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원 재 훈 여행이란 이렇게 떠나도 되는 것이었다. 서로 만난지 채 몇개월도 안되는데 4번을 만나 2700마일 7박 8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44년간 월남과 카나다 · 미국에 살면서 고향사람이라고는 처음으로 그것도 국민학교 1년 선배를 만나 꿈의 현실을 체험한 것이다.
알라바마에 57년간 보지 못했던 국민학교 동기 이운직이는 자기가 사는곳으로 내려와 만나주기를 1년 전부터 소망했는데 그리움만 탓하고 엄두가 나지 안았던 차에 운직과 홍정웅 선배하고는 바로 이웃에서 살면서 특별한 서로의 추억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쉽게 마음이 통할수 있었다.
해방 직전까지 수풍땜 공사장에서 자재과에서 근무하셨던 관계로 해방과 함께 충남 천안 성남 대흥리로 내려와 할아버지와 큰 시골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산들사이에 넓은 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농이 없었고 모두들 근근히 살아가는 빈곤이 거리에 풀처럼 자라나는 그런 곳에 성남국민학교 역사중 2학급을 배출한 우리가 유일한 27기 였다. 병천 · 전의 · 수신 등 지방학교로 진학하고 겨우 몇 명만이 천안 · 청주 · 대전으로 진학했는데 고등학교땐 오직 2명만 서울로 진학할 수 있었다. 수십년간 해외에서 우리세대의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이런 살갓에서 떼어낼 수 없었던 가난 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을 하게된다.
Woodstock Virginia에 살고있는 황규백 한테 떠나기전 연락이 닿아 제일 첫 만남을 갖게된다. 동남쪽으로 길게 누워 눈을 가득 채우는 시컴한 숲이 보이는 언덕 위에 하얀 저택이 전설을 낳고 있듯시 아담하고 높은 2층의 높이로 서있고 얕은 언덕을 오르니 넓은 마당이 있고 이어지는 차고문을 활짝 열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규백과 최근에 받은 수술로 불편해 하시는 부인을 반갑게 만났다.
언제나 미소를 담은 규백은 GRACE PAPA 답게 온화하고 중후한 인품으로 몸이 전보다 커보였다. 언덕 밑으로 계곡사이 사슴들이 물을 먹으러 나올것 같은 작은 강물이 오후의 반사되는 햇살을 화살처럼 쏘아댔다. 서로 다른 모형들의 집들이 집앞의 유일한 도로인 Hickory Lane을 따라 넓은 간격을 두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어 고향의 마을처럼 정다웠다. 규백 내외는 Woodstock 시내로 우리를 안내해 지은지 1세기나 넘어보이는 고급 스테이크집에서 black angus(검정소) 스테이크로 대접해 주었다.
황규백과 박효범과 나는 월남서 부터 인연이 매우 짙은 몇 안되는 동기일듯 하다. 월남에 근무하는 68-70년 사이 사이공에서 서쪽에 위치한 타이닌이라는 캄보디아 라오스 접경 도시에 근무시 100KM 떨어진 사이공에 주말마다 내려가 효범의 장교 BOQ에서 신세를 졌다. 규백은 장교가 아니였기 때문에 낮에만 만날 수 있었다. 1994년 미국으로 내려와 살때 Maryland의 전원에 큰 집을 가지고 살때부터 그가 이사를 다녔던 Charlotte(N Carolina) 만 빼놓고 2000-2001년 사이 14개월동안 Boynton Beach Florida에 살면서 영주권 때문에 7번을 New Jersey로 올라 다닐때 어디 어느 구석이라도 규백을 찾아내 신세를 지곤 했었다. - 2012.09.25
서기 2000년 Boynton Beach, Florida에서 dry cleaning plant 를 맡아 일하고 있을때 우정 찾아주어 Orland에 청과상을 하던 박순까지 내려와 그 밤을 함께한 기억이 새로워진다.
황규백은 늘 신선하고 탐구적이며 엄격한 자기관리와 친구가 아프면 약을 사서 보내주는 동정심이 매우 강한 자상함을 보여주었다. 인연(karma connection)을 불교에서 결과를 얻을 직접 원인과 그로인해 얻는 직접적인 힘 즉 일체 중생은 인과 연에 의하여 생멸한다고 한다. 그와 나의 인연은 매우 강하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도 불현듯 보고싶고 궁금해진다. 분주하고 바쁜 세대 더욱이 이민 이란 특별한 물에서 익사하지 않으려는 고된 분투속에서 이제 빠져 나왔지만 자칫 허무와 자기 고독에 자신감을 놓칠 수 있다. 우정과 사랑이란 감정이 지금처럼 활력과 영양제의 역활을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을가. 누구든 멀리있는 친구의 소식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한없는 기쁨을 준다. 동기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 진다.
규백이 갈길이 먼 우리를 재촉하여 미련을 남긴 이별을 떨치고 그날밤 10시 에 박순이 살고 있는 Duluth Atlanta Georgia 주에 도착했다. 마침 부인께서 NJ 큰 딸집에 머물고 있어 순이네 집에 남자만 셋이서 자는 기록이 세워졌을 것 같다. 박순은 1984년에 골동품 the antique의 세계적인 감정가인 여동생을 따라 이곳에 정착했다. 후에 불란서인 남편과 Orlando의 관광 명소에 화려한 antique shop을 열어 모두 함께 이사해 박순은 역시 큰 청과상을 차렸고 아마도 그 청과상을 목격한 동기는 나쁜인줄 안다. 2001-2004년 사이 Daytona Beach 남쪽 Melbourne 이란 도시에서 역시 청과상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막네딸 Michelle은 우리 아이들이 아직 teen 이였을때 Disney를 혼자서 데리고 투어를 시켜준 고등학생이였는데 오직 딸만 풍년인 집안에 처음으로 아들을 낳아 히어로인이 된 지금은 NY Queens에서 치과의사로 행복한 주부가 되였다. Sunny 두번째는 김용총장이 학장이였던 Darthmouth 대학에 Visual Art의 정식교수로 후학을 길러내는데 전념하고 있다. 인류대학의 총장으로서 백인이였다면 격지 않아도 되였을 많은 고심을 그녀는 함께 이해하며 동정해 주었다고 박순은 귀뜸해 주었다. 큰 따님은 딸 셋의 엄마로 우리는 자주 만난다.
Duluth는 도시의 서복쪽인 모양인데 한글 간판이 서울 종로보다 많아 영문 간판은 어쩌다 눈에 띄어 하늘에서 내려오면 한국으로 오인하게 될것이다. 한인들의 활기찬 역동적인 경제력을 실감케 한다. 미국 카나다 남미 어느 도시든지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소수민족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이유가 뭔지 몰라서.
박순은 딸 셋이 이곳에 살기때문에 NJ에 자주 올라와 지난 오월 매월 동기들의 모임을 갖기로 한 첫 모임에 함께 동참해 주었고 그후 박효범 · 이돈희 · 김정광 · 김홍기 · 전영우(항) · 유재현 등이 매월 두번째 수요일 만나 동대문 시장처럼 시끌 시끌한 모임을 갖고있다. 해보니 점점 진맛이 울어나며 주름살이 펴지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작년말쯤 나는 박순을 달래 부인이 풍으로 고생하며 멀리 떨어져 우리 모임엔 전혀 참석치 못하는 이길영 의사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오랜 회포를 풀기도 했다. 현재 이길영은 parkinson disease로 반신의 부인과 매우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사는곳이 멀어 돌보아줄 형편이 서지않아 우리들도 마음이 무척 안타갑기만 하다. 11월에 뇌수술을 한다는데 기적같은 효과가 있기만을 기도한다. 973-467-7040 (cel) 위로해 주기를 주문해 본다.
순은 다음날 그 유명한 The Stone Mountain으로 안내했는데 케이블을 타고 올라가 보니 800 휘트 높이였는데 사방으로 지평선만 존재하는 정말로 유아독존의 엄청난 하나의 바위산이였다. 지구상에 이 바위는 이것 밖에 이곳에 없다. 300(million years) 약 3억 년전에 지하밑에 대륙붕과 대서양의 지각사이에서 발생한 큰 불덩어리가 식어 중력의 힘으로 하늘위로 솟아 올라온 것이다. 지구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해할 수 없는것이 너무 많다. 케이블은 동북쪽 에 위치했다면 위에서 보니 서쪽으로 사람들의 행열이 개미처럼 올라왔다. 물어보니 곧장 내려가면 밑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해서 선배와 함께 내려가 다시 올라오는데 약 45분이 소요되었다. 우리가 올라온 스피드는 노련한 등산가 만이 낼 수 있었을 터이며 길이는 1.3 mile이나 되었다. 이 여행중에 이곳을 하이킹한것이 가장 값진것으로 남을것 같다.
2일을 박순집에 묵고 일요일 순의 부인이 오후 비행기로 귀가를 하기전 그의 교회에 가서 오전 예배를 함께 드렸다. 그날 새 신자 중에 바로 옆 주의 Tennessee의 chatanooga에서 온 분을 만나 오세환의 신상에 관해 들을수 있는 기막힌 경험을 했다. 부인의 알자이머 그리고 오세환이의 증세등 자세함을 들었는데 그는 과히 세환 가족과 두터운 우정을 갖고 있었다. 이 여행을 떠나기전 세환과 연락이 되어 이때쯤 만나러 갈수 있을거라고 언약이 있었던 터라 전화를 수없이 한 끝에 겨우 연결이 되었는데 "나 지금 출타 중이야, 처제 집에 와 있어. 미리 알았으면 기다렸을 텐데" 이해가 않되어 황당했지만 다음을 약속하고 그 다음 행선지로...
57년만의 만남을 위해 이렇게 달려올수 있었던 그 동기는 아무래도 우리가 하염없이 늙어버려 기회를 잃어버릴수 있다는 조바심도 그 밑바닥에 있었을게다. 아무리 벼르고 말로만 풍성한 약속을 해봐도 선듯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것을 어찌그리 망설여 졌는지 믿기지 않는 이번 여행에 감사를 새겼다. 마침 친구의 구역 예배가 있는 일요일 저녁 모임 30여명의 설지않은 모습 활기에 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57년만의 재회에 함께 축배를 들었다. - 2012.09.26
잠시 이야기를 되돌리고 싶다. 마음깊이 감동을 느꼈던 The Stone Mountain의 여운을 떨어내려는 노력 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바위산 주변에서 벌어졌던 미국이 체험했고 인류를 새로운 도약으로 이끌어낸 사건을 되돌아 보고 싶은 이유다.
1861년 4월 12일서 부터 1865년 4월 18일 만 4년만에 끝이 난 미남북 전쟁의 마지막 운명을 좌우한 전투가 바로 이 바위 주변에서 벌어졌다. 테네시주의 차타누가로 부터 들어온 북군 Union 군대를 Gen. William T. Sherman이 끌고 Confederate 남부군 Gen. John Bell Hood의 군대가 위치한 아틀란타 시를 1864년 7월 10과 20일 사이에 포위작전을 벌리며 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를 감행했다. 이 바위산에서 내려다 보면 그때의 전쟁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Macon, Western Railroad, Ezra등 약 10만명의 군대가 접전끝에 1만 2천여명의 사상자가 생겼고 남부군이 다음해 결정적으로 항복하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서북쪽으로 아팔라치안 산맥의 끝자락이 테네시주로 내려가는것이 멀리 보이 는것 이외는 검은 숲으로 덮인 이곳 들판에서 146년전 인간의 욕망 욕심으로 인한 새로운 도전에 지불해야했던 인간의 피의 발자국 그들이 토해낸 혼과 영혼들이 이 큰 바위산 모서리마다 틈바귀 마다 붙어있을것만 같았다. 미국은 4년간의 전쟁으로 617,000명의 희생을 치루고 노예를 해방시켰다.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권력과 이념으로 인류를 억압하던 옛사슬이 영원히 끊어지는 위대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미국 국민의 10%를 잃었던 전쟁이며 미국이 독립한지 86년만에 일어난 내전이였다. 그후 89년 뒤에 치러진 한국전쟁은 국민의 16%가 넘는 5백만을 잃고도 그 전쟁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고 이시간 우리와 인류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고 있다.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이운직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에서 공부한 형들은 엔진니어가 되어 수풍땜 공사를 돌보다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홀로된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손바닥만한 농토를 일구느라 4 Km나 떨어진 병천중학교를 농번기에는 반은 학교를 결석하면서 겨우 졸업을 했다. 불타는 그의 향학열로 검정고시 등 우여곡절을 거쳐 고대 상대를 졸업하고 선경에 입사할수 있었고 80대 초반 시카고에서 이민을 시작했다.
끝없는 메모리 끝없는 달변 그는 정녕 위대한 삶을 살아왔고 편하게 중고등학교를 갈수 있었던 마음에 나는 수치심을 금할수 없었다. 우리가 살아온 70여년 혹독한 댓가를 치르며 끝없는 인간실험을 거쳐 일구어 온 우리와 조국. 감격 과 감동 연민으로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Huntsville은 알라바마 북쪽 끝인데 미군의 병참부대의 HQ가 있는 곳이라 경제적 특구가 되어 매우 안정적이며 그는 작은 프라자를 소유하고 그안에 큰 세탁소를 차려 사업이 매우 잘되었다. 매우 성공적으로 이민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이곳은 또한 Apollo 우주선이 처음으로 개발된 곳이라 박물관의 크기와 실제 모든 장비와 우주선이 진열되어 우주라는 새로운 개념 새로운 우주시대를 열었던 곳을 관람했다. 수백톤의 쇳덩어리 전기선 전자장치 인간의 몸을 이동시키기 위한 기술과 두뇌가 모두 전시되었다.
"이 로켓은 중력이라는 쇠사슬에 묶이여 이 혹성에 매여있는 인류를 자유롭게 만들며 인류가 우주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게될 것이다." - 베르너 폰 브라운 -
이 우주선 제작을 총지휘 했던 브라운 박사는 독일이 항복하자 연합군과 쏘련군이 먼저 손에 넣을려는 경쟁에서 연합군에 가담 지금의 NASA를 창설한 분. 그분의 일생의 자취를 영상과 벽에 붙은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값진 추억을 앉고 돌아왔다.
첫째날은 5년만에 몇번 쳐보는 골프였는데 통풍이 약한 몇군데 홀에는 큰 선풍기가 5 메타의 높이로 세워져 있어 시원한 바람으로 땀을 시키도록 설치된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운 한여름 이곳은 아열대의 달구어진 열이 몸을 구석 구석 녹여내어 준다. Space Center의 관람을 끝내고 우리는 알라바마 중앙을 가르는 65번 도로로 연결 하기 위해 오후 2시쯤 59번 도로 입구에서 이운직과 서러운 이별을 했다.
Birmingham과 Mongomery 시를 통과해 플로리다주 Panama City로 가기 위해 331번 local highway로 들어 한참을 내려오니 현대자동차의 공장 근처를 지나쳤는데 한번 들려보자는 내 의견이 받아드려 지지않아 지나쳐 왔는데 마냥 아쉬움을 떨쳐낼수가 없었다. 우리의 자부심 우리의 국력을 지구상 어느곳이든 실고 다니는 자동차를 조립하는 거대한 공장 보고왔어야 했는데...
밤 9시에 Panama City의 초라한 시내를 들어와서 "서울식당" 이란 한글 그리고 영어간판을 보고 차를 돌려 들어가니 막 닫을려는 참이지만 우리의 사정을 봐서 푸짐한 저녁을 차려주어 즐길수 있었고 이곳에 27년전 홀홀 단신 들어와 인생보따리를 펴놓은 한 조그만 거인 그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깊은밤이 더욱 깊어갔다.
물만 보이면 낙시의 충동심이 강하게 일어났던 지난날 나는 1만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Marco Islands에서 큰 고기를 잡아보고 싶었던 것이 내 마음속의 샹그릴라였다. 그꿈을 보기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을 대강 처리하고 #10 하이웨이를 따라 주 행정도시 Tallahassee도 지나고 중앙 도로 #75 하이웨이를 따라 겨우 6시에 Marco Island에 도착했다.
마지막 구간 #951 도로의 끝에서 이 섬으로 들어오는 다리 위에서 나의 찬란했던 자연의 샹그릴라는 실제 초호화판의 하늘을 가리우는 높은 상업건물 화려하고 고급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아름답게 도로를 꾸민 도시가 가득 눈을 채웠다. 순간 나는 혼돈보다 더 당황한 내 모습속에 얼마나 무지한 놈인가 이런 도시의 소문도 듣지 못하고 저혼자 상상에 미쳐있었던 머저리같은 내가 속이 쓰려왔다. 누군가에게 물어보든지- 아니면 구글을 뚜드려 봤드라면 이런 실수가 없었을 텐데. 우리는 길이 끝날때까지 가보았다. 대개 길이 끝나는 곳에 배를 정박하는 곳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였다.
빗방울이 쏟아질것 같은 하늘에 노부부가 의자에 앉아 시커먼 먹구름을 올려다 보고 있어 접근해 보니 본토인이 아니고 영국에서 휴양하러 온 사람들이였다. 옆에서 낙시를 하고 있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그는 동구권 그르지아에서 교환 학생으로 온 아이였다. 짱 - 주인은 모두 어디가고 나그네만 무성했다. 그때 막 배를 묶어매고 뭍으로 올라오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고해바쳤드니 어디 어디로 가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찾아낼 거란다. 이제 문을 잠그려는 Deep Sea Fishing Office에 숨을 가다듬고 내일 새벽 7시 30분 출발. 최고 8명만이 탈 수있는 배에 예약을 겨우 하고 그곳 호텔값을 물어보니 최소 하룻밤 300 불이란다.
2000년 여기서 20분 거리의 Naples에서 우리식구들이 하룻밤을 보낸 기억이 있어 우선 그쪽으로 올라가서 모텔을 찾아가 한곳에 들으니 그주인이 NY 주 Binghampton에서 처가식구들이 사는 이곳에 정착 했다며 65불에서 5불을 깍아주었다. 우리는 선창가의 제일 좋은 음식점에 들어가 생선을 싫컷 시켜먹고 그동안 피로에 겹친 심신을 조율했다. - 2012.09.27
독립 기념일 2001년 7월 4일 초등 · 중학에 다니는 아이들과 함께 처음으로 Fl 남부를 관통하는 #75번 도로에서 Naples를 10여 마일 남겨놓고 잦은 고장으로 몇 푼 안되는 쎄이빙을 항상 비우게 하던 카나다에서 끌고온 Ford Lincoln이 짙은 안개를 품어내며 도로위에 주저 앉았다. 우여곡절 후에 차고에 끌어다 놓을때는 일찍 떠나온 해가 등뒤로 넘어갈 무렵이였다. 아이들의 불만 이글거리는 눈빛 따뜻한 말대신 아내가 연거퍼 쏟아내는 핀잔의 언어. 애비와 남편은 이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자그마한 도심지의 상가에 있엇던 우리에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중들이 바다쪽 서쪽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서커스를 구경하러가는 의문이 일어났고 또 분위기를 바꿀겸 아이들을 재촉해서 군중에 섞여 버렸다.
도로끝의 공터에 이 도시의 광고와 선전문들이 나열되었고 바다속으로 100 메타 길이의 다리가 1850년대 큰 화재를 당해서 다시 세웠다는 긴 설명서도 있었다. 긴 해변가 모래사장에 몇 백명의 수영객과 산보나온 우리처럼 달려온 사람들이 긴 다리위에 군데군데 몰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엇다. 지금 내가 체험하려는 지구와 태양이 연출하는 신비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평선에 긴줄을 긋고 있는 검푸른 바다 한가운데 진분홍과 노란색으로 분장한 바람과 구름이 멀리 자리를 비워준 무대위에 태양이 눈높이로 우리와 마주서서 큰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똑바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다는 깨어짐이나 흐트러짐이 없이 한장의 유리판 같았고 다만 지구자전으로 내 왼쪽 어깨밑으로 미세한 기울음을 느낄것만 같앗다. 모든 물새들도 이 장엄한 드라마에 위압되어 모두 멀리 티끌처럼 서쪽을 향해 바다 위에 모두 떠 있었다. 태양이 스스로 서두름도 주저함도 없이 그 찬란한 위용이 바다 표면에 닿자 바다는 온통 붉은 액체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3분의 1쯤 잠길때 갑자기 동그란 원형이 깨어지며 반이 잠길때는 계란이 부서지는 것처럼 바다물에 뭉정 뭉정 흐믈거리드니 부채살 같은 긴 빛을 하늘높이 쏟아내며 감동의 무아지경을 남겨준 후 새들은 다시 하늘로 날아 올랐다.
그 고요와 고독속에 연출된 자연의 드라마가 휩쓸고 간 후 오늘 일어났던 불쾌한 사건으로 당황함. 불행에 대한 분노. 나의 연약함의 좌절. 자존심의 상실. 이 모든 괴로움의 응어리가 수분이 증발하듯 시원하고 상쾌해지며 영혼의 에너지가 몸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내가 믿는 그분은 그 어려운 때에도 나를 인도하여 이 장엄한 자연속에 나의 작은 일들이 문제가 아니고 다만 감정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위로하며 우리를 몹씨 사랑하고 있으심을 느낄때 뜨거운 것이 눈시울을 스쳐갔다.
자연은 오늘처럼 매일 변하지 않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바람과 구름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워 진정한 자연의 신비와 감동을 방해하고 있는것이다. 사실과 진실을 볼 수 없는것. 바람과 구름의 사건으로 이제 생각하게 만든다. Naples 바다는 거기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었다.
1만개의 섬 중 제일 큰 Marco Island는 1965년 시작 1976년 부터 개발되어 뉴욕 증시 카나다 개발회사 및 개인들의 투자로 이루워저 면적 543 평방 킬로에 16,500 명이 도시를 이루고 있고 San Marco 즉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이 된 도시이며 Fl주에서 가장 훌륭한 도시 중 하나이다.
다음날 아침 7시 반에 우리는 멀리 Ohio주에서 왔다는 입을 열면 폭포같은 언어가 쏟아지는 선장 John과 10대의 아들을 데리고 온 부부. 중부 Indiana주에서 아들과 출장왔다는 부자와 합세해 7명을 실은 배가 아무리 달려나와도 빌딩 숲으로 시야를 아직도 가리우는 도시 앞을 헤어나지 못했다. 선장은 여러군데를 다니며 배를 정박시켜 보지만 나를 흥분하게 만드는 고기와 크기는 볼 수 없었지만 이왕 왔으니 그냥 해보는 Deep Sea Fishing이었다. 그래도 꿈은 이루어 지지 않았는가 자위하며 3시간의 물위의 체험을 끝냈다.
뭍에 나오자 마자 최초로 건설된 #41 Tamiami Trail Scenic Highway로 빠져 Copeland까지와 Evergrade state park natural reserve에서 에어 보트를 타고 손가락처럼 수없이 갈라진 작은 강을 누비며 자라나는 맹그로브가 하늘을 가리워진 어둠침침한 초자연의 숲속을 드려다 보았다. 물위에 두눈만 내어놓고 나무위에서 내려와 물위로 올라오는 작은 게를 먹고 사는 너구리 락쿤을 몇시간이고 기다리는 모습. 대낮에도 컴컴한 이곳, 밤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소름끼치는 상상에 편대를 갈라서 덤벼드는 모기떼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플로리다 이곳은 산 하나 없는 늪지대. 항상 뜨거운 태양열로 인한 습기때문에 냉동기 발명 이전에는 인간이 살기에 매우 부적절한 곳이였다. 그 습기를 제조하는 끝도 없는 늪속에, 그 생태계를 유지할려는 숭고한 인간들의 모습. 그들의 고민의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이 많았다.
오후 2시까지 도착하기로 약속한 다음 목적지까지 우리는 아직도 1시간 밖에 여유가 없었다. 이번 여행이 참으로 은혜로웠던 것은 코스타리카로 매월 마다 가야하는 비지니스 트립을 나를 위해 미루며 기다려주는 양원건 외대 동문의 우정도 우정이려니와 모든 일정들이 마음에서 우러나는대로 시간 약속을 해도 거의 착오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제 목사가 된 양목사와 부인 Linda. 모두 강원도 출신들이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살아있는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여기까지 먼 거리를 여행 온 것이다. - 2012.09.29
1965년 8월 안동 36 예비사단에 ROTC 장교후보생 훈련생이 들어왔고 그중에 양원건 외대 서반어과 동기가 섞여있음을 알아낸다. 나는 12월에 제대할 날자만 세며 내무반에 고문관 노릇을 하는데 급히 만날일이 있다기에 달려갔다. "글씨 변소에 앉아있는데 어느놈 화이버를 벗겨가 버렸어, 잃어버린것 어쩌겠누" 그 불똥을 꺼준후 2000년 FL주 마이아미에서 1시간 북쪽 Boynton Beach 에서 일할 때였다. 연락을 받자 나보고 마이아미까지 와서 만나잔다. 몹시 괘씸해서 수화기를 말없이 내려 놓았더니 다음날 일하는 플랜트로 부인을 뎁고 올라왔다. 저녁에 우리식구와 함께 양민석이 하는 스시집에 가서 제일 값나가는 것으로 성찬을 했는데 민석은 겨우 150만 촤지했다. 그는 맨하탄에서 함께 일하다 고향에 내려와서 나까지 끌고 내려온 장본인 이다.
1962년 2학년 첫 학기후 소원으로 갈망하던 의과를 포기할 수 없어서 아버지 몰래 절간과 천안을 오가며 준비했지만 절망적인 결과로 하향을 하는데 천안 친구들이 곧 통역장교 시험이 있는데 응시를 해볼것을 권고해 주었다. 장남인 나의 의대학자금 6명의 동생들 학자금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였기 때문에 부친은 극구 나의 의대 포부를 반대 하셨던 것이다.
사실 부친을 대할 면목이 없어 대전병무청으로 내려가 시험을 치르는데 모두 단 교복 뿐인 외출복을 입고와서 서울과 지방의 모든 대학생을 모아놓은 176명이 시험을 쳤다. 그것이 1963년 2월 초였던것 같은데 5월 첫 주 조그만 봉투하나 우편물 속에 한 국가의 장교 합격통지서가 1/18 의 마분지에 합격이란 빨간 도장이 찍힌것이 전부였다. 그때의 국가사정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는 날짜에 대전병무청에 가보니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한참을 서성이다 병무청으로 들어갔더니 근무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거수경래를 부쳤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충남에서 당신하나 충북은 아예 없읍니다. 오후에 논산행 버스로 훈련소에 인계하던 병장이 대기대 문에 들어서자마자 여기 충청도 천재를 대령했읍니다. 모든것이 너무 황당스러웠다. 그의 등뒤에서 바라보니 외대 한반이였던 구민웅 · 김영조가 이미 와있어 날보자 쓴웃음을 짓는다.
그해의 에쎄이 제목이 "Military Revolution" 이였다. 군사정권이 들어선지 얼마후 였기에 모두들 뜻밖의 명제에 한 시간내로 무었을 쓸수 있엇을가. 다행히 멕시코에 어릴때 부모를 따라간 늙으신 한종원 선생 즉 이승만 박사의 남미 순방때 통역을 맡은 인연으로 외대 서반어과를 창설하셨다. 남미의 군사 정권이 초래하는 많은 문제점을 강의실에서 해주셨기 때문에 하루 빨리 민간 정권으로 바뀌어야 국가의 미래가 보일것이라고 강한 권고를 쓴것이 합격으로 이어진것 같았다. 물어보진 않했어도 같은 강의실에 있엇던 구민웅 · 김영조가 합격이 되어 와있지 않는가. 그리고 동기들이 모두 군복무를 할때 나는 이미 전역이 되어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1961년 서반어과는 2반이였는데 우리는 B반이였다. 시작부터 반듯한 학생을 고르다 2개월이 지나 7인의 영어회화 클럽을 만들고 B반에서 여학생 4명 A반에서 3명 각각 남녀 7명씩 14명이 방과후 모여 제대로된 영어가 아니였지만 날이 갈수록 모두들 열심으로 참가했다. 방과후 마다 여학생들을 몰아 클럽활동을 하니 A B반의 남학생들 가담못한 여학생들의 시기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때 양원건은 태권도에 도인이였기 때문에 그들의 훼방을 무난히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해 내가 떠난후 얼마나 지탱이 되었는지 아무도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나와 그의 51년의 인연 이렇게 시작되었다.
고속도로를 타면 1시간의 거리에 있는 마이아미 한인 장노교회로 우리를 안내하여 함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양원건은 장노이면서 큐바선교를 이미 그때 3년째 하고있엇다.
약 570만의 한인 교포들의 디아스포라와 이민의 역사는 노동력의 세계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진정 1902년 하와이를 비롯 1905년의 멕시코 이민의 시작부터였다. 1904년 영국인 John Mayers이 에네껜을 재배하는 유까탄 반도에서 일어났던 극심한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에네껜은 인디오 원주민들이 처음으로 이용한 노끈 이며 밧줄 또는 마포를 만드는 재료인데 유롭인들이 선박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소맥산업이 번창하면서 푸대를 묶는 끈으로 더할 수 없는 필수품으로 바뀌면서 에네껜의 공급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미 중국 일본인들이 들어와 있엇지만 청나라와 일본은 자국국민들이 혹사당하고 있음을 알고 이민을 전면 금지 시꼇지만 유독 한국은 이민법도 멕시코와 국교도 안되어 있는 상태였다. 일본 이민회사의 부사장 이였던 히나타 떼루마케와 교섭 서울에 대륙 신민 합자회사 출장소를 설치해 한인들을 모았다. 광고 모집에 푸른 황금밭에서 떼돈벌어 4년후 고향에 돌아온다는 사탕발림 약속에 곁드려 어린아이가 7살이되면 국민학교에 입학할수 있다는 달콤하고 현혹된 광고로 전국에서 차출했다. 남자 702면 여자 135명 어린아이 196명 즉 257가족 플러스독신자 196명 총 1033명이 6개월 미만에 서울 평양 수원등 전국 18개 지역에서 보집되었다.
이들과 후예들 288명이 1921년 1월 멕시코를 떠나 큐바로 다시 이민을 했다.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1937-1945년 까지 조국광복을 위해 그들에게는 엄청난 금액인 1천 4백 89불을 하바나에 있는 중국은행을 통해 중국등 각지로 송금을 보내면서 조국을 향한 사랑과 염원을 보여주었다.
1998년 11월 23일 마이아미를 떠나 Costa Rica를 통해 - La Linea Aera Cubana -편으로 11월 26일 Habana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도착했읍니다.La Habana, Matanza, Cardenas, Varadero Fuaguey Grande 이렇게 약 1,800 Km의 여행길에 5개의 도시를 방문했으며 특별히 이지역을 관심의 대상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80년전 우리동포들의 밀집지역으로서 한민족 선교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이였읍니다.
전혀 아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 우린 먼저 Cardenas 에 가서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 가정집을 찿아다니며 혹시 한국인 가정을 아느냐고 물었읍니다. 그중 자전거를 타고가던 한 청년이 알려준 집을 찿아가 보니 그분들은 중국사람들 이였읍니다. 그 부인은 한국인 가정을 알고 있어 저를 안내해 주었읍니다. 그 첫번 만난 부인은 Dora Lee 씨 부인의 집이였읍니다. 처음 만났지만 오래만에 만나는 친척집 같아 서로 반가움으로 상면하며 그 가정이 장로교의 신앙을 갖고 있음을 발견 했읍니다. 이제 그녀의 가정은 우리 선교부의 친정집이 되였읍니다. 그가정을 통해 모든 교포를 만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우리 큐바 선교는 이렇게 시작 되었읍니다. - 2012.09.30
양원건은 70년대 Columbia에서 대학을 이수하고 바로 Costa Rica로 옮겨 대학원 공부를 하는 동안 학비를 벌기 위해 태권도 도장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1984년 카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선수팀을 훈련 참가해 역사상 처음으로 그 나라에 동메달을 안겨 주어 국가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가 마들어 놓은 고등학교 체육 교본은 지금도 교제로 쓰이고 있다. 도장에서 나오는 충분한 자금으로 부동산에 투자 거기서 생기는 이익금으로 큐바의 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동기가 되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남미 24 개국 정복을 이루어 낸 스페인 정부는 마지막으로 재원과 인적 투자를 동원. 새로운 스페인을 큐바에 건설하려고 모든것을 지불해 세운 마지막 나라 였다. 유능한 군의 퇴역 장군들 예술인 경제인 모두가 가고 싶었던 신천지인 스페인의 자부심 이였다. 그러한 민중의 엘리트 의식 때문에 전반적으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던 남미에서 공산주의는 전혀 꽃을 피우지 못했지만 유독 큐바의 진보된 문화 경제의 온도에 맞아 공산주의가 정착하게 된다.
면적 104,556 평방 킬로 (남한의 99,800 평방 킬로 보다 넓음) 길이 1,250 Km 넓이 191 Km 로 미국남단 Key West에서 90 마일 144 km 남쪽에 위치해 있다.
지난 40 차례의 선교보고서에 의해 역사의 뒷장으로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공산권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한민국이 방치하고 관심밖에 놓여 있는 이들의 추적을 쫓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땅끝 까지 전도 하는 의로운 선교 활동을 살펴보고 싶다. 우리의 정열 우리의 실력으로 우리의 결단으로 기적의 사역을 감당해 내는 이들의 노고를 감사드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 한다. 대한민국이 이분들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반드시 오게 될것이다.
1999년 10월 11일 부터 2000년 1월 23일 사이 3번째 사역의 보고서 일부에 이렇게 보고 한다. "그들의 삶이은 너무나 비참했고 불쌍했읍니다. 그들은 완전히 이 세상에서 잊혀진 인간이 아닌 동물의 세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읍니다. 정말로 문명이나 발전이나 소망이나 그 무엇도 기대할수 없는 세계였읍니다. 하나님께선 본(우리의) 선교단을 통해 복음과 사랑을 전하게 하셨고 또 그곳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전하여 깨닫게 하시려는 것 그의 계획이였읍니다. 큐바의 많은 한인 교포집들을 방문하던 중 80세의 고령의 노인을 만나보았읍니다. 그분의 이름은 Esstaban이고 한국이름은 "안 남산" 이라 하셨지요. 자신의 집에서 만든 캔디를 매일 거리에 나가 파는 행상인이였는데 이 노인의 마음이 전체 교인들의 실상 이라 생각되기에 그 일화를 소개합니다.
그는 하바나 Vieja의 높은 건물위의 옥상 위에 무허가 판자집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하늘로 치솟는 무너질것 같은 사다리를 조심조심 그의 집까지 도달할 수 있었읍니다. 우리는 미국 마이아미에 있는 한인장노교 교인이며 이곳 교포들을 만나고 싶어 찾아왔다고 소개하며 혹시 신앙을 갖고 계신지 여쭈어 보았읍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신앙생활은 하지않지만 매일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 해질 무렵 문앞에서 기도하지요. 오늘도 무사히 집에 돌아올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 합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갖고 왔소? 이곳은 너무 가난학하고 필요한 것이 너무 많고 병든 사람이 너무 많소" 우리는 처음 매우 당황했읍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도움은 못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인 당신들에게 민족의 얼을 찾아드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되찾아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왔읍니다" 하고 말씀드리니 일어 서시며 가슴에 두손을 대시며 대답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것 바로 정신적인 그것이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찾아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느끼며 그분을 우리는 만났습니다" 라고 하셨다. "우리는 50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인들인 당신을 만나게 되였고 그 고마움으로 우리 가족은 내일부터 꼭 교회에 나가겠읍니다." 말씀을 하실 때 우리는 서로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부등켜 앉고 한 많은 민족사의 슬픔과 그 역사속에서 고난받아온 그들의 삶을 더듬어 보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잊혀졌고 병든 사회지만 아직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몇몇의 그리스도의 초롱빛은 다시금 그 사회와 각자의 마음들을 밝혀줄 그소망의 생이 곧 올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 그렇게 되길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며 그곳을 떠나왔습니다.
본 선교회는 큐바의 한인사회를 활성화시켜 한인회를 통한 전 한인선교 공략의 정책을 세워, 1953년 한인회가 없어진 이후 처음 50년 만에 한인회를 소집.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을 서로 나누며 우리가 누군인지 소개며 우리의 목적은 그들이 두고 온 조상들의 조국에 대한 소식과 현재의 실상을 전할때 그들은 너무나 큰 반응과 흥미를 갖고 청취했다. 언제인가 돈을 벌어 내 고향 고향에 가 묻히겠다 하시던 선조들이 아무도 꿈을 이루신 분이 없었다며 눈물을 쏟을 때 전혀 알 수 없는 조국을 그리며 더 회한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고 그 땅에서 왔다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와같은 모임은 Habana, Mantanza, Cardenas의 3개 도시에서 똑같이 이루어졌읍니다. 그리고 한인들이 계속 모일수 있도록 그 준비 작업을 할수있는 인물과 장소를 지적하고 교회를 세우도록 보살펴 주고 왔읍니다.
4차 보고서에는 그 결과 큐바의 세 도시에 한민족의 지하교회들이 건강하고 즐거운 모습으로 힘차게 새로운 희망을 앉고 자칫 없어질 위기에 있엇던 민족의 얼 믿음 생활이 21세기 첫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며 83-100명이 지하교회와 정규 교회에 참석하고 있읍니다.
1) - Cardenas의 지하교회 -
30여명의 한인동포 매 격주 토요일 오후 2시에 Dionisa 부인집에 모여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며 60여년 만에 다시 민족이 친히 모여 친교하며 "한민족의 혼"을 되찾고 기뻐하고 있으며 마이아미 장노교회의 도움과 관심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모임은 지난해 1999년 10월 23일 부터 시작 1월 28일에 우리의 방문으로 특별 모임에 33명이 모였읍니다. 권찰역으로 Dionisa 부인이 맡고 말씀 지도는 Cardenas 장노교회 목사님과 원로 목사님(85세 노인이며 현역 Mantanza 대학의 신학대 교수님)과 이 교회의 성인 성경공부를 지도 하시며 또 반신 불구이신 대학 화학 교수이신 Dr. Jorge씨 세 분이 수고를 해주시고 계셨읍니다.
2) - Mantanza 지하교회 -
30명이상 한민족 동포가 모이고 권찰역에 한인회장의 여동생이며 전 Mantanza 대학의 학장을 지낸 Marta Lim 부인이 맡고 성경 말씀지도는 그곳 감리교 목사님이 맡아 주셨으니다. 저의 방문으로 35명이 뫃여 진지하게 "우리조상들이 이민 초기 보여 주신 신앙과 언어를 배움으로 민족의 혼을 되찾아야 된다" 고 역살하셨으니다. 신앙과 언어를 잃으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은 자취를 감출것이니 이제 모두 잊어버린 모국어와 신앙을 되찾기를 호소 했습니다. 그 첫 주 모임이 1월 15일 이였고 매 격주 화요일 2시에 모입니다. - 2012.10.01
20세기 정반대의 두개념사이 정치적으로 축복과 좌절의 극심한 경험을 당하고 있어 어느 민족도 경험하지 못하는 고난과 축복을 통해 새로운 민족 으로 재 탄생되어 가는 과정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영감을 떨칠수 없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언재까지 공존하게 될것인지 아무도 말할수 없다. 특이한 우리의 경험이 새롭게 펼쳐질 미래와 역사에 미칠 민족적 사명과 그 위치가 어떻게 변할것인가도 누구도 속단하기 어렵다. 그 미래를 위해 우리 정부는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을 찿아 긍정적으로 보호하고 단합시켜 한조상의 한민족이라는 형제와 자매의식을 고취시키는 커다란 노력과 홍보를 대대적으로 감행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위에 홍보한것이 2000년 1월에 일어났던 사건들인데 아무리 간단하게 편집을 할려해도 이들 양목사와 Linda 부부의 전도사역을 다 옮길수 없다. 다만 양목사가 이곳에 오기전에는 50년전에 헤어진 옆동네의 친척도 서로 볼 수 없엇지만 이제는 큐바 전역에 흩어진 모든 한민족의 후예들을 찿아내어 복음으로 감화 시켰고 이제 끝에서 끝까지 100개의 교회를 세워 "모든 큐바인"을 상대로 포교를 하며 이들의 성장과 유지 각자 홀로서기를 전적으로 도와주는 사역에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중이다.
양목사는 몽고를 방문하여 옛 정복자 테무진 징기스칸이 어떻게 그 방대한 제국을 다스렸는지 그비밀을 캐러 다녀올 정도로 이사역의 성공을 위해 연구와 공부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이제 30차 보고서에 이런글이 적혀있다. 2009 년 4월 14 - 5월 6일
우리는 기껏해야 한곳에서 하루밤을 세우고 바삐 다니느라 우리의 기도 제목도 잊고 있엇지만 사역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이끌어주심에 우리는 놀라워 하며 감동하곤 한다. - 중략 -Paulo 선교사의 설교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는다. "우리에게 내일은 신비스러운 시간입니다"
- 내하나 살기도 힘들고 메마른 이땅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있을수 없는 사랑의 땀들이 진흙과 모래와 세멘트로 벽돌이 올라가고 있엇다. 정부가 임시로 지어준 사람의 키로 제대로 설수 없는 움막에 거하면서 조그마한 새집 을 기다리는 저들의 마음에 어찌 감사의 눈물이 없겟는가! 다음날 한인사역 지역지인 Mantanzas, 늘 빠짐없이 참석하는 반가운 얼굴들 그러나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영양실조로 거의 모든 노인들이 다리가 검디 검은 피부 색갈에 마음이 아프다. - Varadero 의 Conchita 가정은 12년전이나 별반 변함이 없는 순 한국인 가정 줄담배를 피우는 Eddie 나 시력을 잃어버린 Armando는 좔좔 외울 정도의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신경쇠약에 늘 휘청거리는 어머니에게 가족을 데리고 얹혀 살고있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Conchita의 아들 David 그나마 식당 종업원 자리를 잃고 누나인 한인 지도자 Cristina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이들 형제 모두 구제 대상자 들이다. 나이가 젊은 그들이지만 그저 생명이 있으니 살아가는 듯한 순 한국인 후예들이다. 다만 Armando의 손녀딸의 남편 Junior 가 유일한 공사장 일일 노동자일 뿐이다. 이글을 쓰면서도 저들의 가엾은 모습이 떠나지 않아 Pen을 멈추고 무릅사이에 머리를 뭍고 있을 때가 많다.
이번 큐바의 선교에서 깨달은 것은 이제 큐바인들은 더이상 세상에 오직 의지할 곳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곳곳에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을 찿아 믿음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큐바에서만 볼수있는 믿음의 불꽃이 하늘높이 타오르고 있음을 본다. 가난한 저들이 비싼 흰옷 모자와 터분 흰구두 흰양산 으로 흰 소올로 단장하고 다니는 것이 많이 눈에 띈다. 문이 활짝 열리면 온갖 종파들의 각축장이 되지 않을가? 그래서 큐바는 이때가 중요한것 같다. 오염이 되기전 우리는 80% 이상의 새로운 사역을 위해 새로운 곳을 찿아가려 한다. 하나님 께서 약속하신 "네가 밟는 땅을 다 네게 주리라." 는 말씀에 의지 하여 우리에게 주실 그영적 가나안 땅 큐바 땅을 더 많이 밟아야 되리라. 모든것 주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갈뿐이다. 우리의 등뒤에 계시며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를 맞보며 가슴 뿌듯한 기쁨을 누린다. 주님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냘픈 건강을 유지 하면서 2-4 주일이 걸리는 60년대에 버려둔 국도. 황폐할대로 버려진 넓은곳 거의 원시시대를 갖 빠져나온 그곳에 하나님 의 사역 잊혀진 우리의 뿌리를 찿아 누군가는 했어야할 그일을 70의 노구에 채찍질을 멈추지 않는 Linda 와 Aquiles 부부에게 한없는사랑과 존경을 표하고자 한다. 한종원 교수님이 양원건에게 대학 일학년때 지어준 스페인식 이름이였다 Aquiles 라는 이름은!. 그는 이사역을 위해 그때서 부터 준비했엇나 보다. 그들이 격는 사역현장의 어려움들을 다음의 보고서에서 엿보게 한다.
한량없는 감동적인 선교의 불길 이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한 몽매하고 불쌍한 그들과 자유와 해방을 고대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자녀들 이북 동포를 위해 그들을 사단의 손에서 놓아주기를 큰소리로 외쳐보며 이만 정리를 한다.
중심가를 벗어나 가도 가도 끝이없는 산속길 한복판에 꼬리를 틀고 있는 뱀을 치고 가면서 허다한 사람들이 있는 시내를 제쳐놓고 꼭 산속길를 가야 되는가 싶었다. 그 대답은 도시에 교회들이 줄빗하고 복음을 들을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산속에도 주님이 택하시고 찿으시는 주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찌 우리가 이런 곳을 찿아 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가! 이제는 트럭도 전연 다니지 않는 가파른 길에 들어선다. 순간 마음속으로 불평을 토해낸다. 이런 길이면 트럭을 아예 타고 오르게 하던지 아니면 말이라도 준비할 것이지. 만약 차가 꼭대기를 오르다 미끄러져 딩굴면 어쩔건가? 차를 버리고 되돌아갈 수도 없고 칼로 자른듯한 돌과 먼지 흙으로 바퀴는 헛돌기 시작하자 Gilermo 목사와 나는 내려서 밀때 흙먼지가 우리를 광야의 느네(광야의 마른 풀이 둥글게 바람에 굴러가는 장면) 처럼 감싼다. 이러기를 몇차례 다시 올라간 차를 타고 시동을 걸고 오를때 차는 그야말로 밑바닥이 박살이 나는 소리를 낸다. 앞에 타고 있는 Guilermo 목사와 나는 동시에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나는 당신의 신실한 종" 이라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나는 그순간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거친 대못으로 못박힐 때 심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그 고통을 맛보는 듯 "나는 너희를 위해 고통을 겪는데"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는것 같아 얼마나 울었는지! 정말로 우리는 엉엉 울고 말았다...Merci! - 2012.10.02
- 원재훈의 [잊혀진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 (재훈의 서면요청으로 2012년 9월 25일자의 자유게시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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