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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원 식구들
안 유 환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어둑한 저수지에 물안개가 자욱하다. 이슬 머금은 관목숲속에선 산새들의 지저귐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사방이 나지막하게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소쿠리처럼 보이는 분지에 남향한 양철집 몇 채와 저수지를 굽어보는 듯한 목조 교회당이 종탑과 함께 서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여명 속으로 트럼펫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진다. 여느 때 같으면 해가지고 식당의 설거지가 끝날 때쯤 사람들은 트럼펫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엘림 기도원에 올라온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래전 버트 랭카스터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한 흑백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한 장면을 연상하며 추억에 잠긴다.
그는 특별히 즐거운 일이 있는 날이나 한 날 한시에 세상을 떠난 부모님의 추도일이면 이른 아침에 트럼펫을 분다. 오늘은 추도일이 아닌데도 트럼펫을 부는 것을 보면서 기도원 식구들은 그에게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좋아하는 곡목은 주로 찬송가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543장(저 높은 곳을 향하여)이며 어쩌다「보리밭」이나「가고파」같은 우리가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기도원 식구들은 하루일과를 마치고 쉬는 저녁에는 그의 트럼펫 소리를 따라 찬송가를 부르며 우리가곡도 흥얼거린다.
그는 오늘새벽엔「과수원길」을 경쾌하게 연주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악대부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그는 재즈를 비롯해 팝송도 할 수 있지만 원장의 기도원 운영방침에 따라 소위 경건하지 못한 노래들은 연주할 수 없게 되어있다. 기도원에서는 아무도 텔레비전을 볼 수도 없다. 기도원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접견하는 원장 방에만 텔레비전이 한 대 있을 뿐 신문도 물론 배달되지 않는다. 기도원에 올라오면 풍경은 아늑한 시골마을 분위기 같지만 기도원 위치는 산꼭대기에 가깝다. 어찌 보면 산정호수를 끼고 있는 휴양지 같기도 하다.
엘림 기도원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무정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600m에 위치한다. 누구나 기도원에 올라가려면 10여년 전만해도 버스정류장에서 2시간은 걸어야 했다. 게다가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간편복에 운동화를 신거나 아예 등산복 차림을 해야 했다. 그때는 기도원규모도 크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일부 밭작물을 제외한 모든 생필품은 지개로 져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은 책가방 하나만 들어도 등에 땀이 함박 젖는데 짐을 어깨로 져 나른다는 것은 여간 힘 드는 일이 아니었다.
한때는 산 아랫마을에 기도원 생필품을 전문으로 운반하는 기골이 장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농번기를 맞거나 친척의 길흉사에 참석할 때 기도원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원장이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 기도원 전속짐꾼이었다. 짐꾼들은 노숙자 쉼터 같은 큰방에 함께 기거하며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씩 짐을 져 날랐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달에 한차례 휴가나 외출을 얻어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경제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고 생활수준도 향상되면서 짐꾼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자주 생겨났다.
그는 제대 후 일했던 직장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을 때 같은 교회의 한 권사의 소개로 엘림 기도원 짐꾼으로 들어왔다. 그가 다니던 직장은 공사장 일을 마치면 저녁에는 술자리에 자주 어울려야 했고 동료들은 음담패설이나 화투놀이로 여가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군복무를 하면서도 경건한 생활로 믿음을 굳게 지켜온 그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굶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것이 엘림 기도원 짐꾼이 된 계기였다. 그가 이 기도원에 들어 온지도 올해로 8년째를 맞았고 어느새 나이도 만으로 37세를 바라보고 있다. 오늘은 C집사의 중매로 오전11시 K읍에서 맞선을 보는 날이다. 그동안 여러 차례 선을 보았으나 성사되지 않아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는 아예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집사가 거의 매주일 마다 기도원에 올라와 권유했기에 마지못해 허락을 한 것이다. C집사는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피신 책으로 몇 달간 기도원에 올라와 있었던 적이 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물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식당에서 밀려나오는 푸른 연기가 저수지 수면위로 낮게 깔리고 있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오랜만에 덥수룩한 수염을 밀었다. 면도를 하고나니 얼굴도 한결 희어진 것 같았다. 거울 앞에서 입술을 끌어당기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어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초등학교 때 마을사람들과 함께 봄놀이를 갔다가 관광버스가 전복되는 바람에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를 닮아 귀골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그는 친구들을 잘 사귀는 편이었고 고향마을의 여자 친구들에게도 호감을 쌌다. 친구들 중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으며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M시에서 직장을 얻어 출퇴근을 했다.
그 당시 마을에는 크게 두부류의 또래 청년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마을사람들의 눈 밖에 난 사고뭉치들로 이웃마을 청년들과 패싸움을 하거나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술판을 벌이기 일쑤였다. 한번은 이웃마을 세 처녀가 산나물을 캐러 왔다가 그중 하나가 소 먹이러 다니는 마을 앞산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 일은 사고뭉치들의 소행이었다. 일을 저질은 5명은 모두 지서로 연행되었으나 그 사건은 신문에 보도 되기는커녕 입소문으로 번지다 말았다. 부모들이 마을 유지였기 때문인지 그 엄청난 일은 적당히 마무리되었고 그 친구들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활보하고 다녔다. 오일장이 마을에서 열리는 날은 이들 중 몇 명은 바람잡이를 하고 물건을 훔치는 짓을 하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속한 또 하나의 부류는 마을에서 착한 청년들로 인정을 받았다. 골목어귀에 몰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으며 어른들이 보는데서 술을 마시는 일도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을에서 닭서리나 수박서리를 당한 사람들은 예의 사고뭉치들을 지목하여 의심하거나 경계했다. 그를 비롯한 착한무리 친구들도 남의 닭을 훔쳐 먹기도 하고 수박이나 참외서리를 했었다. 그는 자기 집에 머슴으로 들어와 있었던 먼 친척 아저씨로부터 밤중에 소리 없이 닭 잡는 법을 배웠다.
닭서리는 주로 겨울에 행해졌다. 마구간 같은 곳의 횃대에 앉아 잠을 자는 닭을 잡아내려면 먼저 두 손을 따뜻하게 해야 했다. 품속에서 따뜻해진 한손으로는 닭의 목줄기를 쓰다듬어주면 닭은 고개를 쳐든다. 이때 다른 한손을 두 날갯죽지 밑으로 아주 천천히 밀어 넣으면 신기하게도 닭은 골 골 골, 소리를 내면서 날개를 약간 치켜든다. 이 순간을 놓치면 안 된다. 목줄기를 쓰다듬어주던 손과 뒤쪽에서 날갯죽지 밑으로 밀어 넣었던 손을 순식간에 조르면 닭목과 두 날개가 두 손안에 잡히고 발버둥치지 못하게 들어 올리면 닭서리는 끝난다. 그는 이런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나 친구들은 실수하여 닭을 놓치고 주인에게 들켜 도망친 경우도 있었다.
수박서리는 비오는 밤이 제격이다. 가리개를 다 내려놓은 원두막엔 남포등이 걸려있지만 수박밭에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볼 수조차 없다. 오히려 밭에서는 원두막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동작이 그대로 불빛에 드러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수박서리를 하고 주인이 가까이 오기 전에 자루를 메고 도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훔쳐온 수박과 참외를 친구 집 벽장에 숨겨놓고 며칠씩이나 먹었다. 마을사람들은 그들이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의심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집집마다 감나무에는 잎은 다 떨어지고 붉은 감만 탐스럽게 달린다. 친구 B는 감 따는데 선수였다. 사람그림자가 훤히 보이는 달밤에도 감나무에 올라가 홍시를 가려 딸만큼 대담하고 여유가 있었다. 감 따러 가자는 암호를 그들은 ‘펄시먼’(감)으로 사용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놀이로 생각되었기에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마을의 구멍가게를 털기도 했다. 이들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같았다.
그러던 그가 마을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은 선한 삶을 살기위한 것도 구원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마을처녀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닌 것뿐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 교회 조사와 친해지면서 그와 친구들은 모두 함께 교회에 다니기로 했고 언제나 환영을 받았다.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인해 1년 뒤 세례를 받은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일학교 반사로 임명을 받았다. 일꾼들이 부족한 시골교회였기 때문이다. 그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자기를 가르치는 것과 같았다. 그는 가르치는 대로 생활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차츰 믿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믿음이 자라면서 유혹도 함께 그를 찾아왔다.
어느 겨울날 밤 그는 어머니 젖을 만지는 꿈을 꾸다 잠을 깼다. 그의 한쪽 발끝에는 처음 경험하는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한방에 자고 있던 열일곱살난 가정부 아이가 그의 발을 그녀의 젖가슴에 끌어다대고 있었다. 그는 겨울에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한방에서 함께 생활했고 얼마 전에 친척의 소개로 들어온 그녀도 발치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는 한창 사춘기에 인형이라도 안고 잠들고 싶은 여자아이들의 마음이라 생각하며 살며시 발을 빼냈다. 그 후에도 이따금 자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발이 그녀의 젖가슴에 닿아 있었고 그녀의 손은 살포시 그의 발을 감싸 쥐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잠버릇이 나쁘다고 생각할 뿐 마음을 다잡았다. 날이 밝으면 가정부 아이는 여전히 그에게 오빠, 오빠,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이듬해 봄에 그녀는 이웃마을 총각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고 말았다.
그는 군복무를 할 때도 많은 갈등을 했었다. 논산 훈련소의 훈련을 마치고 배치 받은 곳은 가까운 곳에 기차역이 있는 강원도의 한 부대였다. 부대 앞 골목길은 사창가였다. 군인들이 일요일 외출할 때면 팬티를 입지 않은 창녀들이 마루에서 하체를 드러내고 캉캉 춤을 추듯 치마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유혹했다. 전입 온지 얼마 안 되는 한 일등병은 주일날 교회에 가다가 그 집으로 끌려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유혹 속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며 기도했다. 제대 후에는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얻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그는 등짐지개를 지고 기도원을 나섰다. 원장에게만 읍내에 볼일이 있어 오후에는 좀 늦을 것이라 말하고 허락을 받았다. 거울 같은 저수지 수면에 흰 구름이 떠가고 교회당 앞 언덕에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와 민들레가 한결 정겹게 느껴졌다. 고향교회에서 친구동생과 함께 화단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던 기억이 새로웠다. 대용유리 틈새로 날아든 먼지가 교회당에 가득한 것을 반사들과 함께 청소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는 교회의 일을 할 때마다 수고한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말씀을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신앙에 손상을 가져오지 않는 일자리를 찾았고 갈등이 심해지면 그 자리를 떠났다.
이처럼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기도원을 다른 곳에서는 만나보지 못했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의 절경, 철따라 새 옷을 갈아입는 산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소금강산처럼 보였다. 봄이 오면 온 산은 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고 여름이면 울창한 신록의 싱그러움이 보는 이들에게 새 힘을 더해주었다. 가을이면 울긋불굿 단풍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겨울에는 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빙폭을 이루고 낙엽이 자욱이 깔린 산길은 많은 생각을 더하게 한다. 이제 무정산은 지난 날 발붙이기 힘들었던 가파른 굽이에도 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다. 마음만 먹으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르며 친할 수 있는 산으로, 기도원으로 다가섰다. 이 산의 이름이 ‘무정산’인 것은 아름답게 생긴 모양에 비해 무정하게도 접근성이 너무 어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가 처음 왔을 때만해도 기도원을 오르는 길은 구절양장에 비할 수 있었다. 그는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오르막길을 지개로 짐을 나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래도록 궁리해온 원장과 함께 뜻을 모아 우선은 찻길에서 산 턱밑까지 길을 닦았다. 마침 군청에서 소방도로를 내는 계획과 맞물려 뜻밖에 일은 수월했고 기도원까지는 시간을 30분이나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인해 기도원을 찾거나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차츰 늘어났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길은 여전히 가파르고 험난한 곳이 많았다. 그는 이 미끄럽고 가파른 길 요소요소에 돌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짐을 져 나르는 일보다는 계단을 만들고 길을 정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를 위해 원장도 그에게 총무부장이라는 직함을 주었고 짐 지는 것만으로 먹고 자고 일당을 받는 사람들과는 달리 일정한 월급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거의 매일 길을 정비하는 일에만 매달렸는데도 2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특별한 장비를 투입할 수도 없고 하나하나 삽과 곡괭이를 사용하는 수작업으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길 정비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그는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소방도로 끝 지점에 8평짜리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했다. 이때까지 국도변 찻길에서 조금씩 날라 오던 생필품을 차로 한꺼번에 실어다 컨테이너 박스 창고에 넣어두고 짐꾼들이 져 올리도록 한 것이다. 이제는 옛날처럼 차 시간에 맞추느라 쫓기거나 오래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어졌다. 장마철에 무너진 길을 보수하는 그를 볼 때마다 사람들은 고마움을 표했고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도 배나 더 늘어났다. 교회당을 짓는 것도 이와 때를 같이했다. 그의 성취감은 누구보다 더했다. 그밖에도 전기설비나 기도원 숙소 구석구석까지 손보는 일이며 철따라 채소를 경작하는 것도 그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다. 부품을 메어 올려 조립한 한 대뿐인 경운기를 운전하고 정비하는 것도 그의 손이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기도원의 필수요원이었고 한편으로는 기도원원장의 비서처럼 쓰임을 받았다. 이렇게 살아오는 동안 어느 듯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기게 되었으나 여전히 그는 짐꾼 홀아비로 살고 있다. 결혼을 위한 기도를 꾸준히 하고 그동안 여러 차례 선도 보았지만 응답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C집사는 이러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결혼 비법을 소개했다. 요즘 같으면 필리핀이나 베트남 아가씨를 어렵지 않게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이농현상과 함께 아가씨들이 대도시나 공단으로 몰려들었다. 때문에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노동력으로 생계를 꾸리는 총각들은 결혼하기가 몹시 어려운 실정이었다. C집사는 부모님의 농토를 이어받아 농사를 짓다가 결혼을 위해 도시로 나왔다. 마땅한 직장을 구하려 했으나 사무직은 더욱 어려웠다. 그는 고심 끝에 고정월급은 없지만 실적에 따라 수입이 오르는 출판사 책 외판원으로 들어갔다. 넥타이를 매고 출퇴근하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회사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C집사는 마침내 결혼작전에 성공했다. 아내가 속았다고 생각했을 때는 첫아이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C집사와 맞선을 보았던 아가씨는 친척회사의 경리사무원으로 있었다. 그녀는 선보는 자리에서 회사원이라는 C의 말만 믿고 결혼 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C집사는 머지않아 집을 장만하게 될 것이며 회사에서도 상사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C집사는 책 외판원의 말솜씨를 최대한 발휘하여 아가씨를 설득했다. 게다가 고전문학의 책제목을 들먹거리며 상당한 지식도 구비한 것처럼 보였으므로 결혼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곧이곧대로 바른말을 하면 요즘 세상에 되는 일이 없지. 결혼은 더욱 그래. 시골로 시집오겠다는 아가씨들은 눈 닦고 보아도 없어. 한마을에 사는 아가씨들도 도시로 몰려가는 판에······.’
그는 C집사의 말을 떠올렸다. C집사가 책 외판원을 그만두고 손을 댄 컴퓨터 대리점은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빚만 지고 말았다. 전망이 밝아 보인다는 대리점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컴퓨터에 대한 기초지식도 없는 그가 많은 돈을 보증금으로 내고 대리점을 열면서 받은 컴퓨터는 50%가 재고품이었다. 새로 개설된 대리점은 일종의 재고품 처리통로였다. 게다가 컴퓨터가 팔리지 않으니 6개월이나 1년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신제품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어떻게 하든 고비를 넘겨보려 했으나 대리점은 결국 부도가 나고 말았다. C집사는 아내가 친정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그 일을 해결하기까지 엘림 기도원에 피신해 있었다. C집사는 내일모레 40이 가까워오는 그를 보면서 결혼작전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꼭 결혼할 수 있도록 다짐하며 기도했다. 자기가 닦아놓은 산길을 내려가며 그는 모처럼 마음에 뿌듯함을 느꼈다.
산 아래로 펼쳐진 들판은 모내기를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누렇게 온통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다. 여기저기 들어선 공장건물들은 아름다운 농촌들판의 흠집처럼 보인다. 멀지않은 곳에 조성되는 농공단지 건설과 때를 같이하여 소규모 공장건물이나 창고건축은 어렵지 않게 허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수월한편이지만 오늘 그의 발걸음은 더욱 가볍고 기분도 최고조에 달했다. 비교적 기도원을 자주 찾는 한사람은 오르막길에서 기분 좋게 내려가는 그를 만나 ‘오늘은 뭐 좋은 일이 있습니까?’하고 인사했다. 십년 가까이 기도원의 일을 도맡아 하는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는 한 여인이 딸을 데리고 올라오는 것을 보며 오늘 선볼 아가씨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좋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복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C집사의 말을 떠올리면 맞선보는 자리의 차림새는 아무렇게나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가장 좋은 양복을 골라 입고 넥타이도 빨간 색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도로 종점에 놓여있는 컨테이너 박스는 생필품 창고이지만 한편으로는 원장과 그의 드레싱 룸을 겸하고 있었다. 한 칸짜리 옷장 안에는 원장의 투피스, 원피스를 비롯해 몇 벌의 외출복과 캐주얼웨어가 걸려있고 옷장 옆으로는 뾰족구두가 세 켤레나 놓여있었다. 원장도 외출할 때는 여기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화장을 고치고 나들이를 한다. 옷장 밖의 옷걸이에는 그의 춘추복 두벌이 걸려있다. 한 벌은 밝은 곤색이고 한 벌은 회색이다. 그는 사철 이 두벌 양복을 이용했다. 그러나 외출복 차림을 하기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정도이다. 이제는 친구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일도 없고 지난봄 돌아가신 외삼촌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회색 양복을 한번 입었을 뿐이었다. 윗저고리는 두벌 다 뒤쪽 가운데를 탄 것으로 유행이 지난 지 오래이다. 넥타이도 세 개밖에 없어 이것저것 고를 수도 없었다. 넥타이는 하늘색 바탕에 흰줄과 붉은 줄이 빗금으로 그어진 것을 매고 양복은 곤색이 어울릴 것 같았다. 그는 거울을 마주하여 미소를 지어보았다. 옷을 갈아입으니 자기가 보기에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수레를 끌어보지 않은 소에게 처음으로 멍에를 걸친 것 같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컨테이너 박스 안의 열기 때문에 그의 얼굴에는 금방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온몸이 젖는 것 같아 짧은 머리를 빗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노선버스정류소 까지는 15분은 걸어야했다. 가슴을 활짝 펴고 두 팔을 흔들며 시선은 약간 위로 향하고 미소를 지으며 뚜벅뚜벅 걸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간인데 다방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남자 두 사람이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아 굵은 음성으로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좀 더 안쪽 가리개가 세워진 자리에는 C집사와 아가씨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김 부장, 잘 계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C집사가 손을 들어 그를 부르며 그의 옆자리로 안내했다.
-집사님, 평안하셨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그는 C집사와 아가씨에게 번갈아 인사하며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아가씨도 다소곳이 고개 숙여 마주 인사를 했다. 양장점을 운영하는 아가씨는 C집사와 같은 교회 교인이며 어머니가 안 계신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홀아버지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꾸리며 나이는 29세였다. 그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아가씨의 외모였다. 선보기 전에 당사자들은 믿음만 좋으면 된다면서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인물을 먼저보고 여자는 상대방의 직업과 월수입에 신경을 쓰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산을 내려오면서 줄곧 생각했던 것처럼 아가씨는 되바라지지 않고 수수하게 복스런 인상이며 편안한 느낌을 주어 일단 안도했다.
C집사는 새삼스레 그에게 아가씨가 양장점을 운영하는 것과 가정형편을 소개하고 특히 믿음이 좋다는 점을 그에게 처음 말하듯 늘어놓았다. 아가씨에게는 김 부장이 기도원의 온갖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고 있으며 트럼펫을 잘 부는 것까지 자랑했다. 두 사람은 무슨 말부터 먼저 꺼내야 할지를 알지 못하고 C집사가 엮어가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레지가 가져온 석 잔의 커피에서 오르는 김이 창문으로 빗겨드는 가을 햇살에 짙은 아지랑이처럼 어우러지고 있었다. C집사는 훌훌 불면서 얼른 커피를 마시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가씨는 두 눈을 들어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길과 마주친 그녀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그에 대해 무언가 궁금한 점이 많아 보였다.
-오래전 어머님과 함께 엘림 기도원에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무척 가파르고 힘이 들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아가씨는 먼저 기도원 근황에 대해 물었다.
-예, 그때는 아마 길이 굉장히 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샌들을 신고도 오를 만큼 길이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기도원이 많지만 엘림 기도원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기도할 분위기가 좋은 곳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맞아요. 그 산 이름이 무정산이란 유래를 알고 있습니다. 경관이 빼어나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그 산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아마 이제는 유정산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라갈 수 있고 차를 가진 사람들은 소방도로 끝 지점에 주차를 하면 기도원 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이런 가을철에 오시면 더욱 좋지요.
-기도원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아가씨의 본격적인 질문 앞에 그는 잠시 망설였다. C집사가 설명한대로 사무적인 일을 책임지고 있다고 말할까, 아니면 그가 하는 일들을 사실대로 다 말할까? 일생을 함께 살아갈 사람을 맞이한다는 생각을 하니 답은 곧 나왔다. 결혼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거짓말을 꾸며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믿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이번에는 성공하고 말겠다는 다짐과는 달리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진실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는 기도원에 들어온 동기부터 시작해 길을 닦은 과정이며, 소방도로가 끝나는 자리에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한 것이며, 철따라 채소밭을 경작하는 것까지 자랑스럽게 다 털어놓았다. 그에게는 그런 생활이 딱 마음에 들었고 원장으로부터도 신임을 받고 있었다.
TV를 볼 수 없고 신문도 읽지 않은 기도원의 생활은 아가씨가 생각하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진실은 통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가씨는 그가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하루 일과 가운데 오전 오후 두 차례 생필품을 지개로 져 올리는 것, 특히 가정용 프로판가스는 1통에 8,000원 하지만 1개를 져 올리면 15,000원을 받는 다는 것도 말했다. 힘은 들어도 수입이 괜찮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으나 아가씨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더욱 아가씨의 기대를 빗겨가고 있었다.
이따금 엽차로 입술을 적시며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가씨는 무엇이 생각났다는 듯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설 빌미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자기 혼자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가 전화를 걸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가씨는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선생님, 죄송합니다. 오후에 서울 가는 분의 옷을 내드리는 것을 깜박 잊고 왔습니다.’ 말하며 대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전화번호를 교환하거나 다음에 만날 약속도 하지 못한 채 맞선은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 기도원을 향해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시계는 오후 2:30을 가리키고 있다. 컨테이너 박스까지는 그의 걸음으로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이지만 오늘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멀리서 바라보는 무정산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는 오랜 여행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그를 편히 대해줄 곳은 기도원밖에 없었다. 지난날에는 기도원보다 더 그를 편안하게 해주던 고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도 공단부지로 수용되면서 그는 완전히 고향을 떠났다. 최근 몇 년 동안에는 할머니의 안부조차 물어보지 못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을 다시는 찾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얀 길바닥에서 반사되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낙오된 한사람의 패잔병처럼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컨테이너 박스 앞에는 오전에는 없던 승용차 한대가 주차해 있다. 컨테이너 박스의 자물쇠를 따고 차려입었던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구두도 원장의 구두 옆에 가지런히 벗어놓았다. 마치 직장에서 퇴근해 돌아왔으나 아내가 없는 집에 들어선 것 같았다.
작업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컨테이너 박스 그늘에 기대앉았다. 일찍이 남편과 이혼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기도원을 이어받아 오늘까지 지켜오는 50대 후반의 원장의 모습이 잠시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직도 원장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젊어 보인다. 옛날 공사장에서 일하다 쉴 때 한 대씩 피우던 담배생각이 났다. 막걸리를 한잔 들이켜고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이미 오래전에 떨쳐버린 삶이다. 옛날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니, 그는 자신의 모습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는 일어나 프로판가스 1통을 지고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팠다. 계획대로라면 오후1시쯤에는 C집사를 다시 불러 세 사람이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다음 일을 의논하도록 되어있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게 힘들지 않게 져 올리던 가스통이 오늘은 천근같이 무거웠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몹시 숨이 찼다. 평소 때는 한두 차례 쉬면 기도원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몇 번이나 쉬는지 몰랐다.
남편의 주벽과 매를 견디지 못해 도망하다시피 기도원으로 피신하여 3년째 식당에서 봉사하는 김천 댁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모습도 참하지만 심성도 그만이었다. 남편에게 매를 많이 맞아 부드러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과년한 정신장애 딸을 데리고 올라와 딸이 온전해지기를 기도하며 주방장으로 일하는 S집사, 해가 바뀔 때마다 올해는 짐 지는 일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자주 말하는 H영감. 사연은 모르지만 H영감은 가족이 없다. 영감은 기도원에서 여생을 마치려 생각하면서도 짐을 지지 않고는 밥을 얻어먹을 수 없기에 필사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그가 이런 사정을 원장에게 건의하고 내년부터는 밭작물을 가꾸는 것을 영감에게 전담시키기로 했다. 병원에서도 손을 놓은 암환자 한사람은 두 달째 기도를 계속하고 있고, 매점 일을 보던 50대 후반의 H집사는 작년에 수술 받은 디스크가 재발하여 지난주간에 하산했다. 기도원이란 병든자, 가난한자, 실패자들이 몰려드는 곳. 그들은 마치 베데스다 못가에서 기약 없이 병 낫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같았다. 금년 봄에 새로 들어온 A군만이 장래의 꿈에 부풀어 있다. A군은 그가 하나님의 크신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며 처음 기도원에 올라왔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벼가 누렇게 익은 들판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그의 뒤로 산을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제 오후 늦게 기도원에 올라왔던 중년남자가 하산하는 것이었다. 그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하는 그 남자 뒤에는 A군이 빈 지개를 지고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아직 절반도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데 A군은 오후 일을 시작한 것이다.
-김 부장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점심때는 안보이던데요. 식사는 하셨어요?
A군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응, 원장님에게만 잠시 읍내에 볼일이 있다고 말씀드렸어.
그는 너무 오래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A군은 먼저 올라가시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기운이 좀 나는 듯했으나 얼마 못가 다시 나무그늘에 앉아 쉬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렇게 몸이 쳐지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결혼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날마다 짐 지는 기계처럼 살아야하는 자신이 초라하고 안쓰러웠다. C집사의 비법대로 거짓말을 꾸며대지 못한 것도 후회스러웠다. 그는 저수지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계곡 한쪽에 지개를 바쳐놓고 머리에 물을 뒤집어썼다. 확,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이제 기도원은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한 굽이만 돌면 우리 집이라 생각하니 서서히 마음이 평정되는 것 같았다. 저만치 아래쪽으로는 A군이 짐을 지고 올라오는 모습이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인다. 그는 신참인 A군에게 힘이 빠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기도원으로 들어왔다. 평소 때는 삶은 감자나 옥수수 빵으로 새참을 먹기도 하지만 그는 부엌으로 들어가 냉수만 한바가지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들었다. 어둑해서야 S집사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식당으로 갔다.
-김 부장, 볼일 보러 간 일은 잘 되었어?
H영감이 입을 열자 주방 식구들 모두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들은 오늘 아침 그의 거동으로 보아 선을 보러갔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원장도 김 부장의 짝을 찾아주어야겠다고 주방식구들에게 말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김 부장, 이따가 원장님 호출이셔.
원장 방으로 저녁상을 들고 갔던 S집사가 그에게 전해 주었다. 원장에게 다녀왔다는 인사도 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던 그는 식사를 끝내고 원장 방으로 갔다. 원장은 소파에 앉아 원두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커피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리모컨으로 TV를 끄고 나서 원장은 두 개의 찻잔에 커피를 따랐다. 어쩌다 한잔씩 얻어 마시는 커피 맛이 오늘은 그에게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아침에 갔던 일은 잘 되었어?
원장은 오후 늦게 C집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으나 내색은 않고 말을 꺼냈다.
-기도원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풀이 죽어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원장은 언젠가도 얼핏 그에게 뜻을 비친 적이 있기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김 부장, 열쇠는 언제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야. 오래도록 기도하며 생각했는데······, 김천 댁 있잖아. 여자 하고는 그런 사람은 없을 것 같아. 교양 있는 말씨며 행동 하나하나가 괜찮은 사람이야. 그가 우리기도원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아. 김 부장도 알겠지만 수요기도회 때 기도를 시키면 기도도 얼마나 은혜롭게 잘 하는지······.
-······.
그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잠자코 듣기만 했다.
-김천 댁을 우리 기도원으로 처음 인도한 분이 그 이듬해 남편이 끝내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왔었어. 그분의 요청에 따라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남편 소식을 알렸지만 김천 댁은 힘닿는데 까지 일하며 기도원에서 살고 싶다고 내게 다짐했지. 이젠 완전히 우리식구 잖아. 김 부장과 나이도 비슷하지? 김천 댁이 한 살 많은가, 적은가?
-······.
그는 김천 댁이 자기보다 한 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녀의 앳된 모습이 그보다 아래로 보였다. 3년 동안 함께 있어 왔지만 한눈팔지 않고 자기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그에게도 호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김 부장, 잘 생각해봐. 김천 댁은 내가 설득할 수 있으니까.
그는 낮에 희망다방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무례하게 자리를 떴던 아가씨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내 평생에 맞선을 보는 일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원장이 여러 가지를 종합해서 마침내 그에게 말을 꺼내 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가타부타 대답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원장이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길은 없을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이 불쌍했다.
-기도해보겠습니다.
애매한 대답을 하고 그는 방을 나왔다. 기도원의 밤은 적막했다. 교회당 쪽으로 나란히 보이는 기도원 숙소의 불빛은 유난히 따스해 보였다. 내일은 주일이다. 목회자들이 월요일을 기다리듯 한주동안 짐을 져 올리며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주일이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다. 평소 때 같으면 편안한 마음으로 뒷산 너럭바위에서 트럼펫을 부는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은 손가락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 그는 발걸음을 교회당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엔 대부분 하산하기에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강대상 앞쪽에 켜진 희미한 알전구 아래 S집사와 김천 댁이 한발쯤 거리를 띄워 나란히 앉아있다. 동편창문 쪽에는 암 투병환자가 시체처럼 납작하게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담요 한 장을 꺼내와 뒤집어쓰고 맨 뒤쪽 마룻바닥에 엎드렸다. 기도해야할 것이 너무도 많지만 마음뿐이었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기도원 식구들은 그렇게 모두 곤히 잠들고 있었다.
-2013년 <크리스천문학> 제21호-
첫댓글 목사님의기도원식구들이야기넘은혜롭고재미이있네요저사실기도원많이다니거던요동네가나안수양관요그곳도은혜로운곳입니다엘롬기도원한번가보고싶어요~~~♡.♡ 새해복많ㅇ받으시고늘건강하시길기도드립니다
박 집사님, 새해에 첨 뵙네요!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찾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길이지요.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