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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海師全이 僞書인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Ⅲ. 歷代轉理歌에 現代的 口訣이 나타난다.
歷代轉理歌는 고려 恭愍王 20년(1371년)에 왕의 失政을 바로 잡기 위해 申得淸이 지어 올린 것으로 原本은 漢字, 吐는 吏讀로 표현되어 있다. 歷代轉理歌는 역대 帝王의 흥망성쇠와 승패의 원인 및 결과를 4.4조의 歌辭体로 엮어 누가 보아도 알기 쉽도록 지었다. 특히 고대 중국의 傑王 이하 亡國을 초래한 중국 왕조의 事蹟을 예로 들어 정치를 올바르게 하도록 건의하는 한편 佛敎에 너무 심취하지 말고 儒敎로서 王道政治를 이루어야 한다는 심정을 구구절절이 읊고 있다. 漢文에 吏讀를 섞어 표기한 歷代轉理歌는 한글이 창제된 조선조 들어 范承洛이 한글로 자연스럽게 吐를 달아 成三問⋅朴彭年에게 보여 改作하였다고 하며 조선 端宗 때의 기록인 <華海師全>에 남아 있다. 이 歌辭가 僞作인지 여부에 대해 學者들 간에 見解가 엇갈리고 있다.
1.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華海師全 〈문학해제〉
(華海師全)고려의 申得淸이 1371년(공민왕 20)에 지었다는 노래이다. 傑紂와 진시황을 포함한 중국 역사상 임금들의 학정과 실정을 읊어 임금 스스로 경계하게 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랫말은 ≪華海師全≫ 卷6에 수록되어 있다. 跋의 내용을 보면 이 책은 1860년(철종 11)에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책이 僞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이 책의 간행시기는 물론 <歷代轉理歌>의 작자, 창작 시기 등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歷代轉理歌>의 노랫말은 ‘史榮庫 無三日奴무일노’, ‘佛經閣 刀也難古되얏난고’와 같이 한자와 한글이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데, 한글 부분은 쌍행으로 하여 우선 우리말 부분의 음에 해당하는 한자를 적고 그 옆에 한글로 음을 적어 놓았다. 이때 우리말 부분을 적은 한자는 전통적인 구결의 차자 표기에 사용되었던 ‘爲也야’, ‘爲多다’, ‘爲古고’, ‘爲尼니’, ‘-奴로’, ‘-乙을’, ‘-矣의’, ‘-隱은’, ‘-臥와’ 등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無三무/무삼’, ‘馬乙三말’, ‘活齊졔’와 같이 음만을 빌려 적은 것이다.
한글 표기에서는 ‘馬乙말을’, ‘烽火들어’와 같이 분철 표기가 활발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難伊난이’, ‘刀也難矣되야난의’와 같은 과도분철 표기도 나타난다. <奎 12393>에서는 ‘말를’과 같은 중철 표기도 나타나지만 이러한 표기는 드물다.
한편 일사본에서는 우리말을 적은 한자가 ‘活齊/割齊’(졔)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한글 표기에서도 ‘ ’와 ‘ㅏ’가 혼동되어 평서법 어미가 ‘-/다’, 연결어미 ‘-다가’가 ‘-다가/다’, 의문어미 ‘-ㄴ가’가 ‘-ㄴ가/ㄴ’로 모두 나타난다. 이에 비해 <奎 12393>에서는 이러한 혼동이 적다.
여기의 한글 표기에는 ‘造欣죠흔’, ‘造他조타’와 같이 구개음화가 반영된 표기가 나타나며 ‘無三무삼’, ‘爲隱문’ 등에서 원순모음화를 반영한 표기도 찾아 볼 수 있다. 문법적인 측면에서는 우선 ‘傳世無窮 爲狎時古압시고’를 주목할 수 있다. 이때의 ‘-압-’은 ‘--’의 변화형을 표기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객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청자를 높이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那刀南南刀乃可刀也’의 한글 표기인 ‘나도 남남도 가 되야’에서 주격조사 ‘-가’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寄奴草色劉宋 日世일셰’에서 감탄형 ‘-ㄹ셰/ㄹ세’도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이 노랫말이 적어도 19세기, 오히려 그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인 20세기의 국어를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장윤희)
2. <歷代轉理歌>와 形成期의 歌辭文學 考(이임수 교수 論文 引用)
국문학계에서는 초기에 <역대전리가〉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나옹의 이두체 필사본 〈승원가〉가 발견된 이후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이상보, 정병욱, 이동영, 최강현, 조동일, 박을수, 류연석, 필자 등)들이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나옹이 주로 포교에 힘쓴 것은 이 때(1369년)부터 입적한 1376년 사이로 생각된다. 1360년에 원나라에서 귀국하였으니 나옹의 가사 <승원가> 나 <서왕가>의 창작년대는 1360년을 앞서지 않고, 왕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1365년 이후이거나 회암사 주지를 맡은 1369년에서 열반한 1376년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신득청의 <역대전리가> 창작 년대는 1371년이라 기록되어 있음으로 보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들 작품이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두로 기록되어 전하는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 후대의 이두표기가 첨가되었다고 하더라도 18세기 염불보권문 등의 문헌에 정착된 <서왕가>보다는 더 원형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승원가>는 1971년 김종우 박사가 부산 동래에 거주하는 조혁제씨 집에서 가보로 전해지는 이두체 필사본을 발견하여 학계에 발표한 가사작품이다.
고려말에 발생한 형성기의 가사는 1행 2음보 중심의 시가 형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 조선시대 가사는 시조문학의 형식과 같은 1행 4음보로 구성되나 발생기의 형식은 1행 2음보 중심의 반복인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형성기의 초기가사인 이 세 작품에서 의미구분으로 행을 나누었을 때 1행이 2음보만으로 독립되어 있거나 1행이 4음보 보다 긴 6음보로 의미단락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대전리가>는 의미단락이 1행 4음보로 끊어지지 않기에 4음보를 기준으로 행 구분을 하기가 어렵고, 1행이 3음보만으로 구성된 곳도 적지 않기 때문에 1행 2음보(또는 3음보)로 정리함이 옳다.
이두로 기록된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는 공통적으로 1행 3음보의 파격이 꽤나 많이 나타난다. 나옹의 <승원가>에는 9회, 신득청의<역대전리가>에는 7회나 3음보의 형태가 나타나는데, 역대전리가의 결사부분도 3음보로 보거나 차사(嗟詞)가 붙은 3음보로 볼 수 있다. 구전되다가 후대 18세기에 정착된 <서왕가>에는 3음보가 두 곳밖에 없으나 4자 한문에 조사가 붙은 5자의 형태가 10여회 이상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는 1행이 4음보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초기가사에는 1행 4음보의 행의식도 없었고, 앞뒤행의 대비의식도 분명하지 않았으며 시조 종장과 같은 결사 형식도 완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華海師全의 <역대전리가>와 예주세록의 <역대전리가>는 모두 후대의 이두나 음운이 첨가되어 기록되어 있다. 다만 경상도 방언이 다수 발견되어 이들 작품이 신득청이나 나옹의 창작임을 반증하기도 한다. 예주세록의 이두가 전체적으로 더 일관성 있게 기록된 데 비해, 華海師全의 이두는 예주세록의 이두보다 더 많은 경상도 음운을 가지고 있다. 이는 華海師全의 기록이 더 원형에 가까운 영덕지방의 어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니(爲尼)’의 경상도 방언어미가 ‘하이(漢而,爲而)’이고, ‘보니(本尼)’, ‘오니(溫尼)’, ‘으니(於尼)’의 방언어미는 ‘보이(本而)’, ‘오이(五以)’, ‘어이(於以)’이다. 이러한 경상도 음운형태는 나옹의 <승원가>에서도 ‘하이(何而)’, ‘시이(是以)’, ‘나이(羅而)’ 등의 이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서왕가>에서 ‘후리치고’, ‘자부리라’, ‘시무시소(심으소서)’ 등의 몇 개 어휘만 보이는데 비해 이두로 전하는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서는 대단히 많은 경상도 방언이 발견된다. <승원가>에는 경상도 방언이 너무 많아 일부만 여기에 인용하였다. <승원가>는 필사본이 부산에서 발견되었고 분량도 길기에 경상방언이 많다고 할 수도 있으나 충청도 비인현에서 간행된 華海師全의 <역대전리가>에서도 다수의 경상도 방언이 발견됨은 이들 작품의 작자가 모두 영덕지방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증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歷代轉理歌>에 나타난 口訣에 대하여(朴炳采 敎授 論文 引用)
<歷代轉理歌>는 諺吐에 들어나는 表記法上의 混亂으로 보아 英․正祖 時代를 더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듯하다. 華海師全은 板本이 많아 그것 自體가 後代의 僞作이라는 說이 있는 모양이나 確固한 證據는 없다. 따라서 諺吐는 後代에 많은 添削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口訣은 종래 吏讀의 發達過程에서 漢文의 原典을 읽음에 있어 그 文意를 돕기 위하여 漢字의 吏讀式 用法을 적용하여 高麗朝에서 發達한 것이며 이는 漢文의 順序는 그대로 두고 讀誦의 便宜를 위하여 國語의 關係詞나 動詞 등 漢文句節의 段落을 짓는데 사용되어 왔고 小數字의 借用으로 充分한 매우 簡潔한 借字法으로 알려져 왔다.
1973년 충남 서산 文殊寺에서 14세기 初葉 刊行으로 推定되는 <舊譯仁王經>의 出現으로 口訣에 대한 새로운 여러 가지 問題點이 解明되고 있다. 이와 같은 事實은 종래의 口訣에 대한 見解가 15세기 以後 儒學經典 資料에만 依存했기 때문에 鄕札에 이어지는 吏讀, 吏讀와 竝行한 口訣이라는 觀念이 一般化되었던 터에 이 믿을만한 새로운 實證的 資料가 發見됨으로써 過去 疑惑에 쌓였던 文獻的 記錄이나 口訣 自體의 새로운 면이 硏究되기 시작한 것은 多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佛書 뿐만 아니라 經書에서도 適用된 事實이 밝혀진다면 더욱 喜消息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佛敎는 信仰이요, 宗敎이므로 說法上 漢譯佛典을 읽음에 있어 어떻게 原典의 內容을 해치지 않면서도 우리말의 文章構造에 맞추어 理解하기 쉽게 읽을 수 있느냐 하는 問題는 切實한 慾求였으리라는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方便이 바로 <舊譯仁王經>에서 보여주는 訓讀口訣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訓讀口訣法은 從來 알려진 音讀口訣法과 함께 일찍이 發達하여 倂用되었던 것 같다.
이에 反하여 儒書一般에서 보여주는 音讀口訣은 儒學經典의 正統性과 學習上 讀誦의 必要性에서 訓讀에서 오는 原典換置의 混亂을 피하기 위해서 佛典에서 使用된 訓讀口訣을 人爲的으로 排除하고 制限된 音讀口訣만을 使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이후의 儒敎經典에서 보여준 이제까지의 口訣은 이와 같은 事實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歷代轉理歌>에서 보여주는 口訣은 이제까지의 儒書一般에서 보여 준 音讀口訣과는 또 다른 面을 보여주는 것이 注目의 對象이 된다. 그것은 音讀口訣을 使用하되 佛典에서 使用된 訓讀口訣에 해당하는 懸吐法을 音讀口訣化하여 訓讀으로 寄生文章化하는 式의 特異한 口訣方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作品이 僞作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첫째 <歷代轉理歌>가 실려져 있는 <華海師全>이 朝鮮 末에 작성된 僞書가 아닌가 하는 점, 둘째 口訣에 현대적 의미가 나타난다는 점, 셋째 高麗 末에 발생한 형성기의 歌辭는 1행 2음보 중심의 詩歌 형식인데 이 歌辭는 1행 4음보로 구성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모습이 보인다 라는 점이다.
僞作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첫째 <華海師全> 발견 직후에 여러 筆寫本이 있고 또 몇 종류의 印刷本도 있는데 諺吐의 내용이 相異한 점이 있음을 미루어 보아 後代에 많은 添削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諺吐에 현대적 의미가 나타난다고 하여 이러한 사항을 僞作의 根據로 보기 어렵다는 점, 둘째 形式上으로는 1行 4音譜로 보이나 內容上으로는 1行 2音譜가 主軸을 이루고 있다는 점, 셋째 경상도 方言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이 작품이 申得淸 創作임을 反證할 수 있다는 점. 넷째 고려시대 佛典 일반에서는 訓讀口訣을 사용하여 왔고 조선시대 儒書 일반에서는 音讀口訣을 사용하여 왔는데 이 <歷代轉理歌>는 訓讀口訣에 해당하는 懸吐法을 音讀口訣化하여 訓讀으로 寄生文章化하는 式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僞作으로는 보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종래에는 <歷代轉理歌>를 僞作으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았는데 최근 <舊譯仁王經>와 <僧元歌> 出現 이후 고려말기에 쓰여진 歌辭로 보고 있는 학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趨勢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 <歷代轉理歌>가 현대에 쓰여진 僞作이므로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華海師全>이 僞書이므로 이 작품도 僞作이라고 한다. <華海師全>이 僞書인지는 많은 歷史學者 또는 東洋哲學을 연구한 學者 등 이 分野에 정통한 學者의 檢證이 필요하다.
Ⅳ. 編纂過程을 記述한 元天錫의 跋文에 矛盾이 보인다.
<華海師全>을 검색해 보면 ‘편찬과정을 기술한 元天錫의 跋文에 모순 보이고, 책명이 『話東人物叢記』『話東記』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卷數에도 차이가 있다.’ 라는 文句가 보인다. 跋文의 矛盾이 무엇인지에 대해 言及되어 있지 않아 무엇을 指稱하는지 알 수 없고 卷數의 차이도 무엇과 무엇을 比較하였는지 알 수 없다. 긴 名稱을 줄여서 간단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問題가 되지 않으므로 僞書의 根據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 元天錫의 跋文에 矛盾이 보인다.
跋文의 矛盾이 무엇인지 그 根據를 確認하지 못했다. 일부에서 主張하고 있는 바와 같이 <華海師全>이 <話東記>이므로 이 책 안에 元天錫의 <華海師全>에 대한 跋文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인지 이 跋文에 范伏厓가 <話東記>를 著述한 것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話東記>의 跋文을 적으면서 <話東記>라는 冊名을 言及하는 것은 理致에 맞지 않다는 뜻인지 잘 알 수 없다. <華海師全>을 <話東記>와 동일한 책으로 볼 경우에는 그러한 主張이 成立될 수 있다. 그러나 <華海師全>을 <話東記>로 보는 것은 어디에 根據하는지 알 수 없다.
<華海師全> 元耘谷居義 편에 의하면 華海師全은 元友와 함께 찾아 모은 것을 編輯해서 元友에게 전했더니 元友가 나의 <話東記>를 합쳐서 한 本으로 만들고 두 帙의 책으로 편집하여 한 帙은 自家에 藏守하고 한 帙은 나에게 전하면서 “대략 한 帙만 만들어서 守傳하는 것은 후일에 혹시나 甚한 일을 만나게 되어 保全하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있을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므로 이에 두 帙을 만들어 한 帙은 자네에게 傳하고 한 帙은 나에게 두노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范伏厓는 “元友의 評論을 元友가 編輯한 책의 끝에 씀으로 해서 後日에 師全(華海師全을 지칭하는 것 같음)을 編輯한 주인이 있었다는 것을 提示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公正하게 하기 위함이요 그 사사로운 것은 아니니 싫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元耘谷은 <華海師全>에 대한 跋尾를 作成하였고 이 跋尾 이전까지는 麗末에 누군가에 의해 作成된 것임을 알 수 있고 <華海師全> 3차 發行시 鄭夢周가 冊名을 定한 <華海師全>에 해당된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이외에도 元天錫, 范世東, 范承洛 등이 追錄한 몇 편을 포함하고 있다. <話東記>와는 한 本을 構成하고 있지만 명백히 區分된다.
2. <話東人物叢記>라는 冊名이 다르게 나타난다.
元耘谷은 <華海師全> 跋尾에서 范伏厓가 작성하는 책을 ‘話東記’라고 하고 있고 范伏厓도 元耘谷居義에서 ‘話東記’라고 하고 있으나 范承洛은 歷代轉理歌誌說에서 “내가 曾祖父(范伏厓)의 話東記史를 숨겨서 保管하고 있는데 항상 한가할 때 가만히 내어서 보니 高麗 때 申先生 理猷軒께서 歷代를 두고 부르신 노래라.” 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서는 ‘話東記史’라고 하고 있다.
또 范氏家 所藏本의 冊名은 <話東人物叢記>로 되어있고 ‘天順戊寅二月 漢城往十里 移記 曾孫 錫熙(承洛)’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後記에 의하면 ‘范承洛 先生이 危險을 피하여 漢陽에 숨는 등 곡절이 많았으며 原本을 찾아 죽음을 각오하고 천리 漢陽으로 갔으나 이를 返還 받지 못했다. 다만 筆寫를 許諾 받고 謄寫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本書는 范錫熙(范承洛) 先生의 筆寫本이다.’ 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話東人物叢記>는 范承洛의 筆寫本임을 알 수 있다.
<話東人物叢記>는 卷1에서 東方 儒學의 淵源을 싣고 있고 卷2에서는 後王誥忠情史, 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申伯淸上疏文, 文貞公不喧齋家狀跋 卷3에서는 箕子가 東方으로 건너온 이후 統一新羅까지 人道를 행한 人物을 기록하고 있다.
<華海師全>의 最初 出現은 몇 가지 說이 있으나 1852년 出現이 가장 信憑性 있다. 당시 많은 筆寫本이 나돌았다고 하고 또 1855년 道會가 무산되고 난후 1873년 以後에도 申秉玉이가 가지고 온 필사본을 盈德과 靑松지방에서 後孫들이 베꼈다고 하고 있어 이 筆寫本은 집안에 傳達되는 것으로 內容이 疏略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손집안에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推定되는 不諠齋先生事實 등 諱 贒에 관한 여러 가지 文獻들이 보이고 있다. 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는 筆寫本과는 그 編制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栗里祠에서 발간한 木版本이 <華海師全>에 대한 最初의 印刷本인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申贒의 後孫이 集團 世居하고 있는 盈德, 靑松지방에 刊所가 設置되지 않고 申贒의 傍孫이 集團 世居하고 있는 湖西地方의 栗里祠에 刊所가 設置되고 이 책의 序文을 작성한 李穡의 後孫인 李明稙은 申賢의 後孫인 世休와 必熙를 請하여 考訂에 참여시킨다고 하고 있어 栗里祠에도 <華海師全> 底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底本이 1873년 盈德과 靑松지역의 後孫에게 전래한 <華海師全>필사본이라 할 경우 왜 이 책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疑問을 提示할 수 있다. 추측하건데 栗里祠에는 1852년에서 1855년 사이 筆寫한 底本이 있었고 申賢 집안에 있는 1873년 筆寫本을 參酌하여 1920년 木版華海師全이 出版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奎章閣 保管 筆寫本은 언제의 필사본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852년에서 1855년 사이 필사본이라면 筆寫者의 筆寫에 따른 차이를 排除할 경우 現存하는 <華海師全> 중에서 가장 原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奎章閣 保管 筆寫本의 目次는 卷1 本朝奏對, 元主問答, 卷2 明朝奏對, 簡齋笏書奏對, 卷3 備耗, 出處, 卷4 諸子問答, 言行, 家範, 跋尾, 卷5 諸子拾遺, 世獻, 卷6 繼述, 元耘谷居義, 卷7 東方淵源, 附錄으로 麗季事로 4책 7권 15편 1부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構成은 卷1 本朝奏對, 元主問答, 卷2 明朝奏對(簡齋笏書), 卷3 備耗, 出處, 卷4 諸子問答, 家範(跋尾), 卷5 師全繼辭, 家學(恭愍朝辛亥冬理猷軒做歷代轉理歌諷獻), 東陽世獻, 卷6 諸子拾遺(元耘谷居義) 卷7 東方淵源錄, 附錄으로 麗末事(王在江華禑江陵昌後王誥忠情辭, 王薨于江華江陵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臣申伯淸上疏, 言志錄, 歷代轉理歌誌說)으로 4책 7권 12편 1부록으로 되어 있다.
여러 가지 資料를 참고해 보면 卷4의 跋尾 이전까지는 高麗 末期에 쓰여진 鄭夢周가 命名한 華海師全임을 알 수 있으며 권5에서 권7까지는 朝鮮 初期에 元耘谷, 范伏厓, 范承洛 등에 의해 作成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정몽주가 命名한 華海師全(권1~권4), 元天錫은 跋尾에서 ‘先生 및 一門의 弟兄과 子孫, 宗堂을 極盡히 대하고 선생의 威風을 潤澤하게 하여 몇 편을 著述한다.’ 라고 하고 있어 卷5를, 卷6의 諸子拾遺는 본래 元耘谷 선생의 글인데 1460년 前後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元耘谷 선생이 전부를 기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元耘谷居義는 范世東 선생이 작성한다.
권7의 東方淵源錄은 특이하게 題目 아래 元天錫總斷, 范世東編輯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話東人物叢記>의 내용을 보고 元天錫 선생이 要約한 것 같다. 麗末事의 王在江華禑江陵昌後王誥忠情辭, 王薨于江華江陵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臣申伯淸上疏는 <話東人物叢記>의 卷2에 동일한 記錄이 있어 이것을 移記한 것인지 아니면 <話東人物叢記>에서 <華海師全>의 내용을 이기한 것인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話東人物叢記>의 行款은 半葉 10行 24字인데 이 부분의 기록은 20行 24字로 되어 있고 誤謬로 보이는 文句들이 修訂되어 있어 <華海師全>에서 移記한 것이 아닌가 推測해 볼 수 있다.
言志錄은 邊胤宗이 기록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華海師全>에 포함되는지 알 수 없고 歷代轉理歌誌說은 范承洛이 歷代轉理歌의 吐를 한글로 倂記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으며 내용이 몇자 되지 않는다. 아마 당초에는 歷代轉理歌誌說에 吐를 한글과 병기한 歷代轉理歌와 같이 실려져 있는 것을 筆寫를 하면서 恭愍朝辛亥冬理猷軒做歷代轉理歌諷獻의 漢文体 歷代轉理歌를 빼고 여기에 옮겨 실은 것이 아닌가 보여 진다.
<話東人物叢記>와 <華海師全>은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서로 듣고 본 바를 별도로 기록한 것인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華海師全>이 <話東人物叢記>의 기록을 인용한 것도 보인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話東人物叢記>는 東方儒學의 淵源을 人物中心으로 기록하고 있고 <華海師全>은 申贒의 東方理學에 대한 識見를 주로 기록하고 있다.
范承洛은 曾祖父인 范伏厓 선생이 작성한 <話東記>를 筆寫하면서 冊名을 <話東人物叢記>로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元耘谷 范伏厓 양 선생이 <話東人物叢記>를 줄여서 <話東記>라고 기록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話東人物叢記>와 <話東記>는 동일한 책임을 알 수 있다. 范承洛이 歷代轉理歌誌說에서 <話東記史>라고 하는 것은 元耘谷居義에서 말하고 있는 <華海師全>과 <話東記>를 合한 한 帙을 指稱하는 것임을 文脈과 다른 資料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3. 卷數에 差異가 있다.
<華海師全> 跋尾에 의하면 이 책의 마지막 4차 발행은 鄭夢周가 孔明亮외 3人으로 하여금 간략한 大綱領만 책으로 엮도록 하여 元耘谷에게 10권을 秘藏시키고 “禹玄寶외 5명이 가지고 있는 책을 거두어 간직하였다가 後世에 傳하도록 保全해야 할 것이다.” 하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圃隱이 변을 당하였고 1393년 宋因, 權近, 鄭道傳 등이 <華海師全>을 모조리 찾아내서 불살라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을 미루어 볼 때 <華海師全>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儒者들이 筆寫本을 保管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元耘谷 先生도 잘 알 수 없으므로 確實하게 斷定할 수는 없는 일이다. 朝鮮 初期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范伏厓 선생의 元耘谷居義에서는 ‘元友와 함께 찾아 모은 것을 編輯해서...’ 라고 기록하고 있어 朝鮮 初期에 <華海師全> 몇 권을 蒐集하여 保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湖西儒林의 姜永直 선생은 그가 1935년에 편집한 <校刪華海師全>에서 孔明亮이 4차 발행 당시 필사본을 만드는 것 같고 이 筆寫本이 그의 後孫집안에 保存되어 내려오다가 發見되는 것이 아닌가 推測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華海師全>이 湖西의 孔氏집안에서 發見된다는 說을 根據로 하는 것 같다. <校刪華海師全>은 元․范 양 선생 등이 朝鮮 初期에 작성하여 追錄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편이 排除되어 있어 또 다른 底本을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平山申氏世系圖, 元耘谷의 跋文, 諸子敍述, 東方斯文淵源錄 등을 싣고 있어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華海師全> 4차 發行本은 1388년에서 1391년 사이 編輯되므로 朝鮮 初期에 作成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內容이 들어갈 수가 없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7권이고 그 중 4권(元耘谷의 跋尾 이전까지)은 高麗 末期에 發行된 책으로 보여 지며 나머지 3권은 朝鮮 初期에 元耘谷, 范伏厓, 范承洛 등에 의해 添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元天錫이 秘藏시켰던 野史는 6책이고 華海師全은 4책이며 話東人物叢記는 卷之3까지 있는데 몇 책인지는 알 수 없다. 卷數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基準으로 하였는지 그 基準은 信賴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편찬과정을 기술한 元天錫의 跋文에 모순 보이고, 책명이 <話東記> <話東人物叢記>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卷數에도 차이가 있다.’ 라는 文句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文句로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글들이 百科事典에 揷入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일방의 一方的 主張이 檢證없이 反映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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