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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은 가사문학의 발생지
- 申得淸 선생의 「歷代轉理歌」를 중심으로 -
規堂 申佑燮
Ⅰ. 들어 가는 말
영덕해맞이공원 정상 동해를 바라보는 전망대 아래, 좌측 도로변엔 孤山 尹善道 선생의 詩碑가 있고, 우측 도로변엔 고려 말 申得淸 선생이 지은 「역대전리가」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歌辭文學碑」가 있다.
영덕군은 2009년 9월 “나옹왕사(서왕가·승원가)와 신득청 선생(역대전리가) 조명 한국가사문학”이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움을 개최하여 「西往歌·僧元歌」 , 「歷代轉理歌」가 현존하는 가사문학 중 最古의 작품이며, 두 사람 모두 고려 말 우리 고장(영해 창수) 출신이어서 영덕이 가사문학의 발생지였으며, 또한 위의 작품들이 同時代의 작품이나 제작 연대가 확실한 「역대전리가」를 한국문학사에서 가사문학의 嚆矢(효시) 작품으로 평가하였다.
이에, 영덕군은 영덕이 예로부터 가사문학의 중심지역이며, 또한 문학과 충절의 고장임을 널리 알리고 만세에 귀감이 되게 하고자 도비를 지원 받아 2010년 9월 30일, 50t 규모의 웅장한 바위에 「역대전리가」를 새겨 「가사문학비」를 건립하였다.
영덕군은 이 「가사문학비」를 통해서 영덕이 가사문학의 발생지임을 대내외에 널리 알림은 물론, 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문화기행 관광콘텐츠 소재 활용과 한국가사문학의 발전 등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역대전리가」는 신득청 선생이 고려 말 공민왕 20년(서기1371년) 가을 왕의 失政을 바로잡고자 중국 역대왕조가 겪어온 흥망성쇠의 원인과 결과를 빗대어 가사 형식으로 쓴 상소문인데, 총 363구 1426자로 漢字로 되어 있으며, 총 네 개의 단락 중 셋째 단락의 「임금과 신하의 본분과 경계」를 표현한 24句 100字를 「가사문학비」에 새겼으며,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碑 文
創興治平 安社稷道 나라 세워 다스려 사직을 편안히 함은 前世興王 同轍伊五 앞 시대 나라를 흥하게 한 임금 같고 敗亂家國 亡社稷刀 나라를 어지럽혀 사직을 망하게 함은 前世不君 同轍日世 앞 시대 못난 임금 같도다 烈士忠直 眞儒賢伊 열사와 충신,참 선비와 어진이가 亂世羅高 邑實孫可 난세라고 어찌 없겠는가 蠹小奸諛 凶賊臣以 좀스럽고 간악하게 아첨하는 무리가 平時羅高 邑實孫歌 평시라고 어찌 없겠는가 人君心事 如何中矣 임금의 마음 어떠냐에 따라 蠹反忠忠反蠹 日於爲高 간신이 충신되고 충신이 간신되며 亂反平平反亂 日於爲尼 난세가 평화되고 평화가 난세되니 胡爲不思 無三日高 어찌하여 이런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가 |
Ⅱ. 「歷代轉理歌」가 가사문학의 嚆矢 작품으로 밝혀진 근거
종래 학설에서 短歌인 시조는 고려 말에 발생했고, 長歌인 가사는 조선 초에 발생했으며, 성종 조 丁克仁(1401-1481)이 지은 賞春曲(상춘곡)을 가사문학의 효시 작품으로 인정함이 통설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가르쳐 왔다.
가사문학은 4.4조의 율격(4·4조의 4음보 연속체)을 띤 長歌로서 한글로 씌어졌으며, 조선 중기 이후 송순의 면앙정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박인로의 누항사 등 양반 사대부에 의해 폭넓게 향유되면서 사대부 시가문학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 개화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영남지방 특히 안동 지방에선 부녀자들에 의해 內房歌辭란 이름으로 그 명맥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조선조 500여 년 간 秘傳되어 오던 「華海師全」주1) 이란 책이 1850년대 중반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이 책의 ‘卷六’에 한자로 씌어진 「歷代轉理歌」란 노래가 있었다. 한글로 씌어지지 않았기에 漢文 상소문인 줄로 알고 가사문학임을 지나쳤다.
그런데 이 노래를 한문으로 해석해 보니 뜻이 안 통하는 곳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예를 들면, 「가사문학비」에 새겨 있는 ‘邑實孫歌, 無三日高’ : 이 구절을 한문으로 해석해서는 뜻이 통하지 않았다. 「邑實孫歌 - 없을 손가, 無三日高 - 무슨 일인가」와 같이 우리말로 해석해 보니 뜻이 통하게 되었다. 즉 吏讀(이두)로 표기된 글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 「역대전리가」가 비록 漢字로 씌어져 있으나, 漢文이 아니고 漢文과 吏讀주2)를 혼용하여 우리말로 노래한 것임이 밝혀지고, 그 형식이 4·4조의 율격을 띠기에 가사문학의 형식이며, 상춘곡보다 100년이나 앞서 저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발생 시기가 고려 말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종래 효시 작품이던 ‘賞春曲’은 ‘한글로 씌어진 효시 작품’이 된 것이다.
또, 가사문학의 효시 작품으로 고려말 懶翁王師(1320-1376)가 지었다고 추정되는 「西往歌」와 「僧元歌」도 고려 후기 작품이나, 「僧元歌」는 이두체 필사본으로 후세에 전해졌고, 「西往歌」는 口傳되다가 18세기 ‘念佛普勸文’에서 한글로 정착되었는데, 「西往歌」보다는 이두체로 기록된 「僧元歌」가 더 원형에 가까우며 두 작품 모두 정확한 저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나옹왕사가 공민왕 왕사 직을 사퇴하고 회암사 주지를 맡아 포교에 힘쓴 1369년에서 涅槃(열반)한 1376년 사이일 가능성이 높아 「歷代轉理歌」와 그 선후를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의 작품들을 비교해 볼 때 비슷한 시기이기는 하지만 1371년 고려 공민왕 20년에 저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歷代轉理歌」가 언제, 누가, 왜, 어떻게 이 글을 지었는지가 그 淵源이 확실한 작품이므로 가사문학의 효시 작품으로 인정함이 타당하여 「가사문학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Ⅲ. 作品 解釋
「歷代轉理歌」란 제목에서 ‘歷代’란 중국 역대 왕조를 말하며, ‘轉理’란 왕조가 變轉(興亡盛衰)하는 理致를, 歌는 노래한 글이란 뜻이다. 중국 역대 왕조에서 女色에 빠져 방탕과 사치를 일삼은 임금이 충신의 諫(간)함을 무시하거나 그를 탄압함으로써 나라를 망치게 한 夏나라 桀王(걸왕), 殷나라 紂王(주왕), 周나라 幽王(유왕), 秦나라 始皇(시황) 등을 예로 들어 보임으로써 공민왕이 중국 역사에서 흥망의 교훈을 찾아 깨닫고 올바른 政事를 하시라는 간곡한 내용을 가사 형식으로 적어 恭愍王에게 올린 상소문이「歷代轉理歌」이며, 공민왕의 榻前(탑전)에서 자주 唱奏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왕비 魯國公主가 1365년(공민왕 14)에 難産으로 죽자 상심하여 친히 왕비의 眞影을 그려 벽에 걸고 왕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佛事를 일으켜 화려한 靈殿을 짓고 國政諮問의 전권을 승려 辛旽(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전권을 쥔 신돈이 권문세족을 제거하고 문란한 사생활을 하는 등 국사를 전횡하자, 作者는 斥佛崇儒로써 공민왕이 親政할 것과 王道政治로 善政을 펼 것을 이 가사에 구구절절이 담아 唱奏하였으며, 이 작품은 고려 말 가사문학의 白眉로 손꼽히고 있고, 그 내용은 현 시대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歷代轉理歌」는 한글이 창제된 조선조에 들어 伏崖 范世東의 증손 范承洛(범승락)이 吏讀 부분을 訓民正音으로 토를 달아, 成三問⋅朴彭年에게 보여 改作하였다고 하며, 耘谷 元天錫, 伏崖 范世東이 쓴 「華海師全(화해사전)」에 남아 있다.
Ⅳ. 作者 申得淸 先生의 生涯(1332 - 1392)
선생은 평산 신씨 判事公派 파조이며, 字는 澄叟(징수), 號는 理猷軒(이유헌)이다. 고려 충숙왕 後元年(1332, 壬申)에 형 矢直齋 伯淸과 雙生으로 태어났으며, 東邦의 孔夫子로 불리는 文貞公 不諼齋(불훤재) 賢의 손자요, 벼슬은 고려 太僕正禮賓判事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英敏하고 聰明하며 문장이 능통하여 10여 세에 “我生萬物中 獨與天地參”이란 시구를 지을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恭愍王 7년(1358) 27세에 형제가 同榜及第하여 國中 名士들이 그의 文義講論을 경청하였고, 원나라 名儒들도 그의 器度에 敬服하였다.
恭愍王 10년(1361) 典理參議 겸 大言으로 지내다 불교계의 압력으로 益齋 李齊賢과 牧隱 李穡이 파직 당하자 곧 大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恭愍王 11년에 사화를 입었고, 이어 공민왕 14년(1365)에는 신돈으로부터 서적을 모두 몰수당하였다
恭愍王 15년(1366, 병오) 35세에 다시 집현전 翰林學士가 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가을에 「歷代轉理歌」를 製上하여 왕의 실정을 바로 잡으려 했다.
그리고, 부친인 간재 신용희와 정몽주, 이색, 김혁, 이인복 및 형인 신백청이 함께 신돈의 전횡을 강력히 탄핵 상소하였는데, 왕이 불응하자 공민왕 21년(1372) 벼슬을 버리고 다시 영해 仁良村으로 낙향하여 더 이상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이후 왕은 신돈을 반역죄로 주살함)
圃隱 정몽주가 일찍이 신득청의 인품이 곧고 맑음을 두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淸如滾滾水 맑기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같고
直似落落松 곧기가 낙락장송과 같다.
直而無尖鏃 그러나, 곧아도 뾰쪽한 촉이 없고
淸而無激冷 맑아도 심히 차갑지 않다.
驪興王(禑王) 4년(1378)에 百僚의 三徵에 불응할 수 없어 吏部尙書에 취임하였다. 선생은 禑王에게 勸學成就, 開善閉邪를 말하고 때때로 탑전에서 「歷代轉理歌」를 唱奏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권력다툼에 염증을 느껴 다시 고향에 돌아와 창수면 미곡동 鳳停山下에 茅屋을 마련하고 유유자적하니, 牧隱 李穡이 “鳳停齋“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그 후 조정에서 네 번이나 불러도 나가지 않음으로 포은과 목은이 주선하여 田土 30結을 나라에서 내리도록 하고 그 고을 원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1388년 우왕이 이성계에게 내몰려 강화로 옮겨진 이후에는 동료에게 서신을 보낼 때는 반드시 글 말미에, “왕은 강화에 있고 동궁이 대리한다(王在江華東宮代理 申某)”라고 써 보냈다.
그 해, 이성계 일파들이 우왕을 신돈의 혈통으로 날조하여 ‘廢假入眞’을 주장하매, 종조부인 省齋公 言置 (치)와 형 矢直齋 伯淸이 允王(昌王)에게 權臣의 執命傾國과 上王의 流離在外와 國姓幻造 등의 賊臣兇策을 통박하는 密書를 올렸다가 전 가족이 屠戮(도륙)을 당하였고, 선생도 함께 함몰될 처지인데 牧隱, 圃隱, 僻隱(柳藩) 등 儕流(제류)들의 구원으로 간신히 목숨만을 보전하였다.
공양왕 4년(1392) 7월 고려가 망함을 듣고 망국의 비운에 통곡하다가 동해에 몸을 던져 殉節하니 屍身을 찾을 수 없게 되자, 門人 金三近·金繼權 父子와 李周, 宋克己, 鄭良弼, 金鼎, 金震陽 등이 衣冠을 거두어 招魂葬으로 봉정산에 모셨다.
그 후 자손들은 貫鄕 “平山”을 피하고 세칭 “寧海申氏”로 바꾸었으며, 현재 다시 “平山”으로 還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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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華海師全」과 東方의 孔夫子 不諼齋(불훤재) 申賢(1298-1377)
「歷代轉理歌」가 기록된 『華海師全』은 우리나라 性理學의 전성기였던 고려말 華海師 申賢(1298-1377) 선생의 성리학설을 기록한 철학사상서로, 불훤재 申賢 선생과 신현을 핵심으로 禹倬, 申賢, 申用羲, 鄭夢周 3대 師弟 및 그의 門人(236명)들이 성리학에 관하여 문답한 내용을 대화체 형식으로 상세하게 기록한,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성리학서이다. 申賢 선생을 비롯한 鄭夢周, 元天錫, 范世東 등 수많은 화해학파 학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10여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사상 자료를 담아 저술하였다.
(대학 1751자, 중용 3568자, 논어 15917자, 맹자 34685자)
申賢은 신득청의 조부로, 8세 때부터 易東 禹倬(우탁)의 문하에서 師事, 周易·朱子學 등을 수학하였으며, 忠肅王 2년(1315) 18세에 成均館試(성균관시)에 장원하였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의 학맥을 잇는 성리학자, 평산신씨 영해파 중시조이다.
『華海師全』은 중국(元, 明)과 고려 한 시대 宗師의 大全으로서, 華海大師 및 그 문하생들(華海學派)의 한 평생 思想에 관한 성리학 자료의 총집이며, 걸작이다.
주요 내용은, 신현 선생의 성리학 사상인 誠敬說, 3국의 賓師(元 : 仁宗, 明 : 태조 고황제, 高麗 : 충숙왕, 충혜왕)로서 問對한 내용, 스승 우탁,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등 화해학파 문인들과 성리학에 관해 문답한 내용, 동생 휴묵자(休默子) 집(諿)과 무민자(无悶子) 군평(君平) 그리고, 선생의 長子 간재(簡齋) 용희(用羲)에게 가문의 경계를 삼도록 家規를 짓게 하고 그 내용을 교정하는 과정에서 문답하는 내용, 간재선생홀서주대, 申氏 가계의 언행, 歷代轉理歌, 동방연원록, 원운곡거의 등 총 7권 21편으로 편성되어 있다.
『華海師全』은 麗末鮮初 정치적인 迫害를 받아 4번이나 몰수되어 불태워지는 참화를 당하였으며, 申賢 선생이 돌아가신 후 포은 鄭夢周 등 그 문인들이 흩어져 남은 편린들을 다시 모아 운곡 元天錫이 총단하고, 복애 범세동이 편집하여 각 1본씩을 나누어 비밀리에 보관하여 온 책이 다섯 번째 저작이다.
원운곡 자손은 보관하고 있던 이 책이 발각되면 멸문지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소각하였고, 범세동 家에서 필사본으로 보관하던 것이 1850년 경 조선 정권이 약화되었을 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의 중요한 學問的 價値는 이 책에 담겨진 성리학의 내용이 고려조 빈약한 성리학적 사상 자료에 단비와 같은 10여만 자에 달하는 방대한 철학사상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사 연구에 공헌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이 사상 자료들의 수준이 매우 높고 내용이 정교하다는 데 있다.
가치중립적 위치에 있는 중국 浙江大學校 周生春 교수는 그의 논문 - 『‘華海師全’의 歷史 資料 價値와 申賢의 歷史 地位에 대하여 論하다(2012)』에서 화해사전은 필사과정에서의 일부 부분적인 오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당시의 성리학 수준이 孟朱를 상승한 위대한 著書라고 극찬하였다.
- 范世東의 話東人物叢記, 華海師全, 禹倬의 易東先生實記, 周生春 論文
주2) 歷代轉理歌에 記錄된 吏讀
擧錄爲多 其安人歌 其高眞可 吉奴 亂而 羅到南 南道乃家 乃貴 乃嫩狎喜 奴多 多基於尼 多尤習多 道 刀 刀羅本而 都羅溫而 刀丹馬可 到也本可 道也 刀也西羅 都如難而 道也難以 刀也難高 豆兒達隱 達以 羅高 魯多 曼羅西羅 末三 麻齊刃可 | 거룩하다 그 아닌가 그 곳인가 길로 나니 나도 남 남도 내가 내 귀 내 눈앞에 ~노다 다 그러니 다 우습다 ~도 돌아보니 돌아오니 되단말인가 되어봤는가 되어 되어서라 되었나니 되었나니 되었는고 두 아들은 ~들이 ~라고 로다, 도다 만나서라 말씀 맞이하는가 | 毛乙孫家 無三日高 無三日魯 發可益高 發斤末魯 跋西 於以他可 邑實孫可 業失孫可 矣道 臥 矣奴 隱 焉 亂 而 矣 伊 以 而 伊難 日多 伊難 而羅 日於爲高 日於爲尼 而五 伊五 人達 日世 日於羅 以也兮 底羅韓古 造他馬所 造欣末乙 之於刀以 | 모를손가 무슨일인고 무슨 일로 밝아있고 밝은 말로 벌써 어이타가 없을 손가 없을 손가 ~에도 ~와 ~으로 ~은 ~의 ~이 ~이는 ~이다 ~이라 이러하고 이러하니 ~이오 ~인들 ~일세 일어나 ~ 여! 저러한고 좋다마는 좋은말을 지었더니 | 爲高 河高下高 河古 爲那 爲羅河那 爲乃 漢高 漢而 爲尼爲而 下尼 爲多 河多 闊也 活如他可 河如室齊 活也爲面 闊也爲伊 何里 爲面 河狎時古 爲也時面 河也時面 河也 爲也 韓丹末隱 韓末魯 割家馬亂 割史 爲齊 活齊 割齊 活諸 咸果 咸道 咸隱 咸焉 | 하고 하고 하나 하네 하는고 하니 하니 하다 하랴 하려다가 하려하실제 하려하면 하려하니 하리 하면 하압시고 하야시면 하야시면 하여 한다는말은 ~한 말로 할까마는 할사 할제 할제 함과 함도 함은 함은 |
주3) 이임수, 역대전리가와 초기가사에 대한 연구, 어문학 제 46집,한국어문학회,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