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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도고면 시전리(柿田里)
1) 자연환경
시전리는 순천향대학교에서 21번국도를 따라 서쪽 예산방면으로 시전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645번 지방도로 접어들면 나오는 마을이다. 전체 도고면의 중앙에 위치한 시전리는 북쪽에 기곡리, 신통리가 있고 동쪽에는 향산리와 신유리가 자리한다. 남쪽은 산지로 형성되어 있는데 도산리와 예산군의 간양리가 접해 있다.
서쪽에 있는 마을이 금산리와 효자리이다. 도고면의 으뜸산인 도고산(道高山, 482m)은 시전리와 효자리, 예산군 간양리, 세 마을이 만나는 지점에 있다. 21번국도가 전체 마을의 북쪽에 치우쳐 지나가고 그 바로 아래에 동서로 장항선철도가 지나간다.
시전시는 3개리로 나위어져 있는데, 1리는 갈티, 대문안, 동막골이다. 갈티는 21번국도 바로 남쪽이며, 그 남쪽에 대문안과 동막골이 있다. 1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 2리인 중뜸이고, 645번 지방도를 경계로 동쪽에 붙은 마을이 3리 양지뜸(갱리)이다. 양지뜸은 도고초등학교가 자리하고 갱리는 3리인 맨 동쪽 끝이다.
아산시 도고면 1919년 일제강점기 지도 1/50,000
아산시 도고면 위성사진
2) 마을역사
◆ 동막골
본래 신창군 남상면의 지역으로서 감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감밭 또는 시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티리 일부를 병합하여 시전리라 하여 아산군 도고면에 편입되었다. (한국지명총람4 충남편 하, 한글학회 1974)
시전리는 순천향대학교에서 예산 방향의 21번 국도르 타고 4.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시전사거리에서 동쪽으로 뻗어있는 645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1.2km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도로변에 도고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으며, 상점, 방앗간, 미용실이 있다. 시전리는 일제시대에 인구가 늘어나면서 시전1리(동막골, 갈티) 2리(중뜸), 3리(양지뜸)로 나누어졌다. 그 전까지는 마을 전체를 통틀어‘감밭’이라 불렀다. 감밭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마을에는 지금도 감나무가 많다.
시전 1리 동막골은 645번 국도변에 있는 도고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900m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다. 동막골은 1리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도고산이 장막을 친 것처럼 막혀 있어서 불린다. [(한국지리총람)4 충남편하 한글학회 1914] 동막골과 갈티는 중뜸을 사이에 두고 상당거리 떨어져 있으나 행정상 1리로 편재되어 있다. 동막골에는 현재 45호 정도가 거주한다.
감밭은 ‘조씨 배포에 이씨, 김씨’라는 말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의 입향조는 조씨임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창녕 성씨(昌寧成氏) 가 이주하였다. 이곳에 3성씨가 모여 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라 전한다.
조선시대에 창녕성씨, 김씨, 조씨 3성씨가 역적(逆賊)으로 몰려 낙향을 하게 되었다. 한양에서 마을까지 배를 타고 도망하던 중 도고산을 보고 산세가 매우 아늑하다 여겨 이곳에 터를 잡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창녕 성씨들은 흩어지고, 의령 남씨(宜寧南氏)가 마을의 대성이 되었다. 마을에는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성준경 가옥(순조 25년)이 남아 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마을 주변의 농지는 논에 비해 밭이 많은 편이다. 논농사는 마을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도고저수지 부근의 새양들에서 짓는다. 도고저수지는 시전 2리 중뜸과 동쪽으로 접하는데 일제시대에 준공하였다. 요즘은 지하수를 이용하여 천수답에도 얼마든지 농수를 공급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 저수지의 물이 유일했다.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마을의 농경지도 정리하였다.
마을에서 5분 정도 걸어 나가면 서낭당 고개가 있는데 이곳으로 버스가 지난다. 버스가 다니면서부터 온양장에 나가는 것이 수월해졌다. 버스를 타면 온양까지는 대략 30분 정도가 걸리고, 도고까지는 20분이면 도착한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온양장(4,9일)을 이용하는데, 물건을 사러 가는 경우보다 곡식이며 채소를 팔러 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도고에도 장이 섰었다. 온양보다 도고가 가까워서 도고장을 자주 이용하였으나 점점 상권마저 축소되어 지금은 장이 서지 않는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도보로 약 10분 정도 떨어진 도고초등학교에 통학한다. 도고초등학교는 약 70여 년 전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신창초등학교까지 도보로 통학했다. 45년 전에 마을에 도고중학교가 생기면서 인근의 아이들이 모두 이곳으로 진학을 했다. 그전까지는 1시간 이상을 걸어서 아산중학교에 다녔다. 고등학교는 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온양, 예산, 천안 등지로 진학한다.
▶ 지명
【마을】
• 동막골 : 감밭 남쪽에 있는 마을. 서쪽으로 높은 도고산이 장막을 친 것 처럼 막혀 있음
• 대문안 : 동막골 맞은편에 있는 마을. 전에 큰 부자가 살면서 담을 넓게 둘러치고 대문을 달았는데, 그 안쪽을 말한다.
【산】
• 도고산(道高山, 482m) : 마을의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큰 산이다.
• 삼봉산 : 마을의 동쪽을 위치한 산이다. 석적골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를 풍수가들은 석적골이 사람이고 삼봉산은 밥상이라 한다. 현재 일부가 인삼밭으로 개간되었다.
• 석적골 : 마을 서쪽에 위치한 창녕 성씨 선산이다. 그 형국이 마치 사람이 무릎을 괴고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고개, 나무】
• 갈티고개 : 갈티마을에서 북쪽에 있는 신작로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과거 칡넝쿨이 많이 있엇다고 전해져 갈치 혹은 갈티고개라 부른다.
• 쇳골고개 : 동막골 북서쪽에 위치한 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마을주민들이 시장에 갈때마다 항상 고개를 넘었다.
• 은행나무 : 성준경 가옥 안에 800년 된 은행나무 2그루가 나란히 있다.
• 느티나무 : 마을 입구에서부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수령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느티나무가 있다.
• 서낭나무 : 마을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마을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소실되었다. 과거 신부가 시집올 때에는 이 나무에 오색천을 걸었으며, 상여는 부정하다하여 이 나무를 지나지 못하게 했다.
도고산에서 내려다본 동막골
동막골에서 바라본 도고산
멀리서 본 성준경가옥
◆ 중뜸
중뜸은 시전 2리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마을의 서쪽으로 시전 1리 동막골, 북쪽으로 가향리, 동쪽을로는 도고저수지와 접한다. 645번 지방도로변에 도고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어서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남쪽으로 도고산이 마을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한 느낌을 준다. 예로부터 시전리는 배형국(배形局)으로 마을 내에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다. 배에 구멍이 나면 배가 가라앉는 것처럼 우물을 파면 마을에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물을 파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뜸은 본래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창녕 성씨(昌寧成氏)가 모여 살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자손들이 외지로 나가 정착하여 타 농촌지역과 같이 사람이 줄고 노인분들이 그나마 마을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성씨는 1집만 남아있고, 남씨도 몇 집 남아있지 않다. 그 이외에 김씨, 곽씨, 이씨 등 여러 성씨가 모여 사는 각성바지 마을이다. 전체 20여 호가 거주하며 호수가 조금씩 줄고 있다. 주민의 대다수가 60~70대의 노인으로 고령화 되어간다.
마을의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논과 밭의 비율은 비슷하다. 과거로부터 주민 대부분이 소작농인 빈촌이었다. 일제시대에 도고저수지가 생겼다. 마을 회관은 마을 중앙에 위치하며, 1990년대에 새로 지었다.
마을입구를 기준으로 동북쪽에 위치한 공장 뒤로 오래된 팽나무가 1그루 있다. 수령은 300백년 쯤 되 보인다. 마을의 종교시설로 감밭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 지명
【마을】
• 중뜸 : 온양온천역에서 21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6km 정도 거리의 순천향대학교에서 5km정도 더 떨어진 도로변에 위치한 마을이다. ‘중뜸’감밭 중앙에 있는 마을. 감밭이라고도 불림.
【하천】
• 도고지(도고저수지) : 신유리 앞에 있는 저수지. 1929년 3월에 도고산에서 흐르는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듬.
도고산에서 내려다본 중뜸(감밭)
중뜸에 자리한 팽나무
◆ 가향리(갱리)
시전 3리 가향리는 21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으로는 시전 2리 중뜸이 위치하며, 21번 국도 건너편에는 향산리가 있다. 가향(佳鄕)이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가향리라 부르기 보다는‘갱리’로 줄여 부른다. 21번 국도 기준으로 산 밑 마을을 산밑가향이라 하고, 들 쪽에 입지한 마을을 ‘벌가향’이라 한다.
마을의 형국이 조랭이[조리]와 같아 조랭이는 쌀을 일어 내는 도구이므로, 마을에서 재물을 쌓으면 곧 쏟아내야 하므로 이 마을에서는 큰 부자가 나지를 못한다. 이러한 이유로 마을에서 오랜 세월 터를 닦고 살면 가난해 진다는 속설이 있다. 산밑가향에 위치한 안산부터 마을 회관까지는 자라 형국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의령남씨가 묘를 쓰려고 지관을 불러 묏자리를 찾았다. 지관은 지금 있는 의령남씨 묘가 있는 위치를 가리키며 그곳을 파면 크고 넓적한 돌이 나올 것인데, 그곳이 명당이라면서 그 돌 위에 묘를 쓰도록 권했다. 석연치 목한 생각에 돌을 들어보니 그 밑에서 자라가 나와 순식간에 안산 뒤쪽의 못으로 사라졌다.
본래는 의령 남씨(宜寧南氏) 집성촌이었으나 시대가 변하여 주민들이 많이 줄고 지금은 몇 집 뿐이다. 마을 뒷산에 의령남씨 묘소가 모셔져 있다.
도고초등학교 주변으로 양지편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에 남씨터가 남아있다.
양지편 끝자락에 망덕이 있는데 이 아래쪽에 말무덤은 임진왜란때 교위 남 국걸(南國傑) [의령남씨] 이 삭령(지금의 경기도 연천)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그 타던 말이 그 의관을 물고 고향인 이곳으로 와서 죽었으므로, 의관장으로 망덕 위에 묘를 쓰고, 그 밑인 이곳에 그 말을 묻었다 전한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생활한다.
21번 국도를 지나 시전사거리에서 645번 국도로 접어들면 좌측으로 작은 산이 나온다. 이 산은 퇴미산이라 불리며 의령남씨 목사공파 중종후손들의 대종산이다. 산 아래에 재실이 있으며 산 정상엔 홍주목사를 지내신 8세 남척, 진사를 지내신 9세 침, 참봉을 지내신 10세 규, 진사를 지내시고 시전리에 터를 잡고 정착하신 11세 확, 임진왜란때 교위로 경기도 삭령에서 전사하신 12세 남국걸 그리고 형의 전사소식을 듣고 의병으로 참전하여 싸우다 전사한 그의 동생 12세 국신, 사재감 주부주사군을 지내신 13세 경복, 장예원 판결사를 지내신 14세 형, 가의대부 한성좌윤을 지내신 15세 의익의 의령남씨 선조분들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중종 후손분들의 묘소 또한 대종산에 모셔져 계시다.
이렇게 1리(동막골, 갈티) 2리(중뜸), 3리(갱리, 양지뜸) 시전리는 조선 중종때 의령남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대대로 조상분들을의 선산과 묘소를 모시고 살았으며 현재 목사공파 중종후손분들이 조상의 역사와 문화를 계승하며 살고있다. 의령남씨 시전리 회장은 남상도(24세손)씨가 맡고 있다.
의령남씨 묘소 전경(퇴미산 정상)
향산리에서 바라본 가향리(갱리)
양지편에 바라본 퇴미산(의령남씨 목사공파 중종 대종산)
양지편에 자리한 남씨터
망덕
석양뜰
▶ 지명
• 꽃무늬-돌[화석][바위] : 목당날에 있는 돌. 돌에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남씨-터(南氏-)[터] : 감밭 양지편에 있는 남씨의 터. 중종때부터 계속 그 종손이 살았다 한다.
• 노적-봉(露積峯)[산] : 대문안 뒤에있는 산. 모양이 노적가리와 같음.
• 말-무덤[묘] : 망덕 아래쪽에 있는 말의 무덤. 임진왜란때 교위 남 국걸(南國傑) [의령남씨] 이 삭령(지금의 경기도 연천)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그 타던 말이 그 의관을 물고 고향인 이곳으로 와서 죽었으므로, 의관장으로 망덕 위에 묘를 쓰고, 그 밑인 이곳에 그 말을 묻었다.
• 망덕[버덩] : 양지편 끝에 있는 버덩.
• 목당-날[산] : 신유리의 도고저수지 왼쪽에 있는 산부리. 방(方)씨의 무덤이 있는 데, 지사의 말이“이곳에 배가 뜨면 망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도고저수지 를 쌓느라고 이곳을 파매, 무늬의돌이 나왔다.
• 산밑-가향리[마을] : 중뜸 북쪽에 있는 마을. 향산리에 있는 벌가향리에 상대되는 산 밑이 된다.
• 석양-들[들] : 감밭 앞에 있는 들.
• 양지-편[마을] : 감밭 양지쪽에 있는 마을.
• 옥담-불[마을] : 도고초등학교가 있는 마을. 전에 옥(獄)이 있었다.
• 옥-터[터] : 옥담불에 있는 옛 옥의터.
• 화석(花石)[돌] : 꽃무늬돌.
출처: 장항선 노반개량공사구간내 문화유적 민속조사 (한국철도시설공단, 충청남도역사문화원) ,
(한국지명총람4 충남편 하, 한글학회 1974) 발취 및 수정함.
사진,편집, 의령남씨 자료 : 남원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