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朝(남조) 宋(송)나라의 문학가 劉義慶(유의경)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의 "첩오"(捷悟)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양수(楊修)는 조조(曹操)의 모사(謀士)로 머리가 무척이나 명석한 사람이였다.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同行하여 길을 가던 중,
회계(會稽)의 상우(上虞)라는 곳을 지나가다 길 가에 잘 만든 碑石을 보게 되었다.
이 碑石은 유부비(幼婦碑) 또는 조아비(曹娥碑)라 하며,
碑石에는 조아(曹娥)라는 소녀의 효(孝)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조아(曹娥)는 동한(東漢)때의 孝女로 아버지가 강에 빠져 죽은 뒤 아버지의 屍身을 찾지 못하자
14살의 나이로 스스로 강에 뛰어들어 아버지의 屍身을 업고 죽은 채 떠올랐다고 한다.
후에 그 地方 縣令이었던 도상(度尙)이 曹娥의 지극한 孝誠을 기려
그녀를 표창하고 강 남쪽 길옆으로 移葬한 뒤 碑石을 세워서 그녀의 뜻을 기렸다
비문(碑文)은 당시 13歲의 어린 文章家 한단순(邯鄲淳)이 孝女 조아(曹娥)의 행적에 감탄하여 쓴 稱頌碑였다.
조조(曹操)와 양수(楊修)가 글을 다 읽고 碑石을 둘러보니 碑石 뒷면에도 여덟글자가 내려 써 있었다.
黃絹幼婦 外孫齏臼
황 견 유 부 외 손 제 구.
이 여덟글자는 文人 書藝家로 有名했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이 비석을 보려고 찾아갔다고 한다.
마침 도착했을 때는 어두운 밤이라 손가락으로 더듬어 碑文을 읽고 감탄하여 지은 글이라고 전한다.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 外孫齏臼)라,,,,,,,
"자네 이 뜻을 알겠는가?"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에게 물었다.
"네, 알지요."
거침없이 양수(楊修)가 대답하자,
"가만있게 말하지 말고. 내가 생각을 좀 하게"
하고 조조(曹操)가 말하였다.
조조(曹操)는 말을 타고 30 여 리를 가는 동안 곰곰히 이 글귀만 생각하였다.
"핫 핫 핫 이제야 알겠구나 무슨 뜻인지,,,"
조조(曹操)가 갑자기 무릎을 치며 외쳤다.
"제가 답을 올릴테니 맞는가 보시지요?"
양수(楊修)가 웃으며 말하였다.
"위의 두 글자 황견(黃絹)은
누런 누에고치의 실, 즉 색이 있는 실입니다."
"실 사(絲)와 색(色)을 합하니 절(絶)자가 됩니다."
"그 다음 유부(幼婦)는
어린 여자이니 女와 少를 합하여 묘(妙)자가 됩니다."
"그 아래 외손(外孫)은
여자 쪽을 말하는것 아닙니까? 그러니 女자와 子를 합쳐 호(好)가 됩니다."
"맨 아래 제구(齏臼)는
맵고 쓴 것을 모두 받아 들이는 그릇이니 사(辭) : [受+辛]가 아니겠습니까?"
"즉 絶妙好辭로 절묘하고 훌륭한 문장이란 뜻입니다."
하고 양수(楊修)가 풀이를 하였다. 이에
"내 실력이 자네에게 30리나 뒤떨어 졌네 핫!핫!핫!"
하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양수(楊修)를 두려워 했다.
후에 양수(楊修)는 계륵이라는 고사성어를 남기고 조조(曹操)에게 처형 되었다.
* 薺 (고추냉이 제) 또는 齏 (버무릴 제)자로 쓰고 있지만 䪡 (채나물 제)를 쓰기도 한다.
모두 같은 뜻을 가진 글자이며 원문의 글자는 "채나물 제" 또는 "버무릴 제"로 풀이한다.
"구"(臼) 는 절구 또는 그릇을 말한다.
그러므로 "제구"는 양념그릇을 말함이다.
*조조(曹操)는 회계(會稽) 地方을 간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조조가 이 비석을 본 것도 사실이 아니고 지어낸 이야기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