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만남에 대한 명리적 사유: 강과 나를 중심으로
기유일 식신날 정묘시 관성 공망시간에 나를 구속하는 그 어떤 것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나의 벗(너)인 신천(新川) 강가를 걸으며 음양하고 오행한다. 나의 삶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음앙이 나의 너가 되어있고 오행이 너의 나가 되어 있다. 음양이 펼쳐진 것이 오행이 아니던가. 서양의 고전물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히 강은 인간에게 그것(It)의 하나이다. 그것이니 나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이고 그것이니 나의 밖에 있는 것이라 나와 강의 관계는 마틴 부버가 말하는 비인격적 만남(impersonal encounter)이라 할 수 있다. 나와 너의 만남은 인격적 만남이고 나와 그것의 만남은 객화된(objectified) 만남이고 물질화된 (materialized)만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신천이란 강은 나에게 너 (You)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을까? 그것은 이 신천이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삶 주변에서 나에게 보이지 않는 어떤 힘으로 무형의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으로 파악해 본다. 나는 끝이 2인 임수 해에 태어났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대해(大海) 아니면 은하수와 같은 천진(天津)이 내 기억의 너머에서부터 영향을 행사해 온 것 같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시간은 년간의 임수의 근이되는 해시이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나의 가장 내면적 시지의 세계가 내가 아무리 기억하려해도 가억나지 않는 우주의 기운을 지재(地載)하고 있다. 이것이 신천이 나와 불이인 첫번째 이유같다.
경금일에 태어난 나는 년간의 임수와 시지 해수의 절묘한 천복지재, 나와 너의 우주적 그리고 양자적 상호작용을 느끼지 못한 가운데 느끼며 경금의 분별하는 자아(일간)를 통해 끊임없이 금생수 하며 해수의 복합적인 정보와 지식을 보이지 않는 우주인 임수로 유통시키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신천이 왜 신천인지 왜 나에게 그것이 나와 물아일체된 불이로 작용하는가의 이유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이름도 신천 초등학교이다. 그것도 13회 졸업생이다. 선친이 교장으로 있던 금수라는 조그만 초등학교에서 목생화되는 3학년의 가을에 이곳으로 전학왔다. 신천학교는 팔공산의 토기운과 신천의 수기운이 자리잡은 곳에 위치하고 13이라는 숫자는 3목 갑목이 팔공산 5토에 뿌리내려 1수 임수 낙동강(신천의 본류)을 오랜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목설수(木洩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가 임년의 진월에 태어난 바 갑진월이라 나의 직업과 성장을 주관하는 월주가 갑진으로 내 팔자에 갑목 재성이 년지 인목에 근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와 신천과의 불이적 나와 너, 그래서 우리가 되는 이유는 나의 삶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건으로 입증되어 온 듯하다.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은 때가 되면 (in due course as time ripens) 이 마당에서 풀어놓으려 한다.
기유일 아침 경금일간인 나에게 정인의 십성이 머무는 날 나의 벗 강가를 걸으며 나의 과거, 나의 전통, 나의 어머니, 나의 인성과 관련된 수의 식상들을 드러내어 보았다.
과학명리학회 도반님들
관계공학(Relation Technology, RT)인 명리학의 기제를 가동하여
소중한 상생의 경험적 에피소드들을 이 마당에서 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23. 8. 19 (토), 기유일 아침 산책길에
불이 스마일 합장합니다
첫댓글 열심히 공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