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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지만 실천해야 할 일
세상은 내 생각과 마음, 형편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계절을 갈아입고 있다. 누구의 아쉬움과 만족스러움, 서운함과 기쁨, 분함과 즐거움, 억울함과 행복에 상관없이 시간들은 지난 계절을 훌러덩훌러덩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절로 단장을 하고 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60여년이 다 되도록 제법 많은 계절을 맞고 보내는 경험을 해 왔다. 세월의 마디가 남긴 삶의 흔적이 눈가에 주름으로, 얄팍하고 무디어진 피부 위에 벌써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많은 시절을 몸으로 느껴왔지만 올해 맞는 계절들은 유난히 더 내게 많은 감정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꽤 많은 성상을 교사로 지내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퇴직과 함께 나의 삶은 학생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던 일과는 조금 다른 방향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과거와는 사뭇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30여년 전, 내가 처음 교사 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아침 7시 20분 전후에 출근해서 대부분 밤 10시 11시가 되어서 퇴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긴 삶을 학교라는 조직 속에 짜여진 시간 틀에 몸을 쑤셔 넣고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퇴직으로 인해 내 몸에 맞는 시간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이제는 시간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그간 정해진 시간과 짜여진 일정에 따라야 했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변화에 따라 내 생각이나 태도, 삶의 방식도 많이 달라졌다. 과거 교사로 지낼 때는 나름 가치 기준이 있었다. 이금이라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거지는 사회의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의 수준보다 높거나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모범적이려고 했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라도 하면 제법 큰 부담으로 여겼다. 더구나 양심을 거스리는 일과 같이 윤리나 도덕의 기준을 어기는 일이라면 더욱 부끄럽게 여기고 멀리하려고 했다. 나 스스로 뿐만 아니라 사회 역시 교사들을 향해 이런 시선과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교사의 가치를 높이는 스스로 지켜야 할 일이라 여기고 몸가짐을 조심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퇴직을 하면서 이런 굴레로부터 상당히 자유롭게 되었다.
퇴직 후에 또 달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난 날과 비교해 복장이 상당히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일을 할 때에는 복장도 교사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사들이 입는 옷에도 사회와 학교라는 환경이 요구하는 교사라는 직업에 맞는 보편적인 복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것이 나는 정장차림의 옷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에 출근할 때에는 주로 양복을 단정하게 입고 집을 나섰다. 이것이 교사의 됨됨이나 최소한의 체면을 세워주는 일이라는 생각했다. 또한 이런 태도는 학생들을 향한 교사가 지녀야할 최소한의 예절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집에 갔을 때 일이다. 선친께서는 내게 사람의 마음가짐과 옷차림새에 대해 잠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서로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언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올지 모르겠다며 옷 입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우선 너는 아빠를 닮아 체격이 작으니까 옷을 잘 입으면 좋겠구나. 값이 나가고, 좋은 옷은 아니더라도 항상 깔끔하고 밝고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으면 좋겠구나. 사람은 머리에 지식이 채워지지 않으면 혹 채워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기분이 나빠지기 마련이란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허름하게 입으면 그 사람의 능력 여하를 떠나서 의도하지 않더라도 무시하거나 모자라게 여긴단다. 그러니 보통 때는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다른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반드시 옷차림을 생각해야 한단다.
그래서 양복을 입을 때, 와이셔츠는 기성복보다는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맞춰서 입으면 좋겠구나. 셔츠가 몸보다 커서 헐렁하면 사람들이 꺼벙하게 보거든. 그래서 맞춰서 입으면 깔끔하고 단정해 보여 좋단다. 그리고 셔츠를 바지에 넣을 때는 몸에 잘 맞더라도 구김이 만들어진단다. 그러면 보기에 좋지 않으니까 주름은 양 옆으로 몰아서, 앞 뒤는 평평하게 주름을 펴서 구김 없도록 입는 것이 좋단다.
넥타이 색깔은 다양하게 구비해 두었다가 장소나 환경에 따라 맞춰 매면 좋겠구나. 그리고 넥타이를 매는 형태는 내가 매는 형태로 매면 좋겠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넥타이 매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 한번 반을 둘러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치우친 형태로 매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는 좋은 습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넥타이가 비틀어지면 사람도 삐딱하게 보이거든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한두 번 더 둘러 역정삼각형태로 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습이 좋아 보이지 않니?
그리고 옷은 밖에 다녀오면 종종 다림질을 해 둬서 다음에 입을 때를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단다. 아래 바지는 주름이 반듯하면 좋은데, 다림질이 쉽지 않을 경우 집게로 집어 놓고 다리면 도움이 된단다. 양말은 요즘 젊은이들은 흰색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것보다는 검정색 계열의 양말을 신으면 좋겠구나. 검정색은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멋이 있거든.”
이렇게 세심하게 설명해 주시는 선친의 말씀에 나는 이런 말들이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이야기처럼 들려 거들먹거리며, 장난삼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자들의 실험 중에는 이런 재미난 것이 있다. 평범하게 생긴 젊은 남자를 선정하고 같은 장소에서 한 번은 정장차림으로 서 있게 하고, 한번은 허름한 운동복 차림으로 서 있게 했다. 그런 다음, 그 모습을 본 여러 여성들에게 저 남성에 대한 이미지, 느낌, 직업, 소득, 성격 등을 평가하게 한 것이다.
그랬더니, 대부분 사람들은 정장차림의 남자를 보고는 성격이 좋을 것 같고, 좋은 직업을 가졌으며, 소득 또한 높을 것이며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평을 해 주었다. 반면 허름한 차림의 사람에게는 공부를 못 할 것 같으며, 성질이 좀 있을 것 같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해 주었다. 같은 사람을 두고 평가자들은 복장에 따라 이렇게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 말에는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이 실험은 이런 말의 가치와 의미를 실감나게 증명해 주었다. 이런 일들을 보고 경험해서 그런 걸까? 선친의 복장 설명을 들었을 때에 빈둥거리며 들었던 내가 어느 순간 성장해서 살펴보니, 선친의 설명을 따라 나도 그렇게 옷을 입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 중에는 출근할 때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거나 운동복 형태의 추리닝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속으로 교사의 존재의 위상이나 교사의 체면을 스스로 깍아내리는 일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요즘 사회에서는 교사를 바라보는 이미지나 위상이 예전만 못해졌다. 하지만 내가 교사 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사회에서는 교사라고 하면 사회의 어떤 기준, 보편적 올바름, 가치 등을 지닌 사람들이기를 요구하고 그런 윤리와 도덕을 갖춘 지식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거기에 맞는 삶의 모습을 지니도록 노력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외상을 하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궁핍해도 남에게 돈 빌리러 가는 일을 싫어하고, 분수에 넘는 일이라면 멀리하곤 했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평생 범생이 선생’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직업이나 직책이 사람의 삶과 칼라를 결정한다 했던가! 아무튼 나는 교사라는 직업과 일과 삶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그런 삶을 살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옷장에는 주로 양복들이 많아졌다. 계절별로 정장과 콤비, 정장바지들이 네다섯 벌 정도 되었다. 그러니 언제나 옷장은 좁고 답답했다. 그래서 아파트를 찾을 때는 옷장이 넓게 마련된 집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사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이 옷짐들이 보통 불편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버릴 것을 버리면 좋을 것을 …….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언젠가는 또 요긴하게 입게 될 것 같아서 싸들고 다녔다.
퇴직하고 보니 이런 옷들을 입을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고작 해야 예식을 치르거나 강의를 할 때만 조금 필요했다. 보통 때에는 그냥 편한 티나 면바지, 구두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편한 샌달이나 가볍게 만들어진 운동화 한 켤레면 충분하다.
내가 교사로 있을 때, 결혼식장에 가면 그 화려하고 멋진 자리에 좋아 보이지 않은 가벼운 티를 입고 오거나, 그냥 놀러갈 때 입은 단정해 보이지 않은 잠바를 입고 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혹은 작업복 같은 옷을 입고 오거나 심지어 깨끗해 보이지 않은 추리닝을 입고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사의 심리와 기준에 따라 속으로 ‘저런 옷을 입고 이렇게 멋진 자리에 오다니, 신랑 신부의 격에 맞는 옷을 입고 와야지, 신랑 신부를 존중한다면 저런 옷을 입고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또 ‘나 혼자라면 모르지만 사람들이 예복을 입는 것은 상대를 존중해서 하는데, 그런 예를 갖추지 않으려면 도대체 뭐하러 여기에 오는 거지?’ 하면서 속으로 무례한 행동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런데 퇴직하고 보니, 예식장에 그렇게 입고 나타난 사람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늘 자유롭고 편안한 복장으로 생활하다 보니, 양복이나 자켙은 너무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냥 어디든지 편한 상태로 다니고 싶어진다. 내가 흉을 봤던 그들도 지금의 내 마음과 같아서 편안한 복장으로 예식에 참여했을 것 같다. 어쩌면 퇴직이 내 마음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지 모르겠다.
학교현장을 벗어나 양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여건 속에서 살다 보니 정장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옷장을 빽빽하게 차지하고 있는 옷들이 다른 옷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불편을 주고 있어서 주저하고 있는 마음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는 틈을 타서 옷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봄이 될 때는 봄옷들을 정리하려고 옷을 골라냈다. 처음 골라 버리려고 할 때에는 한 벌만 남겨두고 모두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옷을 들어 살펴보니, 이것도 괜찮은 것 같고, 저것을 들어보니 닳거나 상하지 않아 좋아 보였다. 그러니 다시 내렸다, 걸었다를 반복했다. 아쉽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겨우 다섯 벌 중에 두 벌을 버리려고 내려놨다. 그것도 아깝게 느껴졌다.
그리고 여름을 맞았다. 여름에는 반팔, 짧은 옷들만 입어서 자켙은 한두 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꺼내고 보니 네 벌이나 되었다. ‘여름에도 정장스타일을 이렇게 많이 입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 두 벌을 남기고 둘은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계절마다 버리기를 하고 다시 두 번째 새해를 맞게 되었다. 올해는 정말 한 벌만 남기고 다 버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선별 작업에 들어갔다.
평상시에 잘 입지 않은 옷들이라 ‘이번에는 편한 마음으로 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아깝다는 마음이 들어 당장 버리지 못하고 내렸다, 걸었다를 여전히 반복하고 있었다.
가을이 되었다. 모든 낙엽목들이 옷을 벗고 있다. 어느 시인이 “낙엽이 떨어진가 싶어 주어들었더니, 세월이었더라”라고 노래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 나무들은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과감히 벗고, 새 계절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데, 저렇게 옷을 벗어 던지면 눈보라 치는 겨울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불쑥 솟아났다. 하지만 다시 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무들은 계절이 주는 학습으로 인해 저렇게 떨구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래서 철저히 버려야 내년을 맞을 수 있고, 저렇게 처참한 가지만을 남겨야 새싹을 품을 수 있고, 성장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 이 가을에는 나무가 발휘하는 지혜를 따라 버려야 한다. 생각을 가다듬고 옷장에서 다시 옷을 골라낸다.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해서 옷을 골라내 보지만 낙엽목처럼 떨구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버려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싹을 준비할 수 있고, 성장이 있고 변화를 불러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올해는 계절별로 한 벌씩만 남기고 버리고 있다. 빽빽한 옷들로 비좁았던 옷장이 헐렁해 졌다. 옷을 넣고 꺼내기가 한결 수월해 졌다. 버리고 비워둬야 빈자리가 생겨서 덤으로 편함이 주어졌다. 여기에서 여유로움도 성장도 새로운 생각도 채워질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살면서 버리고 비워야 할 것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미움도, 욕심도, 아집도, 탐심도, 감투도 계절이 바뀜에 따라 버려야 할 것들이다. 유익을 위해 손에 야무지게 쥐었던 것들도, 버려야 할 것들이다. 세상 이치는 버리는 데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실천해야 할 것들이다. 그래야 새로운 계절과 새로운 해를, 더 바랄 수 없는 보석과 같은 삶의 가치들을 맞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버리는 것이 쉬울 줄 알았는데, 더욱이 별 필요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일은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그 사소한 것마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하찮은 옷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 애착을 갖고 있는 것들이랴? 이제 이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려고 한다.
멀리 가려는 사람은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잡다한 짐들을 가득 짊어지고 멀리 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이 약해지는 인생의 후반부에는 더욱 아까운 것들이라도 내다 버려야 하겠다. 쉽지 않은 일지만 꼭 실천해야 할 덕목이겠다.
좋지 못한 습관이나 마음은 저절로 두어도 잘 자라고 실천하게 된다. 게으름은 생각하지 않아도 잘 실천할 수 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은 사소한 일만 만나더라도 저절로 잘 생겨난다. 그런데 공부하는 일이나 몸에 좋은 운동이나 골프나 테니스같은 운동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지런히 훈련하고, 관심을 갖고 꾸준히 훈련해야 폼이 나고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좋은 것들은 훈련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가 보다.
버리는 일 역시 비록 작은 옷 버리는 일로 실천해 보았지만 사소한 일인데도 잘 되지 않았다. 평상시에 훈련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이런 것을 보니 버리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긴 하나 보다. 이것도 훈련을 해야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보다. 주어지는 시간 속에서 게으르지 말고 주어지는 여건대로 실천해야 하겠다. 내 자신까지 버리고 온전히 없어지는 그날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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