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비타콘 원고 - 배울 학(學) 코너
주제: 21세기 가톨릭 신자의 신앙 감각
미사 통상문에 담긴 언어의 온도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미사가 신앙생활의 중심이고, 성찬례에 참례하여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성사생활임을 안다. 그렇기에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가 않다. 교회는 직업상, 건강상, 부득이한 상황에서 주일 미사 참례의 의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목적 지침을 마련하여 신자들에게 알리지만 여전히 신자들은 미사 참례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의무감이 의미(意味)를 넘어서는 경우가 이런 것인가보다. 의무를 채우고 나면 신자로 살아가는 의미는 일상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사의 은총이 크니 사목 현장에서 사제들이 신자들에게 미사 참례를 독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와 미사에 참례하는 교우들 간에 이루어지는 기도와 응답, 곧 미사 통상문의 전례문이 담고 있는 언어의 온도를 느껴보는 것도 우리의 신앙 감각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젠가 잘 알던 스님이 천주교 미사 전례에 참여한 후 자신의 소감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뭐가 뭔지 잘 몰라도 한 가지 맘에 드는 게 있더이다. 미사 중에 자기 가슴을 쾅쾅 내리치며 ‘내 탓이요’를 외치는 순간이 있던데 그거 하나 맘에 들더군요.” 미사 시작 후 참회 예절에서 고백의 기도를 바칠 때 ‘내 탓이요’를 외치며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행위를 가리킨 것이다. 신자들은 습관처럼 고백의 기도를 바치고 가슴을 치는 행위가 익숙하지만 이 행위가 미사에 참례하기에 부당한 우리들의 일상의 죄를 고백하고 성찬례에 참례할 자격을 주는 고백과 사죄가 이루어지는 순간임을 아는 신자들은 얼마나 될까?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우리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살아가지 못한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니 내가 일상에서 잊은 하느님은 물론 내 이기심과 편견 때문에 관계 맺기에 실패한 형제들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라고 소리 내어 고백하는 것은 내 죄에 대한 공적 참회를 표현하는 전례 행위이다. 과거 수도원에서 하루를 마치며 그날 잘못한 죄를 형제 수도사들이 보는 가운데 제단에 엎드려 자신의 죄책을 고백하던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그렇게는 못해도 신자들이 거룩한 미사에 참례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죄를 교회 공동체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가슴 치는 행위의 의미가 의미심중하다 할 수 있겠다.
사제와 신자들 간에 교송으로 바치는 전례문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은 인사말이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란 사제의 인사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는 말이다. 이 인사말은 미사 중에 4번 정도 주고받는다. 미사 시작 전, 복음 낭독 전, 감사기도 시작 때, 그리고 파견 강복 전이다. 물론 변형된 형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 전에도 한다. 이 인사말은 전례적 행위이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신앙 감각의 표현이다. 신자들은 성당에 오기까지 일상에서 꽤나 힘들고 지친 일들이 많았을 수 있다. 가정에서 부부와 자녀와의 사소한 말다툼,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들과의 어긋난 관계로 인한 상처, 내 삶을 억누르는 경제적 압박감과 노후에 대한 걱정, 당장 해결해야 할 어려운 과제들을 뒤로하고 성당에 무거운 발걸음을 하는 신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 신자들을 향해 사제의 첫 번째 인사인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란 말은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숨어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제자들에게 했던 첫 번째 인사와 같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숨을 쉬어라”.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살아온 시간들을 뒤로하고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에게 전해지는 사제의 인사말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갖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라는 권고의 말이다. 어찌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인사말을 받은 신자라면 사제에게도 평화를 빌어주는 교감이 이어진다. 사제 역시 본당 사목에서 지친 피로감과 교우들과의 어긋난 관계, 개인적인 상처와 숙제들을 안고 미사를 집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는 그런 사제에게 신자들이 청하는 인사이다. 수품 때 받은 성령을 기억하고 비록 힘들고 지친 사목 생활 속에서도 첫 마음을 잃지 말고 미사를 정성껏 집전하며 사제 직무의 소중함을 기억해달라는 인사이기도 하다. 교우들이 사제와 나누는 전례적 인사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미사 통상문의 여러 용어들은 때로 습관처럼 외우다보면 무미건조한 말처럼 느껴지지만 곱씹으면 언어의 온도가 느껴지는 순간들이 많다. 한 번은 어떤 교우가 보편지향 기도의 끝에 무심결에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했더니 신자들이 주저없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다. 사제도 미사 통상문을 습관적으로 읽다 보면 미사 읽는 기계처럼 건조한 미사가 되지만, 경문의 구절구절을 정성껏 읽다보면 예전에 못 느꼈던 전례 언어들의 엄중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도 적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사 중에 사제가 바치는 기도문 중에 가장 좋아하는 문구 둘이 있다. 하나는 예물 준비 시간에 홀로 복사들이 가져온 물에 손을 씻으며 바치는 기도문이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사제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죄스럽게 느끼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 순간만큼은 하느님께 내 죄를 씻어달라는 간절함이 묻어나게 된다. 또 하나는 영성체 후에 제구를 정리하면서 바치는 기도문이다.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성체를 받아 모신 마음을 다잡고 내가 모신 성체가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될 수 있다는 표현은 가끔 분심으로 가득차거나 성체에 대한 깊은 신심 없이 모신 성체에 대한 죄스러움을 씻어주고 치유해주는 ‘약’의 효능도 성체에 있다는 말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른다. 신자들이 성체를 받아모시기 전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않사오나”라는 고백과 같은 맥락이다.
가끔은 우리가 습관처럼 바치는 기도문들의 의미에 잠시 머물러 보면 그 전례 언어에 담긴 따뜻함과 장엄함, 몸둘 바 모르게 만드는 죄스러움과 용서와 자비를 느끼게 해주는 언어의 온도가 있다. 이 모든 것도 우리 안에 새겨진 신앙 감각의 표현들이 아닐까 싶다. 이제 미사를 습관이나 의무감이 아닌, 오랜 세월 수 많은 신자들의 신앙 감각의 아름다운 표현으로 다시 만나보는 연습이 필요할 때다.
(송용민 신부)
첫댓글 습관적 미사언어 다시 생각하게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