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평론가 : 우병택 시인
시의 힘, 그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이영균은 ‘시인의 말’에서 “밤이 깊을수록 별이 더욱/또렷해지듯이 /책 속에 깊이 빠져들수록/별들 지면에 점점 또렷해진다/그대와 함께”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유된 것으로 보인다. “책 속에 깊이 빠져들수록”도 그렇지만 “별들 에 점점 또렷해진다.” 그리고 “그대와 함께”라는 말도 그러하다.
밤이 깊을수록= 책 속에 깊이 빠져들수록 별이 더욱 또렷해지듯이=별들 지면에 점점 또렷해진다 그런데 ‘그대와 함께’라야 한다. |
이 도식의 ‘=’앞은 살아오는 동안 짧게 느껴지는 시간 개념, 자신을 온통 무엇에 바치는 숙명 등을 의미할 수도 있고, 아니면 후자의 ‘’과 관련이 있는 공간 개념일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두는 ‘그대와 함께’라는 전제가 따른다. 그렇다면 도식 외에 따라온 ‘그대’와 관련 있는 , 을 화두로 삼아 탐색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정체가 무엇이며, “별”과 “별들”은 왜 단수와 복수로 구별되어 졌는지 그 정체는 무엇이며, “또렷해진다”는 어떤 시적 현상으로 나타나는가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 평설은 ‘별’과 ‘그대’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도록 온 힘이 바쳐져야 할 것이다.
시인의 자아 탐색은 자신의 본체를 성찰하려는 데 있다. 내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 무엇, 그것이 이라는 정서든, 내면의 상처이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더욱 또렷해지는 그리움이든, 원형적인 그 무엇이든 그것을 표출해 내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쓴다. 그것이 ‘희미해져 가는 별’이라면 그것을 밝게 빛나게 시리 시를 쓸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그 힘으로 시를 쓸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의 감성은 쇠퇴해진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에 대해 단호히 고개를 저어야 한다. 쇠퇴하는 감성을 젊게 하려는 감각적인 시인에게 ‘나이’라고 하는 존재는 오히려 ‘별’의 빛을 흐리게 하지 못한다. 그래야 청결한 영혼을 가진 시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영균 시인은 ‘별’과 ‘그대’의 스토리를 시로, 네 번째 내는 창작시집을 “그대와 함께 흐려져 가는 별과 그대 밝히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지.
시인은 사물과 낯설게 만날 때 시적 상상력을 갖게 된다. 혹은, 시적 상상력으로 사물을 낯설게 만들기도 한다. 사물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결과이다. 그것에 새로운 생명 불어넣기이다. 삶과 인간 본체에 대한 환기이다. 그래서 시인은 낯선 만남에 늘 익숙해하며 또 그 만남을 원한다. 그 만남을 낯선 언어로 그려낸다.
이영균 시인의 표제 시가 『죽을 때까지 당신을 해바라기』이다. 부부간이라면 늘 주고받는 말이 ‘여보, 사랑해요’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적인가?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쿵! 하고 가슴 치는 울림에 좁은 내 서재를 한동안 서성거렸다. 여보, 사랑해요’가 아니라
‘여보.
사
랑
해
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해바라기』 전문
라고 손가락을 꼭꼭 꼽으며 말하잖는가. 일상사에서 돌출된 이런 사랑의 표현이 세상에 많고 많은 부부간에 얼마나 가능하겠는지. 남 얘기 말고 독자인 자신은 어떤지. ‘’이라는 말이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럼에도‘죽을 때까지 해만 바라보고 돌고 도는 해바라기가 되어 사랑하겠노라’라고 하지 않는가. ‘여보’는 ‘태양’이요, 시적 화자는 ‘해바라기’가 된다는 이 말 속에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그래서 일상이 오히려 낯선 것 아닌가. 아니다. 사물에 대한 ‘낯설게 하기’는 그것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결과이다. 그것에 새로운 생명 불어넣기이다. 이영균 시인은 4집을 준비하며 드디어 시 쓰기에 개안한 것이다. 천지가 개벽하듯이 말이다. 정말 그럴까? 어디 시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혹자는 이 시를 ‘짧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여보’라는 부름이 정말 짧은 것일까? 속삭일 때와 ‘그냥, 그저 그리고 거저’보다도 훨씬 다양한 ‘여보’가 있지 않은가. 화가 나서, 사랑스러워서, 등을 긁어 달라고, 아니면 오늘 밤에? 시인이 쓴 ‘여보’만 가지고도 ‘별’과 ‘당신’의 관계는 너무 다양해서 필설로는 풀이 난망이다.
이어지는 ‘사’‘랑’‘해’‘요’까지 4행으로 층을 지어 놓은 것에 대해서 이 시집을 다 할 때쯤 독자는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게 중에는 이영균의 발칙한 시 창작에 대해, 얄미워서 눈을 흘기게 될 수도 있겠다. 한 음절을 한 행으로 구조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행간에 많은 이야기를 숨겨놓았든지, 의미 공간의 비약을 의도적으로 시도한 것이든, 혹은 시의 내재율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 자신의 시학이기 때문이든 아무튼 시인은 이 모두를 적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아래 4층의 해설은 독자 몫으로 남기고 다음 시로 넘어가 보겠다. “그대와 함께 흐려져 가는 별 밝히기”를 위해서 갈 길이 바쁘기에 드리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별”과 “그대”의 정체는 무엇이며, 또 누구일까?
번호로 불리는 이름표를 달고서
그 속에서 나를 보네
그의 눈 속에서 한 마리 청노루를 보았네
나를 보고 산속으로 달아나네
따라서 산속으로 가네
더 깊은 산으로 가네
산 정상에 서자 저 먼 세상 사방이 빛나네
그는 다 갖고 싶었던 게 아니었네
단 하나 작은 관심뿐이었네
취하는 방법을 몰랐을 뿐이네
세상의 잣대는 그가 틀렸다 했네
몰랐기에 잘못을 했고 그 속에 갇히게 됐네
그를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슬처럼 맑은 사람이었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그의 청노루와
이슬에 흠뻑 젖었네
나는 깊은 산 정상에서 골짜기로
다시, 청노루의 눈에서
그의 눈으로 그곳을 나와 섰네
날이 뉘엿해져서야 면회실을 나서네
이 바깥도 그 속인 듯
억압을 풀며 세상의 편견을 보네
-『눈 설은 그 집에서』 전문
‘번호표’를 이름표 대신 달아야 하는 곳이 과연, 어디란 말인가. 매스컴에 눈에 익은 푸른 옷을 입고 오랏줄에 엮인 이의 가슴에 새겨진 숫자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눈 설은 그 집’은 그런 곳인가. 이영균 시인은 흔히 세상사에서 말하는 그곳을 끌어들여서 독자를 자신의 울타리에 갇히게 하려는 장치를 이렇게 표현해내는 것이 아닐지. ‘눈 설은 그 집’의 현상적 성격을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기 위해 새롭게 인식한 시이다. ‘세상의 잣대’가 말하길 ‘그가 틀렸다 했네’에서 ‘나’와 ‘그’의 정체가 드러났다. ‘나’가 ‘그 속에 갇힌’ ‘그를 만나고 면회실을 나서며’이 바깥도 그 속인 듯 억압을 풀며 세상의 편견을 보네‘라고’나‘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마치 거울 속의 나와 대면하는 나처럼 말이다. 이때 ‘그’와 ‘나’는 ‘별’과 ‘별들’만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그 정체가 드러날 일이다.
시인은 된 영혼을 소유하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탐색하기 위해 떠돈다. 그것이 태생적이든,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든,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헤맨다. 그것은 삶의 가치에 대해 탐색하기 위한 진지한 자유 정신이며 문학정신이다. 그래서 시인은 천형을 받은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창조 지평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 이영균을 잘 알지 못한다. 그의 이 시집 『죽을 때까지 당신을 해바라기』를 일별하면서, 그의 시를 관통하는 의식이 무엇인지 비로소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눈 설은 그 집」에서 의미 공간의 비약을 의도적으로 시도한 “별”과 “그대” 찾기는 계속되는 것이다.
배고픈 아이 울음 끝에 해가 지고
대장장이 아버지 방짜 짖는 망치질에
날이 저문다
아버지는 쉴 참에 막걸리로 배를 불려
돌아오면 이내 구들에 드러눕고
동네방네 전답 누비던 어머니는
품팔이가 본업인지 부업인지
날 저물어야 돌아오고
아가는 언니 등이
엄마 등인지 소쿠리 요람인지
울다 울다 잠이 든다
명절 저 징소리
흥인지 한인지 들어보면
수 없는 망치질에 농축된 생의 질곡
시작할 때 한번 끝날 때 또 한 번
한 푸는 경(經)*소리다
- 「방짜」 전문
시 「방짜」를 눈 지그시 감고 감상해 보면 금세 시에서 애처로움에서 오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지독하게 가난한 한 가족사가 처음부터 분위기를 어둡게 출발시키고 있다. ‘배고픈 아이 울음, 쉴 참에 막걸리로 배 불리는 지아비, 품팔이가 전업인지 부업인지 애매한 지어미’ 게다가 ‘아가는 언니 등이/엄마 등인지 소쿠리 요람인지/울다 울다 잠이 드는 아가’로 이어지는 시 흐름에서 한 가족사에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애절함을 숨기기 어렵다. 슬그머니 자신이 안고 있는 쓰라린 가족사를 시의 힘으로 잘도 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영균 시인의 이러한 유기적 인식과 자아에 대한 존재 인식과 연관 관계에서 시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가족들 모습이 기록된
오래된 어머니 수첩
10쪽 넘도록 시커멓게 번지거나
끊어질 듯 가늘게 써 내린 아버지의 기록과
꼭꼭 눌러 쓴 이복형의 페이지가 있다
가만가만 적어둔 동생 페이지 다음
쓰다간 지우고 또 지워 얼룩만 가득한 페이지도 있었는데
자신의 창백한 공란처럼
나의 페이지도 투명하길 바라셨나 보다
밤에도 어머니 페이지를 펼치면
환하게 감싸 안는 이 온기
-「어머니 수첩」 전문
시를 쓴다는 것은 과거 경험의 이미지를 재생하면서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시적 천재성은 선천적인 게 아니라 마치 컴퓨터에 입력시킨 자료들을 출력시키는 기술자와 같이 시인은 우리 기억 속에 축적된 수많은 과거 경험의 이미지들을 재생하여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이미지 재구성의 기술인 것이다. 이미지 재구성의 기술, 그것이 상상력이며 시인의 특별한 능력이 된다.
여기서도 시인의 가족사를 경험을 재구성하여 노출하고 있다. 아버지 기록은
10쪽 넘도록 시커멓게 번지거나
끊어질 듯 가늘게 써 내린
것과
꼭꼭 눌러 쓴 이복형의 페이지
가 함께 묶여 있다. 어쩌면 어머니는 이 둘로 하여 평생 생인손 앓듯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
반면에
가만가만 적어둔 동생 페이지 다음
쓰다간 지우고 또 지워 얼룩만 가득한 페이지도 있었는데
자신의 창백한 공란처럼
나의 페이지도 투명하길 바라셨나 보다
자신의 속으로 생산해 낸 남매인지 형제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먼저 기록한 두 사람의 기록보다 훨씬 더 애지중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연이 무엇인지 사랑하는 방법이 애달프다. ‘쓰다가 지우고 또 지워 얼룩만 가득한’ 페이지는 어머니가 기를 쓰고 지켜 온, 지극한 모정이 아니었을까.
돌 틈 민들레가 뒤 따라 난 민들레 탓에
말라죽었다
그는 언청이였다
소외된 그가 잘하던 건 공부뿐이었고
단 한 가지 소원은 형이라 불리는 거였다
엄마는 아픈 손가락에 더 애정을 쏟는다
아우인 건강한 손가락은 더 많은 일을 해도
관심 밖인 듯 엄마는 내심 정을
늘 눈 위에 두었다
그의 시샘 따낸 형이 죽고 나서야
사랑이란 걸 알았다
비 오는 날 제 몸의 홀씨 다 젖어 홀로 운다
아니 형제가 운다
비 갠 오후 돌 틈에 민들레가 살아났다
가슴에 옮겨 심는 엄마
다시는 죽이지 않으리란 다짐으로
꽃의 울음 움켜쥐고 운다
-「민들레 가족」 전문
하이데거는 존재의 참모습은 언제나 은폐되어 있으며 직접 인간에게 드러나지 않고 오직 존재자를 통해서만 제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때 존재를 내장한 존재자는 바로 언어밖에 없다고 했다.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존재이다.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현존재(Dasein)를 증명한다는 점에서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영균 시인이 시의 힘으로 자신의 내면에 또렷이 똬리를 틀고 도사리고 있는 것들을 끌어내어 보이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들레 가족’으로 읽히고 있는 가족사가 바로 존재의 참모습이 아닐까.
형제라고 하여 모두 다 같은 잣대로 잴 수 없는 것이 엄마의 마음일 것이다. 하물며 조금 모자라는 자식을 둔 엄마의 마음이라면 어떠할까?
어린 마음으로는 헤아리지 못했을 시적 화자는 또 얼마나 서운했을까? 모든 게 다 시간의 흐름이 알려줬을 것이다. 그 깨달음이 바로 ‘사랑’이었던 것이다.
망망 바다였을 거야
그의 어깨에서 들리는 낡은 신음
파스가 없어서 더운 물수건으로 찜질해
천장에 시선을 묶고
70년대 가요를 듣고 있어
발톱을 깎는데 발톱무좀 탓에 발톱이 부서져
연필깎이 칼로 후벼 파
너무 파서 피가 나네
휴지로 피를 감싸 쥐며 시원하데
겨울에 복주산 넘다 발에 얼음 박혔기 때문이지
여름엔 무좀 겨울엔 동상
그의 발은 평생 일만 했어
그런 그가
친구 같은 소의 눈 속으로 떠나셨지
소의 눈물, 그가 그리운 건 나도 그래
소의 눈 속은 망망 바다야
그곳엔 동상도 무좀도 없지
사뿐사뿐 저 가벼운 발
죽어야 쉬는 소
-「그 속에서 아버지가 걸어오셔」 전문
언급한 몇 편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사를 엮어냈다면 이 시는 아버지의 아픈 생전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표면적으로는 무좀과 동상으로 시달리는 아버지의 발이 주요 내용이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의 가족 사랑과 희생이 진한 국물처럼 시의 행간에 깊숙하게 스며들어 있다.
시인의 아버지를 넘어, 우리 사회의 아버지가 ‘소’로 형상화 시키고 있다. 묵묵히 주인의 짐을 지고 그렇게 살아오다가 죽어서도 가죽까지도 온갖 고급 제품으로 인간의 소용에 닿는 물건으로 재탄생되는 것이 ‘소’다.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그런 존재이다. 여기서 이영균 시인의 시를 감상하면서 밝아오는 별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조금 더 확실해지는 것이다. 나로 출발하여 가족에서 드디어 우리로 확대되고 간다는 사실 말이다.
소년인 날에 서 있다
그녀는 푸근한 구름이고
한없이 순종적인 책가방이다
책을 꺼내 펼쳐놓으면 세상은 변했다
그녀와 멀어졌다고 느껴지던 날엔
어느새 어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다
돌아보니 그녀 역시
늙어 다 쭈그러진 거죽만 있었다
속은 점점 어려져
책가방이기 전으로 간다
아이가 된 낯선 그녀를 애써 아이로 만난다
그 세월은 60년이나 전에서 해가 뜬다
아니 그녀가 잠이 드는
그런 날이 60년이나 걸렸다
고작 서너 시간의 밤을 위해서 잠들기를
점점 어려져 가던 그 밤
그 짧은 시간에 60년보다 훨씬 전인
90년을 거슬러 와서는 샛별로 갔다
날아갈까 잊혀질까
우린 샛별을 액자 속에 가두었다
그리곤 잠이 들면 나는
책가방을 조르는 소년이었다
-「소년인 날에 서 있을 때」 전문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구성원이다.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가정생활의 안전과 향상이 문명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가정에서 행복해지려는 것이 인간 모든 행위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소년인 날에 서 있을 때」도 ‘어머니’와 관련된 아픈 일화를 중심으로 가족사의 일부인 시다. 이미 치매로 고인이 된 어머니 영전에서 ‘날아갈까 잊혀질까/ 우린 샛별을 액자 속에 가두었다’라고 차마 말로 다 하지 못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상황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머니 생의 끝을 터져 나오는, 이 세상에서 더는 없을 그 뜨거운 무엇을 꾹꾹 눌러가며 떠올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가족의 일화가 회고적으로 등장하는 시에서는 그 가족주의적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누나랑 형, 동생이 이영균 시인의 시속에 등장하는 가족 구성원 모두이다. 특히 어머니와 형이 자주 등장한다. 그중에서 형은 ‘이복형’이었다가 ‘언챙이’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뻥을 튀겼고, 어머니는 이집 저집 다니며 허드렛일을 하기도 한다. 이런 가족사를 시의 힘이 아니고서는 드러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금까지 ‘별’과 ‘그대’를 찾아 이영균의 시 세계를 항행했다. 이제 대항해의 닻을 내리고자 한다. ‘별’은 어머니요, ‘별들’은 가족이며 ‘그대’는 시인이 여생을 함께하고자 하는 ‘여보’라고 확신한다.
이영균 시인이 4집에서 과감하게 툴툴 털어놓는 시는 자아 탐색을 여러 각도에서 시도하는 시인의 자기 실험으로 보인다. 이 실험에서 5집이 나오고 그 뒤가 이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자신의 시적 역량으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도는 불확실한 시대 유랑자적인 시인으로서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그 싹을 뒷표지 작인 「무릎을 세우다」의 아포리즘적 시 쓰기의 시도와 5부 끝 「힐링(Healing)」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가 걸어갈 시의 지평이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들판임을 확인한다.
이영균 시인이 가고자 하는 시의 방향이 시의 힘으로 한층 더 넓고 다양해지길 고대하며 그의 4 시집 발간을 시 구루(Guru)의 한 사람으로 축하한다.
|
첫댓글 우교수님 진면목이 엿보이는 시평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