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문화 원고
누운 시혼詩魂을 깨우다(4)
문무겸비 영의정의 손주 사랑
글 ․ 사진 구능회 최이해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명신 구치관具致寬 선생의 유택
지난 6월 25일, 충렬공 구치관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한국전쟁으로 불려지고 있는 6.25 사변이 발발한 지 6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날 날씨는 화창하고 무더웠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열미리(옛지번 - 하열미리 산 3번지)에 소재한다. 그동안 타성他姓의 선현先賢들의 묘소를 탐방해 오다가, 내 집 가문 어른의 묘소를 찾는 발걸음이라 그런지 한결 더 가볍다. 더위를 무릅쓰고 처음 찾는 산소를 향하는 내 마음이 바빴다. 어느새 묘소 근처에 도착하니 입구 쪽에 서 있는 신도비가 먼저 우리 일행을 맞는다. 오래된 비석은 이제 낡고 풍우에 시달려서 글씨를 알아 볼 수가 없기에, 비교적 근래에 세워진 신도비 내용을 살펴본다. 공의 신도비문은 당대의 문호文豪로 널리 인정받던 서거정徐居正 선생께서 지으셨다. 이어서 묘소에 도착하니 공의 묘소는 부인과 함께 좌우쌍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 선생은 1406년에 태어나, 1470년에 별세한 어른이다. 공의 증조부는 고려에서 보문각 대제학을 지내셨고, 조부께서는 새 왕조에서 개성부윤을 지내셨고, 부친께서는 공주목사를 지내셨으니, 대대로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해 온 가문이라 하겠다.
공의 자는 이율而栗이고 사후에 조정에서 받은 시호는 '충렬忠烈' 이다.
1434년(세종 16년)에 알성시에서 을과로 급제하여, 세종과 문종의 치세 하에서, 승문원의 정자正字로 관로官路에 나섰다. 그 후 예문관의 검열檢閱, 승문원의 주서注書, 사헌부의 감찰監察 등을 거쳐 병조 정랑과 사복시司僕寺의 윤尹을 지냈다.
문종文宗이 죽고, 계유년 정난靖難과 병자년 원옥冤獄이라는 대정변大政變을 거쳐, 세조世祖의 치세에서는 임금의 신임을 받아 승지承旨,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조정의 중신重臣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문文과 무武를 겸비한 공은 함경도 지역의 반란 세력 진압과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들을 격퇴하면서 출장입상出將入相하는 국가의 간성干城이 되어, 세조로부터 “나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이라는 격찬激讚을 들었다. 세조 별세 후에도, 군왕이 교체되는 정치적 불안정기에 원상院相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조선 왕조 초기의 불안정한 왕권을 안정시켜 나가는 데 노老 재상宰相으로서의 경륜을 십분 발휘하였다고 역사는 전한다.
초여름을 지나 무더운 여름으로 들어서는 계절에 공의 유택을 찾아 가문의 큰 어른이시자 조선 왕조 초기의 명신名臣이자, 청백리淸白吏로 한 시대를 살다 가신 고인께 간절한 추모의 정을 드리면서, 많지 않은 공의 유시遺詩 중에 ‘손주에게 주는 시’ 한 편을 골라 보았다.
題 : 貽 孫 詩 (손주에게 주는 시)
穉 齡 踰 志 學 (치령유지학) 어리던 네가 어느 덧 열다섯이 넘어서
嘉 禮 始 加 冠 (가례시가관) 가례를 치르고 관례까지 모두 마쳤구나
重 厚 天 之 賦 (중후천지부) 하늘이 네게 주신 자질을 중하게 여겨
詩 書 敎 以 寬 (시서교이관) 시서를 잘 배우고 너그러이 처신하여라
蓬 門 期 遠 大 (봉문기원대) 가문을 빛내고 미래를 멀리 내다보면서
林 壑 涉 艱 難 (임학섭간난) 깊은 골짜기를 건너가듯 늘 조심하거라
三 世 勤 傳 業 (삼세근전업) 삼대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가업을 이어
從 今 肯 搆 完 (종금긍구완) 지금부터 이를 온전히 이루도록 하여라
능성 구문은 우리나라 경제계의 한 축인 엘지 그룹의 창업자 집안이다. 능성綾城은 오늘날 전남 화순和順의 능주綾州인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유허지가 있는 곳이다. 물론 능성 구문의 시조묘와 2대조 묘도 이곳에 있다. 능성 구문애서는 조선시대 왕비가 한 분 나왔고, 영의정은 오늘 소개하는 충렬공 한 분이 나왔다.
500년이 넘는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영의정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임금은 27명, 오늘날의 입법, 행정, 사법 삼숸을 틀어쥔 왕정 치하에서 신하들의 가장 정점에 있는 영의정은 모두 176명이다. 왕권과 신권의 기가 막힌 조화가 오랜 왕정을 이끈 동력이었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면 이들 영의정의 역할은 지렛대요 저울추가 아니었을까.
전국에 영상의 유택은 대체로 잘 보전되고 있다. 절손絶孫한 가문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느 영상 유택이든지 나라에서 내려준 사패지의 명당에 왕릉 버금가게 둥두렷한 봉분과 묘역이 잘 다듬어져 있다. 물론 귀신이 다니는 길목에 세운다는 신도비神道碑가 묘역 들머리에 있고,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경우에는 안내 팻말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찾은 구충렬공의 유택은 그렇지가 않았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하열미리 산 3번지. 이 주소는 이제 네비에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광주시는 급속한 도시화를 겪고 있어서 지번 재지정으로 ‘곤지암읍 벌열미길’로 바뀐 것이다. 경기도 여주시에서 분당선으로 이어지는 경전철이 났고, 도로 옆 각종 나대지는 온갖 공사가 시도 때도 없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충렬공 유택은 문중묘역에 부모님을 위로 모신 자리에 있기에 별도의 지방문화재 지정도 안 받은 듯 도로변 안내판도 없는 형편이었다. 선조들의 유택을 찾아다니는 몇차례의 수고로움에서 터득한 요령으로 ‘하열미리 마을회관’을 찍고 찾아가는데, 눈썰미 있게 큰 나무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노거수, 예전에는 길손들의 랜드마크였음이 분명하여 그 자리에 차를 세워 물어보기로 했다.
길운이 좋았는지, 마침 능성 구문 종친간 민원으로 마을을 다녀오던 소종회 회장을 만났던 것이다. 이 후로는 그가 일러준 대로 마을 소로를 살펴들어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니 선영이었다. ‘곤지암읍 벌열미길 1’을 찍으면 ‘김영희 동태찜’집이 나오는데, 여기 쥔장이 구천서 소종회장님 집이라 상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010-2753-8355). 또한 앞서 말한 노거수는 광주시 지정 고유번호 57호 느티나무인데, 충렬공께서 선영에 부모님 제사를 봉행한 후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나무라고 한다. 수령은 570년이다. 또한 그 옆에는 문중의 효자 구덕회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도 서 있다. 지금은 효행이 자손의 입신양명으로 대신하는 세상이 된 지 오래라서인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쓴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대를 이어 면면이 이어진 능성구문의 번다한 자손들을 직접 보고, 공께서 손주에게 주었다는 시를 한 수 읽으면서 졸렬하나마 답시 한 수 지어보았다. 사연이 길어 장형시조가 되었다.
답시 구충렬공
문무를 함께 갖춰 이름 앞에 춭장입상
국사에 분망하여 행여나 놓칠세라 손주를 불러 일러 세상은 어려우니 조심에 또 조심을 삼대를 바라보라 간곡히 부탁하니 대대로 뜻을 이어 일국부가 이뤘구나
여전히 받들고 새겨 조심조심 하리라
구능회 한시애호인
최이해 여행작가,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