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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찬회(奉讚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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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 사찰제보 스크랩 광릉숲이 지척이라 더욱 마음이 갔던 `봉선사`
靑光 추천 1 조회 305 14.01.26 13: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릉 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봉선사랍니다
광릉에서 1.5km 떨어진 능안마을에 있는 이 절은
조선조 8대 예종이 선왕인 세종대왕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창건한 절입니다
그래서 대웅전의 현판도 한글로 '큰법당'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정희왕후가 세조를 추모하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서

89칸의 규모로 중창하고 봉선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절입니다
또 우리나라 신문학의 선구자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또 이 절에서 유명 연예인이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었답니다

여러 이야기가 있는 봉선사를 돌아보고 왔습니다.

 

 

 

 

일주문에 한글로 쓰인 현판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좌측으로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하는 곳이 있습니다

연꽃 축제로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요.

저는 그냥 지나쳐 봉선사로 향했습니다

 

또 봉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춘원 이광수의 이야기입니다

이광수와 봉선사의 인연은

독립운동가이신 봉선사의 운허 스님이 1946년 광동중학교를 설립하면서

친일 변절자로 낙인찍혀 갈 곳이 막막한 춘원 이광수에게

봉선사의 다경향실이라는 방에 기거하게 하였답니다

춘원은 그곳에 기거하면서 집필도 하고

잠깐이나마 광동중학교에 교사로 근무를 하도록 배려했다고 합니다

친일파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신문학의 개척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무정, 유정, 꿈'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봉선사에 가면 춘원 이광수의 기념비가 서 있답니다

저는 사진에 담지 않고 바라만 보고 왔습니다.

 

 

 

 

 

 봉선사 입구에 연못이 있어서 눈이 가고

연못 주변을 서성여 보고...

 

 

 

나무들이 울창한 길을 따라

한여름 봉선사의 풍경이 궁금해

봉선사 경내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절 입구에 우뚝 서 있더군요

 

 봉선사 느티나무의 유래

500여 년 전 세조의 비 정희왕후는 먼저 가신 선왕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절을 중창하고 절 이름도 운악사에서 봉선사로 고쳐 부르고

 절 입구 양지바른 곳에 느티나무 한그루를 정성스럽게 심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다치지 않고 자라고 있답니다

-안내문-

 

 

 

 

여기 봉선사에도 하마비가 있었습니다

봉선사 하마비는 1469년 조선 7대 왕 세조의 위패를 어실각에 모시고

중창 불사를 하면서 세워진 것으로

이곳을 지나는 정승, 판서도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답니다

 

 

 

 

 

봉선사 전경이 먼저 보이는 곳에 서자

오래된 절 같지 않게 새로운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정말 요즘 절을 가보면 그 오래전 고즈넉했던 산사의 모습은 찾기 어렵고

새로운 현대에 건축된 건물이 여기저기 많았습니다

 

 

 

 

봉선사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고 하였다.

그 뒤 조선 세종 때에 이전의 7종을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이 절을 혁파하였다가,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세조를 추모하여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라고 하였다.

 

당시 봉선사의 현판은 예종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 보물 제397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선사대종을 같은 해에 주조하였다고 한다.

 1551년(명종 6)에 이 절은 선교양종 중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어 전국의 승려 및 신도에 대한 교학진흥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으며, 이듬해인 1593년에 주지 낭혜가 중창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637년에 주지 계민이 중창하였으며,

1749년(영조 25)에는 재점이 중수하였다

 

또 1926년에는 주지 월초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중수하고 삼성각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1951년 3월 6일에 법당 등 14동 150칸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다.

그 뒤 1959년에 화엄이 범종각을 세운 데 이어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운경과 능허가 운하당을 세웠고,

1970년에는 주지 운허가 큰법당을 중건하고 1977년에는 월운이 영각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큰법당·삼성각·개건당·방적당·운하당·범종각·청풍루·요사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큰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한글현판을 단 것이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봉선사대종을 비롯하여 1903년에 그린 칠성탱화, 사찰 입구의 보운당부도 등이 있다.

그리고 큰법당 앞에는 1975년에 운허가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부처님 사리 1과를 봉안한 5층탑이 있으며,

1981년에는 운허의 부도탑을 세웠다. 이 밖에도 사찰 안에는 ‘춘원 이광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절 옆에 있는 광릉은 사적 제197호이며, 천연기념물 제197호인 크낙새가 주변 숲에 서식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출처-

 

 

 

 

 

 

 

  

 

  

큰 법당은

대웅전과 같은 법당으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한글현판을 단 것이랍니다

법당 사방 벽에는 한글 법화경과 한문 법화경을

동판에 새겨놓아 이채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봉선사 대종(보물 제397호)

이 종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몇 안되는 조선 전기의 동종으로

얘종원년(1469)에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건립할 때 함께 만들어졌다

이 종은 음통없이 두 마리의 용이 용뉴를 만들고 있고

띠 장식대를 한 종신을 갖추고 있어 외래적인 유형에 속한다

이 종은 음통이 없는 점, 종의 입구가 넓어지고 몸통에 두가닥의 띠를 넣은 점,

조각 수법이 통일신라 이후의 범종 양식을 따르지 않은점 등에서

조선 시대 범종 양식의 선례가 되는 작품이며,

조선 전기의 동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날씨가 흐려서 사진도 어둡게 찍히고

비가 올 것 같아 서둘러 내려왔습니다.

 

 

 

 

 

 

 

 

 

절을 내려오면서

다시 연못을 들러 돌아보고

잠시나마 마음을 풀어보았습니다

이곳 봉선사는 봄엔 화사한 꽃들로...

여름에는 연꽃으로

가을엔 예쁜 단풍으로,

겨울엔 설경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고 합니다

 

특히 봉선사는 광릉숲이 지척이라

가슴에 걸려드는 바람도

코끝에 걸리는 풋풋한 풀냄새도

연꽃 차의 향기도 맡을 수 있는 곳이라

언제고 달려가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시원한 하루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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