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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1강
말씀/ 잠언 1:1-33절
요절/ 잠언 1:7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JBF 출신 증언에 의하면, 2세들은 본문 요절 말씀을 귀에 딱지 나도록 들었다고 합니다. 불만으로 쏟아낸 증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언 자체가 잔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반복하여 권면하며 훈계하고 경책합니다. 그만큼 사람의 본성 혹은 세상의 지식과 충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듣지 않는다면 잠언은 잠이 오는 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잠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임으로 영혼의 혈자리를 찌르는 말씀으로 와 닿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개론에서 말한 대로 잠언 저자는 솔로몬입니다.(1) 인류 역사상 가장 똑똑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문과와 이과를 통합한 뇌를 가졌습니다.(왕상4장) 지혜로운 재판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이라는 신앙명은 UBF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습니다. 조기교육과 입시 열기가 뜨거운 한국이기에 다니엘 학습법보다 솔로몬 학습법이 더 유명해져야 맞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솔로몬이 삶으로 남긴 후유증으로 생각합니다. 최고 학자, 최고 음악가, 최고 권력, 최고 부자, 최고 전략가... 최고의 자리를 모두 차지했으면서도 이방여인들의 꼬임에 넘어가 우상숭배에 빠져버렸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잘 짜여진 신학이론이 아니라 뼈아픈 시행착오와 후회를 바탕으로 삶을 통찰하여 나온 지혜로 추정됩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올바른 삶의 방향을 향해 가는 지혜의 중요성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살아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고, 뼈아픈 실패를 겪어야만 아는 것들도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여 올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돕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2)
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핵심 포인트는 ‘훈계를 받게 하고 슬기롭게 하고 근신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훈계를 받아야 지혜롭게 행하고 근신함을 가져야 공의롭게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을 목자가 필요한 양으로 표현한 이유입니다. 재능만으로 슬기로운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인내, 관용, 성실, 용기... 이런 인성이 더 중요합니다. BTS 성공의 비결로 인성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 재능을 가졌으나 인성문제로 사라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메이저리그나 NBA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운동능력만큼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이 인성입니다. 음주운전이나 가정 폭력이나 약물 전과가 있으면 역대급 재능을 가졌을지라도 패스합니다.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 선수는 천위페이 선수에게 7번 대결하여 모두 패했었습니다. 천위페이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다가왔을 때, 그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나에게 날마다 훈련이 필요하구나’ 그때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훈련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능 문제에 과몰입되어 있습니다. 재능이 있어야 탁월한 인생, 복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해석에 익숙합니다. 재능으로 교만해지기도 하고 재능으로 절망해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재능은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살게 하는 동력이 아닙니다. 훈계와 슬기와 지식과 근신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목자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 훈계를 주시고 지식과 근신하는 영을 공급해주십니다. 그때 귀를 막고 자기 고집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겸손히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루가 다르고 일년이 다르게 나날이 성장합니다. 강해집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1장 7절에서 디모데를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신유나 축귀나 예언같은 어떤 은사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목자가 황금의 입을 가졌을지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사탄의 먹잇감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능력도 얻고 사랑도 얻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재능 문제에 매여 두려워하는 마음에 빠지지 않습니다. 명철한 사람은 때마다 주시는 훈계와 슬기와 지식을 믿고 지략을 얻습니다.(5)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오묘한 말을 알아듣습니다.(6) 우리에게도 잠언 말씀이 세상을 제대로 해석하는 명철과 삶을 지키는 지략을 얻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식의 근본이란 지식의 뿌리, 지식의 기초를 말합니다. 해석의 안경 혹은 세계관으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혹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세계관을 갖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관, 어떤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사건이 달라집니다. 창세기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을 때, 온 힘을 다해 충성하여 많은 유익을 남겼습니다. 그러자 주인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날마다 노골적으로 유혹했다고 했습니다. 쾌락이나 실리를 지식의 근본으로 삼는 사람이었다면, 신분상승의 기회, 노예 생활의 절망을 달래줄 기회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 ‘큰 악’, 독극물로 해석했고 ‘심판’을 불러올 폭탄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반면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 호의를 거절하고 모욕감을 안긴 나쁜 청년으로 해석했습니다.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내버립니다. 무엇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요셉의 감옥생활도 그러합니다. 요셉의 감옥생활은 ‘순결하게 사는 사람은 바보다’라고 해석을 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안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지식의 근본을 삼은 것입니다. 그때 도와야 할 죄수들이 찾아 도와주는 슬기로운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왕궁을 비우고 피난갔을 때, 시므이가 따라오며 독한 말로 다윗을 조롱합니다.(삼하16:5-8) 다윗의 부하들은 시므이를 죽이자고 건의합니다. 그때 다윗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부끄럽고 힘든 현재의 상황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끔찍한 수치를 견딜 수 있는 근신함을 얻었고 조급한 마음이 불러오는 악수를 피해가는 명철함을 얻었습니다.
요셉이나 다윗과 대조되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의 첫째 형 르우벤입니다. 르우벤은 아주 잘 생기고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거기다가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운명적으로 복을 받을 팔자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첩과 간통함으로 모든 축복을 망쳐버립니다. 자기와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물줄기를 끊어버린 것입니다. 유혹을 독으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다윗의 전임자 사울도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보여줘, 보여줘, 외치는 함성에 떠밀려 선을 넘어 제사를 드립니다. 소와 양을 다 죽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의 박수를 받고자 남겨둡니다. 그는 대중의 인기 얻는 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정권 유지의 지혜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왕권의 기초를 뿌리채 흔드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서너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유혹이나 욕심입니다. 마약 유혹, 성적 유혹, 도박 유혹, 부정 유혹..., 유혹이 인생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장벽이 안겨주는 절망도 있습니다. 입시장벽, 취업장벽에서부터 시작하여 보이지 않은 수많은 장벽이 있습니다. 내 힘과 의지로 넘어서기 어려워 보일 때, 자포자기하고 불신에 빠지기도 합니다. 상처와 갈등이 가져오는 위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해석입니다. 힘든 일이 힘든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좋은 해석을 하면 시련이나 어려움도 좋은 인생을 살게 하는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안경을 쓰고 해석하면 지혜가 생기고 용기와 근신과 도전하는 지식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지식을 근본을 삼아 건강하고 복되고 빛된 길을 걷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내 아들아’,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까! 부모도 권면과 훈계를 사랑으로 해야 하지만, 자녀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은 일이 생깁니까! 9절을 보십시오. 머리에 쓰는 아름다운 관이 되고 목에 걸치는 금사슬이 됩니다. 왕과 같이 권위 있는 사람, 부자처럼 풍성한 인생으로 빚어집니다. 10절에서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5절에서도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권면하고 권면하고 또 권면합니다. 그만큼 귓등으로 흘려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을 꼰대 취급하고 동류집단을 따라가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훈계와 법을 멀리하고 악한 자들과 함께 하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믿음의 사람들, 경건한 자들과의 교제는 삶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악의 공동체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악은 대부분 나 홀로가 아닌 공동체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11-14절에서는 아주 리얼하게 묘사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산채로 삼키고 통으로 삼키자...”(11,12) 남들처럼 뼈빠지게 수고하여 거두는 삶을 살지 말자! 통으로 빼앗자! 제비를 뽑아 채우자! 우리 하나가 되어 힘을 모아 해보자!(13,14)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함께’라는 말씀이 반복하여 나옵니다. 첫사람 아담과 하와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여자는 선악과를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혼자였다면 감히 실행하지 못했을 터인데, 함께 악한 일을 도모하기에 신이 나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학교 폭력의 현장을 보더라도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럿이 실행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임금을 바알세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상 문화는 의에 둔하고 악에 빠릅니다. 훔친 사과가 맛있다는 말처럼, 세상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을 삼는 것을 능력으로 여깁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가 전면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연일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삶이 망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치유불가의 후유증을 남길 것입니다. 전쟁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 혹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삶이 망가진 사람들, 그들의 아픔과 분노를 치유하려면 지금의 전쟁비용보다 훨씬 많은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피를 흘리는 길을 멈추지 못합니다. 평화와 공존을 쌓기 위해 오랜 시간 대화하고 타협하고 양보하고 인내하며 가는 것보다 당장 정치적 이득을 챙기는 것을 좋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 당당한 권리처럼 들이밀고 있습니다. 전쟁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현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떠받치는 사상의 근본은 진화론입니다. 약육강식,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를 도태시키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어떠한 이념이나 제도이든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기초하지 않으면 끔찍한 결과로 끝나고 맙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솔제니친은 공산혁명으로 수천만명의 목숨을 잃은 비극에 대해 이리 말했습니다.(1983템플턴상 시상식) “반세기 이상 전에 제가 아직 어렸을때, 러시아에 닥친 대 재앙들의 원인에 대해 어른들이 종종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잊었기 때문에 이사단이 난거야...' 20세기를 점철해 온 주요 특징들을 제가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이보다 더 정확하면서 간결하게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잊었다'고 말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그물 치는 것이 헛일입니다.(17) 그와 같이 은밀하게 악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18) 악인의 엎드림은 타인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자기 피를 흘리는 것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타인의 생명을 뺏는 것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결과로 돌아옵니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15:33,34)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사람들은 ‘어느 것이 내게 유익이냐’, 이익의 문제에 예민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을 좇아 가는 것은 망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20-27절은 소리치는 엄마와 귀를 막고 있는 아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입니다.(20)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말합니다.(21) 어리석고 거만하고 미련한 자들을 소리 높여 책망합니다.(22,23) 아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시끄러운 엄마를 상상해도 될 것 같습니다. 24-27절은 귀를 막고 고개를 흔드는 아들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부르는 데 오지 않습니다. 손을 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데, 돌아보지도 않습니다.(24) 귓등으로 흘려 듣고 책망의 소리에 몸서리를 칩니다.(25)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재앙과 두려움의 시간이 광풍같이 임하여 근심과 슬픔에 빠지게 만듭니다.(26,27)
어린 시절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핸드폰은 커녕 전깃불마저 귀했던 시절입니다. 어머니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저녁 밥상을 준비해놓고 소리 지릅니다. “그만 놀고 집으로 와라”, 캄캄해지기 전에 가족들 밥을 먹여야 상을 치우고 설거지도 할 수 있습니다. 미련한 아들은 어머니 소리를 들었는데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딱지치기, 자치기, 오징어게임에 푹 빠져 있습니다. 해가 떨어져 다른 친구들이 다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른 가족들은 밥 먹고 있는데, 어린 놈이 늦게 와서 밥상머리에 앉습니다. 겁대가리 없는 것은 그 뿐만이 아닙니다. 땀이 옷에 쩔어 땀 냄새는 징글징글하고 손과 얼굴은 먼지로 꾀죄죄한데도 곧바로 밥상머리에 앉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무개념에 무개념을 더한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야단과 호통과 매를 바가지로 뒤집어씁니다. 돌이켜보면 철없는 초딩 시절만 그런 그림을 보여준 것이 아닙니다. 인생 전체에 걸쳐 그런 모습이 따라옵니다. 해야 할 것을 하기보다 욕망에 이끌려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마음이 참으로 끈질깁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그때가 언제입니까! 지혜를 따르지 아니하고 욕망을 좇아 살다가 재앙을 만나는 날입니다.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후회의 때입니다. 웹툰을 보면 회귀를 배경으로 쓰여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10년 전 과거로 혹은 젊은 시절로 타임 워프하여 돌아가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소재인데도 많이 먹히는 이유는 그만큼 현재를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사회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중학생 때 알았더라면...’,
지혜와 훈계와 지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대로, 자기 욕망대로 달리고나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찾아옵니다. 시간은 언제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전심으로 달려야 할 때가 있고, 근신하고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헛짓 하며 그런 때를 다 보내고 버스 떠나고 나서 손 흔드는 꼴을 보입니다. 옳은 소리인 줄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피우며 돌이키지 않는다면, IQ와 상관없이 미련한 자임이 분명합니다. 목자로 살면서 수없이 목격한 팩트입니다. 수능 만점을 맞은 사람인데도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미련한 인생길을 갑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모든 자들이 그러합니다.(29,30) 훈계를 받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그 열매를 먹게 될 것이며, 자기 꾀로 배를 채우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31)
32,33절은 결론입니다. 훈계를 거절하고 지혜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고 퇴보하다가 죽음에 이릅니다.(32) 고생을 피해 안일하게 살다가 망하는 사람도 미련한 사람입니다. 훈계를 받은 대로 마음에 새기고 손발을 놀려 부지런히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평안을 누리며 두려움으로 추락하지 않습니다.(33) 모든 것이 헝클어지는 혼돈스러운 시대입니다. 기후도 헝클어지고 국제 질서도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지식의 근본을 삼는 것이 안전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