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의 어떤 여자 중에서 군자(君子) 수삼 인이 개명(開明)에 뜻이 있어 여학교를 설시하라는 통문(通文)이 있기에 놀랍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을 삭제하고 다음에 기재한다.
무릇 사물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변하고 법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갖춰지는 것은 마땅한 이치이다. 우리나라가 이 땅에서 500년 동안 무사히 이어 왔고 우리 성상(聖上)께서 덕으로 왕위에 올라 국운이 더욱 왕성해졌고, 이미 황제의 자리에 오르셔서 문명개화의 정책을 펴고 계시니 우리 백성은 그 뜻을 깨달아 이전의 나태한 관습을 버리고 각각 개명한 신식을 준행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벙어리, 장님처럼 구습에만 빠져 있는가. 이것은 매우 한심한 일이다. 혹시 이목구비와 육체가 남녀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어찌하여 남자가 벌어 주는 것만 받아먹으면서 평생을 방 안에서 남의 통제만 받는가. 우리보다 먼저 개화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가 동등하여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며 각종 학문을 배워, 장성한 후에 결혼하여 평생을 살더라도 남자에게 조금도 압제를 받지 않는다. 이는 그 학문과 지식이 남자에게 못지않아 권리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중략)…… 이제는 옛 풍습을 벗어 버리고 개명 진보하여 우리나라도 타국과 같이 여학교를 설립하고 여자아이들을 보내어 각종 재주를 배우게 하여 이후에 여중군자들이 되게 하도록 지금 여학교를 창설한다. 뜻있는 동포 형제들 중 여러 여중호걸들은 각각 분발하여 귀한 딸들을 우리 여학교에 보내 달라.
9월 1일 여학교 통문 발기인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
〈황성신문〉, 1898년 9월 8일
**소사(召史)란 남편을 사별한 과부를 가리킨다.
아래는 원문인데 현대문으로 옮긴 것과는 맛이 좀 다릅니다. 더 과격!! ^^ 예를 들어 " 엇지하야 병신모양으로 사나희의 버러쥬 것만 안져먹고..."같은 표현들이 현대문에서는 순화(?)되어 표현되어있어요.
대져 물이 극면 반다시 변고 법이 극면 반다시 갓츔은 고금에 덧 리치라. (중략) 일신우일신을 사마다 힘쓸 거시여 엇지하야 일향 귀먹고 눈먼 병신 모양으로 구습에만 져 잇뇨. 이거시 한심헌 일이로다. 혹쟈 이목구비와 지오관 륙톄가 남녀가 다름이 잇가. 엇지하야 병신 모양으로 사나희의 버러쥬 것만 안져 먹고 평을 심규에 쳐야 의 졀졔만 밧으리오. 이왕에 우리보다 몬져 문명화헌 나라들을 보면 (중략) 사나희의게 일호도 압졔를 밧지 아니허고 후대을 밧음은 다름아니라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희와 못지 아니헌고로 권리도 일반이니 엇지 아름답지 아니허리오. 슬프도다. 젼일을 각허면 사나희가 위력으로 녀편네를 압졔허랴고 한갓 녯글을 빙자하야 말허되 녀 안에 잇셔 밧글 말허지 말며 술과 밥을 지음이 맛당허다 허지라. 엇지허여 지륙톄가 사나희와 일반이여 이흔 압졔를 밧어 셰샹 형편을 알지 못허고 죽은 사 모양이 되리오. 이져 녯 풍규를 젼폐고 명 진보야 우리나라도 타국과 치 녀학교를 셜립고 각각 녀아들을 보여 각항 조를 호아 일후에 녀즁군들이 되게 올 로 방쟝 녀학교를 창셜허오니 유지허신 우리 동포 형뎨 여러 녀즁 영웅호걸님네들은 각각 분발지심을 내여 귀 녀아들을 우리 녀학교에 드려 보시랴 허시거든 곳 착명시기를 라나이다. 『황성신문』1898. 9.8 「여권통문」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사람임을 내세우면서 여학교 설립을 주장하고 있는 이글은 <여학교설시통문으로서> 한국 최초의 여권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이 통문에서 여성들은 교육권과 함께 여성도 문명정치에 참여해야 하고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천부인권사상을 배경으로 여성들이 민족의 운명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일은 “놀랍고 신기한”(<황성신문>)일이거나 “희한한”(<제국신문>) 일로 치부되었을 뿐 사회적 주목과 지지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이 글을 실은 여성들은 며칠 뒤 최초의 여성교육운동단체 <찬양회>를 조직하였으며, 관립여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찬양회의 회장은 양성당 이씨, 부회장은 양현당 김씨였으며, 그밖에 총무원, 사무원, 찬성원 등의 구성원이 있었다. 또한 윤치호, 장지연 등의 독립협회 인사들이 자문을 맡았다. 신분과 직업에 관계없이 여학교 운영을 담당할 회비를 내기만 한다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창설 당시 회원수는 400여명이었고, 회원은 여성이 대부분이었지만 남성과 외국여성도 있었다.
찬양회는 일반적으로 서울 북촌의 여성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종묘사직과 궁궐을 중심으로 한 북촌일대 왕족이나 양반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였다. 회장인 양성당 이씨 또한 왕가 종친 출신이었다. 찬양회가 관립여학교의 설립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이들의 사회적 신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사회의 ‘삼종지도’를 충실히 수행했을 것으로 여겨진 양반여성들이 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되어 문명개화론을 외치고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밖에 찬양회에는 일반 서민층 여성과 기생, 첩들도 참여하였다.
찬양회는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1898년 10월에 회원 100여 명은 경복궁 앞으로 나아가 고종에게 직접 관립여학교 설립을 청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고종은 즉시 답을 내려 적절한 조치를 약속하였고 여학교 설립은 곧 실현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재정부족을 내세운 학부(學部)의 반대로 관립여학교 설립계획은 1년이 넘도록 진전되지 않았다. 찬양회는 이미 고종의 약속을 믿고 여학생을 뽑아 놓은 상황이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찬양회는 결국 직접 학교를 세우기에 이른다.
상소문에는 학교를 세워달라는 것 외에도 “출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장옷을 쓰지 않고 가마를 타지 않으며 우산이나 들고 다니게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여성들에게 ‘배운다는 것’의 의미는 이처럼 여성을 구속하는 일상의 문화를 바꾼다는 뜻도 있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운동과 더불어 여성계몽을 위한 사업으로 일요일마다 정기집회를 개최하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열었다. 주요한 주제는 여성의 의식각성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외치는 것이었는데, 회원이 아닌 여성도 많이 참여할 정도로 집회는 성황이었다.
강사진은 주로 독립협회 남성회원들이다. 이 사실은 찬양회의 개화론이 남성지식인에 의해 선택된 근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말해준다. 남성지식인이 주도한 근대여성담론 안에서 여성은 여전히 타자적 존재였다. 그러나 찬양회가 겪은 성공과 좌절의 경험은 이후 여성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권의 확보가 여성해방운동의 출발이었다는 사실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답게 살고 싶은 여성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물론 여학교가 없던 시대에도 여성들은 교육을 받았다. 내외가 엄격히 분리된 사회 속에서 할머니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여자로서의 길’을 전수받았고, 그 교육은 여성이 ‘내(內)’외의 공간을 상상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신분제를 철폐한 근대의 평등사상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다는 자각을 주었고 여성들은 남성과 ‘똑같이’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면서 학교의 설립을 요구하였다. 동등한 기회를 통해 동등한 내용의 교육을 받음으로써 동등하게 사회를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근대국가의 건설을 열망하며 남학교를 세우는 데 골몰하고 있던 국가와 남성지식인, 남성자본가들은 여성교육에 대해서는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였다. 여성들은 왜 여학교가 필요한지 사회를 설득하는 일부터 해야 했으며, 끝내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했을 때, 여성들은 선택은 열악하나마 스스로의 힘으로 여성교육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비록 돈 없고, 사람 없고, 지지마저 없어도 ‘배운다는 것’은 여성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여학교설시찬양회>가 정식명칭인 찬양회는 한국 최초의 여권운동단체이다. 1898년 9월에 서울 북촌에 살고 있던 여성들이 신문에 <여학교설시통문>을 발표하고 관립여학교 설립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찬양회는 조직 후 여성계몽을 위한 연설회·토론회를 개최하는 한편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에 주력을 하였다. 고종에 직접 상소를 올리기도 하나 학부(學部)의 반대로 뜻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관립여학교가 세워지기까지라는 조건 아래 1899년 2월에 순성여학교를 연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사립여학교이며 여성들 스스로의 힘으로 설립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그러나 순성여학교는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1901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나혜석, 김명순과 함께 1세대 신여성이자, 1920년대 신여성 담론을 주도했던 『신여자』의 편집주간 김원주는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 저 딸 하나나 훌륭하게 만들어 남의 집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운다고 예수교당에 다니신 덕에 일찍 개화한 어머니는 여자도 학교에 다니는 일이 있는 줄도 모르는 그 예전에 나를 학교에 입학시켜 ‘여학생, 여학생’ 하고 불리는 자랑스러운 몸이 되게 하였나이다. …… 어머니는 생존시에 나에게 부도(婦道)와 여직(女職)에 대하여는 도무지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으셨나이다. 어머니는 나를 여자 구실은 안 시키고, 어떤 표준도 없이 그저 남의 집 열 아들 부럽지 않게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여성 아닌 남자 대장부를 만들려는 것이었나이다. 외할머니나 이모들이 그런 어머니를 보고, 계집애를 가르치지 않고 뛰어다니게만 두고, 시집 보낼 옷가지 하나 장만 아니하면 어찌할 거냐고 하면, 어머니는 “당신네들처럼 바리바리 싣고가서 종노릇만 해야 하오?” 하고 핀잔해 버리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