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떨어진다. 솜털 같은 이것들, 켜켜이 쌓이니 가슴 짓누르는 무게가 바위보다 묵직하다. 계절의 흐름이란 이런 거다. 화사한 풍경으로 마냥 눈멀게 했다가, 느닷없는 낙화(洛花)로 순식간에 가슴 먹먹하게 만드는 것. 속절없다. 사람 사는 일도 매한가지라 또 속절없다. 맑고 맑은 산사(山寺)에 들어 연등 하나 불 밝히면 이 먹먹함 풀어질까. ‘부산한 거 싫다’ ‘수다스러운 거 싫다’하면 화암사 찾아간다. 전북 완주군 불명산 어느 자락에 꼭꼭 숨어있는 ‘잘 늙은 절’이다.
● ‘구름 속에 주춧돌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시인이 화암사에 홀렸다. 이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한 사람은 안도현 시인이다. ‘화암사, 내사랑’이라는 시(詩)에 이렇게 썼다. 마음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면, 구름 속에 주춧돌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를 만난다고. 이 절 안마당에 발 들이면, 인간의 마을에서 온 햇볕을 보고, 세상의 뒤를 그저 쫓아다니기만 한, 불명산 능선 한 자락 같은 참회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깨달음 얻은 절을 시인은 사랑하게 됐다. 그래서 꼭꼭 숨겨두려, 누구에게도 찾아가는 길을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마지막에 적었다.
시인의 애를 태운 절은 계곡을 30분쯤 거슬러 올라야 만난다. 판판한 길은 주차장에서 출발해 5분이면 끝난다. 그 다음은 ‘돌밭’이다. 길에 돌멩이 잔뜩 뒹구니 걷기가 그리 녹록치 않다. 줄 난간 의지해 너럭바위 지나고 급경사의 철계단, 완만하게 굽은 돌계단도 올라야 한다. 등에 땀이 좀 맺힌다 싶을 때 창연한 고찰이 구름 흐르듯 나타난다. 공을 들여 찾아가는 절이 반갑다. 몸은 고달파도 ‘마음의 흙먼지’ 많이 떨어진다. 법당 코앞까지 차를 타고 가면 못 느낄 것들이다.
돌계단 끝에서 숨 고른다. 화암사는 신라의 절이다(694년). 원효와 의상이 수도했고 설총이 머물며 공부했다. 전설도 한 자락 걸쳤다. 옛날 어느 공주가 아파서 어느 왕이 기도 드리니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 산 바위봉우리에 핀 꽃을 건넸다. 잠에서 깬 왕이 수소문해 꽃을 찾아 공주에게 먹이니 병이 나았다. 그래서 꽃자리에 절 짓고 이름을 ‘화암(花巖)’이라 했다. 가만히 보니 절이 꽃이다. 사위는 한갓지고 미동 없이 고요한 가람들은 꽃만큼 곱다.
절 마주하고 서면 정면에 보이는 것이 우화루다. 보물(662호)이다. 가지런한 돌축대 위에 지은 누각인데, 바깥에서 보면 2층, 안에 들어가면 1층인 구조다. 경사진 땅을 판판하게 다듬어 건물 올리는 것이 대세인 요즘인데, 우화루는 기울어진 땅에 맞춰 지었다. 땅을 깎아내지 않아서인지 보기가 편안하고 산과 나무와도 잘 어울린다. 빛이 바랜 단청, 손질하지 않은 나무기둥이 자연스러워 슬쩍 봐도 마음 편안해진다. 칸마다 낸 문이 예쁘고 처마 아래 걸린 소박한 현판도 푸근하다. 안마당으로 가서 우화루 내부를 보면 퇴색한 빛깔이 어찌나 고운지 눈이 번쩍 뜨일 거다.
경내에선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맑은 풍경소리 들어본다. 깊은 고요함에 정신 맑아 진다. 우화루, 극락전, 적묵당, 불명당이 ‘ㅁ’자로 마당을 에둘렀다. 건물마다 묵직한 시간의 무게 느껴지니 ‘묵은 맛’이란 이런 걸까 싶다. 5분만 앉아 있으면 잘 늙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인데, 찾는 사람 드물어 여태 연등 하나 걸리지 않은 것이 안쓰럽지만, 호들갑스러운 세속의 형식을 뒤로 한 채 시간과 자연에 의연하게 순응하는 이 적요한 절이 참 당당하다. 맞다. 이 절, 참 잘 늙었다. 시인도 그렇다고 했다. ‘잘 늙은 절, 화암사’라는 수필에 이렇게 썼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극락전에서 부처님을 알현한다. 불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종교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똑같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떨어진 ‘꽃잎’ 위해 기도한다.
극락전은 규모 작아도 국보(316호)다. 널판(하앙) 넣어서 처마를 길게 뽑은 우리나라 유일의 ‘하앙식’ 구조 건물이다. ‘극’․‘락’․‘전’이라고 한자한자 떼어 붙인 현판도 참 독특하다.
시인은 수필에서 화암사를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라고도 소개했다. 급히 보면 10분도 채 안 걸릴 작은 절. 그런데 경내로 들어가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눌러앉게 되는 신비한 공간. 이렇게 머물다가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고향집 같이 푸근하고 든든한 절 한 채 가슴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마음 번잡할 때 이거 곱씹으면 분명 위로가 될 거다.
● 마음의 생채기 보듬는 ‘치유의 숲’
상관면 죽림리 공기마을 편백나무 숲(상관편백나무 숲)은 들러본다. 마을 들어앉은 모양새가 밥공기 같다고 해서 공기마을이다. 마을 이름과 달리 숲은 ‘명품’이다. 26만평의 대지에 10만 그루의 편백나무, 6,000주의 잣나무를 비롯해 삼나무, 낙엽송, 오동나무 등이 빼곡하다. 숲은 1976년에 산림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됐고, 입소문 탄 지는 3년 쯤 됐다. 영화 ‘최종병기 활’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매년 주차장을 넓혀야 할 정도로 찾는 이들 늘었다. 그래도 날 더 더워지기 전 까지는 상황이 낫다.
들머리 산책로 따라 곧장 가면 편백나무 산림욕장이다. 나무들이 어찌나 촘촘한지 한낮에도 사위는 어둑하다. 여기저기 쉴 수 있는 자리 잘 만들어져 있다. 평상처럼 판판하게 만든 터가 많으니 돗자리 하나 챙겨 간다. 하늘로 곧게 뻗은 나무들, 보고만 있어도 마음 참 상쾌해진다.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마음껏 들이켜며 산책 해본다. 편백나무의 피톤치드 발생량은 여느 나무의 그것에 비해 많다고 알려졌다. 공기 싱싱하니, 머리 맑아지고 체한 것처럼 답답했던 가슴도 뻥 뚫린다. 의사가 고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의 병까지 아무니, 숲은 명의 중에 명의다. ‘치유의 숲’이란 이런 거다.
편백나무 삼림욕장을 포함해 숲 전체를 에두르는 산책길이 잘 나있다. 임도와 산책로 다 합쳐 10km쯤 된다. 특히 주민들이 직접 냈다는 오솔길이 운치가 있다. 이 길, 걸을 수 있는 만큼 걸어본다. 고실해진 흙길 밟는 기분이 어찌나 편안한지는 걸어 봐야 알 수 있다. 발이 편해야 심신이 편하다.
돌아 나올 때는 족욕을 해본다. 숲 한쪽에 유황온천을 이용한 족욕탕이 있다. 이 근방에 한 때 유황온천으로 이름 날리던 죽림온천이 있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대신 마을에 상관리조트&스파가 생겼다. 여기서 온천도 즐기고 숙박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상관저수지로 간다. 상관편백나무 숲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데, 물새 날아다니고 버드나무 가지 늘어진 봄날 풍경 참 예쁘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부터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관리된 덕에 수질도 깨끗하다. 완주에는 풍경 예쁘기로 이름난 저수지 많은데, 대아저수지, 동상저수지 등이다. 상관저수지도 빠지지 않는다. 상류 쪽 제방이 있는 곳도 들른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수변 식물들이 우거진 풍경이 경남 창녕의 우포늪처럼 천연하다. 이 옆으로 전북지역 4대 종단이 조성한 ‘아름다운 순례길’도 지난다. 이곳에서 만난 한 여행자는, 여기 풍경 너무 평온해 완주 올 때마다 들른다고 했다. ‘첫사랑’처럼 자꾸 생각나는 곳이란 말이다. 살면서 이런 곳 하나 만들어둬야 한다.
● 여행메모
화암사에는 국보도 있고, 보물도 있다. 그런데 요즘 어지간한 절 다 있는 홈페이지는 없다. 호남고속도로 익산IC로 나와 799번 지방도 타고 봉동사거리까지 간 후 국도 17호선 타고 경천면지나 대둔산도립공원 방향으로 간다. 용복주유소 삼거리에서 우회전 해 약 4.5km 가면 화암사 들머리다. 봉동읍에서 완주군청 지나 순천완주고속도로 완주JC→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IC로 나오면 편백나무 숲이 있는 상관면이다. 상관편백나무 숲 곧장 가려면 호남고속도로 익산JC→익산포항고속도로 완주JC→순천완주고속도로 상관IC 순이다. 공기마을에 상관리조트가 있다. 온천스파 시설도 있다. 완주군청 문화관광과 (063)290-2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