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진 시인의 시 <가을 읽기> 삽화의 붉은 감나무 잎을 보니, 어린 시절 감나무가 많았던 고모님 댁 두메 마을이 떠오른다. 어릴 때 자동차도 안 다니던 그곳 두메 마을 고모님 댁까지 하루 종일 걸어갔던 그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래는 연전에 가족 카페에 올렸던 그 때의 추억이다.
고모님 댁 고욤 단지 - 길 따라 추억 따라 - |
감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몇 그루 어린 감나무에 감이 몇 알 달린 것 같더니, 누가 땄는지 저절로 낙과(落果)했는지 익기도 전에 사라졌다. 감나무는 도회지에서는 결과(結果)가 부실하거나 낙과하기 일쑤여서 발간 감이 주렁주렁한 감나무를 보기가 어렵다. 시골에서도 들녘보다는 두메에 가야 볼 수 있으니 무척 청정하고 고아한 나무의 품격이 엿보인다.
감나무를 볼 때면 고모님 댁이 있는 예천 은풍골이 떠오른다. 은풍골은 예로부터 감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이곳에서 나는 준시(蹲枾)가 임금님께 진상되었다고 한다. ‘준시’란 감을 깎아서 꼬챙이에 꿰지 않고 납작하게 말린 감을 말한다. 이와 달리 꼬챙이에 꿰어 말린 감은 ‘곶감’이다.
은풍골은 예천군 하리면 읍실(邑谷)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두멧골로, 막다른 골짜기에서 고개를 넘으면 풍기(豊基)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행정구역이 은풍현(殷豊縣)이었다. 읍실에서 약 십 리 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현촌(縣村)이란 마을이 있는데 옛날 현청(縣廳)이 있던 곳이다. 현촌 어귀에는 삼백 년 묵은 명목(名木) 엄나무가 있어 마을의 역사를 말해 준다.
현촌에서 불과 삼사백 미터 북쪽에 고모님 댁이 있는 서사(西沙) 마을이 있다. 지금은 마을이 옛날 모습과 달라졌지만, 마을 어귀에는 아름드리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작은 공터 다음이 바로 고모님 댁이었다. 감나무는 마을 어귀뿐만 아니라 마을 안 곳곳에 있었다. 마을 뒤편 고모님 댁 사과 과수원 언저리에도 큰 감나무들이 여러 그루 있었다.
서사 마을은 은풍골을 흐르는 개울 서편에 있고, 개울 동편에는 동사(東沙) 마을이 있다. 그 유명한 준시 감나무의 원종(原種)은 동사 마을 뒷골에서 자생하는 감나무라고 한다. 이 감나무의 감은 수분과 당분이 많고 껍질이 얇은 특징이 있어, 색다른 맛을 지녔다고 한다. 이 감나무는 접목이 잘 되지 않아 다른 동네에서는 볼 수 없으며, 바로 옆 동네에 옮겨 심어도 나무는 살지만 감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은풍골의 감이 이처럼 명물인데, 사실 나는 은풍골의 감 맛보다 고모님 댁 고욤 맛을 잊을 수 없다.
국민학교 겨울방학 때 할머니와 함께 서사(西沙) 고모님 댁에 가는 날이다. 풍산 설뭇 마을에서 칠십 리 하룻길을 걸어야 하니 일찌감치 행장을 차렸다. 숙모님들이 손수 떠 주신 스웨터와 흰색 무명 양말로 무장했다. 그리고 기다란 명주 목도리로 얼굴만 내놓고 머리와 귀를 칭칭 동이고 남은 자락으로 목을 둘렀다. 얇은 명주 천이 보기보다 참 따뜻했다. 이 정도면 매서운 찬바람에도 끄떡없다. 전날 만든 노란 콩고물 묻힌 인절미 보따리와 길 가다가 점심 요기하려고 아침 밥솥에 찐 고구마 꾸러미를 할머니와 나누어 들었다.
마을 뒤 고개를 넘어 안동-예천 간 국도에 들어선다. 지금은 포장도로지만 그 때는 비포장이었다. 흙길이었지만 주로 군용차와 버스가 간간이 다닐 뿐이어서 이따금 먼지가 날려도 견딜 만했다. 버스가 다녔으나 버스 탈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차멀미를 심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버스를 탄다 해도 그 때는 예천읍에서 은풍골로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어차피 절반은 걸어야 했다. 국도를 걷다가 버스가 오면 잠시 미루나무 가로수 쪽으로 몸을 돌려 버스 꽁무니에서 일어나는 흙먼지 구름을 피하곤 했다. 그 때의 버스는 흰색이었다. 지금의 버스와 달리 보닛이 앞으로 튀어나왔고, 뒤에는 짐을 실을 수 있도록 번호판 위쪽에 작은 선반이 달렸다. 아이들은 이런 버스를 ‘백돼지’라고 불렀다.
해가 중천에 올 때쯤 예천읍에 다다른다. 여정의 절반 가까이 온 셈이다. 예천읍의 동남 언저리를 내성천(乃城川)의 지류인 한천(漢川)이 감싸 흐른다. 읍내로 들어가자면 남쪽에선 예천교를, 동쪽에선 한천교를 건넌다. 예천교는 안동 통로, 한천교는 영주 통로로 이어진다. 할머니와 나는 예천교를 건너 읍내로 들어서서 한천교로 빠져나온다. 새파란 겨울 하늘 아래 하얀 콘크리트 한천교를 건너던 감회가 지금도 유별나니 왠지 모르겠다.
한천교를 건너 영주 통로를 두어 마장 지나면 왼쪽으로 은풍골 가는 지방도가 갈라진다. 지방도로 들어서면서부터 풍경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국도의 길바닥은 가끔 모래를 뿌려서인지 흰색에 가까웠는데, 지방도의 그것은 누런 흙색 그대로다. 그리고 국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일정한 키의 미루나무 가로수가 늘어섰는데, 지방도는 가로수가 거의 없고 가끔 몇 그루 나무들이 수채화처럼 자연스레 서 있다. 길 폭도 좁아지고 좌우의 산도 더 다가와 시야도 좁아졌다. 무엇보다 왼쪽에 한천의 물길을 동무하고 상류로 올라가는 길이어서 발걸음이 즐거워진다. 조금 전에 건넌 한천교의 감회가 유별난 게 이렇게 다른 세상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 길로 들어서면서 할머니와 함께 아침에 꾸려온 찐 고구마로 요기를 한다. 삼십여 리를 걸었지만 다리 아픈 줄 모르겠다. 서울서 피란 올 때 수백 리 길을 걸어서 단련된 까닭일까. 할머니는 워낙 걸음이 가벼우셔서 나보다 한 걸음 앞서가신다. 걸음뿐 아니라 할머니는 무슨 일이든지 재바르게 하셨다. 봄이나 여름에, 온 식구가 동원되어 콩밭이나 조밭을 맬 때면 할머니가 앉은 고랑이 제일 앞서 나갔다. 쇠죽거리가 떨어져 갑자기 집 근처 논둑이나 밭둑에 쇠꼴을 베러 나가면 할머니 다래끼는 순식간에 가득 찼다.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고모님 댁에 도착하려고 한천의 개울물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한천은 바로 은풍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다. 골이 깊어 물은 사시사철 끊임없이 흐른다. 이 개울엔 간간이 보를 막아 주변 논에 물을 공급하고 물방아도 돌린다. 풍산 같은 들녘에서 보지 못하는 물방앗간이 개울을 따라 몇 군데 있었다. 물방앗간이 있는 맛질을 지나고 읍실을 거쳐 마침내 서사에 다다르면 해가 서산에 기운다.
친정어머니와 조카가 뜻밖에 찾아오자 고모님은 반색하며 맞아 주셨다.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기별 없이 찾아가니 더욱 반가운 만남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지친 몸을 따뜻한 아랫목에서 녹이고 있는데, 고모님이 작은 단지와 숟가락을 들고 오셔서 저녁을 지을 동안 우선 먹으라는 것이었다. 단지 속엔 짙은 갈색의 잼(jam)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난생 처음 먹어 본,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고욤이었다.
고모님 댁 부엌 옆 담장 안에 고욤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고욤나무는 감나무과에 속하며 도토리만한 고욤 열매를 맺는다. 고욤은 그냥 따서 먹기도 하지만, 단지에 담아 저장해 두면 잼처럼 변한다. 이 때의 맛은 비견할 데가 없다. 오죽하면 “고욤이 감보다 달다.”는 속담까지 있을까. 그 고욤 맛이 좋아서였는지 그 후 고모님 댁에 갈 때면 그 고욤나무에 올라가 놀곤 했다. 지금도 어릴 적 고모님이 안겨 주시던 그 고욤 단지가 그립고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2009.11.15)
고염나무
첫댓글 전형진14.10.25 04:22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지난 16-17일 1박2일로 [방주회]에서 안동 다녀오며 [소수서원] 가다가 풍기에서 사과를 6 명이 18만원 어치 샀어요. 내가 회장이라서 내 차로 모시고 갔지요. 아직도 그곳은 시골 냄새가나고 산천이 좋습니다.
14.10.25 12:22
그랬군요. 소백산맥 기슭에 자리한 소수서원, 부석사, 희방사 등은 학창 시절에 소풍다니던 곳이었지요. 지구온난화로 대구사과가 풍기까지 올라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