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연(안동김씨역사연구회)이 지난 11. 11일로 창립 17주년을 맞았다.
옛 것을 귀하게 여기며 발굴하고 기록을 남겨 전승하자는 노력으로 일관해 온 지난 세월
잘 알려지고 널리 알려진 선조님들의 이야기보다는 크게 알려지지 않거나 잘 못 알려진 자료들을 찾는 데에 중점을 두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너무나도 지극히 평범한 원리에 충실하면서 함께 해 온 시간들이 어느새 강산이 두 번 바뀔만큼이며, 회원들 대부분이 불혹(不惑)에 시작한 연구모임이 어느새 이순(耳順)과 고희(古稀)를 넘겨 이어왔으니, 예로부터 드물고 귀하다는 고래희(古來稀)가 아닐까 싶다.
그야말로 뜻 깊은 17주년을 맞아 조촐한 기념행사나 오붓한 식사모임이 있을법 한 일이나, 역시 연구모임 '안사연'은 남달라서 간략하게나마 오후 반나절 탐방 답사활동을 펼친 후 저녁식사를 하기로 하였으니 이 또한 과연 그럴만하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안사연'임을 확인해주었다.
[광평대군 묘역 답사]
광평대군 묘역은 서울시 강남구 수서동 산자락 12만여평에 자리잡은 전주이씨 광평대군(廣平大君) 파종회(派宗會) 묘역으로 세종대왕의 5남 광평대군과 태조 이성계와 강씨 부인 소생 7남 무안대군 방번 등의 묘소와 종문(宗門) 700여기의 묘소, 그리고 사당과 재실, 종회당, 종가 등이 모여있는 보기 드문 왕손의 묘역으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된 곳이다.
<광평대군 묘역 재실인 숭모재(崇慕齋) 건물>

<정면으로 걸어 올라가면 내삼문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사당이 있다.>


<사당 뒤로는 도청(都廳) 현판이 달린 건물이 한 동 있어 눈길을 끈다. 도청(都廳)이란 실록편찬이나 궁궐공사등을 전담하던 임시 관서를 말함인데 묘역의 사당 뒷쪽으로 광평대군 묘 아래에 도청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도청 우측으로는 '廣州治西光秀山李氏世葬記(광주치서광수산이씨세장기)'라 씌어진 비석이 있는데 통칭 세장기비(世葬記碑)라고 한다. 숙종 21년(1695)에 조사한 186기 무덤의 위치를 조사한 내용을 영의정을 지낸 후손 이유(李濡)가 짓고 이담(李湛)이 쓴 것을 비석에 새긴 것으로 가족 묘소로서의 오래고도 광대한 면모를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비석은 받침대에 단순한 지붕을 얹은 기본형으로, 최근에 지은 듯 단청도 되지않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는데 돌 자체가 철분의 붉은 색 느낌이 드는 무늬가 진하게 배어있어 얼핏 글자 판독이 쉽지는 않으나 자세히 보면 정제된 글씨체로 새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ㅇ 광평대군 여(璵)
광평대군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소생 5남으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왕자의 난때 희생된 계비 강씨 소생 무안대군 방번의 봉제사를 받들도록 한 세종대왕의 배려로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광평대군은 그후 양부 무안대군의 사당을 짓고 기거하기도 하였으며 20세에 이르러 창진(瘡疹, 천연두)을 앓다가 요절하였다. (왕조실록)
일설에는 8왕자를 두었던 세종이 유명한 관상쟁이를 불러 왕자들의 관상을 보게 하였더니 5남 광평대군의 경우 굶어죽겠다고 하여 왕자로 태어난 아이가 어찌 굶어 죽겠느냐며 실소를 금치 못하였으며, 그래서인지 더 많은 토지를 내렸다고 하는데 결국 준치 가시가 목에 걸려 이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점괘대로 굶어죽었다고 하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광평대군은 다행이도 아들이 태어난 직후에 사망하여 대를 이을 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영순군이며, 영순군은 다시 남천군과 청안군, 회원군 3남을 두었으니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입양없이 적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며 불행중 다행인 셈이다.
이곳 광평대군파 묘역에서는 무안대군과 광평대군, 영순군을 삼선조로 부르며 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고, 영순군의 아들 삼형제의 집을 삼궁(三宮)이라 부르는 바, 이 때문에 이 마을을 '궁말'이라 하고 묘역을 '궁촌별묘(宮村別廟)'라고 부르고 있다.
<광평대군 묘, 부인 평산 신씨와 쌍분으로 합장하였는데 일반적인 우상(右上)에서 벗어나 남편이 좌측에 묻혀 있다.
원래 지금의 선릉 자리쯤에 모셨지만, 뒤에 그곳이 성종임금의 능침(선릉)으로 정해져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봉분 앞쪽으로 장대석을 2단으로 쌓아 올린 후 좌우로 연장하였으며 각각의 묘 앞에는 귀접이 형식의 지붕없는 간결한 비석을 세우고 상석을 배열하였으며, 그 앞으로는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장명등을 세웠고 좌우로 문석인을 세워 왕손의 위엄을 갖추었다.>

<광평대군 묘에서 내려다 본 묘역 전경, 발 아래 사당과 재실로 이어지는 중심 축을 설계하여 이곳이 중심임을 알 수 있다.
수서지구 아파트 촌이 안산을 가리고 전망을 막아섰지만 이곳 땅값이 대한민국 최고임에야 명당중의 명당일 것이다.>

<금번 창립17주년 기념 약식답사를 준비하고 자료정리한 안사연 윤만 총무가 광평대군 묘 앞에서 회원들에게 설명중이다.>

<광평대군 신도비, 사후 131년에 심의겸이 찬(撰)하였다. 묘 우측 앞에 세워졌는데 받침대 위에 비신을 세워 간단한 지붕을 얹었다.
비석 글씨는 판독 가능하며 제액(題額)은 전서체로 '장의공신도비명(章懿公神道碑銘)'이라고 씌어 있다.
장지를 옮긴 일이며, 무안대군의 왕씨 부인도 살아생전 극진하게 모셨다는 얘기와 아들 영순군 이후 번창한 자손 등을 적었다.>

광평대군 오른쪽에 묻히신 부인 평산신씨는 좌의정에 추증된 신자수의 딸이며 조부 신휘창의 손녀로 우리 안동김씨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외증손녀 사위가 되신다. 그래서 우리 일동은 목례로 재배 인사를 올렸다.
ㅇ 무안대군 방번(芳蕃)
묘역의 중앙에 광평대군 묘가 자리잡고 그 우측 능선으로 넘어가 아들 영순군, 다시 능선 하나를 넘어가 무안대군을 모셨다.
참배객 입장에서 바라보면 광평대군 묘에서 왼쪽 능선인 셈이다.
아다시피 방번은 강씨부인 소생의 이성계 7남으로 세자책봉시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의 반대로 동생 방석에게 넘어갔고, 이방원의 왕자의 난때 세자 방석과 함께 피살 되었다. 이후 세종의 배려로 후사가 없던 방번의 봉사손으로 5남 광평대군이 입양되어 이곳 묘역에 함께 모셔지게 된것이니, 처음 도진릉동(道津陵洞)에 있다가 광주 학당리로 이장 된 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무안대군 묘, 단묘로 왕씨부인과 함께 모셨는데 비석에는 '왕자 무안대군(王子 撫安大君) 증시(贈諡) 장혜공(章惠公) 휘방번지묘(諱芳蕃之墓) 해좌(亥坐)' '삼한국대부인왕씨(三韓國大夫人 王氏) 부좌(拊左)''라고 씌어 있다. 부인을 왼쪽에 모셨다하여 부좌(拊左)라 함은 이해가 가나 남편을 해좌(亥坐)라고 한 것이 특이하다.
본디 돼지 해(亥)는 12번째 십이간지로 돼지를 뜻하며, 시각으로는 9시~11시, 방향은 북북서를 뜻하는바, 해좌(亥坐)라고하면 해좌사향(亥坐巳向), 즉 남남동향이라는 뜻인데 풍수지리 전문가들도 잘 쓰지 않는 방위표기라고 한다.
옛 비 받침에 최근에 다시 만든 비석을 꽂은듯한데, 원비석에 그렇게 쓰여 있었는지, 굳이 새로 쓴건지 알 수 없다.>


<무안대군 신도비, 광평대군 신도비와 흡사하다. 송시열이 찬(撰)하고 십일세손이 썼다는데 이름자가 식별 곤란하다.
방석과 방번 사후 태종 이방원이 세자 방석에게는 '소도', 방번에게는 '공순' 시호를 내렸으나 문종 승하후 단종 즉위년에 문종에게 '공순'시호가 올려졌기에 방번 시호가 '장혜(章惠)"로 고쳐졌다하며, 왕씨부인이 매년 철마다 강씨부인의 정릉이 옮겨진 후에도 가마를 타고 가서 제사를 올리곤 하였는데 이때문에 광평대군 손자에 이르기까지 제사가 끊이지 않아서, 선조가 묘소를 새롭게 할 때도 광평대군 집에 있었던 옛 노비의 힘을 빌어 찾을수 있었고, 현종때 주위를 정비하니 비로소 건원릉의 짝이 될 수 있었고, 옛 호를 회복하여 정릉(貞陵)이라 하고, 다시 신주를 만들어 태묘에 배향하였다 하니, 지금의 정릉 바로세우기에 큰 역할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ㅇ 증(贈) 영의정 행 금산군수 이중휘(李重輝)
광평대군의 9대손이다. 아들 이유(李濡)가 영의정이 되었는데 첫 부인인 신안동김씨 김상헌의 손녀딸, 계배가 우리 안동김씨 김득신 할아버지의 차녀로 김득신 묘갈에 '차녀는 군수 이중휘에게 시집가서 아를 렴(濂)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큰 아들 유(濡), 둘째 담(湛)은 신안동김씨 부인이 낳고, 3남은 김득신 할아버지 차녀가 낳은 것이다.
<묘지는 품(品)자 형태로 3개의 봉분을 배치하였는데 뒤에는 남편 이중휘, 앞쪽 2개의 봉분중 오른쪽(보는사람편에서 왼쪽)이 신안동김씨 부인, 왼쪽이 김득신 할아버지 따님이시다. 가운데 세워진 비석을 보면 정면에 '증영의정행금산군수이공중휘지묘(贈領議政行錦山郡守李公重輝之墓)'라고 씌어있고 좌, 우 양측면에 증정경부인안동김씨(贈貞敬夫人安東金氏)라고 똑같이 써 있으나 (보는사람편에서) 왼쪽에 元, 오른쪽에 繼가 적힌 것으로 보아서 왼쪽이 (영의정 이유를 낳은) 신안동김씨부인, 오른쪽이 김득신 할아버지 차녀로 보인다.>



이 분의 사위가 좌의정 권상하이며, 김득신 할아버지 따님 소생 3남은 이조판서 문절공 박세당의 사위이다.
ㅇ 영의정 이유(李濡)
증 영의정 이중휘의 장남 이유, 함종 어씨 부인과 함께 묻혀 있는데 광평대군 묘역에서 왼쪽으로 멀리 (보는사람 입장에서는 오른쪽) 필경재 뒷쪽으로 몇개의 묘들이 커다란 곡장에 둘러싸인 채 마치 지금까지의 광평대군 묘역과는 별개인것처럼 구분되어 보인다.
알고보니 이쪽은 광평대군의 증손 정안부정공(定安副正公) 이천수가 지은 아흔아홉칸집 종가 필경재(必敬齋)가 현존하고 있으며, 그 뒤편에 몇 기의 묘가 담장 안쪽으로 집중 관리되고 있었는데 영의정 이유와 효정때 우의정을 지낸 이후원, 헌종때 우의정을 지낸 이지연 등 3정승이 모셔진 핵심지역인바, 정안부정공 이천수 직계후손들만 별도 관리하고 있는듯 보이며, 필경재(必敬齋)가 종가집이라고 하는데 광평대군파의 종가인지 정안부정공 소파(小派)의 종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광평대군파종회 명의로 발행된 묘역안내문(지도)에는 필경재나 뒷쪽 몇기의 묘가 누락되어 있고, 필경재쪽에서는 별도의 A4지 한장짜리 안내문을 인쇄해서 배포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한 목소리가 아닌듯 하다.
<영의정 이유의 묘, 하나의 봉분에 어씨 부인과 합장하였으며 둥근 호석(護石)을 쌓아올려 견고해 보인다.>


<영의정 이유 신도비, 묘 아랫쪽 과거 입구쯤 되었겠지만 지금은 필경재 뒷마당에 서 있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2m가 훌쩍 넘는 크기로 사방에 글씨가 빽빽히 적혀 있는데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야기와 계모를 잘 모셔서 부인이 임종할때 '모자 관계가 된 지 이십년에 서운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는데 그 계모가 김득신 할아버지 따님인듯하다.>

<종가 필경재(必敬齋)는 현재 궁중요리전문 고급음식점으로 객단가가 매우 비싸서 필부(匹夫)가 가기에는 벅차다고 한다.
최초 99칸으로 지었으나 세월에 따라 많은 유실이 있었으며, 나름대로 계속 손질 보완하면서 유지하고 있어 지금에도 유서깊은 건축물의 빛이 여실하다. 1987년 4월 8일 문공부에 의해 전통건조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겨울해는 짧은데, 쫓기듯 잠시 답사하는 발걸음이 바쁘지만 가볍다.
이어지는 행사는 교대역 근처에서 자축 만찬, 반주를 곁들어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모두가 즐겁고 보람있는 하루였으며, 지나온 17년을 자축하고 만족해하는 자리였다.
<17돌을 자축하는 안사연 영환회장님의 축사>

작금의 현실은 여러형태의 답사회와 연구회가 자천타천으로 활동중에 있으며,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이 공존하며 상호 보완하는 추세에 있는데 그럼에도 단일 문중(門中)에서 20년 가까이 역사문화연구활동을 자체적이며 자발적으로 꾸려나가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다. 더군다나 단순한 친목단계의 모임이 아니라 철저한 고증과 연구, 발굴을 통하여 알찬 자료를 발간하고 학술대회나 논문집을 발간하는 격조높은 연구회라는 점이 그렇다.
앞으로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꾸준함이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뒤늦게 일원으로 합류한 사람으로서 무한 감사드린다.
계속 발전하여 조상님들을 선양하는 각종 사업을 추진하며, 후손들에게 널리 전파하는 활동도 더욱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옛 것을 익혀 지금을 아는 온고지신(溫故知新)에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보다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변화하기를 바라며 계속하여 무한 발전하는 안사연이 되는데 일조할 마음이다.
다시한번 안사연 17주년을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