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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9월23주일 수요일많은 과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요15:1-8)
저의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과수원을..6000평정도 했습니다
주로 복숭아자두 감 밤나무 등등...다양한 농사와 과수원을 했습니다
해마다 봄이면 과수원집에서 자면서 일하셨고 ...가을농사가 끝나면 본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어떤날은 아버지의 얼굴에 수심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을 어린 저의 눈으로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수고는 너무 많이 했는데 거두는 것이 별로 없을 때 농부의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물론 ....어쩌다 벌레도 별로 없고, 비도 적절하게 잘 와주고, 햇살도 좋고 해서 온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면 아버지는 논둑에 앉아서 알알이 속이 차가는 이삭을 어루만지며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시곤 했습니다.
오늘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이와 같은 농부로 비유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에서 가장 많이 농사하던 품목은 포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은 포도나무로,.... 하나님은 포도나무를 가꾸고 재배하는 농부로...., 제자들과 예수 믿는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 비유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주님께서 이와 같은 비유를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비유의.말씀대로... 하나님이 농부이시라면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
많은 소출을 얻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마다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농부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 머물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하고 고백함으로 구원 얻기만 하면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것도 소원 중의 하나지만, 낳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이 생깁니다.
아무리 무남독녀 5대손 독자라고 할지라도 애를 낳기 전에는 자식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바라지만 일단 낳고 나면 ....
보다 중요한 것은...그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다음 더 큰 소원을 하나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붙어 있다고 하면서 잎만 무성한 가지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무성한 잎을 사방으로 뻗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주인으로 하여금 쉬게 만드는 그런 가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풍성한 수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두 송이 열매 맺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더 많은 과실을 거두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더 많이 맺게 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라는 말은 헬라어로 ‘플레이오나’(pleiona)인데, 영어의 ‘more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단순한 과실에 있지 않고, 더 많은 과실에 있습니다.
또 5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여기서 ’많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폴룬‘(polun)인데, 영어의 ’much‘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7절 역시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많은 과실을 맺기 원하는 것은 바로 농부의 심정입니다.
죽어라 농사를 지어 놓고 반타작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농부 되신 하나님도 우리가 많은 과실을 맺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 하는 그런 기초적인 신앙 고백을 하는 것으로 절대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 각 사람은 풍성한 소출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포도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무슨 과실을 맺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떤 과실을 맺어야할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과실은 무엇일까?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인격과 그를 따르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과실이다. 성경에 보면 전도의 열매를 과실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과실이라고 하고, 가난한 자를 위해 헌금하는 것도 과실이라고 합니다.
특히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는 특별히 인격의 성숙을 일컬어 과실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격을 성숙시키는 요소들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닮아 우리 인격이 성숙해 가는 것을 일컬어서 과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서 13장15절 같은 경우에는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의 삶을 일컬어서 과실, 또는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이냐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붙어 있는 포도나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포도를 열기 마련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나무라고 한다면 우리의 열매는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 나무는 예수 열매를 맺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과실이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닮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격과 삶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이 과실이라는 말입니다.
포도나무가 포도를 맺는 것 같이.... 예수 나무는 예수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8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닮은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주님을 닮은 사람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고민해야 합니다.
과연 내 인격이 주님을 얼마만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닮은 것이 많다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실 텐데, 과연 나는 얼마나 주님을 따르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농부가 포도송이가 많이 맺힌 포도나무를 보고 즐거워하듯이 하나님께서도 나를 보고 즐거워하실 텐데, 과연 나에게 그런 과실이 있는가? 이 시간 여러분도 고민하면서 자신을 돌이켜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격과 삶을 보고너, 예수를 많이 닮아가는구나.
정말 과실이 많은 포도나무 같구나. 놀랍도다. 하고 만족하실 수 있다면 할렐루야지요.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
예수를 10년 믿어도 자식들 눈에 전혀 달라진 무엇이 보이지 않는 부모,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어도 부부끼리 서로 쳐다 볼 때 존경할 만한 무엇이 보이지 않는 관계, 이웃 사람들이 볼 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 줄은 알지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특별한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너나 나나 똑같다.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 만약에 이와 같은 삶을 산다면 많은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슬퍼하실 까요?
오늘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입만 무성한 포도나무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것 같이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열매 하나 찾기 어려운 그런 허울 좋은 교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프게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나를 보실 때 과연 주님이 만족할 만한 열매가 있나?
내가 주님을 만족하게 할 만한,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크고작은열매가있나?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면 열매를 위해 농부는 가지를 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마다 포도농사를 하는 농부는 그 포도나무가 과실을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치기를 합니다
농부는 포도나무 하나 하나를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손으로 들어보고 살펴본 다음에 죽은 가지는 사정없이 잘라냅니다.
그 다음에 앞으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 가지도 잘라냅니다. 심지어 조금 나와 있는 순을 보고도 어떤 순은 떼어 내버립니다.
여러분...왜 죽은 가지를 잘라 주어야 합니까?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병균이 득실득실하게 되어 나중에는 건강한 나무까지 못쓰게 만들기 때문에 사전에 잘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가지의 순을 다 떼어버립니까?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면 나중에 다른 가지들이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자양분까지도 전부 도둑질해 가버리기 때문에 사전에 다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 전지를 하십니다.
필요없는 교만 이기심등등...잘라버려야 열매를 맺읍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제해 버리시는 것과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죽은 가지나 전혀 소망이 없는 가지를 잘라버리십니다.
그러면 우리 중에 누가 죽은 나무 가지입니까?
누구를 놓고 죽은 나무 가지라고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 때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다가 배신한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죽은 가지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가룟 유다를 잘라버리셨듯이 그런 사람도 교회에서 잘라버리신다고 해석합니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보이는 나무 가지는 또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건성으로 다니는 사람이 바로 그런 가지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사람은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것만 보면 구원받은 것이 틀림이 없는 것 같은데, 그 인격과 삶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다움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돈에 대한 애착은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다.
욕심이 머리끝까지 차 있어서,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면 좋겠는데 움켜쥐고 만 앉아 있습니다.
이기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 자기생각 밖에 모르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없는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일찌감치 전지를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려는 것은 죽은 가지가 누구며, 열매 맺지 못할 가지가 누구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무 가지를 깨끗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나무 가지를 깨끗하게 하실까요?
과실을 안 맺는 가지를 더 맺게 하기 위해 깨끗하게 하실까요?
아니면 과실을 맺는 가지를 더 깨끗하게 하실까요?
과실을 맺는 가지입니다.
주님은 이 과실을 맺는 가지를 놓고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하나님은 제자들을 과실을 맺는 가지로 보시고 그들을 이미 말씀으로 깨끗케 해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는 우리도 산 가지로 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서 구원해 주신 너무나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 각 사람을 죽은 가지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과실을 맺는 가지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조금만 손질해 주시면 풍성한 과실이 열릴 수 있는 가지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은 과실을 맺도록 하게 위해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깨끗케 하실 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을 듣고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도 깨끗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또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영의 양식으로 허락하셔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교훈 하십니다.
그 말씀으로 책망하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위로하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잘못된 것을 수정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깨닫지 못한 비밀한 은혜를 깨닫고 기뻐하게 하십니다. 우리 영혼을 소생하게 만드십니다.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성령을 통해서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면서 긴 시간동안 설교를 귀담아 들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으로 여러분을 교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속에 잘 담으면 우리 인격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많은 열매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또 하나는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기분 나쁜 이야기지만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9절.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안타깝게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보면 가끔 매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매를 안 맞고 잘하면 좋겠는데, 그게 안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매를 자주 맞는 자식이 잘되는 일이 많습니다.
나는 저 놈 키울 때 큰 소리 한번 안쳤다. 하는 식으로 너무 고분고분 키우게 되면 부모 마음은 좀 편할지 모르지만 나중에 키워 놓으니까 매가리가 없습니다.
매도 맞고, 뺨도 맞고, 욕도 먹어가면서 든든하게 자란 자녀는 어디에 갖다가 놓아도 쉽게 굴복하지 않는데, 나쁜 말 한번 안 듣고 온상에서 곱게만 자라다보니 너무 약해져서 나중에는 군대가서 ...탈영하고 자살하고......무슨 심한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쩔쩔 매고 정신을 못 차리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보면 믿음이 좋고, 강한 분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두들겨 맞은 경력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아주 헌신적입니다.
두들겨 맞으면서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징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기 위해서는 징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부모가 조금만 잘못해도 매를 들고 와서 때리는 이런 부모는 무섭지 않습니다. 한대 맞아주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년이 가도 매 한번 안 들던 아버지가 한번 화가 나서 매를 들었다 하면 그때는 종아리가 터집니다.
하나님도 그런 아버지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침에 잘못한 것을 가지고 점심 때 때리고, 점심 때 잘못한 것을 가지고 저녁 때 징계하는 그런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가만히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훈 하시고 책망하시면서 계속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듣고 빗나가고 고집스럽게 저항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때리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이 잘못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식을 잃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징계를 잘 받고 나면 하나님도 좋고 우리도 좋습니다.
우리가 과실을 풍성히 맺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는 예수를 10년 믿어도 징계를 받아 본 일이 없습니다. 너무너무 재밌고 행복해요. 너무너무 잘돼요. 예수님 믿는 게 너무너무 행복한데 징계가 다 뭡니까?
오죽이 잘못했으면 징계를 받아요? 하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정말 너무 잘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런 식으로 대우해 주셨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참 많은데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면 심각하게 질문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가 없는 사생아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경우에 따라서는 징계도 하시면서 우리에게 있는 죽은 가지,..곧 열매 안 맺는 가지들을 다추려내 버리심니다
그래야 포도송이를 맺을 수 있는가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냐?
내가 징계를 받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는 분이 계시면 집에 돌아가셔서 조용히 묵상하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좋고, 나 좋으려고 그런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징계가 절대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 거하라
한가지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과실을 원하시면서도 우리보고 과실을 맺으라.고 명령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전부 읽어보십시오. 너, 과실을 많이 맺으라. 하는 명령이 기록된 곳이 한 군데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과실은 자연스럽게 맺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절로 맺는다고 하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그렇습니다.
가지가 자기 스스로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일은 나무가 다 해줍니다.
흙에서부터 영양분과 수분을 끌어올려 가지에게 충분히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가지는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과실을 맺으려고 몸부림 칠 필요가 없습니다.
과실을 맺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선해 보려고 해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과실을 많이 맺으라고 하시지 않고, 내 안에 거하라는 명령만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문 1절부터 10절까지를 보면 안에 거한다는 말씀이 10번 정도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4절이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 말씀을 거꾸로 바꾸어서 읽으면....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되어지는 현상이지만,...... 내가 예수 안에 거하는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은 제게 이렇게 반문하실 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자동적으로 예수님 안에 있지 않습니까?
옳은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구원자와 구원받은 사람의 관계 안에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이미 예수님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태어나서 호적상 그 집의 아들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집의 식구처럼 살려고 하면 호적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가족 관계를 위해 특별히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노릇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관계로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관계를 토대로 예수 안에 거하기를 노력하는 우리 자신의 노릇 수고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거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생명 되신 그리스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따라 우리는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삶이란 예수님을 마음 문 밖에 세워놓고 사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주님과 아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간섭 받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둡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삶은 그 반대의 삶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어 들이고 그분과 더불어서 먹고 마시는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삶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삶입니다.
유대 나라는 손님을 함부로 식탁에 초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식탁에 초대를 받으면 그것을 굉장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식탁은 단지 배를 채우는 장소라기보다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랑과 존경을 주고받고, 서로가 즐거워하는 장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마시는 삶이요,
마음을 터놓고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면서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요, 예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 안에 사는 삶을 살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까?
본문 7절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서 내 말과 구하라는 말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는 쉽게 말해... 말씀과... 기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본문 7절의 의미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5절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똑 같은 사실에 대해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그렇다면 7절도 마땅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내가너희 안에 거하면.그래야 말이 되는데, 이상하게도 7절에 가서는 내가가 내 말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내가 예수 안에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손에 잡히고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영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내가 그분을 모시고 있다, 내가 그분 안에 있다.고 말해도 어떤 면에서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끝나기 쉽습니다.
잘못하면 놓치기 쉬운 것이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손에 들고 있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묵상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동적으로 예수 안에 거하면서 주님과 깊은 영교(靈交)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머리에 담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입술에 담고 지내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큐티 노트에 기록해 놓고 있으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풍성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는 삶은 예수 안에 있는 삶이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순교자였던 본 훼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언제나 당신의 가슴에 울려야 하고 당신의 생활 속에 날마다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당신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말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자의 말은 따지고 분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거나 따지려 하지 말고, 다만 그 말씀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 되어 우리를 튼튼하게 세워 줄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인격과 삶의 과실들이 절로 맺힐 것입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를 보는 자마다와,정말 다르다.
하고 말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무엇이든지의 기도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동시에 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기도입니다.
7절을 보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면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기도가 왜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뒤이어 나올까요? 여기에 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억지로 해야 될 때도 많이 있지만, 자연스럽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면서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기 시작하면 말문이 열립니다.
기도가 터진다는 말입니다.
그 기도는 어떤 것만 구할 수 있는 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는 그런 기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서로 만나면 처음에는 정도 안들고 누군지도 잘 모르니까 말을 할 때도 참 신경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이 말을 해도 될까? 이 말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면서 할 말, 안 할 말 가려가며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습니까?
서로를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불편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남이 깊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지 않습니까? 사랑에 빠지고 나면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가지고 이리 재어보고 저리 재어보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지껄이는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두 사람이 만나면 걸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즐겁고 좋습니다.
그래서 듣고만 있지 않고 서로가 거리낌없이 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 하면 우리 마음의 소원대로, 욕심대로 다 털어놓는 그런 기도를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수준 높은 무엇이든지의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을 마음으로 묵상하고 살아 계신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 사랑에 흠뻑 젖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부담 없이 아뢸 수 있는 기도로 발전을 합니다.
무엇이든지의 기도는 바로 이와 같은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려면 이런 기도를 해야 됩니다.
신앙 생활은 삭막한 사막이 아닙니다.
신앙 생활은 뒤에서 매를 가지고 때리니까, 훈련을 시키니까
할수 없이 기도하고 또 성경 읽는, 피곤하기 그지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피곤한 것이 신앙 생활이라면 오래 가기가 힘들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행복하고 재미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다가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 거리낌없이 내놓고 기도할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깊은 생명의 교류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고 자양분을 공급받습니다.
모든 필요한 지혜를 얻습니다. 생명이 유지되고 과실을 맺기에 꼭 있어야 될 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전부 공급받습니다.
그러므로 휘청거리지 않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주님과 깊이 교제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공급받기 때문에 비록 생활이 조금 쪼들린다 해도 그것 때문에 오만상을 찌푸리고 하루종일 불평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안에 뿌리를 깊게 내리라
아이작 뉴턴이라는 유명한 과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망원경으로 수백만 마일 떨어진 우주 공간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망원경을 옆에 내려놓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채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망원경을 다 동원해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천상의 것들을 더 많이 볼수있으며 하나님에게도 더 가까이 나갈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절로 되는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명령을 하셨겠습니까?
명령을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결단하고 노력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안에 거하기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각오를 하고 행동에 옮겨야 됩니다.
주안에 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고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그 일을 방해하는 일들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어린애를 엄마 품에서 떼어내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는 마치 생명이 끊어지는 것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아우성을 치면서 엄마 옷자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 아이의 생명 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를 놓치면 죽는 것처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엄마를 안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이와같은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기를 사모한다면 왜 우리가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놓는 것처럼 살겠습니까? 왜 우리가 열매가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처량한 포도나무가 되겠느냐 그 말입니다. 결단해야 됩니다.
엄마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나무되신 예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풍성한 과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생명의 원천이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지혜의 보화가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풀고도 남음이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에게 이와 같은 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왜 그분에게 가시지 않습니까?
왜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습니까?
런던에 있는 어느 왕궁에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얼마 전에 그 포도나무가 2천 송이가 넘는 포도송이를 맺어 장안에 화제가 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이 와서 조사를 해본 결과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템즈강이 흐르고 있는데 포도나무 뿌리가 계속 뻗어 나간 결과 그 해에는 강바닥까지 그 뿌리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뿌리가 강바닥에 있는 좋은 영양분을 전부 싹싹 긁어모아 가지고 포도나무에다 공급하자 가지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박고 있으면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의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 해답을 주십니다.
우리의 난제들을 주님이 때를 따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의 인격과 삶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과실들이 주렁주렁 열리도록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8절을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내가 과실을 많이 맺을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하나님이 날 보고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소원을 가지고 삽시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내가 과실을 많이 맺어야 되겠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삶을 좀더 적극적으로 살아야 되겠다.’하는 각오를 가지고 한 주간 동안 순종하시고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