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슨트(강경역사문화가이드) 강의안
내용 : ▶강경 옥녀봉 한국 최초 침례교회
▶구)강경성결교회 한옥예배당
▶강경성지성당
1. 옥녀봉 한국 최초 침례교회(향토유적 제38호 2009.11.5.)
<기독교한국침례회 최초예배지 – 지병석씨 집>
기독교한국침례회 최초 예배지인 이곳은 향토유적 제38호(2009.11.5)로 등록된 곳으로 1896년부터 1935년까지 폴링, 스테드만, 펜윅 선교사들이 40년간 거주하면서 선교 활동을 넓혀 간 곳이다.
제1대 폴링선교사 제2대 스테드맨선교사 제3대 펜윅선교사
(1895~1899년) (1899~1900년) (1900~1935년)
기독교한국침례회 최초 예배지인 이 집은 본래 강경에서 인천을 오가며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씨 집으로 지병석씨는 폴링선교사에 의해 전도를 받고, 서울 한강에서 침례를 받은 한국 최초의 침례교인이다.
바로 이 집에서 지병석씨 집에서 1896년 2월 9일 폴링선교사 부부와 아만다 가데린, 그리고 지병석씨 부부가 함께 예배드림으로 침례교회가 시작된다. 기독교 한국침례회가 태동한 곳이다(현재 133개 지방회, 3,548여 교회. 80만 명의 성도로 성장, 파송선교사 331가정 760명/64개국 196민족)
그리고 1898년 폴링 선교사는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ㄱ자형 집을 지었는데 1900년 초 스데드맨 선교사 ‘ㄱ자형 교회’로 개조하는데 이는 한강 이남 최초 ㄱ자형 교회가 된다.
폴링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보스톤 클라렌든 스트리트 침례교회에 사업에 성공한 씽 집사(S. B Thing)가 외동딸 엘라 씽(Ella Thing)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엘라에게 상속될 유산을 생전에 소망한 선교 사업에 쓰기로 결정하고 딸 이름을 따서 엘라 씽 기념 선교회가 조직되어 이 선교회에서 훈련받은 폴링과 그의 부인 그리고 아만다 가데린 선교사 3인이 1895년 한국 제1진 선교단으로 파송 되었다(씽 집사의 죽은 딸의 유산으로 한국 침례교 선교가 시작).
특히 강경침례교회 최초 예배지는 1908년 옥녀봉에 세워진 옥녀봉 신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齋祠<재사> : 이곳에 일본인들에 의해 옥녀봉 중앙에 먼저 건설). 처음에 옥녀봉 강경침례교회 오른쪽에 조그맣게 시작된 신사가 계속 확장되어 갔다. 급기야 신사참배가 강요되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 강경신사는 어조영(御造營)의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고 신사참배 강요로 옥녀봉에 있던 신사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제 큰 규모의 신축 공사가 계획되면서 신사 바로 옆의 강경침례교회 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옥녀봉 강경스테이션 구내의 면적은 모두 15,616㎡(4,732평)에 달한다. 이는 옥녀봉 전체 크기의 1/3 규모이다. 더욱이 침례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단이므로 1942년 6월 10일 침례교 부지를 강탈하기 위해 32명의 지도자를 체포하여 원산 헌병대로 송치 감금하고 폭행한다(침례교 부지, 신사참배거부, 재림사상). 1943년 5월 14일 4,732평의 침례교 부지를 증여 형식으로 강탈하여 강제로 신사 부지로 등기 이전하였다. 옥녀봉 ㄱ자형 강경침례교회를 방화 소실시켜 폐쇄시켰으며, 32명의 지도자중 23명은 석방하고 9명은 기소하여 함흥형무소에 이감한다. 1944년 2월 13일 전치규 목사는 옥중에서 순교를 당한다. 결국 1944년 5월 1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침례교단은 해체령이 내려졌고, 모든 재산은 몰수 되었다. 신사를 새롭게 신축하려는 일본의 꿈은 광복을 맞이함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시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이종덕 목사는 교회에 부임하셔서 많은 일을 하시다가 한국전쟁 때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끌려가 논산천과 강경천 삼각지 갈대밭에서 총살당하여 순교하였다(1950.9.28). 그곳에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종덕 목사> <이종덕 목사 순교비 – 논산천과 강경천 삼각지>
한국인 초대 감목인 이종덕 목사는 1904년 20세 때에 독립당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임천 주재소에 감금되었는데 펜윅 선교사와 임천 유지 장기영씨의 도움으로 풀려나 1905년 공주교회 내 성서학원에 입학 최초의 신학생 되었다. 1906년 펜윅 선교사로부터 성경학을 배우고, 1911년 교사(선교사) 직분을 받고, 1912년 10월 경북 산점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4년 12월 원산 대화회에서 1대 펜윅이어 2대 감목으로 선출 임명 받고, 1915년 일제 명령에 불복하여 구속되었다가 풀려나 1917년 간도 종성동으로 이사 1921년 간도 종성동 국자가 교회 내 성경학원을 설립 원장직을 하다가 1922년 12월 26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1924년 감목직을 3대 전치규 목사에게 물려 주었다. 1937년 일제에 비협조 이유로 4월간 옥고를 치루고 풀려나서 만주에서 8년간 순회 목회를 하였으며, 1945년 8월 조국 광복이 되어 윤석훈, 나상순 집사와 전 성도들의 역사로 홍교리 114번지에 있던 일본인들의 사찰을 매입 교회당으로 삼아 강경침례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한 후 이종덕 목사는 교회와 교단(당시 교단 총회장)을 지키며 피난을 하지 않고 부목사인 김장배 목사에게 손으로 크게 쓴 명함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들고 인민위원회와 내무서등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전도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28일 공산당이 퇴각하던 날 밤 공산군에 의해 체포 되어 금강변 갈대밭에서 총살형으로 순교 향년 66세를 일기로 첫 성지교회의 성인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