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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의 논의는 성경신학적 범위를 넘나드는 신철학적 범주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1. 개요
2. 상세
2.1. 고전적 혹은 형이상학적 접근
2.1.1. 역사적 반론 제기2.1.2. 그리스도교 신론과의 관계
제1원인(causa prima라틴어, the first cause영어) 이론은 인과관계에서 모든 인자에 선행한다고 생각되는 '최초'[1] 원인을 가리킨다.
유의어로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ὃ οὐ κινούμενον κινεῖ가 있다.[2] 물론 제1원인은 부동(不動)을 함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동의 원동자'보다는 더 넓은 개념이다.
서양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제안한 논변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말로는 우주론적 논변이라고도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움직이는 것은 무언가에 의해 움직여지며 이러한 원인-결과의 계열을 끝까지 추구하면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원인을 고찰하게 된다. 이것은 순수한 형상이며 자기 이외에 사유의 대상을 갖지 않는 사유의 사유이며 종교적으로는 신은 만물의 창조자, 지배자로써 제1원인이었다.
제1원인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 가치가 존재의 원리로 파악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물의 본질이라고 한다. 가치와 반가치의 극복으로서의 신학은 가치와 현실과의 대립이며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곳에서 출발하여 순간마다 새롭게 출발되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 신 존재론적 고찰의 시원 -dhleepaul
제1원인론은 그 '제1원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는 제1원인론은 귀류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그 가정으로부터 모순이 나오므로 "제1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거짓이며, 따라서 "제1원인은 존재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는 다음과 같다:
토마스는 유사한 과정에서의 다섯 가지 논증을 펼친다. ㄱ) 운동[10]에서의 논증 ㄴ) 능동인causa efficiens에서의 논증 ㄷ) 우연적 존재자(ens, ὄν, 有[11])와 필연적 존재자의 논증 ㄹ) 완전성의 논증 ㅁ) 질서의 논증이다.
이 논증의 핵심은 운동이나 원인이 무한히 소급해가거나, 혹은 필연적인 존재자ens에 존재esse를 주는 또 다른 필연적 존재자ens를 무한히 소급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무한한 소급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만 무한소급으론 자연에서 관찰되는 후험적 결과를 부정하게 된다는 쪽에 가깝다.[12]
또한 거듭 강조되어야겠지만, 제1원인 개념은 세계를 설명하는 '전제'라거나 그리스도교의 독점적 '교리'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람에게 주워져있는 '관찰 가능한 세계'로부터의 논리적 추적[13]이라 표현함이 옳다. 다시 말해서 관찰되는 후험적 세계에서 시작하는 것이지, '원인이 순환한다면?', '철학적 인과가 없다면?' 등의 순수하게 오직 가정적인 조건을 붙여 반박하는 것은 Ad hoc가 될 뿐이다. 관찰 가능한 후험적 세계로부터 첫 원인을 말하는 것은 최소한 고전적 의미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서구 철학 전통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이 제1원인이 이오니아 학파에겐 '신적인 원자'였고 피타고라스에게는 '신적인 불'과 동일시되는 '신적인 하나'였으며 훗날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존재esse였지만, 모두에게 이 원인은 신Theos/Deus이라 불렸고, 이러한 신론은 대부분의 고대 희랍 철학자들에게 널리 통용된 견해였고[14] 일부는 단일신론Henotheism[15]으로 발전한다.[16] 즉 제1원인론은 그리스도교의 '교의'가 아닌 고중세 철학의 전통이라는 맥락에서 봐야한다.
또한 제1원인론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로, 이를 '시간적 인과관계'의 첫 원인에 대한 사유로만 단정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는 제1원인론을 명백하게 오해한 것이다. '시간의 처음'에 대한 사유는 제1원인에 대한 질문을 던진 건 사실이고, 특히 플라톤을 따라 대부분의 고대 철학자들과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우주에 '시간적 태초'가 있다고 보았기에 제1원인과 '최초의 시간'은 흔히 패키지로 묶여져서 사유된 건 맞다.[17] 그러나 이미 후기 고대에도 '시간적 최초'와 제1원인은 개념적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그나마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선 '첫 원인'에 대한 사유에서 '시간의 최초'가 중요한 추가 질문으로 붙어다니기라도 했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는 아예 그런 '추가 질문'들마저도 근본적으로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토마스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우주에 시간적 시작이 없다'고 봤고[18], 이 점에서는 오늘날 자연과학의 견해와 매우 달랐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첫 원인에 대한 토마스의 물음은 온전히 '존재론적 인과관계'에 맞춰져있을 뿐, '시간적 인과관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따라서 특히 토마스 및 그의 계승자들(토마스주의자들)이 사유한 제1원인은 빅뱅우주론과 묶어서 연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따라서 토마스에게 있어서 시간의 시작 때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은 부차적으로 밀리고, 시간이 '시작'을 가지든 안 가지든 간에 첫 원인은 '시간 그 자체'와 인과관계를 가지게 되며, 또한 '시간'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첫 원인과 인과관계를 가지게 된다.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존재자)을 존재하게 하는 것, 바로 '존재하다'esse라는 행위actus를 토마스는
| ㄱ. 제1원인causa prima ㄴ. 존재 행위actus essendi ㄷ. 순수 현실태(실현태)'actus purus[20] |
라고 부른다.
가령 현대 물리학적으로 말해서, 시간은 빅뱅으로 시작하였고 빅뱅은 그저 '있을 뿐'이다. 빅뱅이 '있다'는 것을 넘어 더 시간적 인과를 물을 순 없다. 물리학적 법칙들도 그저 '있을' 뿐이며, 물리학적 무(無)라 할 수 있는 양자요동quantum fluctuation에서 더 거슬러 인과를 물을 순 없다. 그러나 이것들은 '있다'는 점에서 없는 것, 혹은 사유 속에만 존재하는 것과 구별이 된다. 이러한 존재자들을 없는 것들과 구별하게 하는 무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건 그냥 있을 뿐이야"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원인을, 토마스 및 토마스주의자들은 '존재하다'esse, 제1원인, 존재 행위, 순수 현실태(실현태)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제1원인에 대해 흔히 반론으로 제기되는 것(OO는 '그저' 있을 뿐이다)은 최소한 토마스 및 토마스주의에 대해선 반론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토마스 및 토마스주의의 사유를 뒷받침하는 논거일 뿐이다.
결국 존재자는 그저 '있을 뿐'이다.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제1원인이란 없다.
철학적으로 제1원인론이 주장되어 온 역사는 엄청나게 오래되었고, 그에 대한 반론들도 몇 가지 제시되어 왔다.[24]
제1원인론은 더 이상 현대 철학의 주류 담론에서 논의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폐기되었거나 반박된 명제는 아니다.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논의의 중심에서 벗어났을 뿐, 존재의 근원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에 따라 제1원인론은 중요한 철학적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특히 제1원인론과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점은 '운동'과 '원인'이라는 개념을 근대 물리학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에 해당하는 라틴어 motus(혹은 그리스어 kinēsis)는 물리학적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 제14장에서 사각형이 닮은꼴로 확대되는 기하학적 변화까지도 포함시켰듯이, '변화'나 '바뀜' 전반을 아우르는 폭넓은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물질'을 뜻하는 영어 material의 어원인 라틴어 materia 역시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의 '질료', 즉 가능태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동일하게 '원인' 개념 또한 물리학적 인과 관계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철학적 '원인'은 모든 유한유ens 혹은 우연유ens의 존재 근거를 탐구하는 개념으로, 개별 사건의 인과 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는 보편적인 원칙을 지칭한다. 따라서 물리학 이론이 고전 역학에서 양자 역학으로 대체되더라도, 모든 존재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철학적 전제는 흔들리지 않는다.[25]
위에서도 말했듯이 원인의 무한한 소급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이런 소급은 어째서 사물들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가능태의 본질이 현실태actus[26]로 실현actus 되었는지, '존재한다'esse는 작위actus가 왜 사물들에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비록 제1원인을 통해서 현실태actus라는 작위actus를 설명하는 형이상학적 설명이 오늘날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한다'는 작위에 관심이 있다면 제1원인론은 여전히 유효한 설명이다.
제1원인론에서 주의할 것은, 이것 자체는 그리스도교 신론 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론은 당연히 이에 해당하지 않으며,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도 위의 본문(신학대전 제1부 제2문제)에선 말 그대로 '제1원인이 존재한다'를 논증할 뿐이다. 여기에 토마스는 "모든 사람은 이런 존재를 하느님으로 이해한다"고 덧붙이지만, 이 덧붙임은 "이로써 삼위일체론이 입증되었다"는 부류의 언급이 아니라 단지 철학에선 이런 존재를 신으로 부른다는 의미일 뿐이다.[27] "신이라고 불리니까 이런이런 성격이 따라붙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아니며, 일단은 신이라고 불리는 이 제1원인의 성격은 다른 본문에서 철학적으로 논의된다. 따라서 제1원인론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이를 그리스도교 신론와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며, 토마스의 언급은 고전기 희랍 철학부터 이어져온 제1원인론을 자신의 색깔로 집대성한 것이다.
신학대전은 여기에 뒤이어 신은[28] 가능태가 없는 순수현실태이며 질료와 형상의 합성이 없고(1부 3문 2절) 우유accidens도 없다는 것(1부 3문 6절), 신에겐 본질essentia과 존재esse가 동일하다는 것(1부 3문 4절), 신이 전적으로 단순하다는 것(1부 3문 7절), 선bonum은 존재자ens와 개념상으로만 구별될 뿐 실재적으로 동일하다는 것(1부 5문 1절), 신이 선하고(1부 6문 1절) 최고선이라는 것(1부 6문 2절) 등을 논의하며 점점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간다.
삼위일체론의 경우 신 안에 어떤 실재적 관계들[29]이 존재한다는 것(1부 28문 1절), 피조물 안에서 우유적 존재를 갖는 것은 신에게 전이될 땐 실체적 존재를 가진다는 것(1부 28문 2절), 따라서 실재적 관계들은 신의 본질과 같지만(1부 28문 2절) 관계는 구별을 내포하며 "같은 곳에서 능동이 운동과 같고 수동도 운동과 같다고 해서 능동과 수동이 같은 것이라는 귀결이 되는 것은 아니"듯이 신 안의 실재적 관계들은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1부 28문 3절) 등을 논의하며 점점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제1원인론을 철학적으로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자 서구 철학이 고전기부터 종교간 장벽을 넘어 가져온 사유로 생각해야 한다.
[1] 주의를 주자면 이 '최초'는 시간적 의미의 '최초'가 아니라 논리적 '최초'를 말한다.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부터가 우주에는 시간적 시작이 없다고 봤고, 이 문서에서 길게 설명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의 시간성'은 믿음의 대상일 뿐 철학적 증명 대상(곧 '자연철학적 방법론'의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제1원인론의 논법을 살짝 비틀어서 우주의 '시간적 최초'를 철학적으로 입증하려 드는 시도에 대해 토마스는 이렇게 반론한다:
"세계가 항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만 신앙으로만 파악되는 것이고 논증적으로 증명될 수는 없는 것이다.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무한히 진행하여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결과를 위해 그 자체로써 요구되는 원인들이 무한히 다수화되어 가는 경우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돌은 막대기에 의해 움직여지고 막대기는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등 이렇게 무한히 진행되어 가는 경우이다. 그러나 작용인의 계열에 있어서는 우유적으로 무한히 진행되어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을 생각된다. 즉 무한히 다수화되는 모든 원인이 다만 하나의 원인의 질서를 갖고 있어 이런 원인들의 다수화가 우유적인 경우이다. 예컨대 제작인이 망치가 하나 다음에 하나가 부러지기 때문에 우유적으로 많은 망치로 작용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 망치에는 다른 망치의 작용 다음에 작용한다는 것이 우유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낳는 자인 한에 있어 이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낳아진다는 것이 우유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인 한에 낳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아들인 한에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낳는 자로서의 사람은 누구나 다 능동인들의 계열에 있어서 같은 하나의 단계를 즉 특수한 낳는 자의 단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서 무한히 낳아져 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만일 이 사람의 출생이 다른 이 사람에게 의존하고 그리고 원소적 물체들에 의존하고 또 태양에 의존하는 식으로 무한히 진행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q.46, a.2., 정의채 역주)[2] 단,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 내지는 unmoved mover라는 관습적 번역에는 주의점이 필요하다. 한자 動(움직일 동) 및 영어 move로 번역된 희랍어 kinēsis는 영어 kinetic의 어원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 생각하는 '운동'을 넘어 '변화' 일반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가령 kinēsis에는 생명의 '탄생'도 들어간다. 다시 말해서 '부동의 원동자'의 원래 뉘앙스는 '남을 변화하게 하는 불변의 원인'이다.[3] 제1원인론을 주장하는 어떤 철학자들은 제1원인은 자기원인이다, 즉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산출했다고 보았다. 반면, 제1원인 자신조차 자기 자신의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제1원인의 원인은 대체 뭐냐?"라고 묻는 것은 아예 무의미하다고 본 철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니...[4] 제1절에서 토마스는 초월자의 존재가 모든 사람에게 자명한 것은 아니라는(=인간의 이성이 본래부터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제2절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 논증이 가능하다고 밝힌다.[5] 신학대전 각 절Articulus''의 통상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절Articulus의 주제에 대한 견해 A를 소개하고, 여기에 대한 반박 B를 소개한다. 그리고 주절에서 주제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A에 대한' 토마스의 견해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A는 토마스의 반대자들의 견해이고 B는 토마스와 같은 입장의 견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6] 여기서부터 토마스의 반대자들의 견해이다.[7] 여기서부터 '주절'이라 하며, 토마스의 견해이다.[8] 여기서 말하는 가능(possible)은 우연한 것, 우연적인 것(contingens)과 같은 것이다. 즉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말한며, 필연과 반대 의미이다.[9] 앞에서 소개된 두 번째 견해에 대한 반박.[10] 여기서 '운동'은 현대 물리학적 의미의 '운동'을 넘어 변화 일반을 일컫는다. 가령 생물의 탄생은 여기서 운동에 포함된다.[11] ens는 관습적으로 '존재자'로 번역되지만, 이는 근대 철학 맥락에서의 번역어인 '존재자'가 중세 철학으로 역류한 것이며 오히려 이해에 방해된다는 비판이 있어서 有를 대안 번역어로 쓰기도 한다.(예: 정의채) 유사한 이유로 고전 철학에선 '있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예: 김진성)[12] "자신들의 필연성을 단지 수용하기만 하는 것등의 무한한 연결고리 혹은 필연적이지 못한 것들의 자기 존재를 위한 연결고리는 복잡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난점을 스스로 해명하진 못한다.", 월터 패렐Walter Farrell, O.P.,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해설서 I』A Companion to the Summa. Vol I., 조규홍 번역, 수원가톨릭대학교 출판부, p.92.[13]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그 자체에 관한한 자명 한 명제다. 왜냐하면 이때 술어는 주어와 같기 때문이다. 후에 명백히 하겠지만 사실 하느 님은 자기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그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 명제는 우리에게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명제는 우리에게 더 명백하게 알려지고 그 본성 을 따라서는 덜 명백하게 알려진 것을 통해 논증될 필요가 있다. 즉 결과를 통해 논증될 필 요가 있다."[신학대전 1부 2문 1절 주문, 정의채 번역]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하나의 논증'을 반대했으니, 그 역시 거기서 사유와 존재가 허용될 수 없는 방식으로 동일시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명제들을 '본래 그 자체로'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quoad se)과 '본래 그리고 우리를 위해' 명백한 명제들(propositio per se nota et quoad nos)로 엄격히 구별하고, 안셀무스의 논증을 첫째 범주에 부속시켰다: 비록 존재론적 논증이 그 자체로 논리정연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 본질에 대한 즉각적 직관의 결여 때문에, 그 본질에 대한 신앙이나 불신앙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토마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질서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위르겐 베르비크Jürgen Werbick, 도로테아 자틀러Dorothea Sattler, 테오도어 슈나이더Theodor Schneider, 『교의학 I/1: 서론, 신론』Handbuch der Dogmatik BD. 1: Prologomena / Gotteslehre (22000),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24, p.163 ][14] "신들과 우주만물에 관하여 그 당시 [발췌자 주- 헤시오도스 시대] 통용되고 있던 관념들의 세 가지 특징은 특별히 강조될 만하다. 그 당시 그리고 그 후 피타고라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어떤 하나의 자연적 실재가 뒤이어 나타나는 신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의 신적인 기원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탈레스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포함하여 우주 내의 모든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했다.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어떤 실체가 그 자신으로부터 우주만물을 발생시키는 살아있는 실체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가장 잘 주장할 수 있는가? - 같은 책 67쪽] 둘째, 이 신적인 기원의 이름과 본성에 관한 점증하는 관심이다. 이러한 관심은 헤시오도스가 호메로스의 선택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사실과, 이 시기 동안에 다른 많은 신발생론들이 지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 가운데 몇몇은 신적인 기원을 선택함에 있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그 둘과 달랐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다. 셋째, 신이나 인간의 본성과 힘이 그가 유래한 실체에 의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그 결과라는 관념이 이미 통용되고 있었다. ... 어떤 다른 행위자의 개입 없이 자기 자신과 닮은 어떤 것을 산출할 수 있는 능동적 실체라는 이 관념은 물론 그리스 사유에 대해 너무도 심원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로이 케네스 해크Roy Kenneth Hack, 『그리스 철학과 神: 소크라테스이전 찰학자들에게서 신 개념의 역사』God in Greek Philosophy to the Time of Socrates (1931), 이신철 번역, 도서출판 b, 2011, p.54[15] 종교학에서 유일신론Monotheism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일신(one god) 외 기타 신들을 일신의 한 단면만도 못한 비독립적 영으로 본다. 기타 신들의 이론적 비존재를 논하지는 않으나 실천적 비유효성을 주장하며,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사이에 위치한다.[16] "오르페우스의 교설들은 7세기에 '제우스'라는 이름이 일정한 양과 질의 신적인 힘을 감싸 안고 있으면서 또한 디오니소스나 자그레우스라 불리는 또 다른 유사한 상징으로 마음대로 변환될 수 있는 단순한 상징으로써 다루어질 수 있음을 상세하게 예시해 보여준다. [폴 몽소Paul Monceaux(『오르페우스교의 말들』s. v. orphici, Daremberg et Saglio)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이른바 오르페우스교의 신들은 다만 하나의 유일한 신의 서로 다른 이름이거나 다양한 형식들 또는 연속적인 화신들일 뿐이다..] 오르페우스교들 역시 하나의 신적인 힘이 우주만물의 근원이라는 그리스의 지배적인 믿음에 동의한다."(Hack, 같은 책 p.59)[17] 이건 빅뱅우주론이 자연과학의 정설인 오늘날에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이기도 하다.[18]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주에 시간적 시작이 있는지 여부'가 철학(자연철학)으로 논증될 순 없다고 봤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구히 존재해온 우주' 개념이 자연철학적으론 더 개연적이라 보았다. 동시에 '시간' 자체는 신앙에 의거해 하느님의 창조라고 보았다. 토마스는 언뜻보기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견해(철학: 우주는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억겁의 시간 전에도 존재했다 / 계시: 시간 그 자체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호 모순이 아님을 파악하고 둘 다 긍정한 것이다.[19] (발췌자 주석) 창세기 1장 1절[20] '순수한 행위'로도 직역할 수 있다.[21] (발췌자 주석) quidditas는 '무엇' 내지는 '하성(何性)'으로 번역되는 말로, 본질essentia의 동의어이다. 곧, 본질essentia이란 "X라는 것은 무엇quidditas인가"라는 뜻이다.[22] (발체자 주석) actus는 형이상학에서 '현실태'로 번역되지만, 라틴어에서는 그냥 담백하게 '행함', '작위', '실현'을 의미한다. 이 라틴어에서 파생한 영어 act와 유사하다. 사실 한자어 현실(現實)도 그냥 실현(實現)을 뒤집었을 뿐인 단어이며, 한자 의미는 real보다는 act에 가깝다.[23] (발췌자 주석) '존재한다'esse는 '생물이다', '동물이다', '지성적 동물이다' 같은 무엇임(본질)의 영역에 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행한다actus는 작위actus의 영역에 속하며, 동시에 가장 순수한 의미의 작위actus이고 우리가 스스로 행할 수 없는 작위actus이다. 이 순수한 형태의 작위, 곧 '순수 현실태'actus purus를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이를 통해 (범신론과 달리) 피조물과 창조주를 엄격히 구별하면서도, 모든 피조물을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게 하는 작위actus로서의 신 개념, 곧 '존재한다'esse와 동일시되는 신 개념을 말할 수 있게 된다.[24] 다음의 반론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으면 이 링크를 참조.[25]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부 1문제-12문제), 정의채(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 철학박사) 번역, 바오로딸, 32014, p.171 역자 주석[26] 희랍어로는 에네르게이아energeia라고 한다. 이 라틴어와 희랍어에서 각각 영어 act와 energy가 파생되었다. 영단어들에서 볼 수 있듯, '현실태' 개념은 어떤 형용사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작위'를 의미하며, 그래서 종종 '실현태'로도 번역된다.[27] 물론 '제1원인은 존재한다'라는 논증 후 토마스는 제1원인의 속성에 대한 논증으로 나아가지만, 이러한 논증'들'은 다음 논증'들'을 근거짓는 것이지 논증'들'끼리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원인을 신이라 부르는 언어적 전제가 망설여지는 현대인이라면, 제1원인의 속성들을 논하면서 그리스도교 신론으로 나아가는 논항들을 (즉 제1원인의 존재가 아니라 제1원인의 속성을 논하는 논항들을) '그리스도교적 신 증명'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며, 토마스의 논증에서도 현대인의 이러한 언어적 전제를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이는 동일한 사고를 표현하는 두 가지의 표현 양태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라는 물음과 무엇이 하나님인가라는 물음은 결국 방법론적으로만 구별된다.
하느님의 현존(Dasein)에 대한 물음은 하느님의 '그러한 존재'(Sosein)에 대한 전(前)이해를 함축하고 있다. 하느님의 현존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하느님의 그러한 존재를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위르겐 베르비크Jürgen Werbick, 도로테아 자틀러Dorothea Sattler, 테오도어 슈나이더Theodor Schneider, 『교의학 I/1: 서론, 신론』Handbuch der Dogmatik BD. 1: Prologomena / Gotteslehre (22000), 이종한 옮김, 분도출판사, 2024, p.188 ][28] 계속 강조되지만, 이는 명칭상 제1원인을 이렇게 부른다는 것이지 신의 성격이 이 명칭로부터 증명된단 소리가 아니다. 제1원인이 존재하고 이 존재가 신이라고 불리는데, 이 존재의 성격을 이제 논해보자는 소리다.[29]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존재자의 10가지 범주 중 하나로서 언급되는 '관계'를 말한다. 10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 실체substantia, 양quantitas, 질qualitas, 관계relatio, 장소ubi, 시간quando, 자세situs, 소유habitus, 능동actio, 수동pas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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