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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8월 24일 토요일 맑음. 30℃,➂
과거 성 요한 기사단장의 궁(Grand master palace)이자 현재는 몰타의 대통령 집무실 맞은 편은 성 조지(St. George)광장이다. 뒤에는 성 알버트 대학이 이어진다. 발레타 구시가에 있는 광장중에서 가장 크다.
분수대가 있고 공연 무대다 설치되어있다. 잉글랜드의 수호 성자인 성 조지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봐서, 기사단 시절에도 광장은 있었지만 영국 점령 시기에 이름이 바뀌었나 보다.
성 조지는 초기 기독교의 성자인 게오르기우스를 말한다. 정교회와 가톨릭 그리고 성공회 루터교 등 기독교의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성인이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서양 기독교 문명에서 널리 전파되어 여러 나라에서 남자 이름에 많이 사용한다.
영어로는 조지, 프랑스어는 조루주, 이탈리아어는 조르지오, 독일어는 게오르크, 스페인어로는 호르헤, 그리스어로는 요르고스 등이 모두 성 게오르기우스에서 나왔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상징은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 문양인데 월드컵 때마다 눈에 보이는 잉글랜드의 국기가 여기에서 나왔다.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 여러 도시의 수호성자이기도 하다.
로마 제국의 군인이었기에 기사, 군인, 보이스카우트 등의 수호성자이기도 하다. 성 게오르기우스를 알아보기는 매우 쉽다. 갑옷으로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탄 기사가 긴 창으로 용과 싸우고 있으면 성 게오르기우스이다.
여기엔 유명한 전설이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가 어느 나라를 지나다 용의 제물로 바쳐지는 여인을 만났다. 그동안 어린 양을 용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양이 부족해지자 드디어 사람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는다면 용을 처치하겠다고 했다. 마침내 용이 나타나자 게오르기우스는 창으로 용을 찔러 죽였다.
이에 감동해 왕을 비롯해 그 나라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르브닉 성내에서도 본 기억이 있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동상이나 조각 그리고 그림은 유럽의 구시가의 광장이나 성당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광장의 이름이 성 조지이니 광장의 중심이나 구석에 당연히 성 조지의 동상이나 조각이 서 있어야 하는데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광장의 이름은 지우지 못했지만, 동상은 치웠나 보다.
대신에 세테 주뇨(Sette Giugno) 기념비가 있다. Sette Giugno (이탈리아어로 "6 월 7 일"에서 유래)는 매년 6 월 7 일에 기념되는 몰타 국경일이다.
1919 년 몰타 인구의 일련의 폭동에 이어 영국군이 군중에게 발포하여 4 명이 사망 한 그날에 일어난 사건을 기념한다. 폭리를 취하는 상인과 식민지 정부에 대항하는 봉기를 기리기 위해 몰타 독립을 향한 첫 걸음으로 간주된다.
삼면으로 광장을 둘러싼 바로크 양식의 건물은 각각 기사단의 보물(Treasury) 창고와 중앙 경비대, 그리고 경비대 숙소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여러 차례 용도가 바뀌면서 지금은 이탈리아 문화센터로 사용된다.
그늘진 골목길로 잠시 들어서보니 시원하다. 테라스에 빨래들이 주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성 조지 광장이 있는 공화국 거리(Republic st)에서 옆으로 한 블록을 가면 유명한 해협 거리(Strait st.)가 나온다.
영어 단어 스트레이트(Strait)는 해협(海峽)이다. 좁다는 뜻도 있다. 발레타의 구시가 거리는 폭이 그리 넓지 않지만 스트레이트 거리는 더욱 좁다. 건장한 남자 서 넛이 들어서면 길이 막힐 정도이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해협 거리인가보다. 이렇게 좁은 골목이 유명한 이유는 과거 이곳이 몰타 바깥에서 유명했던 홍등가였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디나 항구도시는 외지 선원들이 출입하기 마련이다.
거친 바다에서 돌아와 몰타의 발레타에 하선한 선원들은 술과 장미를 찾아 좁은 스트레이트 거리로 몰려들었다. 과거에는 홍등가로 유명했다.
그러나 오래 방치되었던 스트레이트 거리는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거치며 근래엔 힙(hip)한 분위기의 바와 카페가 숨어있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인파로 붐비는 공화국 거리의 한 블록 옆인데도 스트레이트 거리에 가면 상대적으로 한적하다. 숨어있는 듯한 골목이라 아는 사람이 아니면 찾지 않는다. 발레타에는 영국과 아이리쉬 펍이 많다.
몰타에 남겨진 영국의 유산 중 하나다. 스트레이트 거리에서 나와 발레타의 재래시장(Food market)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유럽 어느 도시나 도심에 있는 재래시장은 현지의 풍물과 식자재를 구경하기에도 좋고, 다양한 음식을 파는 푸드코트가 있어 한 끼를 해결하기도 좋다.
영어로는 발레타 마켓 또는 시티 마켓이지만 몰타어로는 ‘Is-Suq tal-Belt’이다. 아랍어로 시장을 수크(Souq)라고 한다. 기독교 문명의 기사단 이전에 지배했던 아랍 이슬람의 영향이 몰타어에 남아 있음을 다시 실감한다.
발레타의 시장은 여느 유럽 도시의 식품 시장처럼 실내 시장이다. 시장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에는 다양한 식자재 상과 슈퍼마켓이 있고 지상층에는 디귿 자 모양으로 벽면을 따라 다양한 푸드코트가 있다.
푸드코트엔 몰타 음식과 유럽 음식 외에도 인도, 중동 그리고 필리핀 음식점이 많다. 유럽의 항구도시를 다니다 보면 가끔 필리핀 음식점을 발견한다. 인력 수출이 외화 획득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필리핀 경제구조로 인해, 필리핀 여성들도 역시 많기 때문이다.
키프러스 섬이 생각난다. 중심도로로 나온다. 성 엘모 요새로 공화국 거리는 계속 이어진다. 마차도 지나간다. 걷는이들이 많은데 무척 덥다. 거리가 미끄러워 반들반들거린다. 엘모 요새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두었다.
시계 방향으로 걸어간다. 바다 건너 요새와 이어진 등대가 보인다. Ricasoli Lighthouse, 리카솔리 요새에 있는 등대다. 포트 리카 솔리 (몰타어 : Forti Rikażli)는 1670 년에서 1698 년 사이에 세인트 존 교단에 의해 지어진 몰타 칼 카라의 요새다.
절벽길을 걸어간다. 그늘이 없다. 수영하는 이들이 보인다. 바위 암벽 해변이다. 로어 바라카 가든 방향으로 올라간다. 우리가 고조섬으로 내일 갈 때 탈 배의 선착장이 보인다. Lower Barrakka Gardensdp 올라섰다.
가든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추모의 종(Siege Bell War Memorial)이 걸린 거대한 종각과 그 곁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한 남자의 조각상이 있다. 추모의 종이다. 세인트크리스토퍼 보루(바스티온 Bastion)에 세워져 있다.
세계 2차 대전 몰타 공반전(1940-1943) 중 희생당한 몰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몰타는 지중해 군사 요충지다. 추축국(독일과 이탈리아)의 포위, 공격 및 폭격에도 연합국이 승리한 전투다.
당시 군인과 시민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 수만 채가 파괴되었다. 이 종은 1992년 몰타의 조지 십자장 수상 50주년을 맞아 엘리자베스 2세가 제막했다.
추모의 종 옆에 있는 거대한 청동 와상은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졌다. 청동 기념물 하단 동판에는 영국 시인 로렌스 비니언(Laurence Binyon 1869-1943)의 "추락한 자를 위하여"(For the Fallen)의 싯구가 적혀 있다.
"At the going down of the sun and in the morning we will remember them"(해가 질 때 그리고 아침에 우리는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로어 바라카 가든이다. 몰타 발레타의 공공 정원으로 같은 도시의 Upper Barrakka Gardens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정원에서는 그랜드 하버(Grand Harbour)와 방파제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볼 (Alexander Ball) 제독 기념비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정원 중앙에 위치한 신고전주의 사원 형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는 몰타의 시민 위원을 역임 한 왕립 해군 장교이자 식민지 행정관이었다. 또한 테라스 공간에는 1956년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주세페 가리발디, 유럽 연합 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기념판이 있다.
조각가 우고 아타르디(Ugo Attardi)의 작품 Enea동상도 있다. 바다가 보여 좋다. 꽃나무와 팜유, 대추야자도 보인다. 아치도 있다. 어퍼 공원이 보인다. 모여있는 사람들이 아주 작게 보인다. 12시다.
대포소리가 들리고 이내 하얀 연기가 구름처럼 올라간다. 공원을 나와 도심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바울의 동상을 발견했다. San Pawl Nawfragu, 몰타의 2월 10일은 법정 공휴일이다. 바울의 날이다.
몰타에서는 San Pawl Nawfragu라고 한다. 바울은 몰타의 수호성인이다. AD60sus 바울이 몰타에서 나파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바울은 현대 터키의 아드라뭇데오에서 출항한 배에 죄수로 로마에 이송되고 있었다.
여행중 폭풍으로 배가 손상되어 몰타에 좌초되었다. 섬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바울이 불을 피울 때 독사에 물렸는데도 그 지역 사람들은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후 바울은 섬 관리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고쳤다. 그 후 많은 섬 사람들이 고침을 받기위해 바울에게 왔다. 바울은 겨울 3개월 동안 몰타에 머물렀다고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다. 동상에는 뱀과 불꽃이 있다. 반갑고 기쁘다.
골목길을 올라간다. 중앙 중심도로를 가로질러 간다. 과일 노점상이 보인다. 신앙의 신비로움(MYSTEIZIUM FIDEI)이 적혀있는 간판이 있는 교회가 있다. 전망애에 서서 다시 바다를 본다.
몰타는 강화도 크기와 비슷한 정도로 크지 않지만, 섬 전체가 바위산이라고 할 정도로 지형이 험준하다. 그러다 보니 몰타 여행을 소개한 블로그나 후기를 보면, 대부분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위주이다.
몰타의 역사, 동상, 건물, 구호 기사단의 역사를 모르면 몰타 여행을 다녀와도 가장 중요한 것은 못 보고 지나친 셈이다. 물론 그것도 틀렸거나 나쁜 여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행의 방식은 각자 다른 것이니까.
단지, 몰타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여행 전 십자군 전쟁과 기사단에 관한 영화나 책자를 보고 읽어보고 알아봐야겠다. 몰타 여행이 훨씬 더 풍부해지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이해의 폭이 더 깊어진다.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좀 지친다. 성직자이자 정치활동가인 몰타의 애국자 던 미키엘 제리(Fr Michael Xerri, 1737 – 1799)의 기념비가 있다. 안톤 아기우스의 작품이다.
Anton Agius (1933-2008)는 몰타 주변에 많은 기념물을 만든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몰타 조각가다. 그는 전 몰타 대통령 Ugo Mifsud Bonnici에 의해 "국가 조각가"라고 불렸다.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s Pro-Cathedral)에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세인트 폴의 프로 대성당 및 대학 교회로, 몰타 발레타의 독립 광장에 위치한 유럽 교구의 성공회 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은 19세기 몰타를 방문한 애들레이드 여왕이 섬에 성공회 예배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의뢰했다. 이에 앞서 성공회 예배는 그랜드 마스터 궁전의 한 방에서 열렸다.
Auberge d' Allemagne (독일 기사단 Hospitaller의 수도원 집) 부지에 지어진이 대성당은 William Scamp가 설계했으며 1839 년에서 1844 년 사이에 지어졌다.
애들레이드 여왕은 1839년 3월 20일 주춧돌을 놓았고 그녀의 깃발은 성가대 가판대 위에 걸려 있다. 60m 이상 솟아오른 첨탑으로 인해 발레타의 랜드마크인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몰타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골목 그늘진 계단에 앉아서 잠시 쉰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 좋다. 건너편 슬리에마 신도시 지역이 다 보인다. 광장에서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 1613- 1699)의 동상이 있다.
그 는 이탈리아와 몰타에서 일한 이탈리아 바로크 예술가다. 그는 성 요한 교단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성 요한 교단에서 은총의 기사가 된 그는 1659년 몰타에 있는 기사단 본부를 방문하고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Preti는 세례 요한 (1661-1666)의 삶과 순교에 관한 거대한 일련의 그림으로 발레타의 성 요한 대성당 내부를 변화시켰다. 몰타에서는 개인 소장품과 교구 교회에서 Preti의 많은 그림을 찾을 수 있다.
선착장으로 걸어서, 돌아서, 내려간다.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그늘에 모여있다. 배를 타고 건너간다. 아직 오후 2시가 되지 않아서 슬리에마 시내에 있는 자라 패션 옷가게로 들어갔다. 매장이 크다.
옷 보다도 시원한 에어컨이 있어 좋았다. 작은 가게에서 물 2L 하나을 샀다(2.1유로 3,150원). 좀 비싸다. 숙소로 걸어간다. 숙소는 4층 건물의 아파트 비슷한 팬션이다. 간판도 주인도 없다. 문을 밀고 들어간다.
탁자 위에 열쇄와 방번호가 에약자 이름과 함께 올려져 있다. 가족이 운영하는 숙소인데 작고 에쁜 식당도 있다. 깔끔하고 깨끗한 실내 분위기다. 413호실이다.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전기포터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켰다.
전기 타는 냄새가 나더니 전기가 모두 나가버렸다. 전기 고장이다.(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우리 포터가 120볼트로 미국에서 사용했는데, 여기는 220볼트로 스위치를 바꾸지 않아 타버린 것이다)
다른 방은 불이 들어왔는데 우리 방은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주인 부부가 와서 413호 실로 방을 바꿔 주었다. 우리 포터는 어떻게 불이 들어와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한다.
여행을 출발해 처음 누워보는 침대다. 두 밤을 눕지 못하고 노숙을 한 셈이다. 피곤하고 졸린다. 무리하지 말리로 다짐을 하고 숙소에서 쉰다. 날이 길고 밤이 길다. 이렇게 몰타에서의 하루를 보낸다.
8월 24일 경비-버스비 6유로, 배값 왕복 7.6유로, 피자 2조각 3.5유로, 커피 3.65유로, 물 2L 2.1유로, 숙박비 127,000원, 계161,275원. 누계164,95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