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그 흥청망청한 시대
일상적인 조어법에서 벗어나 새롭게 나타난 신조어(新造語)나 길거리에 내걸린 플래카드의 문구는 당시의 문화를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코드 역할을 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들은 언중(言衆)에 의해 쉽게 일반화되고 나중에는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 긴 생명을 유지한다.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여인 환향녀(還鄕女)를 비하하여 ‘화냥년’이라 한 것이나,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코를 베어가자 민중들이 위험한 것을 보면 아비(我鼻)[내 코]라고 한 것이 l모음동화현상에 의해 ‘애비’라고 한 것들이 그 좋은 예다. 즉 ‘화냥년’이나 ‘애비’라는 용어에는 당시의 문화가 담겨 있어 그 시대의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매개 역할을 한다.
그와 같은 예로 ‘흥청망청’이란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모양, 또는 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 쓰는 모양의 부사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논다.’ ‘돈을 흥청망청 쓴다.’는 문장을 예로 든다.
1505년에 ‘채홍사’ ‘채청사’ 라는 벼슬이 있었다. 채홍사는 기생 중에서 예쁜 기생을, 채청사는 여염집의 예쁜 처녀를 잡아들이는 벼슬아치다. 채홍사는 원래 채홍준사(採紅駿使)로서 ‘홍(紅)’은 여자를 ‘준(駿)’은 말을 뜻한다. 그래서 채홍준사는 미녀 기생과 준마를 모으는 역할을 했는데 이는 말고기가 양기에 좋다하여 보양책까지 강구하며 황음(荒淫)을 즐겼다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이다.
연산군은 이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채홍사를 팔도로 파견하여 그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일기’에는 그들의 활동상이 잘 나타나 있는데 남편과 아이가 딸린 기생은 채집의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연산의 명령에 채홍사들이 그들을 빼면 숫자가 부족하며 기생은 아이에 대한 애착심이 없으니 재고해 달라는 건의문이 보인다. 한양의 미녀들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전국에서 미녀들을 채집한 연산군은 그들과 놀아나기 위해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바꾸고, 학문과 인재양성의 전당인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었다. 도(道)를 잃은 군왕은 인격이나 정신적 가치 등은 다 내버리고 오직 제왕의 권력과 육체적 쾌락만 추구하는데 전념했다. 그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는데도 연산군은 오히려 사냥터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강제로 쫒아내고 그 영역을 넓혀 일반인의 접근을 금하는 금표비를 세우기도 했다.
1498년에 연산군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트집잡아 신진사류들을 다 죽이더니(무오사화) 1504년에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생모 폐비 윤씨의 한을 달래기 위해 복수극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나라의 경영을 책임진 제왕의 행위치고는 너무도 치졸한 행위를 일삼아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영혼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나락의 길로 빠뜨렸다. 어머니로 인해 정신적 혼란을 보이기도 하며 끝내 여인 집착증에 빠져 황음무도한 짓을 하더니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까지 범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박원종 등이 주도한 반정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자신의 체면을 유지를 위한 방편을 마련했다. 소위 심리적인 방어기재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기생의 명칭과 대우였다. 우선 궁궐에 들어오기 위해 여러 고을에 모아둔 기생을 운평(運平)이라 했고, 그들 중에서 뽑혀 궁궐에 들어가면 흥청(興淸)이라 했다. 이들 중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부류를 천과(天科) 흥청, 나머지는 지과(地科) 흥청이라 했다. 더구나 이들 흥청이 이동할 때는 사대부들이 가마를 메게 했다. 신분사회의 변화치고는 천지개벽의 수준이다. 연산군은 그렇게 할머니를 비롯하여 아버지(성종)의 후궁들에 의해 쫓겨난 어머니를 무척 동경했다. 그것이 곧 처용무를 변용한 야한 춤으로 나타났고, 기생의 등에 타거나 스스로 말이 되어 기생을 태우고 술래잡기를 하는 등 여인 속에서 놀다가 여인 속에서 망했다.
그에 비해 정조는 의연하고 아름다운 효성을 보였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한 아픔이 긍정적인 전이(轉移)를 일으켜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을 남겼고 서호(西湖)와 같은 인공호수를 만들어 농업생산력을 향상하기도 했으며 민초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주는 등 군주로서의 지도력을 보였다. 자신의 아픔을 어떻게 삭이느냐에 따라 삶과 문화는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다.
연산군도 초창기에는 제법 성군다운 기지를 보였다. 세종조에 인재 양성을 위해 젊은 문신들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휴가를 주었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부활하는가 하면 철갑옷과 투구를 만드는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국방을 튼튼히 하기도 했고, 여지승람을 완성하고 국조보감을 간행하는 등 문치에도 힘을 썼다. 그러나 생모 폐비 윤씨는 아들에게 여인으로서 큰 짐을 남겨 주었다. 살아있을 때의 실수는 죽어서도 후손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다. 연산군의 총명함은 결국 여색으로 인하여 흐려졌고 여인의 치마폭에 자신을 묻어버림으로서 패주의 길을 걸은 것이다.
연산군이 행차하면 그 뒤에는 수없이 많은 흥청들이 뒤를 따랐다. 그 기생들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흉이라 하여 ‘흥청망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잊혀지지 않는 역사의 교훈으로 남는 사건은 민중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신조어를 남겼다. 연산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묘호(廟號)도 받지 못하고 왕릉의 위상을 갖추지도 못했다. 다만 성종의 적장자였기 때문에 대군의 예에 맞게 묘를 썼다. 그래서 연산군의 무덤은 능(陵)이 아니라 연산군의 묘(墓)라 한다. 강화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어 묻혔으나 중종 8년 사위가 묻힌 방학동의 능성 구씨 선산에 묻혔다.
지하철 1,4호선 창동역 1번 출구에서 1161번, 1144번 버스를 타면 바로 연산군 묘 앞에 내린다. 쌍문역 2번 출구에서 130번 버스, 06번 마을버스를 이용해도 좋다. 주변에 도선사와 손병희 선생의 묘, 천도교의 봉황각이 있어 등산을 겸한 가족 나들이로도 좋은 곳이다. 입장료는 무료지만 월요일은 휴무이므로 입장이 불가능하다.
* 강기옥




한국문인협회회원. 펜클럽한국본부회원.
내외일보논설위원. 화백문학 편집위원.
서울역사문화포럼이사. 서초문인협회부회장.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첫댓글 연산조에 대한 고증과 흥청망청의 유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흥청망청이 그런 뜻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어머니 사랑을 받지 못한 연산군,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한 정조,
역시 자식에게는 어머니 사랑이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사실 역사란 긴 세월을 지나면서 가지가 흩어지고 변질 될 우려도 있어 다는 못 믿겠지만,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큽니다. 고맙습니다.
지나간 역사 속에 스며 있는 교훈 잘 읽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군왕의 자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연산군의 생애가 인간적으로 볼 때는 안타깝지만 역사 앞에 큰 실수를 한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오명...... 아찔합니다. 역사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역사에 대해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성군이었던 성종(연산군의 아버지)에 비해 간신들의 말을 듣고 행한 탓에 국력이 쇠약해져 후일에 일어나는 왜란과 호란까지 부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종반정(1506년)에 의해 쫓겨나고, 폭군이라 실록에도 들지 못해 연산군일기라고 칭하게 되지요. 세종과 성종에 의해 구가된 태평 성대는 연산군때 신진사류(사림파)를 2차례 모함함으로써 끝나고, 더 이상 국력을 상승시키지 못하는 결과가 오게 되어 그것이 가장 안타까울 뿐입니다. 역시 자식은 사랑으로 생모가 키워야 되는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