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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에서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이동했다.
일행 중에 나이가 제일 많은 큰 형님이 운전대를 잡았다.
노련미가 역력했다.
형님은 매일 테니스로 몸을 다지고 있다.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다.
때문에 평균 연령에 비해 젊고 동안이다.
그러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 같다.
양 어깨가 처지고 균형이 맞지 않는다.
또한 손도 약간 떨리는 듯했다.
그런데도 매일 술을 마신다.
하루도 거르는 일이 없다.
호텔 버드겟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부분 개성이 강한 편이다.
또한 행동도 각각 다르다.
남에게 막무가내로 술을 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의 의사를 존중해서 술을 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현대사회는 후자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같다.
술을 평소에 마셨던 사람이라면 같이 대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사람에게 막무가내식으로 술을 권장한다면 화가나고 짜증이 날 수도 있다.
형님은 그러한 편에 속했다.
유별나게 우리들을 사랑한다고했다.
늘 두고쓰는 미사여구로 상대의 마음을 현혹하기위해서다.
그것도 대작시간이 흐르면 강요로 변해갔다.
술을 먹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이 가중되었다.
이것이 싫어서 때로는 곁을 피할 때도 있었다.
하이델베르크네카어 강
그러나 대부분은 참고 곁을 지킬 때가 많았다.
이러한 형님과 34일 동안이나 여행을 같이 한다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했다.
여행을 선택했던 것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위해서였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혀 자아를 발견하기위해서였다.
그런데 하찮은 술로 인해서 목표가 빗나가고 있었다.
형님 곁을 피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어제도 술을 마셨다.
여기다가 여행의 패턴도 변해갔다.
식사를 제때에 마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점심식사가 늦어지고 저녁식사가 지체되어갔다.
하루 여행이 끝나고 저녁식사를 마치면 밤 12시가 되어갔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위해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를 추구할 수없어서 혼자서 걷는 시간이 늘었다.
하이델베르크 성이 보인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룩셈부르크(Luxembourg)로 이동했다.
그러나 승합차속에서 금방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기력이 예전같지 않아서 여행은 뒷전이 되고 만 것이다.
여행을 추진했을 때 이런 상황이 전개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점점 후회가 되기시작했다.
룩셈부르크(Luxembourg)에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이동했다.
큰 형님이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을 못하는 입장에서 늘 가슴이 아팠다.
운전을 대신할 수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늘 좌불안석이었다.
출발한지 한 시간도 채 돼지않아 졸음이 왔다.
그러나 마음대로 잠을 청할 수도 없었다.
교대로 운전하는 형님들에게 미안했기때문이다.
운전하는 큰 형님도 졸음을 피할 수 없었던지 운전을 교대 하자고 했다.
황제의 첫사랑 촬영지
두번째 형님이 운전대를 잡았다.
두번째 형님은 큰 형님처럼 술을 마시지 않았다.
체육과 출신답지 않게 인성이 착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승합차 속도가 점점 가속되고 있었다.
앞차와 거리를 충분히 유지해야하였는 데도 이것을 무시하는듯 했다.
습관 이겠거니 생각했다.
운전이 미숙한 것도 아니다.
베스트 드라이버 이기때문이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르게 신중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불안해지기시작했다.
나만 이렇게 느끼나 생각했다.
황제의 첫사랑 촬영지
도로 상에서 가끔 차선을 이탈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럴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러한 운전실수는 금방 시정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변화가 없었다.
둘째 형님의 침착성이 좀채 낳아지지 않고 있었다.
장시간 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 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도 속도를 줄이려 하지 않았다.
불안해졌다.
아직도 감각을 익히지 못했나 생각했다.
시민들의 휴식공간
바로 뒷쪽에 하이델베르크 성이 있다.
안전띠를 확인하고 양손을 앞 좌석에 고정시켰다.
독일의 자동차 전용 고속 도로에 차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졌기때문일 거이다.
반대편 차선에서 도 차량들이 쾌속질주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째 형님은 가끔 중앙 분리선을 침범하고 있었다.
중앙차선은 생명선이다.
그런데도 중선선을 침범해 의심이 들었다.
운전하는 둘째 형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고 멍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각광을 받는다
눈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으나 지각능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형님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없었다.
정확한 정신상태를 파악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차량 속도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직선 이었던 도로가 약간 굽어지기시작했다.
그리고 전방에 바리케이드(barricade)가 나타났다.
속도를 줄였으면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질주했다.
바리케이드(barricade)가 갑자기 “ㄱ”형으로 꺾이기시작했다.
여기서 속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순간동작은 뒤따르지 못했다.
순간 승합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차량이 지그재그로 흔들려 중심을 잡지못했다.
마음의 휴식공간, 카페
겨우 중심을 잡았지만 하마터면 반대편 차선으로 전복될 뻔했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 만으로 다행이라 자위했다.
이것은 분명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갑자기 전개된 상황이라 위기를 대처하지 못한 둘째 형님은 얼굴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모두가 두번째 형님을 위로했다.
그리고 간위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차량을 살펴보았다.
승합차 옆이 일자로 긁혀있었다.
바리케이드에 긁힌 것이다.
백미러도 떨어져 덜렁거렸다.
앞 범퍼에 흠이 나있었다.
사람이 다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주님께 성호를 그었다.
당사자인 둘째 형님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광장
사실 운전하면서 이 정도의 사고는 빙산의 일각이다.
국내서 라면 보험회사에 연락하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곳은 독일이다.
즉각 독일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의견이 분분했다.
대수롭지 않는 사건인데 경찰에게 까지 연락해야하나 하고 반대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빨리 독일 경찰에게 신고해서 보험적용을 받자고 했다.
그래야만 사건이 매끄럽게 마무리될 수있기때문이다.
결국 신고를 했다.
하이데베르크 성이 보인다. 광장에서
신고한지 2시간만에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독일 경찰은 아주 친절했다.
현장에서 이것저것 묻더니 최선의 방법을 안내했다.
차량 상태를 조사하고 조서를 작성했다.
조서 내용은 보험회사와 공유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으니 이제 안전하게 운전하여 목적지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금 40유로를 요구했다.
조서작성 비용이라고 했다.
100불이라도 지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긴장했기때문이다.
성 야곱성당
다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이동하고 있다.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했지만 이번 사건과 같은 무모한 행동은 더이상 겪고 싶지않았다.
큰 교훈이 될 것 같다.
이번 자유여행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했다.
이것은 이후 여행에 신중할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서로간에 많은 갈등을 겪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서로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암묵 간에 의사소통은 이루워지고 있었다.
형식적인 겉 치레에 지나지 않았다.
국내에서라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유럽이다.
도로가에 있는 가게와 카페
그래서 일심 동체가 되어야 한다.
회원 각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의 의중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했다.
그렇지 못하고 서로 어울리다 보니 상대방의 잘못만 과대확산되었다.
이것이 폭발 직전에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따라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서울에서 6명이 가끔 만나면 식사나하고 헤어지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크게 유대감은 없었다.
단체행동에서는 서로간에 유대를 돈독히 하고 회원을 배려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지 못했던 것이 작금에 가서야 후회가 되었다.
반성이 뒤 늦은 감은 있었으나 사고로 인해 서로 간의 의중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광장
회원 모두가 가슴이 따뜻하고 이해심이 많았다.
이것을 알아가는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여행을 하는 동안 많은 기도를 했다.
대형사고로 연결되지 않고 가볍게 상황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기도때문이었다.
상황을 마무리하고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교외 Budget Ludwigshagen 호텔에 도착한 것은 밤 9시가 훨씬 넘어선 이후이었다.
27일 하루를 마무리 했으나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밤새 비몽사몽 했기때문이다.
박물관
오늘은 5월 28일로 동유럽 자유여행을 시작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조식 후 Budget Ludwigshagen 호텔을 나섰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여행을 위해서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평소에 가장 가보고싶었던 곳이었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역사 유적지가 많으며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있는 곳이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 10시에 현지에 도착할 수있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성 근처 어디에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오전내내 주차장을 찾기위해 시내를 돌았지만 허사가 되고말았다.
그러다가 현지 주민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유료 주차장을 찾을 수있었다.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가기위해서
푸니쿨라를 타야한다.
지구가 탄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억년 전이다.
이러한 지구에 인류가 등장한 것은 겨우 300만년도 채 되지 않는다.
1859년 다윈의 ‟종의기원”이 출간되었다.
이후 과학자들은 인류도 진화과정을 거쳐 인류가 탄생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역사학자나 과학자들이 인류의 조상을 찾고자 노력한 이유다.
현재까지 연구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는 150만 전에 아프리카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보고 있다.
이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취 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그 후 인류가 진화하여 ‟호모 에렉투스” 가 등장 하게 되었다.
이들은 불을 사용하고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이 여러 곳에 자취를 남긴 이유다.
하이델베르크 성문
그 대표적인 곳이 유럽 하이델베르크 골짜기, 동남아시아 자바 섬, 중국의 베이징 등지다.
이들을 각기 하이델베르크 인, 자바 인, 베이징 원인이라 부르고 있다.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지도했던 내용이다.
이러한 지역들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아직까지 이들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먼 거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경제적 여건이 충족되지 못했기때문이었다.
그런데 선배가 동유럽 자유여행을 추진하면서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를 언급하자 눈이 번쩍 띄었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가 늘 머리 한곳에 고착되어 있었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인은 오늘날의 하이델베르크 사람들 과는 거리가 멀다.
하이델베르크 인은 현생인류 이전의 사람들이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시에 도착했을 때 맨 먼져 머리에 떠 오른 것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인이었다.
유적지가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성에서 바라본 시가지
그러나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인은 우리들의 기억에서 지워진지 이미 오래다.
우리들의 직접적인 조상이 아니기때문이다.
그래서 현생인류와 관계있는 문화재로 눈길을 돌렸다.
그 중에 압권은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성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시에 도착했으나 시가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주차를 할 수없었기때문이다.
현지인에게 물어 겨우 유로주차장을 찾을 수있었다.
주차를 한 후 네카어(Neckar River) 강변을 걸었다.
시원한 강바람이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러나 강바람도 더위에 지쳐가고 있었다.
보도블록을 따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쪽으로 이동했다.
도로가에는 레스토랑과 선물가게, 카페 등이 즐비했다.
얼마가지 않아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이곳에 거대한 성당이 있었다.
성 야곱성당이었다.
성 야곱성당을 지나 다시 야시장이 있는 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한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상치않아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곳이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라고 했다.
건물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는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의 소설 『황태자의 첫사랑』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이다.주인공인 황태자는 궁정에서 백부의 손에 자랐다.
하지만 궁정생활은 엄격했다.
스무 살이 되어 자유의 도시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로 유학을 했다.
그때 그는 첫사랑을 만났다.
청춘을 만끽 하였지만 아직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기는 나약했다.
숙명처럼 찾아온 케티와의 첫사랑은 짧았다.
사랑과 긴 이별 그리고 재회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신분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발랄하고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이곳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에서 전개되었다.
그 무대가 되었던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하이델베르크 성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시는 낭만의 도시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활기차 보였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로 가득했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를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가슴을 설래게했다.
네카어 강(Neckar River)을 중심으로 조성된 빨간 가옥들이 마치 천상을 연상하게 했다.
황태자의 첫사랑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낭만적이고 평화롭게 보였다.
어디 선가에서 애잔하고 잔잔한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거리의 악사가 펼치는 바이올린 음이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없었다.
커피 한잔이 생각났다.
다시 카를 테오도르 다리로 이동했다.
네카어 강(Neckar River)물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강 양변에 빨간 주황색 지붕이 낭만적 이었다.
그리고 마을 위로 난 철학자의 길도 선명하게 보였다.
헤겔,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여러 철학자들이 산책 하면서 명상에 잠겼던 곳이다.
그 아래로 비단처럼 다리가 펼쳐지고 있었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를 걸으며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었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는 처음에 나무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강물이 불어나거나 폭설이 내릴 때면 어김없이 다리가 무너졌다.
이것을 안타깝게 바라본 카를 테오도르는 돌로 다리를 다시 복원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오늘날 카를 테오도르 다리다.
시내 쪽에서 바라볼 수있는 수문은 중세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교곽 아래 부분은 아치형으로 되어있는데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있다.
교곽의 아치와 완만한 산이 어우러지는 조화는 선경이었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더욱 화려하고 아름다워 그림속에 주인공이 되는 듯 했다.
하이델베르크 성(Heidelberg Castle)으로 이동했다.
하이델베르크 성은 언덕위에 있었다.
이 성으로 올라가는 방법은 두가지다.
첫째는 funicular(푸니쿨라)를 이용하는 방법이고, 두번째는 도보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funicular(푸니쿨라)는 밧줄로 궤도를 끌어 올려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한 산악 교통수단이다.
엔진이 없는 것이 특징이고 경사가 심한 곳도 문제없이 등정이 가능하다.
오늘날 케이블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funicular(푸니쿨라)를 이용했다.
등정은 20분도 채 소요되지 않았다.
등정시간보다는 표를 예매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되었다.
funicular(푸니쿨라)에서 내려 성문쪽으로 걸어갔다.
성문은 엘리자베스 문이다.
엘리자베스 문을 통해 궁정 안으로 들어갔다.
궁정 안은 화단이 조성되어있었다.
이곳에 갖가지 화초가 만발하고 있었다.
화초는 바람의 강도에 따라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입이 딱 벌어졌다.
우거진 숲과 화초사이에 로마시대 원형극장과 같은 건물이 우뚝 솟아있었기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꼼짝않고 서있었다.
바라볼수록 호흡이 멈출 것같았기때문이다.
숨을 가다듬고 공원을 지나 건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건물의 지붕은 무너지고 골조만 남아있었다.
전망대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하이델베르크 시내가 한눈에 바라보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와 성 야곱성당, 그리고 황태자의 첫사랑 촬영지, 철학자의 길도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두둥실 떠있는 한 송이 연꽃을 발견할 수있었다.
카를 테오도르 다리다.
어느 것 하나도 놓칠을 수 없는 역사적 보물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선해주신 대장 님에게 감사를 드렸다.
전망대에서 다시 성안으로 이동했다.
성은 18~19세기의 의료용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독일 약제 박물관이 이곳에 있었으며 성의 지하에 1751년대에 만들어졌다는 높이 8m 의 거대한 술통이 있었다.
이 술통을 보관한 지하창고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술통으로 올라갔다.
술통으로 올라가기위해서는 100여개의 계단을 걸어야 했다.
평소 산행을 즐겨했기때문에 이것 쯤이야 생각하고 술통위로 걸어 올라 갔다.
술통 위가 마치 산 위에 있는 전망대 와도 같았다.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밖은 찜통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지하는 평균 20도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술통은 전쟁 시 식수를 보관하기위해서 만들어진 물통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와인이 가득 채어져있었다.
22만 리터의 와인이라고 했다.
지하에 상가가 있었다.
와인을 팔고 있었다.
와인 한잔이 생각났다.
지하 와인 저장고
하이델베르크 성(Heidelberg Castle)은 축조된 이래 증축을 거듭했다.
빨간 석재를 주로 이용했다.
건물 앞 벽에 성인 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조각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세련되어 있었다.
1200년대에 건축된 건물 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관광차 여기에 온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상인 들도 우리를 보고 “니하오마(nǐhǎoma)”라고 인사를 했다.
중국인들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상인은 미안했던지 곧바로 안녕하세요 하라고 정정했다.
고마운 분들이다.
언제나 미소를 잊지 않고 있었기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성(Heidelberg Castle)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537년 낙뢰를 맞아 일부가 파손되었다.
당시 중턱에 있던 성을 재건 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 후에도 신∙구교간의 전쟁으로 성은 황폐화 되다시피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정원에 ‘여기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을 받으며 행복했노라’라는 괴테의 시구가 인상적 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성(Heidelberg Castle)을 관람하고 독일 바이에른 주 제2의 도시인 뉘른베르크 시로 이동했다.
뉘른베르크 시 교외에 숙소인 Ibis Budget Nuremberg City M이 거기에 있었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