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대전시 동구 이사동은 유교 한옥촌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남부순환 도로가 나기 전인 1990년대 의 이사동은
동요인 고향의 봄 배경에 맞을 만한 시골마을 이었다
위치는 대전 시민이 성인이 되면 한번쯤은 찾았을
산내 면허시장을 지나는 다리를 건너 고구마 줄기 처럼 뻗은
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3키로 정도 걸어 들어가면 출기 끝에 달린 고구처럼 생긴
동그란 마을을 볼 수 있는데 이 마을이 바로 이사동이다
고구마 줄기 끝에 달린 조용하고 아늑한 이사동에서 6년간을 살았다.
이사동6년 살이는 행운이 손짓하여 만나게 된 아내와 연애시절에
둘이서 호젓한 시골길 따라 걷자며 느리게 걷기시작한 길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우연히 옥계동 마을 뒷쪽으로 이어진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니
길끝에 동요속 마을 같이 아름다운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옆쪽 시루봉 가는 기슭에서 걸음을 쉬기로 하고 아름드리 상수리 나무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자연스럽게 아래로 보이는 기와집들의
살림살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한나절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가족들과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5년후 은진송씨들의 집성촌인 이사동에
비어 있는 집을 수리해 사는 조건으로 전세를 얻어살게 되었다.
살아 보니 좋은 것이 불편 하고 불편한것이 좋은 것으로 바뀌어져
사람이 살아 간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는 께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시내 보다 3도 정도 차이가나는 온도는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에는 매섭게 추웠다
전기 조명이 별로 없어 캄캄한 밤에는 어두울 수 록 잘보이는 파란색 별빛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밤이 깊어지면 병원구급차와 경찰순찰차의 출동 싸이렌 소리 대신 목청높은 개구리들의 합창이 밤새도록 울렸다.
사랑방에는 겨울에 나무로 불을 지펴 구들을 데워서 뜨끈뜨끈 하게 몸을 녹일수 있었서 좋았으나
제재소에서 장작을 구해 도끼로 패고 톱으로 자르고 하는 수고로움을 감수 해야 했다.
통닭집이 멀리 떨어져 있어 40분정도 기다려야 했으나 통닭을 기다리는 어린자식들에게
빨간휴지 파란휴지나 도께비 방망이 같은 옛날 이야기를 경험자 처럼 들려 줄 수 있어 좋았다.
봄 겨울 할것 없이 자연이 주는 이사동의 아름다운 풍경은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움이었다.
봄이 시작되는 사월의 마을입구 에는
아름드리 수양버들 서너그루가 냇가에서 춤추고 있고
마을 뒷산인 오도산에서는 애기 손바닦 크기로 자라기 시작하는 연두색
나무잎과 붓으로 쿡쿡 찍어 누른듯한 분홍빛 개복숭아꽃이 곳곳에 피어나
아름답기 가 글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하는 어린딸을 앞세워 동네 이집저집 호구 조사를 다녀보니
검정기와 집들 안에는 모두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고
어김없이 널따란 꽃밭을 예쁘게 가꾸고 있었다.
꽃밭 옆에는 빠짐 없이 주인의 남다른 개성으로 지어인 개집이 있었고
일년에 한두번 개장수가 들어 와 개팔라고 외치는 소리가 마을에 울려 퍼질때면
동네 개들이 항의라도 하듯이 한꺼번에 짖어 대기도 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맑은 물길을 따라 윗쪽으로 올라 가면 작은 저수지가
있는데 오도산에서 바로 흘러 들어 오는 물이라 시원하기가 손이 시릴정도며서
더위를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면 훌러덩 옷을 벗고 수영을 즐길 수 도 있었다.
들어오는 길은 있어도 나가는 길이 따로 없다보니
마을을 돌아 나가는 야채판매 트럭 외에는 마을을 찾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간혹 켄버스들고와 그림 그리는 낮선 사람은 귀빈을 보는듯 반가울 정도인 조용한곳 이기도 하였다.
봄에는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냉이와 쑥을케고
가을에는 알밤과 홍씨를 줏으로 다녔던 기억은 가족 모두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절은 자식을 품고 살아 갈 때가 아닌가 싶다
대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네 이사동 그곳에서 자식들을 품고 살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