하기도 했다. 외형은 과일 저장고라지만 실상은 무시무시한 마귀소굴로 도처에 살기가 귀신불처럼 번쩍거렸다.
-찍…… 쿵……
철문이 열렸다. 다락문이 열렸다. 꾀꼬리인질은 죽지 부러진 매 마냥 복마전에 떨어졌다. 좀생이는 안으로 제꺽 문을 닫아걸었다. 그는 방수포 비옷에 싼 보쌈 볼모를 거꾸로 메고 조심스레 중앙복도 옆으로 걸었다. 참나무로 세운 다락기둥에 몸을 부딪치며 조심스레 휘청거린다. 움벽을 손더듬으로 짚어가며 다락룸까지 헐레벌떡 걷는다. 중앙복도 복판에 곧바로 갱도전의 함정이 매장되었는지라 옆으로 에돌아가야 했다. 그는 아까 영길이와 교대하자마자 인차 저장고 안으로 올라와 함정을 정돈했다. 평소엔 함정 뚜껑을 자작나무 널로 덮었다가 문을 처깔할 땐 다시 열어놓았다. 말하자면 유사시나 비상시엔 전투태세를 취했다가 평화시기엔 덮개라는 안전장치를 해제하군 했다.
약탈혼의 창경(倉庚)인질을 납치해오는 아짜아짜한 사랑싸움을 두고 혹 추종자대오나 미행부대가 있을까봐 방어하느라 함정뚜껑을 젖혔다. 대신 오림대를 몇 대 가로놓고 그 위에 비닐박막 조각을 편 후 보드라운 흙을 살짝 뿌려놓았다. 함정 웅덩이에 골똑 찬 물 위로 뾰족한 함대 꼬챙이 끝이 촘촘히 돋아났다. 경비망이 삼엄했다. 만일 절도범들이 저장고를 들이친다 해도 다락룸에 깃든 보초꾼이 상해를 입기 전 도적놈들이 먼저 갱도전의 함정지뢰에 녹아날 것이 아닌가! 좀생이는 잘코사니를 부르곤 해왔다.
-철컥……
좀생이는 기체 라이터를 켜 촛대심지에 불을 붙였다. 어두컴컴한 갱도 안이 점차 밝아졌다. 조짚 위에 편 방수포 옷에 누운 봉화라는 ‘황작’(黃雀)을 들여다보던 좀생이는 흠칫 놀라 어깨를 으쓱거린다. 금의공자의 치째진 봉의눈 눈썹 가장자리가 터졌다. 눈동자와 귓불에 피가 질벅했다. 이마와 관자놀이 사이엔 계란만큼 한 혹이 돋아난 채 시퍼런 멍이 생겼다. 입술마저 새파랗게 질렸다. 습기가 많고 차가운 저장고 안이라 보쌈에 든 ‘황앵’(黃鶯)은 가끔 다리품을 호비작거리며 가다듬는다. 오동통한 무릎에 소름이 다닥다닥 돋쳤다. 촛불에 드러난 ‘황조’(黃鳥)의 모습은 먼지와 검불, 소꼴이 묻어 꽤 구겨져 남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살짝 흐트러져 나온 적삼자락 때문에 쏙 오무라져 들어간 배꼽이 쫄딱 폭로되었다.
한때는 미치도록 쫓아다니며 사랑했고 인제는 행주처럼 쥐어짜며 볼모로 잡아둔 꾀꼬리! 좀생이는 꿈 같고 극 같은 엄연한 현실을 체감으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자율신경이 통 배합해주지 않았다. 내 청춘아, 너는 언제까지 고달플소냐? 그래 딱 여자와만 결혼해야 되느냐? 이렇게 비열하게 장가를 들어선 무엇 하랴?! 연애는 도적질로 하고 잔치는 오픈으로 한다 했는데 난 왜 시종일관하게 야행잠입, 기편, 매수, 콩 훔치기, 약탈혼, 보쌈, 인질, 감금, 함정 등 추잡한 연기를 해야 하나?……아, 매음녀와 오입쟁이의 연분이여서 곧잘 방정맞기만 하는 것일까?!……오입쟁이 헌 갓 쓰고 똥 누기는 예사다는 말이 십상 옳다고 할까?……
자탄자가, 자창자화하던 좀생이는 너무나 묘연하고 막연한 낙망감에 무아몽중 방수포 레인코트 옆에 쿵 쓰러지고 말았다. 자멸의 범행을 각오한 일락천장 도태였다. 청춘의 기둥이 무너지는 파열음이었다. 붕괴였다. 낙하였다. 그 여파가 어찌나 진동을 연장하였던지 문득 보쌈에 든 ‘황앵’이 놀라 꼼틀거린다. 가는 신음과 함께 조짚이 부스럭거린다. 살아있음의 미약한 준동이다.
좀생이는 와닥닥 놀라 일어섰다. 자기가 오랫동안 악마와 시팅룸(sitting room)에서 동침한 듯 한 경악에 부르르 떨었다. 갱도밀실에서 소생한 송장을 맞띄운 듯 무서웠다. 교합의 열락이 쟁여둔 덧정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런 요귀와 이런 내밀 소굴에까지 기어든 게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려 한다는 미욱함에 비롯됐음을 터득했다. 그러나 한편 피못이 들어 쇼크한 은근짜가 못내 가긍하고 처량해보였다. 그 궁상을 일별한 순간 터널 같은 리빙룸(living room)에 든 청춘남녀가 어차피 불운아임을 보충해 느꼈다. 그럴수록 원망은 오로지 자아저주로만 늘어졌다. 세궁민의 불가피면의 한탄만일까?! 형망제급 같은 전통윤리의 대물림에설까?……
좀생이는 사뭇 달라진 형형한 표정으로 보쌈에 든 인질을 살펴본다. 오뉴월 소에게 씌운 꾸러미마냥 입안을 틀어막은 수건…… 가을날 낙엽마냥 푸시시 흩어져버린 머리카락…… 단추가 벗겨져 활짝 까발린 앞가슴의 적나라한 노출면적…… 더덕더덕 얼룩진 핏자국…… 아, 불쌍하다는 반성의 죄의식이 목을 꺽 막아버렸다. 보잘것없는 한낮 농촌 덜먹 총각에게 얼려 생동생동한 청춘을 유린당하고 이젠 갱도 속에 처박힌 금의공자 인질을 동정하고 싶었다. 좀파리로 날아든 가짜 경리에게 속여 환상만 잔뜩 팽창해온 다 같은 시골 청춘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봉화는 갈증을 느꼈던지 입술을 감빨며 꼭 감은 눈꺼풀을 움직인다. 좀생이는 냉큼 일어났다. 초막에 내려가 물을 가져다 그녀의 상처도 씻어주고 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좀생이는 허방다리를 조심조심 스쳐지나 다락기둥을 스치며 철문을 닫아걸었다. 그리곤 안개 속에 사라져버렸다……
봉화는 동통을 가까스로 참으며 아령칙한 기억을 애써 되살렸다. 그물거리는 촛불을 빌어 간신히 둘러본 주위에 초풍하리만큼 기급했다. 갱내의 양쪽에 버텨 세운 동바리는 거무칙칙한 흑송이었는데 누르께한 송지가 퍼져 험상궂은 장승처럼 보였다. 귀틀집처럼 덧쌓은 낙엽송 틈새로 황토가 부슬부슬 떨어졌고 휘우듬한 널판자를 댄 천정엔 디룽디룽 매달린 거미줄이 그네를 흥청흥청 뛰고 있었다. 호화롭던 노래방과는 전혀 다른 18층 생지옥이었다. 아니, 러브호텔이 있는 쌍제비산장의 별택으로 밀월처럼 여행한다던 좀 경리가 이런 돼지 굴에 자신을 처넣다니?…… 자기가 살던 까치동의 행랑채 방앗간보다 더 어수선했다…… 게다가 아깐 또 불문곡직하고 주먹찜질까지 했지 않았는가……
창경 인질은 노기가 부글부글 괴였다. 거안제미로 섬기고 싶던 충절이 일거에 증발된다. 기편을 당했고 유린을 당했음을 알았다. 간특한 치한! 바싹 말라든 그녀의 입가에서는 씹어 삼킬 듯한 육성이 간간이 새어 나온다.
‘좋 경리?…… 흥, 개×거러지라고 해라! 네가 나를 망쳐놓은 만큼, 나도 너를 해치고야 말테다…… 노리개에게는 인격 존엄이 그래 전혀 없다는 말인가! 거시기도 모두모두 찢어놓을 놈!’
황앵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가 후- 크게 들이긋는다. 갱내 공기가 희박하여 약간의 질식이 생겼던 것이다. 가슴이 켕긴다. 거꾸로 업혀온 통에 흉부가 결렸나보다. 그러나 몸 상황을 따질 새가 없었다. 어서 빨리 뒷짐을 풀어 던지고 굴왕신같은 지옥을 탈출해야 했다. 봉화는 촛불에 드러난 영창 같은 감방을 다시 살펴보았다. 꽁꽁 묶인 몸을 희뜩 뒤쳐 배밀이를 해갔다. 드디어 움막벽에 둘러친 사시나무 갱목에 붙어 앉은 그녀는 입에 문 수건을 다락기둥에 비벼댔다.
정적과 공포가 엄습한다. 봉화는 죽기내리고 입에 문 수건을 마구 마주 부비며 역사질했다. 입가에서는 열기가 생겼다. 목구멍이 갑절 매캐하였다. 이슥해서야 수건이 스르르 입에서 떨어져나갔다. 후- 안도의 숨이 나갔다. 이어 몸을 틀며 상체를 기울여 입으로 발목을 맨 소장바를 풀었다. 인젠 설 수 있었다.
그러나 결박당한 두 손을 풀 수 없다. 꾀꼬리 인질은 문득 다락방 중간 기둥에 꽂혀있는 비수가 설레발치는 걸 보았다. 그녀는 입으로 비수자루를 물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것은 좀생이가 과일을 깎아먹는 식칼 대용이기도 했으며 또 혼자 보초 설 때의 호신도이기도 하였다. 다시 앉은 자세로 비수를 꼬나든 봉화는 아득바득 칼을 놀려 포승줄을 오리오리 끊었다. 살을 벨까봐 조심해서 칼질하느라 비지땀이 송공송골 내돋쳤다. 기지개를 켠 그녀는 헝클린 몸을 가다듬었다. 보쌈에서 인질은 풀려 석방됐다. 그녀가 금시 단도를 도로 기둥에 꽂아 두려할 때다. 쿵, 철썩,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동굴 문이 인차 닫히더니 인기척이 들려온다. 안개발이 뜬김 마냥 일거에 땅굴로 밀려들었다. 희미한 광선도 함께 비쳐들었다.
-좆 경리!
여급은 또 악을 토했다. 바오라기로 대충 발목을 둘둘 감고 수건을 입에 넣어 물었다. 연후에 방수포 우의에 누워 뒷짐을 진 두 손으로 비수를 꽉 틀어쥐었다. 제꺽 눈까지 꼬옥 감았다. 꾀꼬리 인질의 원형이 복구되었다.
물이 담긴 생수병을 든 좀생이는 후들후들 떨며 들어온다. 접객부의 곁에 이르자 손등으로 환자의 이마를 짚어본다. 이어 움칠 서던 그는 촛불을 들고 봉화 옆에 쭈크리고 앉는다. 불빛 가까이에서 상처를 씻어주고 목을 축여주려는 데서다. 좀생이가 생수병마개를 여는 찰나, 잠자코 누워있던 여인이 후닥닥 일어나면서 발길질을 날리는 게 아니겠는가! 어쩔 새 없이 뒤로 벌렁 넘어진 좀생이는 손에서 그만 촛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촛불이 꺼진 갈무리광은 대뜸 까막나라로 변했다. 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렸던 봉화는 거추장스러운 헝겊 빗장을 일제히 뽑았다. 다리를 꼬부렸다가 전주른 충격 그대로 발길을 날려 냅다 찼다. 가슴을 차인 좀생이는 낙장거리를 하고야 말았다. 재강아지 눈 감은 듯 돌발적인 일변이다. 여급은 손에 틀어쥔 비수를 장님 막대질하듯 마구 휘둘렀다. 약탈혼으로 보쌈에 든 인질을 장닉하려던 좀생이가 오히려 반공격으로 피동에 떨어졌다. 어이쿠으악…… 엎어진 자리에서 좀생이는 비명을 지른다. 비수의 난도질에 어깨를 찔렸다. 쉭쉭- 휙휙- 칼부림은 암흑 속에서 분주히 자지러지게 회오리를 몰아온다. 그리곤 악패듯 휘파람소리가 난다. 악풀이가 고조에 올랐다. 피랍자가 기만자를 향해 흉기를 맹렬히 휘두르며 공세를 발동한 거다.
꾀꼬리가 맹수로 둔갑했고 웨이트리스가 여협객으로 탈바꿈했다. 인질은 비법적인 구름투옥에서 탈피하려고 생사결단으로 발악한다. 여자의 유연성을 잃고 야성과 보복으로 미쳐 날뛴다. 사랑횡재와 애정폭리를 절취한 색한을 겨냥해 볼모는 징벌의 무기를 휘두른다. 아지트를 폭격한다.
봉화는 진상을 알았다. 좀 경린지 좆 경린지 좋 경린지 하는 들치기, 위선자, 불강도의 신원조사를 하지 않아도 용의자로 점찍기엔 이유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녀는 범법자(犯法者)를 응징하는 살인타격에 성수나게 광분했다. 허나 비수가 둔기는 아니래도 필경은 어둠속에서 붓날리는지라 급소를 찌를 수 없었다. 자주 빗나가곤 한다. 열도의 정염을 불사르던 황금파트너, 명콤비, 임자들은 지금 한창 근접전, 육탄전, 백병전을 벌리고 있다. 타악탁, 투닥닥타악…… 팔과 팔, 손과 손, 그리고 옷자락과 흉구가 스치는 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친다. 향연의 축제가 훼멸의 파티로 전주곡을 바꾸었다.
좀생이는 적수가 무기를 사용하는 우세에 짓눌려 방어와 피신을 섞어가며 응부한다. 바닥에 뒹굴며 자꾸 갱목 쪽으로 피해간다. 인질은 상대의 숨소리와 자취를 조준해 쿡 무찔러나간다. 빙탄간의 대치상태는 쌍방의 체력을 무던히 소모했다. 남녀는 청춘의 운명이 던진 덫에 걸렸다. 서로 기진맥진했다.
방치골 지하에서는 여전히 물이 흐르고 생물이 놀고 뿌리가 숨 쉬고, 또한 지하 다락방은 활극이 치열하다……
7. 침몰의 심연
좀팽이로서의 좀생이는 불의지변에 맞띄운지라 당황했다. 자칫하면 인질한테 요절날 번도 했으니깐. 기민하고 약삭빠른 그는 전면방어와 응부후퇴로 위기열세를 만회할 수 없음을 자인한다. 좀생이는 상대가 돌격해오지 않는 암중모색의 휴전을 이용해야 했다. 살짝 신발을 벗고 자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게 더듬었다.
후- 마침 촛대가 손에 잡혔다. 좀생이는 신발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촛대를 든 채 맨발바람으로 동남쪽 출입구를 향했다. 고양이걸음처럼 자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동발목을 짚으며 퇴각했건만 인질은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휙휙, 핫핫, 헝헝거리며 빈 칼부림을 해댄다. 목표물을 놓친 눈 먼 헛총질이다.
보아하니 볼모는 여협객으로 둔갑해 무예를 연마하는 듯싶다. 여자란 육체적인 능욕에서 해탈될 땐 목숨을 걸고 도박하며 정신적인 유린에서 각성할 땐 상대를 쓰러뜨리고 자립한다. 봉화의 궁극적인 항거가 바로 연약한 여성을 초인간적인 본능발동에로 궐기했음을 시사한다. 유괴자를 처단하려는 일념은 살기와 광분과 야욕으로만 충만되었다. 간음죄를 저지른 위군자와 일대일로 싸우다가 이 지옥에서 둘 다 죽어도 원이 없겠다는 것이 최대의 소원이다. 인질은 괴괴한 어둠을 칼로 펑펑 구멍 내며 무시로 난도질한다.
-터엉…… 푹…… 퍽……
흙부스러기, 거미줄, 먼지, 동발꽃이 떨어져 몸에 들씌워진다. 윽윽, 용을 쓰며 도로 비수를 빼낸 그녀는 발광, 발악을 한다. 악마의 검무를 보인다. 헛칼부림이 휘- 날파람만 일으킨다. 여자의 거친 호흡과 윙윙거리는 비수의 울부짖음이 갱도유격전을 공포의 심연으로 몰고 간다. 특히 사냥물을 졸지에 놓쳐버린 추격자는 더욱 눈에 쌍불을 켜고 단말마적으로 공세를 들이댄다. 방수포 우장이 벌써 여러 번 군데군데 찍혀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호박에 침질이었다. 과녁을 명중하지 못한 눈 먼 총알만 불발탄마냥 갈기는 판이다.
인질은 마치 한 마리의 성난 사자처럼 미쳐 날뛴다. 선불 맞은 야수처럼 으르릉거리며 피 묻은 칼을 물고 들뛴다.
-찰칵……
별안간 굴왕신 같고 복마전 같던 저장고 안에 햇빛이 새어든 듯, 달빛이 비추는 듯 환히 광명으로 밝아진다. 무슨 소릴까? 무슨 불빛일까? 눈이 셔 봉화는 눈을 슴뻑거렸다. 이어 빛의 조명반사방향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등 뒤 동남쪽 출입구에서 비쳐오는 불빛이 갱내를 대낮처럼 밝혔던 것이다.
아, 촛불이 다시 타오르고 있다.
동발목과 박달나무쯤에 끼워 고정한 촛대는 저장고 천정을 핥으며 불길을 날름거렸다. 촛불 앞엔 라이터를 꼬나든 좀생이의 잔약한 체구가 안겨왔다. 몸매는 작아도 커다란 그림자를 밀실 앞까지 드리우며 던져오고 있었다. 납치자의 피 묻은 낯에는 야멸찬 조소와 우울한 적의가 무섭게 번뜩거리는가싶더니 인차 떨떠름한 무표정으로 바뀌어버렸다. 갱도 두 끝에서 적은 질투와 대치로 떡 버티고 마주 쏘아 본다.
좀생이는 피 묻은 윗옷을 쫙쫙 찢으며 천 조각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다. 너덜너덜한 끄나풀들이 낙엽마냥 갱도에 쌓인다. 좀팽이의 앙상한 늑골이 불빛 속에서 유표하게 드러났다. 미사리의 털이 부르르한 앙가슴이 거뭇하게 안겨온다. 바싹 마른 갈비뼈가 심호흡에 따라 들락날락한다. 그 율동에 따라 어깨의 상처에서 흘린 핏방울이 푸들거리며 휘젓긴다. 흘러내린 피가 괴춤에 질벅하게 묻었다.
서리발치는 비수를 추켜든 인질은 피투성이 유괴자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선다. 칼끝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볼모의 귓불에 묻는다. 납치자의 뒤에서 불똥을 튕기며 타오르는 촛대를 보노라니 가슴속의 적개심은 더욱 세차게 이글거린다. 거무스름한 곰솔 동바리와 벽을 막아 세운 잣나무의 송진을 뻘겋게 물들인다. 촛불은 마귀의 춤사위를 한창 벌인다. 소나무에서 분비되는 끈적끈적한 액체인 송방은 독특한 향기를 풍긴다. 굳으면 황갈색의 무른 유리와 같은 상태가 된다는 송고가 지금 불빛에서 연한 색상을 반사시킨다.
봉화는 점점 악착스레 입술을 깨물었다. 매음부, 윤락녀, 고당명기로 도태된 팔자를 면치 못하게 한 저 놈의 가해자, 유괴범, 레이보이를 깨끗하게 죽여치우는 게 당연했다. 무고한 자매, 혹은 애매한 동업자들을 위해서라도 자기가 좋 경리를 처단해야 하는 줄로 각오했다.
뿌지직뿌직…… 탁탁툭투욱…… 탁…… 송진과 나무껍질이 촛불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의 점화를 받아 달아오르더니 드디어 불꽃을 반짝거리며 튕긴다. 좀생이는 총망히 촛대를 비수리나무 틈바구니에 꽂았다. 그러다보니 화재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여유가 정말 없었다. 한시 급히 날뛰는 인질의 관성을 제압하기 위해 불을 밝히는 데만 열중했으니깐……
좀생이는 대담해졌다. 죽음이 번쩍거리는 흉기 앞으로 떳떳하게 맞받아갔다. 털이 더부룩한 미사리가 훌쩍 벗은 상반신을 내밀고 걷는다. 다락룸과 출입구 사이의 갱도 낭하를 간격 두고 그는 자기의 비장한 청춘을 향해 온건하게 걸었다. 그는 비수 앞에 내맡긴 목숨을 주려고 다가선다.
좀생이가 문득 뚝 하고 멈춰서더니 저장고 안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메아리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봉화 난 죄인이요! 죽어도 아깝지 않으련만 그러나……
-닥쳐! 또 얼리려고?…… 아직도 경리인가 하느냐? 연극은 끝났다. 죽어도 아깝지 않은 것을 알면 됐지 또 무슨 놈의 잔소리 수작질이냐?
-난 그래도…… 방치골의 남자방치 노릇은 해봤으니…… 허허…… 호걸장군이여. 총각구실을 완성한 영웅이 내란 말이요. 일생이 얼마라고 살아생전에 주어진 책임을 끝마쳐야지 흐흐…… 난 부모한테 덜 미안하오. 아버지 엄마가 준 생명이 그래도 구실을 했으니 흐흐……
-난 기생이다. 갈보년이다. 내 청춘으로 네 놈의 남자방치를 분질러버리겠다. 알았어?
-사랑하는 여자의 손에서 죽는 게 남자의 행복이라면 난 서슴없이 그대의 칼을 받겠소!
-칼을 받기 전에 먼저 방치골의 선물을 받아라!
-방치골 선물?!……
좀생이가 재차 물으렬 때, 웬 물건이 씽 날아오더니 그의 샅을 냅다 갈긴다.
-으악!
좀생이는 단마디 비명과 함께 손으로 샅을 움켜쥐고 쿵 물앉았다. 고환이 터지는 듯 아팠다. 눈앞에서는 불꽃이 반짝거린다. 이어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는 미처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꼬부리고 앉아 신음하며 앞에 떨어진 물건을 주어 들었다. 다듬이방치였다. 미끈한 미루나무로 잘 다듬어 만든 방치였다. 여급이 던진 방치는 면바로 좀생이의 요해처를 명중했다. 봉화는 다락방에 편 거적 속의 짚더미에서 방치를 찾아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좀생이가 멧돼지나 까마귀를 쫓을 때 대야거나 도람통을 두드리려 갖춰둔 딱따기였다. 타악기가 결국 주인의 무기를 때려 한바탕 악의 발성을 토로했다.
-어때? 방치골 선물 맵죠? 시원하지야 않을 텐데……
-이 쌍년이…… 앗! 죽여치울 년……
-방치골 방치로 몸을 닦아보세요. 방치골의 남자방치노릇을 해보았다고 방금도 자랑을 지껄였죠? 한 번 더 고자 힘줄 같은 소리 늘여 놓아보세요!
-아…… 봉화! 난 병신이 되어도 할 말이 없구려.
-좋 경리가 병신이 될까요? 더 기세를 뽐내보세요. 말리지 않을 테니……
-지금 내 청춘은 오로지 진실한 시간 속에서 최후로 피어나고 있소. 아름다운 삶은 아름다운 꽃으로 시들어버린다 했소!
-죽든 살든 그 여부는 이 공정한 징벌 무기가 결정할 테다.
-또 징벌 무기 있나?
-이번에는 칼 맛 좀 보세요!
-엉?……
-애당초 죽는 게 무서웠다면 이 따위 엉터리 지랄을 피우지 말거지…… 때 늦은 후회는 소용없다.
-좋소. 난 죽어도 원이 없소.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으리라.
-용감한 사내대장부는 죽음을 겁내지 않고 성실한 호남아는 거짓을 모른다. 마찬가지로 분노한 여자는 수다스럽게 지껄이지 않고 직접 행동하며 앙갚음하는 여인은 핏빛을 보고서야 손을 떼는 법이다. 어때? 기생에게 이런 철학이 있을 줄은 몰랐지? 이 갱도를 좀 경리 무덤으로 만들고야 말테다. 자 칼 받아라! 칼……
-그래, 날 정말 죽일 셈인가?
-죽음에도 장난이 있나? 어서 내 칼 받을 준비나 해라! 좀 경리나부랭이……
-정말 날 처단할 셈이요? 아가씨!
-아가씨? 흐흐흐…… 늑대 주둥이에서 꿀 발린 말이 나오다니……
-아니야, 이 봐…… 봉화 씨, 날 죽이려면 죽여줘…… 그런데……
-그런데 청춘에 죽자니 목숨이 아깝다는 말이죠? 겁쟁이!
-아니야, 장부일언중천금이라 난 하늘에 맹세하오. 그런데 딱 한 가지 소망만은 들어줘. 하룻밤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했는데……
-또 그따위 늑대수단으로 날 얼릴 셈이냐?
-이 씨팔년이 주둥이 닥쳐!…… 아, 봉화 마지막으로 나 요구 하나만 들어줘…… 무조건……믿어요 봉화를……
-됐어. 어서 용건이나 빨리 말해 봐요!
-이제 몇 초 후 내 목숨 끝장날 거 알아. 넘 통쾌해. 그리고 행복해, 진심으로 난 격동되어 있어. 이제 내 심장이 멎기 전 생명의 마지막 기회로 그대에게 청을 하나 들려 하네. 나 술 한 잔 마시고 노래 한곡 부를 테니…… 들어줘……
봉화는 멍해졌다. 살인범에게 사형장으로 압송하기 전에 마지막 호화로운 만찬이 있다질 않는가! 그녀는 애증이 분명한 갈림길에서 추잡하고 꾀죄죄한 남자의 최후를 집행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좀생이가 대체 무엇을 제기하는지 딱히 몰라 잠깐 틈바구니를 주었다.
좀생이는 인질이 동의하든 말든 일방적으로 부스럭거리더니 몸을 돌려 갱목을 더듬는다. 그는 손을 뻗쳐 천정에서 비닐박막에 싼 병을 꺼낸다.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다. 꿀꺽꿀꺽- 독한 알코올이 좀생이의 목구멍으로 연신 넘어간다. 메마른 늑골이 더욱 풀떡거린다.
좀생이는 술병을 왼손으로 잡곤 바른손으로 입술을 쓱 문지른다. 입가에는 물기가 번지르르하다.
봉화는 유괴범을 유심히 훔쳐본다. 어딘가 미심쩍으면서도 사이비한 포인트가 숨어있는 듯하였다. 음면 같기도 하고 또 저력이 다분한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적의가 조금 흔들리는 감에 다시 단속하는 태세를 취했다.
좀생이는 적수가 어떤 포즈를 취하든 일절 무관했다. 아주 도고한 오기로 태연자약하였다. 그는 술병을 다락기둥에 탕 메친다. 펑- 병이 졸지에 박산 났다. 깨끼춤의 연기자가 구경 무슨 도깨비탈춤을 추려나?
봉화가 금시 단칼에 좀생이를 요정 내려고 달려들 때, 좀생이는 적수의 동태에는 개의치 않고 어느 겨를에 손에 기타를 잡아들었다. 그리곤 어스레한 불빛이 얼른거리는 다락천정을 향해 눈을 지그시 감고 몸을 뒤로 젖버듬했다. 좀생이는 갑자기 오른 손을 탁 놀려 기타 줄을 튕긴다. 적막하고 괴괴하던 동굴에서 신기루의 봄 우레 같은 괴성이 울려나온다. 허리와 등, 어깨를 갱목에 기대고 선 기타수는 제법 무대에 오른 가수마냥 활기를 띈다. 마귀의 소굴에서 흑색연출을 감상하는 듯 봉화는 기태이상에 오리무중에 빠졌다. 도정신할 수밖에 없었다. 좀생이는 엉덩이와 팔을 흔들며 노래를 부른다.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못 다한 그 사랑도 태산 같은데
가는 세월 막을 수야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흐르는 내 인생에 애원이란다
지나간 그 옛날이 어제 같은데
가는 세월 잡을 수야 없지 않느냐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연창자는 혼자 기타반주를 하면서 제법 악에 받쳐 부르짖는다. 어느새 좀생이의 눈가에 이슬이 질벅하게 고였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다락기둥을 터지라고 잡아 친다. 갱목이 부르르 떨면서 천정에서 거미줄과 먼지가 마구 날려 내려온다. 좀생이는 히스테리로 광란에 잠겼다.
볼모는 냉정해졌다. 싸구려 자비심에 동요해서는 안 된다고 자중하는 중이다. 좀생이는 풀썩 물앉았다. 기타를 홱 팽개친다. 술병이 마사진 유리조각 위에 기타를 나뒹군다.
봉화의 몸에 살기가 다시 생겨 올랐다. 결코 나약할 수 없다고 자신을 뚱기쳤다.
-좀 경리, 연극 작작 하세요! 내가 더는 당신의 관중이 아님을 똑똑히 알아두기 바라요. 연극은 끝났어요.
-흥, 연극이 아니야. 마술은 더욱 아니고…… 결국 누구를 속이려는 수작은 절대 아니야. 아가씨, 맘대로 해봐. 응?
-쳇, 담은 여전하시네요. 좋아요……
-물론이지.
-악!
입술을 깨물고 또박또박 내뱉던 인질은 별안간 돌풍을 일으키며 덮쳐든다. 이렇게 간악한 여자를 자초부터 감히 나약하고 방탕한 매음녀라 할 수 있을까? 방치골의 살방치가 요절되는 순간 처참하게 푸념한 것은 새삼스러운 절감이었다. 그러나 그 징벌의 자매편은 채 끝나지 않았다. 통지기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흡했다. 음탕한 여자로서의 통지기년은 유래가 참 미묘하다. 통지기는 원래 물통, 밥통을 등을 나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계집종을 일컫는 말이다. 통지기들이 저자거리를 사러 저자거리에 나왔다가 장사치나 한량패들이 수작을 걸면 잘 눈이 맞아 놀았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유흥의 저자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살을 섞은 은근짜한테 한생을 맡겨 삶을 종속시킬 줄은 몰랐던 좀생이다.
-후유……
종식이라도 깃드나보다. 좀생이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비장한 예감을 앞세운 절규다. 두더지 혼인에 종지부호를 찍을 준비를 한다. 외할머니가 어릴 때 들려주시던 두더지 혼인유래가 느닷없이 얼핏 스쳐 지난다.
두더지가 혼인을 하려고 세상에서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하늘에게 청혼을 하자 하늘은 일월이 없으면 내 덕을 나타냄이 없으리라 했다. 일월에게 가 구하니 일월은 또 구름이 나를 가리니 구름이 내 위에 있다 하였다. 구름에게 가 구했더니 구름은 바람이 있어 나를 흩어지게 하니 바람이 내 위에 있다 하였다. 바람에게 갔더니 구름은 흩어지게 할 수 있으나 밭 가운데에 있는 돌부처만은 넘어뜨리지 못한다 하였다. 석불에게 가 구하니 석불은 말하기를 내가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나 오직 두더지가 내 발을 뚫으면 내가 넘어지기 때문에 그가 나보다 나으리라 했다. 이에 두더지가 이르기를 천하에 높은 것이 나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고 같은 두더지에게 청혼을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로부터 “두더지 혼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하다면 난 앙혼을 했는가? 자리를 봐가며 발을 펴라 했건만……
좀생이는 신세타령을 길게 늘일 여유가 없었다. 유정증, 백음증에 걸려 테크닉을 보이던 이왕지사가 우스운 한 단락 에피소드로 남았다. 외박으로 엔조이하던 추억은 이미 퇴색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상관자의 손에 죽는 길밖에 없다. 영광과 행복의 통로다.
좀생이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일 미터 간격을 두었던 대치의 공간거리가 좀 멀리 격리되었다. 일진일퇴가 시작된다. 아무리 사내라고 우쭐거려도 그건 어차피 적수공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일방이 무기로 전신무장한 공격 앞에서 용빼는 수 없다.
좀생이는 절대적인 굴복자로 진작 전락되었다.
-뿌지직 타악……
등 뒤에서 소리치며 촛불이 크게 타 번진다. 때를 같이하여 불시에 저장고 안이 더 환해진다. 해송 동바리와 벽을 두른 전나무의 송진을 태우며 촛불은 끝내 바싹 마른 나무에 달아올랐다. 확확…… 펄펄…… 뿌지직뿌직…… 탁탁…… 전나무의 송진이 줄줄 흘러 떨어지며 천정 아래의 밑바닥 나무들에도 불길을 만연시킨다.
연기가 벌써 갱내를 덮어온다. 다락기둥…… 다락망대…… 다락침상…… 방수포 비옷…… 조짚 위의 피목…… 동발목…… 천정 거미줄…… 밀실의 모든 형체가 똑똑히 드러나 알려지고 있다. 화재화재……매연매연……소각소각……
그런데도 복수자는 왼눈 한 번 팔지 않고 납치자만 직시하며 다가온다. 두 사람은 짜장 혈안이 되었다. 그녀의 등 뒤로는 기다란 그림자가 용춤을 흔뎅인다. 벽체에 매달린 광솔 불에 비쳐진 인질의 몰골은 강파르게 질린 채 복수의 불길로만 타올랐다.
우등불! 우등불! 아, 물로 꺼버려야 한다.
-지독한 매소부!
순간 좀생이는 입술 새로 악다구니를 뱉었다. 자기의 납치 행각에 기편성, 유괴성이 있었다면 볼모의 복구엔 잔인성, 살인성이 충만했다고 단정하던 데로부터 출발한 용단일 거다. 좀생이는 퇴각하던 뒷걸음을 스톱하고 이번엔 복수자를 맞받아 맨몸으로 돌진했다. 송거에 드러난 그의 다모증 미사리의 윗몸이 뻘건 빛덩이로 번뜩거렸다. 육탄으로 적진에 돌입하는 용사답다.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장부 투사의 기세답다.
상대의 돌발적인 공격에 인질은 놀랐다. 그토록 맹렬하던 육정의 에너지처럼, 그다지 기세 차던 혹애의 관능처럼 사신에 용감히 도전해 최후를 이겨가는 남자의 기질에 굳어졌다. 정복자의 점유욕, 승리자의 소유욕에 포로되었다.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분발하는 전투정신매력에 깊이 흡인된 거다. 결코 격투를 하는 도중에 지친 패망쇠미가 아니었다. 봉화의 눈앞에서 훨훨 타오르는 삼단 같은 불기둥은 거짓을 불사르는 모닥불 축제였다. 요사하고 간특하고 교활하면서도 음충맞은 사기꾼, 위선자, 절취범으로 낙인을 찍었던 선입견이 사르르 증발되었다. 절치부심이 해소되었다. 오만하고 기고만장하던 인질의 체형이 졸지에 물먹은 흙 보살님처럼 스르르 꺼지며 내려앉는다. 태엽이 풀린 시계와 같았다.
좀생이는 뭉클해났다. 살인에 광분하던 인질이 칼을 집어든 손을 축 아래로 떨어뜨리며 오뚝이처럼 차렷하자 그만에 감격과 함께 위안이 생겼다. 상대의 극대화한 긴장 탕개가 늦추어졌다는 발견에서였다. 자기의 반공격이 볼모의 항복을 자안하는 데로 심리승리를 전취한 거다. 눈알이 알알하고 입안 목구멍이 매캐하다. 갱내에 자욱한 매연으로 인해 눈 뜨기조차 힘들다.
좀생이는 복수자를 팽개친 채 홱 돌아서 손으로 촛대를 쑥 뽑아 던졌다. 허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촛대는 녹아 형체를 잃었고 동바리와 곰솔에서는 불길이 본격적으로 날름거렸다. 천정의 거미줄마저 불속에 훌훌 날아 내렸다. 그가 빗자루 가지러 다락룸을 돌아서는 찰나, 뭔가 앞에 와 텅 부딪쳤다. 봉화였다. 두 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내리고 두 눈을 살그머니 감은 채 흐트러지진 포즈를 취했다.
아, 반성과 용서의 힌트로 건네던 신호였다. 너무나 익숙한 육체적인 언어렷다. 관솔불에 애리애리 잗젊은 얼굴이 불깃불깃 상기되면서 사내의 흉장을 쑤셔놓는다. 좀생이는 순간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불사조로 나타난 사랑의 여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수치와 회개와 법열로 반죽된 철저한 점유의 무한대 포옹이었다. 관솔불보다 더 뜨거운 열도로 목숨을 걸로 채집하던 이성을 설설 끓여 녹이리라며 으스러지게 포박한 거다. 필승불패의 쟁취를 치른 것이리라!
-으악……!
별안간 좀생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봉화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뒤로 물러간다. 페니스를 두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린 채 허리를 잔뜩 꼬부렸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탁탁 튕기는 불똥소리 속에 간간이 새어 나온다. 이어 좀생이의 두 손등 위로 피가 흐른다. 봉화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 비수에 또 진붉은 선지피가 새로 묻혀있었다.
좀생이가 봉화를 꽉 끌어안을 때 그녀는 긴장된 신경의 탕개를 풀었다. 그리하여 미처 손에 꼬나든 비수의 감각을 의식 못한 채 좀생이의 포옹에 휘말려들었다. 하여 봉화가 남자의 포옹에 끌려드는 순간, 뾰족하게 꼬나든 비수 끝이 면바로 상대의 고간을 찔렀던 거다.
남근의 신낭에 관통상을 당한 좀생이는 비칠거리며 게걸음치더니 쿵 넘어진다. 사랑하는 여자의 메스에 의해 거세당하고 무낭내시로 되고 말았다. 잇따라 풍덩 하는 물소리와 함께 마귀의 지옥 함정에 거꾸로 쑥 빠졌다. 물보라가 솟으며 함정 위에 불기둥이 신기루를 세운다. 흙먼지, 물방울이 봉화의 몸에 어지럽게 튕겨온다.
초야권을 치렀던 여자로부터 뜻밖의 일격을 맞고 황문이 된 남자가 또 함정으로 굴러 떨어졌다.
-사람 살려요……
청승맞은 비명소리가 갱도 안에 울린다. 탁탁탁…… 불길소리가 육성을 삼켜간다.
동발목 천정이 우지끈 내려앉더니 일시에 함정에 떨어졌다.
봉화는 결사적으로 굴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까지도 피 묻은 칼이 손에 쥐어졌다. 왼손주먹과 바른손의 칼로 굴 문을 집어 두드리다가 어깨로 떠밀어 겨우 문을 열었다. 문이 빠금히 열려서부터 재앙은 더 커질 줄이야…… 원래 봉폐되었던 굴 안은 바깥 공기가 흘러들자 대뜸 기세등등한 불길에 기름을 친 듯 더 맹렬히 타번지는 것이 아닌가!
-우왁…… 으악…… 아악……
함정 안에서 돼지 멱따는 듯 한 대함이 고래고래 튕겨 오른다. 사람과 짐승의 성대를 떠난 괴상한 굉음이 아닐 수 없다.
굴 문 밖으로 대뜸 삼단 같은 연기사태가 꾸역꾸역 풍겨 나온다. 산언덕은 화재가 난 듯 연기타래가 뭉게뭉게 감돈다. 천국에 오르는 이를 위로하는 전송과 배웅의 향연 같다.
불에 타는 갱목을 지나 반쯤 열린 굴 문 밖에 상반신을 내민 봉화는 더 기어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폭 꼬꾸라졌다. 질식에 실신한 거다. 매캐한 비린내가 사처에 풍겨간다……
그때로부터 꼭 일 년 후 추석날이다.
과일저장고, 갱도 옆에 금방 벌초한 봉분이 유표하게 눈에 뜨인다. 등에 갓난아기를 업은 새 각시가 제단에 술을 붓고 있었다. 옆엔 노파가 손등으로 눈굽을 찍고 있는 정경이 어렴풋이 보인다. 널빤지로 만들어 세운 비문엔 “청춘비망록”이라는 검은 글씨가 내리 새겨져 있다. 방치골은 청춘의 희성이런가!
갑자기 까마귀울음소리가 어디선가에서 들려온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댄다. 개미떼가 기어오르는 패말둑 묘갈명에 흰 나비가 나래를 접으며 살그머니 내린다. 검은 “파충류”의 비상과 함께 백색 “날짐승”의 추락이 교체된다. 곤충은 번식하고 인간은 퇴화되는가! 자연의 섭리를 인간의 진리가 노크한다. 진화 속의 돋되는 되풀이다. 서기는 공중에 표표히 날린다.
아이고 애고…… 꺼이꺼이…… 으앙으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