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행의 터를 빛내주신 관정 큰스님.
----굉혜(정우, 영월 망경산사 주지)
1) 도량불사의 지침을 주셨다.
관정 큰스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2001년 강원도 영월에서였다.
당시 나는 등인 스님과 함께
눈코 뜰 새 없이 도량불사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참선공간의 임법당과 스님들의 방사가 있는
복합 건물 한 동을 새로 지었는데
그 새 건물에 최초로 큰스님이 묵게 되었다.
우리와
평소 교류하는 다른 곳의 큰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큰스님 묵으실 방을 열심히 청소하였다.
큰스님을 맞이하는데
자기도 일조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며 매우 신심 나서
일하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새로 만든 수행공간에
첫 손님으로 큰스님을 모신 것에 대해
우리는 매우 특별한 의미로 생각하였다.
등원 스님이 나를 큰스님에게 소개하셨다.
“앞으로 이 절 주지가 될 사람입니다.”
내가 삼배를 올리자
나에게 절 한번 할 때마다
한 마디씩 덕담을 해주셨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당시 나보다 먼저 삼배를 올린
등인 스님에게 하신
말씀이 더 크게 메아리로 남아 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빨리 빨리 서두르십시오.”
다음날 큰스님은
우리들의 도량불사 터를 세심히 둘러보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라고 일일이 일러주셨다.
우선 새로운 사찰의 이름을 지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복안을 말씀드렸다.
수행대중스님들은
은둔과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아
울력을 일상화하며 검박한 생활을 유지하고,
건물도 매우 소박하게 지을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도량의 명칭에 대해서
큰스님의 고견을 청하였다.
우리의 수행 터전이 깃들고 있는
높은 산의 이름이 망경대산(望景臺山)이고
정상 옆의 크게 보이는 봉우리가
금화산(金華山)이라는
별도의 산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산 이름 등을 따서 몇 가지 안을 먼저 소개해 드렸다.
① 望景臺寺(망경대사), 望景大寺(망경대사), 望景寺(망경사)
② 金華寺(금화사), 金華精舍(금화정사), 金華禪院(금화선원)
③ 如來寺(여래사), 如來精舍(여래정사), 如來禪院(여래선원)
큰스님은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제시된 안이 아닌
‘망경산사(望景山寺)’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써 주셨다.
이로써 오늘날의 ‘망경산사’가 탄생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려서 앞으로 불사를 진행할 때
가람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큰스님의 의견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곳은 매우 큰 가람 터다.
너희들의 바람대로 은둔하며
소박하게 살며 도량을 작게 지을 곳이 아니다.
이곳은 건강도 이루고
수행도 함께 이룰 수 있는 매우 수승한 곳이다.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는 큰 도량이 될 것이다.”
그런데 20여년이 다되어가는 지금,
이 깊은 오지에 아스팔트도로가 정비되었고,
박물관이 들어서고, ‘산악자전거’ 코스 등
두루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관정 큰스님은
풍수지리에도 매우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등인스님의 수계
2002년 9월
큰스님은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갑자기 인천공항으로 입국하게 되어
강거사님과 등원 스님, 등인 스님은 서둘러
공항까지 마중 나가 망경산사로 모시고 오셨다.
망경산사에서 이틀 밤 머물고
다시 중국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이 때 뜻하지 않게
등인 스님에게 수계를 하시게 되었다.
수계 날 대중스님들보다
일찍이 법당에 나오셔서 우릴 기다리셨던
큰스님께서는
등인 스님에게만 계를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한 마리 거대한 용에게도 계를 주셨다고 해서
우리 모두 크게 놀랐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 방문에는
다른 일정이 하나도 없었고 오로지
등인 스님에게 수계만 하시고
강릉 백운사만 들리셨다 곧바로 출국하셨다.
그런데 큰스님은 제자
등인 스님에게 수계한 것에 대해 아주 만족해 하셨다.
“내가 아주 훌륭한 제자에게 수계하였다.
이제 안심이 된다!”
통역을 하는 강거사에게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도
등인 스님을 제자로 삼고 난 뒤
큰스님은 매우 달라져 보였다.
이미 법명을
큰 연꽃이란 뜻을 가진
굉련(宏蓮)이라고 받으셨는데,
한국에 오시면 아주 기분 좋은 소리로
“홍롄(중국식 발음), 홍롄”이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힘이 있었다.
앞전에 뵈었을 때는
늘 약간 구부정하시고 피곤하여
힘들어하시는 모습이었는데,
등인스님한테 수계한 이후에는
마치 젊음을 되찾은 것처럼 활발하게 보였다.
피로가 없어지고, 밝고 가벼워졌으며,
눈에서도 활기찬 빛이 났다.
그래서 내가
주위 스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큰스님은 마치 고시합격 통지 받은 사람 같다!”
3) 망경산사 관정 큰스님 친견법회
2002년 봄에
망경산사는 개산대재법회를 성대히 열었다.
당시 스님들이 많이 오셨고,
군수님을 비롯하여 지역사회 인사와
원근지역에서 오신 불자님들이 도량을 메웠다.
그해 10월,
관정법사님 초청 선지식 친견법회가 열렸다.
벌써부터 관정 큰스님과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큰 법회가 가능했다.
이 때 법회에서 큰스님은 법문을 하시고,
또 천도재도 하시고 불자님들을 위하여 마
정수기도 해주셨는데 3일간이나 계속되는 행사였고,
이때도 많은 신도들이 참석하였다.
서울에서 영취사 신도들이 관광버스로 왔고,
영월지역 신도들도 많이 참석하였으며,
인근 부대의 군인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이때 스님들을 비롯하여
신도 분들이 100여명 가까이 마정수기를 받았다.
그 가운데 인상 깊은 스님은
건봉사에서 오신 만오(晩悟) 노스님이었다.
일생 염불수행을 하신
만오 스님은 특별히 큰스님을 뵙기 위해
최전방 휴전선 근방의 건봉사에서 영월까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시며 오셔서
큰스님을 친견하시고 큰 환희심을 가지고 돌아가셨다.
관정 큰스님께서도
만오 노스님에게 특별히 격려해 주셨다.
“극락세계에
스님의 커다란 연꽃이 이미 피어나 있습니다.
그날 만오 노스님은
한 불자님의 수고로 특별히
건봉사까지 모셔다드릴 수 있었고,
훗날 종로3가 비원 앞 아미타사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열 때
특별 초청법사로 모시게 된 인연이 되었다.
법회가 온전히 끝나고
망경산사 대중스님들은
관정 큰스님께 절을 올리며
그날 들어온 불전을 전부 전해드렸다.
당시 불전도 많이 들어와 큰스님도 매우 놀라셨다.
4) 서울 인사동 ‘여래선원’ 과 관정 큰스님
등인 스님을 비롯한 우리 몇명은 명상을 하면서
동시에 참선을 했기 때문에
서울 인사동에 따로 법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래선원’이라 하고 함께 수행하는
도반들과 아는 스님들이 무상출입하였다.
이런 이유로 관정 큰스님께서도
자연스레 여래선원에 들리셨고,
보리향 보살님의 시주로 새로 모신
고불부처님 점안식까지 해 주셨다.
여래선원은 관정 큰스님께서
자유로이 왕래하시며 머무셨고,
우린 최선을 다하여 모셨다.
관정 큰스님께서
자주 머무시다 보니 입소문을 듣고
꽤 많은 불자님들이 친견하러 모여들었고,
그때마다 큰스님은
마정수기를 베풀고, 소참법문도 해 주셨다.
또 스님들이나 재가불자님들의 요청으로 천
도재도 자주 하시게 되었다.
특히 2003~2004년 2년간은
서울에 오시면 이곳에 머무시는 시간이 많았고,
여래선원에 계시면서 지방에 일정이 생기면
지방에 다녀오시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 때 관정 큰스님을
대중스님들과 함께 모시면서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큰스님께서 직접 주재하시는 천도재 의식은
천도하는 대상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떤 때는 아주 일찍 끝난다.
그것은 영가를 불러와 앞에 앉히는 작업에서
시간 차이가 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큰스님은
영가가 나올 때까지 다라니를 계속 외우신다.
어떤 때는 영가에게 꾸지람을 주시기도 하였다.
영가가 온 이후에야
유족에게 잔을 올리고 절 하도록 하신다.
만일 다른 곳에서 하는 식으로
영가가 좌정하기도 전에
잔을 올리고 절하면 안타까이 여기신다.
한 보살님이
북한에 두고 온 가족 2명의 천도재를 모시게 되었다.
이 보살님은 이별한 지 50년이 넘어
가족의 생사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제사를 모셔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날은
이상하게 영가를 부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영가가 한 사람은 와서 천도를 했는데,
한 사람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여
큰스님에게 그 연유를 여쭈어 보았다.
“죽었더라도 이미 극락에 갔거나,
아니면 아직 살아있으면 오지 않는다.”
한 번은 천도재를
아주 빨리 끝낸 사람이 있어 여쭈어보았다
“이 영가는 비구니 스님들이
옆에서 많이 도왔기 때문에 쉬웠다.
끝나고 들어보니
이 보살은 한마음선원을 다녔는데,
그 절에서 재만 있으면 계속 재를 올리고,
자신의 조상뿐만 아니라 남의 재에도 참석하여
영가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기도를 받고
천도된 영가들이 모두 와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한 번은
재미동포 한 사람이 자신의 장성한 자녀가
신기가 많은 것을 걱정하며 큰스님께 상담하였다.
“당신의 따님에게는
수행하던 사람의 영가가 빙의되어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내가
그 영가를 천도하여
따님으로부터 떼어내 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실한 불자가 되겠습니까?”
큰스님이 출국하시고 나서도
나는 거의 한 달간 천도재 하는 꿈이 계속 되었다.
큰스님을 모시고
열심히 천도재 일을 도와드리며 기도했더니
나의 업장도 많이 소멸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스님과의 법연으로
나는 큰스님을 뵈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럴 때면 중국에서 홍거사를 통해서
큰스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하였다.
여래선원을 출입한 불자님들은
안국선원에 나가시는 한순남 보살님을 비롯하여
위강원 한의원 전병롱 거사님이나
변호사 박병규 거사님 같은 많은 염불인들이
관정 큰스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고 인연을 맺었다.
큰스님은
여래선원에서 계시면서 편히 쉬시지도 못하셨다.
하루도 쉬시지 않고 찾아오는 많은 불자님들 때문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