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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 봉화 스크랩 봉화금씨 무진장재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36 12.03.12 10: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무진장재(無盡藏齋)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 505
(원소재지 : 봉성현 문촌)
건 축 주 :  금원정(琴元貞, 1472∼1557)
건축시기 :  신라시대
중건시기 :  1480년
소 유 자 :  금동린(관리자 : 금동린)
문 화 재 :  경북 문화재자료 제152호, 1985-08-05 지정, 1동

건축 이야기
봉화읍 소재지에서 무진장재로 가는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915번 도로를 타고 남쪽 안동 방향으로 가다가 상운면 소재지에서 봉성 가는 길로 좌회전 하여 5km쯤 간다. 문촌리 큰 마을 입구에서 좌회전 하여 작은 물길을 따라 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봉화읍 소재지에서 36번 도로를 타고 태백 현동 방향 동쪽으로 4km쯤 가서 봉성 방면으로 우회전 하여 918번 도로를 탄다. 봉성면 소재지를 거쳐 6km쯤 간 뒤 청량산 쪽과 상운 방면의 갈림길에서 상운 방면으로 다시 5km를 가서 문촌리 큰 마을 위쪽 입구에서 우회전 하여 올라가는 방법이다.

마을 입구에서 농로로 계속 1.7km쯤 가면 작은 연못이 있는 몇 가구만의 마을이 나타난다. 그 마을 끝에서 좌회전 하여 채 포장되지 않은 농로를 200여 m 가면 무진장재가 있다.

무진장재는 입구로부터 수십 m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큰 느티나무에 가려서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느티나무를 끼고 들어서면 무진장재의 위용이 보이는데 그윽한 산자락에 쌓인 모습이 아늑하다.

건축 구성
무진장재는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 끝에 완전 口자형을 이루며 동향하여 자리 잡았다. 문화재 안내판 앞에서 보면 출입문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으로 무진장재가 있고, 우측으로는 안채가 있다. 이 재실은 막돌 허튼층쌓기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는데, 아마 땅 높이의 차이로 석축을 쌓아 평평히 하고 집을 지은 것이리라. 그래서 석축의 높이가 집 둘레를 따라 가며 보면 일정하지 않다.

막돌을 쌓아서 만든 정면 큰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좌로부터 1칸의 통로 문간, 2칸의 안방, 2칸의 부엌이 있다. 왼쪽에는 앞에서부터 4칸 누마루와 1칸 온돌방이 있다. 뒤쪽에는 좌로부터 1칸짜리 온돌방이 둘 있고, 1칸 부엌과 1칸 마루가 있다. 오른쪽에는 뒤에서부터 1칸의 도장방, 1칸의 사랑방, 1칸의 통로문간, 1칸의 마구간으로 되어 있다. 4칸 누마루는 2층 구조로 하부에는 각기 2칸씩의 곳간과 창고를 두었는데 입구 쪽은 담으로 막고 나머지는 비워 두었다.

이 건물의 중심이 되는 무진장재는 누마루 형태로 되어 있으므로 안마당에서 돌로 만든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게 되어 있다. 안마당에서 보면 앞면은 열려 있고, 뒷면에는 각 칸마다 흙벽을 치고 쌍여닫이 울거미널창을 달고 우측 온돌방과의 사이에는 4분합여닫이 문을 달았다. 대청 마루판은 우물마루이나 장귀틀 선이 일치하지 않는다.

무진장재는 건물 입구에서 보면 앞면은 팔작지붕이나 뒷면은 맞배지붕이다.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이 겹쳐진 겹처마이다. 또한 앞면은 막혀 있고, 이층에 2개의 판장문이 달려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안채의 지붕선은 서로 연결되어 가지런하고 무진장재의 지붕은 따로 높다.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여러 개다. 정면 누마루와 안채 사이의 문, 만약 사랑채를 상정한다면 중문에 해당할 것이다. 정면 안채의 중간에 작은 문이 또 하나 있다. 오른쪽 측면에도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이 문은 무진장재의 대청마루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갑자기 좀 낮아지는데 이는 통로에 아궁이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안방과 사랑방을 중심으로 관리인이 생활하며, 묘제를 지낼 때는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누마루에서 문중회의도 하고 제수도 점검하고 상도 차리고 하며 음복도 한다. 또한 비가 올 때는 대청에서 망제(望祭 : 멀리서 무덤을 향해 제사를 올림)를 올리기도 한다고 한다. 숙식은 각 온돌방에서 하는데 일반적으로 누마루에 딸린 방을 종손이 사용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은 연령에 따라 방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무진장재란 현판은 금원정의 글씨라고 하는데 따로 보관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중 이야기
- 무진장재의 현재 모습
현재 무진장재의 건물 주변에는 농사용 자재들이 마음껏 쌓여 있다. 건물 전면 마당 한 곁에는 고추를 말리느라 건조장을 만들었고, 또 한쪽엔 고추를 널어놓았다. 저쪽에는 트랙터가, 또 저쪽에는 트럭이 서 있다. 전면 축대 위에는 비료가 가득 쌓여 있고, 우측에 난 문 옆으로는 농사용으로 쓰이는 기름통들이 즐비하다. 그 옆으로는 고추밭 지주대도 묶여서 놓여 있고, 후면에도 이것저것 잡동사니들이 벽에 기대어 있다. 이곳에서 살림을 하려면 농사를 짓지 않을 도리가 없고, 농사짓는 집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고는 있지만 이 건물을 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온 사람으로서는 그다지 반가운 정경은 아니다. 그렇지만 잡초에 뒤덮여 퇴락해가는 다른 건물들을 수없이 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산다는 것 자체가 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관련인물
- 교유 인물
이현보(李賢甫),권벌(權?),이황(李滉)
- 활발한 교유와 학문활동을 했던 봉화의 선비

금원정(琴元貞, 1472∼1557)의 자는 정숙(正叔), 호는 농수(聾?)이며,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문곡(文谷) 금휘(琴徽)의 아들이다. 그는 연산군 때 진사가 되었고, 1515년(중종 9) 장사랑 영해 훈도(訓導)를 역임하고 현량(賢良)이 되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3) 훈구세력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화를 당했던 ‘기묘사화’가 발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자연에 묻혀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기르는 데에만 힘쓰며 살았다. 그는 당시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인 ‘사마회(司馬會)’를 조직하여 이를 주관하였다고 한다. 글씨에도 매우 뛰어나서 자필 현판이 전해온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금원정은 당시 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현보의 『연보』에 “1538년(중종 32) 10월 조에 금원정, 권희익과 함께 회노암(會老菴)에서 노닐다.”라는 구절이 있다. 『농암선생문집 속집 2권(聾巖先生文集續集卷之二)』에 금원정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회노암(會老菴)?이란 시가 있다.
충재 권벌이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무고를 받아 삭탈관직 당하고 귀양을 떠나게 될 때, 금원정이 공의 손을 잡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권벌은 웃으며, “나는 그대를 대장부로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 하느냐. 죽음과 삶과 화와 복은 천명이니 천명을 어떻게 할 것이냐.”하였다는 내용이 퇴계 이황이 쓴 ?권벌 행장?에 실려 있다. 이는 그가 비교적 이름이 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이 지역에서 활발한 학문과 교유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원정에 대한 정보가 넉넉하지 않고, 또 달리 전해오는 이야기도 없지만, 그는 매우 효성스럽고 우애가 가득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정형(李廷馨, 1549∼160)의 『지퇴당집(知退堂集)』에는 금원정이 효로써 그 어머니를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육(金堉, 1580∼1658)이 기묘사화에 관련된 인물들의 전기를 정리한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봉화 > 봉성상운권 > 문촌리
- 비봉산 자락에 펼쳐진 문촌리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는 응봉산의 서쪽 자락, 비봉산을 품고 그 좌·우에 펼쳐져 있는 마을이다. 서편으로는 상운면 운계리를, 동편으로는 명호면 풍호리를 두고 있는데, 명호와의 사이에는 응봉산, 풍악산 등이 넓게 펼쳐져 있으므로 마을들은 주로 운계리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문촌리의 서쪽, 응봉산의 깊은 품속에는 가시골(시동)이 있다. 이 산마을은 300년 전에 연안송씨가 개척한 마을이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빈 터로 남아 있다고 한다.
문촌리의 남쪽 부분으로는 마장고을과 묵녹고을(묵노골)이 있다. 묵노골은 묵은 밭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평택임씨가 150여 년 전에 여기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고, 이름이 그 때의 상황으로부터 붙여진 것이라고 하면, 이 산속 마을은 사람들이 들고 나고를 거듭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평택임씨도 떠나고 각성들이 몇 집 들어서 있을 뿐이다.
마장고을은 이곳에 옛 봉화고을의 역마 사육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골짜기가 넓고 풀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골 영역에서 가장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곳이 마장고을이다. 1백여 년 경주최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오늘날에는 각성들이 살고 있다.
문촌리의 중심은 기촌고을이다. 이곳은 문촌이라고도 한다. 상운에서도, 봉성에서도 먼 곳이라 하여 끝촌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상운과 봉성 사이에는 3번 지방도가 아래로 뻗어 있고, 그 위쪽으로는 102번, 또는 103번 면 도로가 가설되어 있다. 문촌리는 그 두 도로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기촌은 3번 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조선시대에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끝촌에서 문촌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곳은 6백여 년 전에 봉화금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문촌 또는 기촌의 동쪽 편으로는 깊우실·갈골·검성 등이 있다. 깊우실(심곡)은 깊은 산 속에 있는 마을인데, 150여 년 전에 연안송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갈골은 그 위쪽으로 붙어 있는 마을인데, 칡덩굴이 뒤덮고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산골마을이다. 검성골은 갈골의 북동쪽으로 좀 떨어져 있는 마을이고, 문촌에서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성을 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이 검소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검성골의 북쪽으로 좀 떨어진 지점에는 무진장고을이 있다. 이곳은 신라 고찰인 무진장재가 있었던 곳이라서 무진장고을이라고 한다. 아래쪽의 봉화재와 위쪽의 구름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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