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 태사공 신달 (太師公 莘達 )
→ 2世. 공신공 선지 ( 功臣公 先之 )
→ 3世. 복야공 금강 ( 僕射公 金剛 )
→ 4世. 문정공 집형 ( 文靖公 執衡 )
→ 5世. 문숙공 관 ( 文肅公 瓘 )
→ 6世. 문강공 언이 ( 文康公 彦頤 )
→ 7世. 시랑공 돈신 ( 侍郞公 惇信 )
→ 8世. 유수공 상계 ( 留守公 商季 )
→ 9世. 녹사공 복원 ( 錄事公 復元 )
→ 10世. 어사공 순 ( 御史公 純 )
→ 11世. 문현공 보 ( 文顯公 珤 ) ===> 아드님이 여섯분 이신데
→ 12世
첫째, 찬성공 계종 =>찬성공파
둘째, 대언공 안적 =>대언공파
셋째, 봉록군 중조 =>봉록군파
넷째, 양간공 안숙 =>양간공파
다섯째, 소부공 암 ===> 소부공파 (少府公派)
여섯째, 태위공 안비 =>태위공파
12世, 소부공(少府公)은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문현공(文顯公) 휘(諱) 보(珤)의 다섯째 아드님으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함(職銜)이 소부윤(少府尹)이시다.
산소(山所)는 장단 송림현(長湍 松林縣)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失傳)되고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반장재(盤庄齋)및 동소(同所)에 소부공 추원단(少府公 追遠壇)을 설단(設壇)하여 시사(時祀)를 모시며,
또한 진주시 동사동 덕산재(德山齋)에서도 위패(位牌)를 모시고 춘추(春秋)로 제향(祭香) 올린다.
배위(配位)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판삼사(判三司)를 지낸 박지량(朴之亮)의 따님이시다.
공(公)께서는 큰아드님 영윤공(令尹公) 휘(諱) 주보(周輔)와
판서공(判書公) 휘(諱) 해(侅) 두 아드님을 두셨다.
13世, 영윤공(令尹公)께서 외 아드님이신 14世,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휘(諱) 염(廉)과 함께 려말이초
(麗末李初)의 정란(政亂)에 풍속이 순후(淳厚)한 진주시 집현면 입방(晋州市 集賢面 笠坊)으로 낙향(落
鄕)하셔서 호를 입은(笠隱)이라 칭(稱)하시고 은둔(隱遁)하셨다. 판도판서공 후손(後孫)으로서 문,무과
(文,武科)에 등과(登科) 한분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하며, 공(公)의 후손(後孫)들은 주로 영남지방(嶺
南地方)에 거주(居住)하면서 소부공 장방파(長房派)라 칭한다.
둘째 아드님이신 전법판서공(典法判書公) 휘(諱) 해(侅)께서는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 대광(大匡)의
품계(品階)에 오르시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파평군(坡平君)에 봉(奉)해졌다.
전법판서공의 아드님이신 정후공(靖厚公) 휘(諱) 호(虎)께서는 이조 선력좌명(李朝宣力佐命) 개국공신
(開國功臣)으로서 대광(大匡)오르시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으로 봉(奉)해 졌으며 시호(諡號)가 정후
(靖厚)이시다. 공(公)의 후손(後孫)은 주로 경기도(京畿道)와 개성지방(開城地方)에 거주(居住)하며
소부공 이방파(二房派)라 일컫는다.
장방(長房) 판도판서공(版圖判書公) 휘(諱) 염(廉)의
장자(長子)이신 15世, 부정공(副正公) 휘(諱) 유덕(惟德)께서는 문과(文科)
가선대부(嘉善大夫)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내셨다.
공의 장자(長子)이신 16世,사직공(司直公) 휘(諱) 췌(萃)께서는 문과(文科) 사직(司直)을 지내셨다.
공의 장자(長子)이신 17世, 참의공(參議公) 휘(諱) 거(擧)께서는 문과(文科)
통정대부 행 이조참의(通政大夫 行 吏曹參議)를 지내셨다.
공의 장자(長子)이신 18世, 상장공(上將公) 휘(諱) 산석(山石)께서는 문과 등재(文科登第)하시어 상장
군(上將軍)을 지내셨다.
이상의 선조(先祖)님은 진주시 집현면 입방(晋州市 集賢面 笠坊)에 사셨다.
상장공(上將公)의 장자(長子)이신 19世, 보은공(諱:輔殷)께서 판관(判官)을 지낸 성근례(成近禮)의 가문
에 출입(出入)하시여 창녕(昌寧)으로 오셨으며, 학문(學文)과 덕망(德望)이 과거장(科擧場)을 기울이고
도 남을 만큼 뛰어 났으나 덕(德)을 감추고 벼슬살이에 나아 가시지 않으셨다.(隱德不仕)
공의 장자(長子)이신 20世, 운봉공(雲峰公) 휘(諱) 삼빙(三聘) (字:莘叟, 號 逸菴)께서는 성균진사
(成均進士)시에 학문(學文)과 행실(行實)이 현명(顯名)하시어 학행(學行)으로 은일(隱逸)되어 운봉현감
(雲峰縣監)에 제수(除授)되셨다.
공의 장자(長子)이신 21世, 생원공(生員公) 휘(諱) 경(耕) (字:景任, 號:杏軒)께서는 일찍이 선조(宣祖)
을유년(乙酉年:1585년)에 성균생원(成均生員)에 합격(合格) 하셨으나 불혹(不惑) 전에 졸(卒)하셨다.
생원공의 아드님이시며 시조공(始祖公)으로 부터 22世 되시는
연곡(燕谷) 입향조(入鄕祖) 외신재(畏神齋)(諱:南龍 字:士元)공 께서는 선조 경인생(宣祖庚寅生1590年)
인데 임란(壬亂)을 당하시어 다섯의 나이에 편 모부인(偏母夫人) 재령이씨(載寧李氏)손을 잡고 창녕현
(昌寧縣) 북쪽 연화봉(蓮花峰) 아래인 이수(伊水)의 위쪽으로 택리입향(擇里入鄕) 하셧다.
공(公)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이시라 5세(五歲)에 능히 독서를 하셨고 성동(成童)이 되자 당시(當時)
한강 정구 선생(寒岡 鄭逑 先生)의 높은 제자(弟子)로서 덕행이 일세의 사표(師表)이신 성안의 선생(成
安義先生)(號:芙蓉堂)에게 나아가 학문(學文)을 요청(要請)하였으니, 선생께서 보시고 크게 감탄(感歎)
하여,칭찬하며 말씀 하시길 ~ 이 아이가 일찍이 엄군(嚴君)을 잃었지만 학업(學業)에 돈독(敦篤)한 뜻
을 품고 문사(文辭)가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가히 나의친구(生員公:父親)는 죽지 않았다고 하겠
구나~ 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성리학(性理學)이 제반서적(諸般書籍)으로 가르치니 공(公)은 사림(士林)
의 제군자(諸君子)중에 가장 뛰어 나셨다.
인조 갑자년(仁祖甲子1624年) 사마시(司馬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 하셨으니 모부인(母夫人)을 봉양
(奉養)하며 남는 여가(餘暇)에 공부함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평생동안 넓고 충실(充實)한 학문(學文)
을 유고(遺稿)에서 가히 볼수 있으리라.
공(公)은 시대가 호란전후(胡亂前後)라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으시고 이계(伊溪)곁에 서당을 짓
고 그 현판(懸板)을 외신재(畏神齋)라 하고 스스로 호(號)를 삼으시니, 蔡西山(채서산) 선생(先生)의 독행
불괴영 독침불괴금 (獨行不愧影 獨寢不愧衾 : 홀로 행하여도 그림자에 부끄러운이 없고, 홀로 잠을 자도
이불에 부끄러움이 없다)에서 뜻을 따온 연유(緣由)이며, 공의 신독공부(愼獨工夫)가 이와같음에 이르렀
으니 참으로 가히 후세의 법(法)으로 삼고 또한 문학덕행(文學德行)이 당세(當世)에 추중(推重)하며
후손들이 연이어 거업(擧業)에 성공하니 공의 후손(後孫)들은 공의 호(號)로서 분파(分派) 삼아
외신재공파(畏神齋公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公께)서 북청공(北靑公) 휘(諱) 명철(命哲) (字:錫余, 號:遯窩)을 낳으시니 효종 임진년(孝宗壬辰年)
에 증광시(增廣試)에 생원(生員)이 되시고 현종 임자년(顯宗壬子年:167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하시여 통훈대부 행 북청판관 겸 북청진 병마절제도위(通訓大夫 行 北靑判官 兼 北靑鎭 兵馬節制都尉)
를 지내셧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유곡찰방(幽谷察訪)등을 역임(歷任)하셨으나, 경신사화(庚申士
禍:1680년) 당시에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선(善)한 무리들이 대부분 버려 졌으므로 공(公)께서 여러번 상
소(上疏)를 올려 정치(政治)의 핵심(核心)을 직소(直訴)하였으나 끝내 채택(採擇)되지 못하였으니 타당
(他黨)의 두려움과 꺼림을 받은 것이다.
마침내 관직(官職)을 버리고 고향 연곡(燕谷)으로 돌아 오시어 둔와(遯窩)라 스스로 호(號)를 지어 부르
며 산림(山林)에 소요(逍遙)하시었다.
숙종 정묘년(肅宗丁卯年:1687년)과 무진년(戊辰年:1688년)에 조정(朝廷)에 부름이 있었으나 나아가지
않으셨고 다음해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해에 졸(卒)하셨다고 유고(遺稿)에 전한다.
북청공께서 고성공(固城公) 휘(諱) 동로(東魯) (字:一至, 號:燕涯)을 낳으시니 공(公)께선 생이지지(生而
知之)의 특출(特出)한 자질(資質)의 가업(家業)을 계승(繼承)하여, 7세(七世) 이래로 기국과 도량(度量)
이 이미 완성(完成) 되었으며, 퇴계 선생(退溪 李滉)의 재전제자(再傳弟子)이신 갈암(葛菴 李玄逸) 문하(門下)
에서 수업(修業)하셨다.
숙종 갑자년(肅宗甲子年:1684년)에 진사(進士)가 되시어, ((갑술사화(甲戌士禍) 이후로 영남(嶺南)의 남인
(南人)으로서)) 숙종 기묘년(肅宗己卯年:169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셨으니 그의 비범한 재주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이며, 또한 양대 급제자(兩代及第者)가 연곡(燕谷)에서 나셨다.
통훈대부 행 예조정랑(通訓大夫 行 禮曹正郞)을 지내셨고.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 고성현령(固
城縣令)을 역임(歷任)하셨다.
공(公)께서 예조 정랑직( 禮曹正郞職)으로 계실적에 동문(同門) 벗의 자제(子弟)가 과거에 응했는데, 채점을 잘부탁
한다는 청탁(請託)을 받으시고는 일불러 낙방(落榜)시켯다는 일화(逸話)가 전해 내려올 만큼 청령강직
(淸廉剛直)한 성품이어써, 당시에 영상(領相)이자 남인(南人)의 영수(領首)인 미수 허목선생(眉首許穆先生)이 빼어난 공의 자
질(資質)을 흠모(欽慕)했다고 미수문집(眉首文集)에 실려 있다
향연은 육십을 채우지 못하셨고,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만조(洪萬朝)의~ 높은 재주는 옛날부터 대부분
지위(地位)가 없었으니 만가지 계책(計策)이 어찌하여 다시 여기에 그치리오~ 라는 만사(輓詞)에 공의
재주가 대강 보이며, 오현(五賢)의 수현(首賢)인 한훤당 김굉필선생(寒暄堂 金宏弼先生)을 모신 도동
서원(道東書院)에 배향(配享) 되셨으니, 오래도록 우러러 보는 바가 되셨다는 것을 거듭 알수 있도록 유
고(遺稿)에 남겨셨다.
고성공께서 매국헌공(梅菊軒公) 휘(諱) 취원(就遠)(字:子悠, 號:梅菊軒)을 낳으시니 문장과(文章)과 절행
(節行)이 당세(當世)에 추중(推重)되시고 다섯번이나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
가시지 않으셨다.
당시는 갑술사화(甲戌士禍) 이후라 영남 남인(南人)이 환로(宦路)에 나아 가는것은, 율곡 선생(栗谷 李
珥)이 아홉번 장원급제(九度壯元) 한것 만큼이나 어려웠으리라.
매국헌공이 손자로서 연오공(蓮塢公) 휘(諱) 방찬(邦燦)(字:汝幹.號:蓮塢)을 낳으시니 공(公)께선 천성
(天性)이 중후(重厚)하시고 학문(學文)이 심오(深奧)하시어 문장(文章)짓는 실력이 과거장(科擧場)을 기
울게 할수 있었으나 거자(擧子)들과 나란히 하지 낳았으며 학업 연마(硏磨) 하는것을 필생의 업(業)으로
삼아 사림(士林)들이 공(公)을 추앙(推仰)하였고 후생(後生)들이 배웠으며 문학(文學)이 현세(顯世)하셨
다고 유고(遺稿)에 기록되어 있다.
연오공께서 이계공(伊溪公) 휘(諱) 치효(致堯)(字:聖民,號:伊溪)을 낳으시니 문학(文學)이 뛰어 나시어
세상에 드러나셨으며 유고(遺稿)를 남기셨다.
이계공께서 묵와공(黙窩公) 휘(諱) 종로(鍾魯)(字:尼叔,號:黙窩)을 낳으시니
행실(行實)과 절의(節義)로써 세상에 드러나셧으며 유고(遺稿)를 남기셧다.
묵와공께서 연봉공(蓮峯公) 휘(諱) 영관(永觀)(字:子成,號:蓮峯)과
정언공(正言公) 휘(諱) 영성(永誠)(字:子純)을 낳으시니
연봉공께선 학문(學文)과 덕망(德望) 뛰어 나심에 유고(遺稿)를 남기셨고,
정언공께선 고종 정묘년(高宗丁卯年1867년)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하시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
言)을 지내셨다.
~~~위 두분 공(公)께서 나의 고조부(高祖父)와 종고조부(從高祖父)가 되신다~~~
아아~ 이러토록...우리 외신재(畏神齋)공께서 연곡(燕谷)에 입향(入鄕)하신후로 사백성상(四百星霜)
동안 과업(科業)과 신독전승(愼獨傳承)의 학업(學業) 문미(門楣)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으니, 오윤
(吾尹)의 영남 5대문중(五大門中)으로서 가업(家業 )또한 가히 손색이 없을것이라 사료 되는바 간략
(幹略)하나마 연곡(燕谷) 연원약사(淵源略史)를 기재(記載) 하는바이다...
~~~ 丁亥 陽月 宗末 馨漢 謹告 ~~~
연곡 종가(宗家)로부터 분문(分門)된 문중은 : (창녕:신구,용소) (청도:장기) (밀양:부연) (경산:옥분)
(합천:소문중) (함안:백산문중 ) (창녕:소문중) (청도:소문중)( 밀양:서가정문중) (진주:사천문중)
(장수문중)(전주문중)(창녕수다리문중)(옹진문중:在北韓) 등이 있고,
이방파(二房派)는 (온양,인천문중) (개성문중) (시흥,미산,은행문중) (파주:마은문중)
(포천:저운문중) (장단문중) (김천문중) 등지에서 우리 소부공파 일족이 세거하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