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진(金應振) 목사는
1882년 2월 29일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에서
부친 김희복, 모친 최경수씨(춘화교회 설립자)의 5남 2녀 중 4남으로 출생했다.
1901년 춘화교회 서리집사
1906년 춘화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
1907년 3월 밀양 무안교회 조사로 시무(1909년 사임)
1907년 9월 1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경상대리회 대표로 참석
1912년 평양신학교 입학
1917년 밀양 마산교회 조사
1920년 12월 20일 평양신학교를 14회로 졸업하였으며
1921년 7월 5일 부산진예배당에서 열린 제11회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허락을 받고
1921년 7월 20일 제11회 경남노회 임시노회(기장읍교회)에서 목사 안수 및 위임식 거행
1925년 1월 2일 웅천읍 북부리교회에 부임하여 위임목사로 시무하다.
1927년 4월 17일 창원 본포교회에 부임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27년 7월 신룡 갈전 진영 본포 4개처 교회에서 김응진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함.
1928년 12월 신룡 갈전 본포 3개처 교회에 전임목사로 시무하다.
1939년 10월 24일 창원 본포교회에 두번째 부임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42년 갈전교회에 부임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다.(1947년 사임)
1952년 갈전교회에 부임하여 담임목사로 시무하다.(1958년 사임)
춘화교회 약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崔慶守氏가 福音을 迎接한 後 其 男便 金禧馥氏와 5남2녀(김응삼, 김응칠, 김응옥, 김응진,
김응오)全 家族이 믿다. 入神 理由는 金禧馥氏는 其 先親의 獨子이므로 自己의 子女의 祝福을
받기위하야서 諸神偶像을 極盡히 恭敬하였다. 偶像을 섬기는 것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더 많은
祝福을 받을 뿐 아니라 雜神이 侵犯치 못한다는 데에 感服하야 믿게 되다.
同氏 夫妻는 愛煙 愛酒家였으나 信後 酒草一切를 禁하고 篤信하다. 물론 禮拜堂은 없었고
自己의 家屋이 唯一의 聖殿이요 唯一의 安息處였다.
약 1년 후에 大邱에서 처음으로 안의와 宣敎師가 巡廻하다.
또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是年(1897년)에 密陽郡 春化里敎會가 成立하다.
先時에 本里數人이 福音을 得聞하고 彼此相傳하야 信徒接多함에 三間會堂을 新築하고 禮拜 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P.46)
이렇게 시작된 춘화교회에서 장남 김응삼은 영수(오늘의 장로에 해당됨)가 되고 4남 김응진은
집사로 섬기다가 1906년 장로가 되었고 후에는 목사가 되었다.
1906년 춘화교회 초대 장로가 된 그는
1907년 9월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독 노회에 경상대리회 총대가 되어
장로 36인중 한명으로 참석 하였다.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 경상대리회 초기에 장로가 된 분은 심취명, 정덕생, 이현필, 김봉명,
김응진, 이윤팔 등 이며 1911년 까지 밀양지역의 목사가 없는 장로총대로 노회에 참석했다.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창립 시(평양신학교) 문창교회 최경호 장로와 함께
경상노회 총대로 참석하는 등 노회, 총회에 빠짐없이 그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1912년 제2회 경상노회에서 신학교 입학을 허락받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01년 마포삼열 선교사에 의해 교회를 지도할 목회자 양성을 위해 설립된 평양장로회 신학교는
5년 과정으로 1년에 3개월을 신학교에서 교육 하고 나머지는 개 교회로 나가 현장실습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교수도 부족 했고, 교회 수에 비해 목회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교회
초기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없는 이런 교육제도를 선택 했을 것이다.
김응진 목사도 학업과 목회사역을 병행 하느라 1920년 12월 20일(제14회. 졸업생 17명)에야
졸업하였고 1921년 7월 5일 부산진교회에서 모인 제11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허락받고
1921년 7월 20일 기장읍교회에서 모인 제11회 경남노회 임시노회에서 목사장립 및 위임식을 거행
그는 경남지역에서 무려 64년간 목회하면서 25처 교회를 돌보았다.
춘화교회, 무릉교회, 다원교회, 밀양마산교회, 웅천교회, 웅천북부리교회, 갈전교회, 본포교회,
기장교회, 마천교회, 명동교회, 경화교회, 생곡교회, 가주교회, 용원교회, 월백교회, 욕지교회,
신용교회, 함안교회, 의령교회, 신제교회, 계내교회, 유천교회, 가음정교회 등 그가 담임목사로서
뿐 아니라 장로로, 전도사로 교회를 돌보며 섬긴 교회들이다.
김응진 목사는 1969년 10월 8일 경남노회 공로목사로 추대 받으셨고,
1974년 7월 12일 9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1974년 7월 12일 93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고향 선산에 안장되었다가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밀양 독립기념관에 그의 흉상이 제막되어 애국독립지사로 기념하고 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했다.
김응진 목사와 서달성 사모와의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 김덕환 장로는 밀양읍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아 부산항서교회. 신광교회에서 시무했으며
밀양 다원교회를 담임하여 사역하기도 했다.
장녀 김덕순 권사는 평양 숭의 여학교와 대구 동산병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동산병원 간호사로
봉사했으며 남편인 문영복 장로는 대구 동산병원 제5대병원장을 역임했다.
차녀 김광순 권사와 변재갑 장로는 김 목사님이 농촌목회를 하는데 든든한 동역자였으며,
차남 김창수 장로는 대구 계성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신명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대구영남고등학교. 마산 창신고등학교 부산 금성중.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교육자였으며,
대구 남산교회에서 장로장립 받고 부산영락교회 취임하여 시무하다 은퇴 한 후 원로 장로로
추대되었다.
출중한 외모와 타고난 음성으로 은혜로운 예배를 인도했던 그를 기억하는 동료 목회자들은 한결
같이 그분은 강단 인물로는 모든 조건을 갖춘 분으로 부러워했으며, 그의 목회에 동역하면서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 또한 그의 고매한 인품과 자상한 보살핌에 찬사를 아끼지 아니 하였다.
대부분의 목회사역이 주로 어려운 농촌교회를 돌보다 보니 교회마다 재정적 어려움 때문에
교회와 갈등이 생기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에 목사가 사례에 연연하지 않으려면 목사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농촌목회를 하면서 자립할 수 있는 양봉에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벌꿀’ 하면 김응진 목사를 생각할 정도로 양봉으로 얻은 소득으로 어려운 교인과
교회를 도운 것도 그의 목회 소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목사는 어느 곳이나 어떤 상황을 만나도
설교할 수 있도록 설교준비에 중점을 두었고, 교회가 원하지 않으면 목사가 먼저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은혜로운 방법이라는 목회 철학을 가지고 사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