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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제2강
말씀/ 마가복음 11:20-25절
요절/ 마가복음 11:22절
하나님을 믿으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새해 복 많이 받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만큼 UBF에서 익숙한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가 한계에 부딪혔을 때 혹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선교사들을 도울 때마다 가장 많이 증거했던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다가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가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나 유대인들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중에도 하나님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데, 뭘 더 믿으라는 말씀인가?’
그런데 어떤 상황을 만나면, 믿는 자리에 서 있을 것인가?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자리로 이동할 것인가? 도전 받습니다. 말씀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갭이 있을 때입니다. 말씀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는데, 실제 상황은 연속하여 힘든 상황으로 흘러갈 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씀했을 때,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현실과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현실과 말씀이 다를지라도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자들 또한 그런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이후,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고난 받고 죽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를 통해 구원역사가 완성될 것이며,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들어오는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 입장에서는 너무 황당하고 너무 비현실적인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길에 대해 말씀하는 예수님을 책망하는 모습,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본래 영광을 보고도 도통 깨닫지 못하는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으리으리한 성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몰려가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다가왔기에 끝도 없는 순례 행렬이 성전을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이 저렇게 살아있는데, 예수님 한 분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구원의 통로가 되어 만민을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 말씀을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한가지 퍼포먼스를 행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 시장했습니다. 그때 멀리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가 있음을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기대하며 가셨습니다. 가서 보신 즉 잎사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했습니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14) 14절입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4절 말씀은 ‘제자들이 듣더라’로 끝났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았는데, 무화과를 저주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살리는 일을 해 오신 예수님이 처음으로 죽이는 저주를 쏟아내셨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토록 온유하신 예수님이 도대체 왜 이리도 화가 나신 것일까요! 15절을 보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분노 모드였습니다. 성전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했습니다. 마치 깡패처럼 뒤엎어 버린 것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져주하신 사건과 연결됩니다. 무화과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한다는 저주는 이스라엘의 자랑 성전이 더 이상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18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 말씀에 열 받아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려고 결심합니다. 상황만 보면,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베다니와 성전에서 힘들었던 하루가 끝나고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아침, 제자들이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가 전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생각이 나서 외쳤습니다.(21)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베드로의 외침은 단지 무화과나무 한그루가 말랐다는 신기함만을 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랍비여,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처럼, 강도의 소굴이라 저주하신 성전도 말라버릴 수 있는 건가요?” 성전이 마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성전을 대체하게 된다는 지금까지의 말씀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이는 첫째로 예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당시 세상은 예수님 말씀을 랍비의 가르침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창세 때부터 계셨던 하나님과 함께 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고, 하늘에 새가 있으라, 땅에 기는 것과 동물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 또한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구원역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것이며, 예수님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심판장으로 다시 오셔서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역사가 완성되고 성경의 계시가 완성된 지금, 예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제게 새해 요절로 시편 1:2편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말씀대로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며 살아갈 때 마르지 않는 한 해를 보낼 것을 믿습니다. 지금 보이는 상황을 전부로 생각하지 말고 주님 주신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위에 굳게 서는 한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복음역사가 승리할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역할이 끝났으며, 성전은 예수님으로 대체될 것을 말씀했습니다. 지금 상황은 전혀 그럴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기마다 수십만의 순례자들이 성전으로 몰려들어 제물을 바치고 열광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성전의 위용에 압도되어 정신줄을 놓아버릴 정도입니다. “주여 이 성전이 어떠하며 이 돌들이 어떠합니까!” 성전은 영원토록 번창할 것처럼 보였고, 무너지고 사라질 것은 유대사회의 마이너였던 제자공동체가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가 하루만에 말라버린 것처럼 그토록 빛나는 성전 또한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라지고 맙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도 그러했습니다. 반면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제자공동체는 유대를 이기고 로마를 이기고 전 세계로 뻗쳐나갑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당시 현실과 충돌한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과 충돌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성전에 희망을 둔 것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과학기술문명에 희망을 둡니다. 당시에는 성전이 구원을 주고 이스라엘을 영원토록 보호해줄 것처럼 생각했는데, 오늘날에는 과학기술문명이 구원을 주고 인류문명을 보호해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유발 하바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세상의 모순을 해결하고 신의 영역을 넘볼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구원을 줄 수 없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만민으로 구원역사가 확장된 것처럼, 과학기술의 발전이 세상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불의가 소멸되고 공평과 정의가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이 산’이라고 말씀했는데, 그렇다면 어느 산이겠습니까! 시편 46편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산을 흔들리지 않을 산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 예수님 계신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어느 바다이겠습니까! 예루살렘에 서면 사해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산을 들리어 사해에 던져지라 말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성전산을 들어 사해에 던져지는 모습을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는 구약의 에스겔서 성전 환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을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자, 물이 흘러들어가는 곳마다 나무가 살고 물고기가 살아납니다. 결국 죽음의 바다 사해가 생명의 바다로 바뀌게 됩니다. 에스겔서의 환상은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새 역사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핵심은 절대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나고 영생을 얻는 역사를 의심치 말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복음역사의 성격이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사회에서 가망 없다고 여겼던 자들, 나병환자들을 고치고 세리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개시켰습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으로 다져진 유대사회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유대사회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드러냈습니다. 산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유대사회였는데, 거기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일어나고 거기에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거기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과 이방세계를 향한 선교사들이 나왔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도 그러합니다.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회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산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짓눌려 의심에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의심하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 로마의 박해를 사라지게 하고 로마를 세계 교회의 중심으로 우뚝 세우셨습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는 우리를 향한 도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역사는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합니다. 30여년 전에는 깃발 꽂은대로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부흥의 물결이 밀려왔는데, 지금은 교회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침체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때는 힘있게 일하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믿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의심하지 않는 것은 산처럼 거대한 장애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멈추지 아니하고 전진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러하고 한 개인의 신앙 여정도 그러합니다. 때마다 부딪히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취업 문제로 고통하던 시절, 자신에게는 취업 자체가 거대한 산이었다고 했습니다. 백수에게 매순간 압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산과 같은 취업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산을 만났습니다. 이제는 직장생활의 압박과 업무 스트레스가 산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장의 산에 깔려 죽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그 때는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하나가 옮겨지고 또 다른 산을 만나고 또다시 옮겨지는 과정을 거치며 믿음을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또다른 산 앞에 서 있는데, 망하지 않을까 깔려죽지 않을까 의심에 빠지지 않고자 기도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마음에 파고드는 의심을 물리치는 가장 좋은 무기는 기도입니다. 24절에서 기도를 말씀하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참으로 위로가 됩니다. 기도하는 자들에게 주신 확실한 약속입니다. 한편으로는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확실하게 이루어질 일 혹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놓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24년 나이 한 살 더 먹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예측을 넘어서는 문제, 우리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를 놓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자리는 매순간 의심과의 전쟁터가 됩니다. ‘괜히 되지도 않은 일을 놓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가!’, 중보기도 할 때마다 찌르고 들어오는 소리입니다. 우물 파는 사람은 어디까지 파야 합니까! 물이 나오기까지 파야 합니다. 그와 같이 기도는 받은 줄로 믿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어제까지는 받은 줄로 믿었는데 오늘 의심에 빠져버렸다면, 내일 다시 믿음위에 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연말 꾸준히 일대일 해왔던 두 사람이 잠시 말씀공부를 쉬겠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도 잠시 쉴 수 있겠다는 생각, 한편으로는 낙심이 찾아왔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는 않은가!’ 복음역사가 무거운 짐처럼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많지 않고 목자들의 나이는 많아지고 청년 세대는 현실의 무게에 눌려 있고 세속도시는 따라가기 힘든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은혜를 주시는 것을 매번 체험했으면서도 의심의 소리가 매번 강력하게 찾아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부요절로 잡고 기도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친족들과 동역자들과 선교사들과 양들과 기도지원을 요청한 사람들의 실제 기도제목들을 놓고 기도하는데, 단순히 제목나열의 기도가 아니라 의심의 소리가 사라지고 받은 줄로 믿기까지 기도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기도의 자리를 지킬 때마다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자에게 은혜를 주사 때마다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기도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합니다.
믿음의 기도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저는 주로 침상에 엎드려 무릎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데, 유대인들은 주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서서 하늘만 바라보고 간절히 기도하라, 40일 금식기도 혹은 100일 새벽기도를 하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으로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혐의란 ‘카타’(κατά)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로 다른 사람을 반대하거나 대적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동행 문제로 심하게 다툰 것처럼,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문제로 상대방을 용납하기 어려워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혐의에 대해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가 나같은 자의 허물을 용서하는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의심을 물리치는 담대한 기도로 연결됩니다.
어려운 시대의 복음역사를 견디고 승리하는 비결은 서로의 혐의에 대해 관대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동체에서 드리는 기도는 세상 어떤 열정보다 뜨겁습니다. 크고 웅장한 건물 성전보다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를 용납하는 사랑이 식어버리면, 아무리 크고 웅장한 성전 건물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세속주의의 산에 가로막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혐의를 용서하고 끌어안음으로써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모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거대한 세속주의의 산을 옮기고 생명구원역사를 섬기는 모임으로 쓰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