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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말로 학문한 사례 소개:
그리스인들의 그리스말로 학문하기
유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그리스-발칸어과)
2007.08.23
<<발표에 앞서>>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리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를 고른 까닭은 제 전공이 그리스학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최근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인문학의 위기의 원인을 학문의 발상지인 고대 그리스에서 찾아보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벌써 10년 이상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묘안으로 인문학을 위기에서부터 구하고자 하는 논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별다른 뾰족한 수는 잘 발견될 것 같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리스학 전공자로서 제 나름대로 인문학의 위기가 왜 왔는지, 그리고 지금 인문학 발전을 위해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인문학 지원 정책이 과연 인문학을 위기에서 구해낼지에 대해 저는 지극히 의구심이 나서 저 나름대로 이런저런 궁리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논리적인 접근보다는 신화적 접근을 해 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그리스인들이 인류 처음으로 학문을 일으킬 때, 그들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정신으로 학문 탐구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살펴본다면 지금 우리가 그들에 비해 얼마나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어떤 정신을 잃었기에 인문학의 위기를 맞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엘리아데가 말하는 illud tempus, 즉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세상이 어지러워진 까닭을 밝히고 다시 태곳적의 창조적인 힘을 소생한다는 지극히 신화적인 방법으로 오늘날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짚어보고 또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서양 학문은 모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발상지다. 지난 300년 동안 전세계의 지성인들과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바탕에 갈려 있는 자유와 정의,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정정당당한 겨룸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일궈 낸 올림픽 경기, 호메로스(Ὁμηρός Homeros)의 ‘일리아스(Ἴλλιας Illias)’와 ‘오디세이아(Ὀδύσσεια Odysseia)’에서 비롯되어 헤시오도스(Ἥσιοδος Hesiodos)의 ‘신통기(Θεογονία Theogonia)’와 ‘일과 나날(Ἔργα καὶ Ἡμέραι Erga kai Hemerai)’로 이어지는 서사시와 시모니데스(Σιμόνιδης Simonides)와 핀다로스(Πίνδαρος Pindaros)에서 시작되어 사포(Σαπφώ Sappho)의 서정시로 이어지는 서양 문학, 아이스킬로스(Αίσχύλος Aischylos)와 소포클레스(Σωφοκλής Sophocles), 에우리피데스(Εὐρυπίδης Eurypides)의 3대 비극작가와 아리스토파네스(Ἀριστοφάνης Aristophanes)의 희극에서 시작된 연극,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 밀레토스에서 서양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Θαλής Thales)가 시작한 사상혁명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 과학 정신과 수학으로 우주의 원리와 사람들의 삶의 원리까지 설명하려 했던 수학의 창시자 피타고라스(Πυθάγορας Pythagoras), 세계의 무상한 변화 뒤에 변하지 않는 로고스(Λόγος Logos)가 있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Ἡράκλειτος Heracleitos), 최초의 원자론을 주장한 데모크리토스(Δημόκριτος Democritos), 병의 시작과 진행 과정을 세밀하게 살펴 병을 치료하는 과학적 의학의 창시작인 히포크라테스(Ἱπποκράτης Hippokrates), 인간의 과거사를 탐구하는 역사학을 시작한 헤로도토스(Ἡρόδοτος Herodotos)와 투키디데스(Θουκιδήδης Thucidides), 서양 철학의 초석을 놓은 소크라테스(Σωκράτης Socrates), 플라톤(Πλάτων Platov),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Aristoteles)......, 실로 현대 문명은 고대 그리스 민족의 천재성에 절대적인 빚을 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의 천재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떻게 그리스에서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 사이의 불과 30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짧게 살펴보려는 것이 이 발표의 목적이다.
<<그리스 문명에서 학문의 탄생 과정: 길과 만남을 통해 배우는 사람들>>
기원전 1100년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 제국의 아나톨리아 반도, 그리고 크레타를 비롯한 에게해의 섬들, 그리스 본토에 찬란하게 꽃폈던 청동기 문명이 갑작스레 끝난 뒤, 그리스에는 문자가 없는 암흑 시대가 찾아 온다. 그로부터 300년쯤 지난 기원전 800년쯤에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나타나면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탄생을 알린다. 그것은 인류 문학의 첫걸음이기도 했다.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바벨탑, 또는 만리장성과 같은 웅장하고 위압적인 기념비가 아니라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말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문학으로 시작하는 그리스 문명의 첫 신호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리스인들은 보이지 않는 말과 정신이야말로 어떤 거대한 기념비보다 더 영속적이고 위대함을 깨달은 최초의 민족이다. 그래서 그리스 하면 파르테논 신전이나 밀로스의 아프로디테와 같은 아름다운 조형물보다는 그리스 신화나 호메로스의 서사시, 그리스 비극과 같은 찬란한 말잔치가 더 먼저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얻은 말과 정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사랑은 끝내 탈레스를 비롯한 자연 철학자들의 사유를 낳았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와 같은 역사학자,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의학자들의 배출로 이어졌다. 그리스는 학문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고 발전했다는 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발전의 본보기를 모여 준다. 우리가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이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초창기 학자들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호메로스가 활동하던 시기부터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가 등장하는 기원전 6세기 초반까지 그리스는 결코 선진국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이미 수천 년 전통의 문명을 자랑하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와 같은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초창기 그리스의 선각자들은 이들 선진 문명 지역으로 직접 가서 많은 것을 배워 왔다.
그리스에서 신화적 언어가 아니라 논리적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한 최초의 인물이자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는 젊어서 무역업에 종사하여 성공한 사람이었다. 돈을 충분히 번 뒤 그는 장사를 그만두고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인들에게서 기하학을, 칼데아인에게서 천문학과 수학을 배웠다고 한다. 당시 칼데아인들은 천문학에 대해 상당히 발달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당히 실제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의 천문학은 달력을 만드는 중요한 일에 이용되었다. 특히 이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그들은 또한 이집트인들이 실용적 기하학에 능했던 것처럼 상업 수학에 능했다. 그러나 탈레스가 이들에게 기하학과 천문학을 배운 까닭은 지적 호기심과 배워 아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이집트인들과 칼데아인들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매우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이해에 매달린 반면, 그리스인들의 자연에 대한 질문은 자연이 어떤 원리로 작용하고 또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비실용적 지적 탐구였다. 그래서 탈레스는 쓸모 없는 탐구에 시간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해를 떠난 비실용적인 질문을 할 정도로 앎에 대한 정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 그리스인들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특징이었다. 또 자연의 힘의 균형을 정의(δίκη dike)라 불렀던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이집트를 여행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더욱 더 인상적인 유학 경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수학의 창시자인 피타고라스다. 그는 젊어서 사포의 고향으로 유명한 레스보스(Λέσβος Lesbos) 섬에서 탈레스, 아나시만드로스와 함께 철학 공부를 했고 이어서 이집트로 건너가 스물두 해 동안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의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점령하자 포로로 잡혀 바빌로니아에 가서 다시 12년 동안 살았다. 그는 그 기간 동안 내내 이집트 사람과 칼데아인들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배웠다. 그리고 페르시아 왕의 시의였던 그리스인 데모케데스(Δεμοκέδης Demokedes)의 도움으로 쉰여섯 살에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독재를 피해 다시 델로스 섬과 크레타, 델포이를 거쳐 남부 이탈리아 크로톤(Κρότον Kroton) 시에 정착한 뒤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집단을 운영하다가 여든 살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웃는 철학자로 알려진 데모크리토스(Δημόκριτος Democritos)도 이집트, 에티오피아,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파키스탄 지방에까지 가서 인도의 브라만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의 저술 내용으로 헤아려 보면 동쪽으로는 바빌로니아와 수사까지,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바르케까지, 남쪽으로는 나일 상류의 시에네(오늘날 아스완)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흑해 연안 그리스 식민도시인 오르비아를 중심으로 크리미아 반도, 우크라니아 남부까지 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또 고대 그리스의 칠현(七賢) 가운데 한 사람인 아테네의 솔론은 공직을 물러난 뒤 오로지 배우고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 소아시아 지방과 이집트, 키프로스를 방문했다고 한다.
질병의 마술적, 신적 기원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과학적 의학을 세운 히포크라테스(Ἱπποκράτης Hippocrates)도 데모크리토스에게서 철학을 배우고 이오니아 지방 에페소스시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집대성한 파피로스 문헌을 공부한 뒤 마케도니아, 트라케, 스키타이 지방, 에게해의 섬들, 아테네, 펠로폰네소스, 테살리아 지방 등 그리스 본토 전역을 여행한 뒤, 이집트와 리비아에 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
<<글이 아니라 말로 생각하고 배우는 그리스인들>>
이와 같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신적 혁명을 이끈 초기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선진 문화를 가진 지역으로의 여행과 그곳의 큰 스승들과의 만남에서부터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를 얻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식과 기술을 도입했을 망정 외국 의 세계관이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또 애써 외국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외국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세계관과 사상을 만들어 나갔다.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번역은 생각도 해 보지 않은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그리스인들은 문자를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 모든 의사소통의 제1 수단은 입에서 나오는 말, 즉 대화와 연설이었다. 글은 부차적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시인이나 정치가, 철학자들은 말하는 사람[speaker]이었지 쓰는 사람[writer]이 아니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리스 정신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드로스(Φαῖδρος Phaidros)에서 소크라테스가 설명하고 있듯이 사람을 그린 그림이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듯이 적힌 말, 즉 글 역시 생명이 없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새겨지게 되며 나중에 자신을 옹호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언제 침묵하고 언제 말을 해야 하는지도 안다. 앎의 살아 있는 말에는 영혼이 있지만 적힌 말은 헛것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글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의 생각의 생명이 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자신을 대변해 주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각기 알맞은 진리를 가르칠 수도 없는 글을 쓰는데 펜과 잉크를 써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물에 쓰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글자를 발명하고 이를 사용해 보기를 권하는 토트신에게 파라오 타무스가 하는 아래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너의 이 발명은 배우는 자의 영혼에 망각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은 기억을 활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밖으로 드러난 글자만을 믿게 되어 그 글 속에 있는 정신을 믿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발명한 그 묘한 것은 기억이 아니고 회상의 수단이 될 뿐이며 저의 제자들은 진리가 아닌 진리와 비슷한 것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많은 것을 읽기만 할 뿐 아무것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내용이 없는 지혜의 허울만 보이는 귀찮은 친구가 될 것이다. 문자를 이용하게 되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기억력은 쇠퇴하게 될 뿐 아니라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없이도 많은 분야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글자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오던 진정한 진리의 전달이라는 특별한 유대를 깨뜨리게 된다. 진정한 지혜는 글을 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지혜와 권위를 통해서 얻어져야 하는데 글자는 이 중요한 유대를 깬다는 점에서 크나큰 해악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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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탐구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탐구 못지않게 다른 시민들과의 소통과 공유, 그리고 그들에게 인정 받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기에 남들이 못 알아 듣는 외국어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생각과 의견을 남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그리스어로 조리 있고 명료하게 표현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외국어 교육이나 번역의 문제가 없었다. 자연 그들이 힘써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학문과 철하게 알맞은 말로 만들기 위해 갈고 닦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리스의 폴리스는 자유 시민들 사이에는 완전한 평등이 존재했다. 더 잘난 사람도 고매한 사람도 없었고 열등하고 무시하거나 차별을 해도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밀실이나 갇힌 공간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언어가 아니라 시장과 광장의 탁 터진 공간의 자유로운 언어였다. 남들과 대화하고 의견을 나누며 인정 받아야 한다는 필요에서부터 그리스어는 균형과 절제와 조화를 가진 투명하고도 섬세한 표현 수단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인류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 가치를 나타내는 낱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리스인들이 갈고 닦은 그리스어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이런 언어의 개발과 사용은 그리스인들로 하여금 이성에 관한 신뢰, 형식에 대한 감각, 조화에 대한 사랑,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성격, 선험적 추론에 의지하는 경향을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그리스인들은 모두 어린아이들이다’라는 말이 암시하듯 그리스인들은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심각한 종교적 분위기나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말해서는 안 되는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자유로웠다. 그러기에 그들의 생각은 대담하고 독창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의 ‘우리말로 학문하기’>>
그리스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과 같은 거대한 석조 기념물이 없다. 고대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아름답기는 하나 인간의 부담을 느낄 정도의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건축만 아니라 조각이나 도자기 역시 과도한 장식이나 비인간적일 정도의 손질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은 어떤 것이든 ‘인간의 척도(ἄνθρώπινα μέτρα hunam metre)를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르테논이나 그리스 조각보다도 훨씬 더 그리스를 대표하는 것은 돌이나 청동으로 만든 눈에 보이는 거대한 기념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말과 정신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비극 작가들의 작품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와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책이 가장 그리스적인 기념비요 가장 위대한 그리스의 유산이다. 그리스인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기념물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말과 정신이 더 위대하고 영속적임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들이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고의 기능과 문화 창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결국 인간은 언어로, 자신의 모국어로 생각하고 자신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리스인들은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임에 있어 외국어를 배워 사용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자신들의 모국어로 생각하고 표현하려 노력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낱말 하나하나에까지 정성을 들여 그리스어를 갈고 닦았다. 그 결과 그리스는 학문과 철학을 하기에 가장 훌륭한 언어로 태어났다. 아직까지 어느 민족도 그리스인만큼 언어에서 성공한 에는 없다. 그들은 거대하고 화려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 기념비가 아니라 서사시로, 그리고 서정시로, 또 비극으로, 역사적 산문과 철학적 산문으로 자신들의 위대함과 탁월함을 표현했다. 언어는 기호의 체계요 언어적 요소들의 거대한 관계망이다. 각 민족은 모국어의 그 거대한 관계망을 어떻게 짜맞춰 나가는가에 따라 피라미드보다 더 거대하고 위대하며 더 영속적인 정신적 건축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본보기를 보여 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인들이다. 모국어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다.
<<언어를 빼앗긴 한국 학문 어디로 갈 것인가?: 즐기기와 겨루기(Σχολὴ καὶ Ἀγών)>>
오늘날 우리말이 처한 사정은 딱하기 그지없다. 논문도 영어로 써야 더 높은 평가를 받고 강의도 영어로 해야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 그리고 영어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이등시민이나 된 듯이 주눅들고 눈치를 봐야 하는 형편이다. 세계화를 따라가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영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는 600년 전 최만리가 세종대왕께 올린 상소문의 정신을 빼어 박은 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과연 이런 현실 앞에서 한국의 인문학, 아니 학문이 발전할 수 있을까? 영어로 쓴 논문들과 영어로 배운 지식이 온전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현실 앞에 아무런 자성의 소리나 우려와 경고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더 기분 나쁘다. 섬찟하기까지 하다. 한국의 기백과 정신은 모두 어디 있기에 이렇게 조용한가? 언어를 빼앗기면 영원히 종속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인문학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인류 역사상 고대 그리스에 이어 두 번째로 창조적이고 천재들의 시대였다고 하는 르네상스에서부터 17세기 근대 과학의 성립 시기까지 유럽 여러 나라들이 가장 힘쓴 것은 자신들의 모국어를 다듬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학술원과 영국의 왕립학회가 대표적이다. 특히 영국의 왕립학회는 22인의 언어와 산문체에 관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영어를 특히 철학적인 목적에서 개량하고자 힘쓰는 한편, 그 때까지 국제 언어였던 라틴어를 쓰지 않고 각국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논문을 발표하게 됨으로써 생겨난 국제적 학술 정보의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해외의 학문 정보를 조사하여 영어로 요약하여 학자들에게 알려 주는 한편 영국 학자들의 업적을 각국 언어로 번역하여 알리는 사업을 했다. 이는 모두 모국어로 학문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라틴어가 유럽의 학문과 교양의 공통어였던 시대에 오히려 자국의 언어를 갈고 닦아서 자신들의 사고와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발전한 것은 오늘날 우리의 영어 일방 주의에 많은 시사를 던져 주고 있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의 의사소통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신들의 모국어로 학문과 예술 하기에 힘썼고 또 성공했다. 이는 지금 국제 사회에서 한국 사람들의 의사 소통 능력을 높여야 한다는 똑 같은 이유로 영어를 강요하는 것과는 정반대가 되는 정신이다.
끝으로 한가지 더 새로운 걱정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연구비 지원 문제다. 국가가 정부의 이상이나 가진 자의 비위에 맞는 연구 과제만을 골라 워낙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는 돈 없는 인문학자라면 누구도 반항할 수 없는 폭력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 거대한 이해 앞에 초연하기란 힘들게 마련인 까닭이다. 게다가 주변에 그 연구과제만 되기를 기다리는 제자 시간 강사들의 애타는 눈초리 앞에서는 자신의 모든 철학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고픈 연구보다 연구 과제 심사에 통과할 수 있는 주제를 고르고 홀로 하기보다는 연구 주제를 크게 잡고 일을 덩치 크게 만들어 남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연구만 해야 한다면 자신이 좋아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인문학의 자유정신은 어디로 갈 것인가?
원래 학교나 학파를 뜻하는 영어 낱말 school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σχολή(schole)다. 이 낱말의 본디 뜻은 ‘여유, 여가’이다. 현대 그리스어로 σχολάζω(scholazo)라는 동사는 ‘파하다, 퇴근하다’를 뜻한다. 그리스인들에게 학문이란 직접적 경제 활동과 관련이 없는 지적 탐구 행위였다. 그러나 거대한 국가 지원 연구비 혜택 앞에서 인문학 연구도 어 이상 여유와 여가가 아니다. 배를 주리고 몸은 고달파도 현실에 대한 부조리에 날카로운 비판을 하는 꼿꼿한 인문학도의 건설적 비판 정신이 위협 받는 이 시절에 인문학자로 살아간다는 일은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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