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운동의 두 뿌리 -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적 전통형성에 기여한 스톤-캠벨 환원운동에 영향을 준 두 뿌리 -
김 명 복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예레미아 6: 16)
서론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원을 밝힌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Allen, Hughes 공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의 뿌리는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대별(大別)된다. 여기 신성한 뿌리는 (1) 초대교회에 의해 남겨진 성서적 기록 곧 영적 정체성의 근원인 성경이며, 세속적 뿌리는 (1) 성경에 대한 많은 전제조건을 형성시킨 개신교 종교개혁측의 환원 운동가, (2) 일치를 위한 이성적 모델을 형성시킨 17, 18세기의 계몽운동, (3) 19세기 미국에 있어서 Barton W. Stone, Walter Scott, Campbell의 환원운동 등 모두 4가지의 근본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관심있게 탐구하고자 하는 분야는 ‘세속적인 뿌리’이며, 그 목적은 세속적인 뿌리를 탐구함으로써 성서적 뿌리를 분명히 이해하여 보다 능동적인 기독교적인 삶을 살고자 함이다. 스톤-캠벨 운동에 미친 두가지 주요 영향을 이상의 뿌리들에서 찾는 다면 (1) ‘세속적인 뿌리’의 출발이 되는 개신교 종교개혁과 (2)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이성시대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두가지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배경을 형성하는데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16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 프리드- 하드만 대학의 Sam Hester 교수의 강의 자료 ‘환원운동의 배경’(M.H 터커 편저, 김익진 역, 환원운동의 역사, p.49-50)에 의하면 ‘역사는 결코 진공속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가장 훌륭하게 기록된 역사일수록 역사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다. 환원운동은 역사속의 어느 특정한 시대동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속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환원의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본 문제가 요구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전통의 첫째 뿌리는 16, 17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이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던 르네상스(기독교 인문주의)로 거스러 올라간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사도적 기독교 신앙의 회복에 대한 이상이 형성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 이상을 결정짓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적 전통의 뿌리는 15, 16세기의 르네상스(기독교 인문주의)와 16, 17세기의 종교개혁에 근거하며 특별히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신교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르네상스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 Renaissance는 본디 부활, 재생의 뜻으로 14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전 구라파를 휩쓸었든 예술 및 문화상의 혁신운동으로서 중세기의 기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성의 해방 및 존중을 주안(主眼)으로 하는 동시에 희랍, 로마의 고전 문예의 부흥을 목표로 하고 문학, 미술, 건축을 비롯하여 널리 정치, 학술, 종교의 방면에도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었으며 근대 문명의 획기적 발전의 단서를 이루었다. 북유럽의 이민족에 의한 로마의 문화 파괴가 몰고온 천년간의 암흑시대는 미신과 종속이 팽배해 있었고. 로마카도릭 교회가 유럽인들의 정치, 문화를 지배함으로써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위해 교회를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례전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수단으로 삼고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여 이교도나 죄수를 구원의 은혜에서 제외시켰고, 교황에게는 성례전 금지 명령권까지 주어졌었다. 르네상스의 여명이 밝아올 무렵 중세의 유럽의 기독교신앙은 두 갈래의 상반된 길로 가고 있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봉건적 의존과 미신 상태이며, 둘째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스콜라 철학의 논쟁 상태였다. 두 경우 모두 성서는 닫혀지고 있는 책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수도사들은 영적인 회복을 촉구했고 진보적인 종파는 개혁과 초대 기독교 신앙으로의 환원을 외치기도 하였다. 이때에 르네상스의 일부분으로 등장한 기독교 인문주의라는 학문적 운동을 통해 성서 원문의 내용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입각한 거룩한 삶을 살고자하는 외침이 있었다. 이 시기에 영국의 John Wyclif (1328-1384)와 보헤미아의 John Hus (1373-1415)같은 비국교도들이 나타나 성서에 근거한 은총을 주장했고, 평민들이 성서를 직접 읽는 등 초대교회의 삶을 회복코자 했다. 그러나 중세의 거대한 카도릭 사상은 이들을 화형시키거나 지하세계에 감금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원에 관한 중세의 뚜렷한 근거가 희박해졌다. 그러므로 고대세계의 학문을 회복하기 위한 르네상스의 영향을 심층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중세의 가치관을 배격하였다. 중세 역사는 학문, 지식, 문화의 흐름을 오염시켰다고 생각하고 주권적인 하나님이 부여한 선(善)을 위해 최근 사상가의 가르침을 회피하고 지식과 학문의 근원인 고대의 가르침을 표방하였다. 인문주의 표어는 근본으로(ad fontes), 근원, 원천으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황제 Rotterdam of Erasmus(1466-1536)는 희랍의 고전철학, 성서 등을 연구하여 희랍어 신약성서를 펴냈다. 그 당시 동경의 상징인 믿을 만한 성서의 본문을 만들어 낸 것은 그의 탁월한 업적이었다. 그는 기존의 카도릭 교회로부터의 자유로웠던 사상가로서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교리, 생활, 수도원, 일반 세속 정치인들을 비판하였으며 교회와의 관계를 끊지 않은채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가지고 기독교 고전(제롬, 오리겐, 어거스틴 등)과 기독교 원천에 대한 지식을 동시대에 재현하는데 기여했으며,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당시 스콜라 신학자들의 새로운 것을 배격하는 고정관념과 사상을 깨고 새로운 것은 가장 오래된 옛것이며 그것은 예수와 사도들 초대교회의 가르침이라 했다. 그러나 이와같은 기독교 인문주의가 초대교회의 환원을 주장한 대표적 학파는 아니다. 이들은 한 종파, 교리, 신학적 견지를 공유하지 못했다. 그들의 전형적 관심은 초대교회의 회복이 아니라 고대 기독교인의 가르침의 회복이며, 그들로부터 분명한 기독교적 삶과 진정한 영성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었다. 이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초대교회의 회복 운동자들에게 분명하고 광범위한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15, 16세기초의 암울했던 시기에 고대 세계와 고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입장은 유럽의 대학에서 점차 지배적으로 되어 갔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지도자가 된 몇 사람들은 인문주의 정신을 받아들였고 고대의 모델과 표준에 대한 강한 확신을 발전시켰으며, 종교개혁자 가운데 몇몇은 고대의 모델과 표준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관심을 초대 기독교회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열망으로 전향하였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 인문주의라는 학문적 운동은 개신교 종교학자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고 스톤- 캠벨등 환원운동가들의 사상적 흐름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2) 개신교 종교개혁의 영향 흔히 그리스도의 교회는 개신교가 아니라 기독교일 뿐이라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뿌리는 16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으로 되돌아 가지 않을 수 없다. 르네상스시대가 유럽의 학문적 문화적 재생의 시기였다면, 개신교 종교개혁은 유럽의 기독교 신앙의 대 갱신시기였다. 이러한 갱신은 중세교회가 인간의 전통과 규칙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어지럽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타락시켰다는 생각이 팽배한데서 시작하였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서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부터 출발한다. 1520-1530년대의 유럽은 성서에 대한 새롭고 활동적인 관심이 부여되던 때이다. 이는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에서 연유한다. 중세가 성서에 관심을 가졌으나 “오직 성서로만”이란 주장은 새로운 것이었다. 루터등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권위를 부인한 점에 혁명적이었다. 이는 교회의 전통이 성서를 압도하고 있는 것에 대한 거부이며, 교회의 권위아래에 있는 성서의 위치를 교회의 권위위의 제자리로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결국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와 결별되고 말았다. “오직 성서로만”의 외침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일치된 외침으로서 16세기에 확산된 종교개혁의 핵심적 주장 원칙이 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주요 흐름은 루터란과 개신교의 두갈래다. 이 두 전통파는 교회갱신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택했다. 루터란은 역사적 조직적 교회를 개혁하고 정화하며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의 입장이고, 개신교의 접근방법은 성서적 실례에 근거한 초대교회의 본질과 형식을 회복하는 ‘회복’의 입장이다. 개신교신학자들은 거듭 성서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에서 우리의 뿌리를 찾기위해서는 성서적 선례의 형식을 강조하는 개신교의 전통에 집중해야한다.
(1) 쯔빙글리와 개신교 전통 기독교 인문주의는 많은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Huldreich Zwingli(1484-1531)는 개신교 신학의 설립자로서 이 사상의 양식에 가장 분명한 실례를 제시해 주었다. 쯔빙글리는 젊어서 엄격한 고전적 교육을 받고 바젤대학의 교수와 사제가 되었다. 1516년 쯔빙글리는 기독교 인문주의의 도구를 사용하며 성서를 고양시켜 성서만이 가장 권위있는 가르침이라고 여겼다. 그는 희랍어 신약성서와 성서의 히브리어 원문을 연구하였으며 그리스 고전과 초대 교부들의 작품을 읽은 결과 로마 카톨릭 사상과 예배와 신학이 본질에서 왜곡되었으며 많은 오류를 발견하고 성서로 돌아가자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오히려 에라스무스의 ‘그리스도의 철학’을 ‘그리스도의 법’으로 한층 더 체계화시켰으며 오직 성서만이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의 표준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신념은 에라스무스와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적 관례와 원리에 대한 높은 강조와 ‘성서의 선례에 의한 종교개혁’을 강조하는 경향은 개신교 전통의 핵심적 특징이 되었다. 쯔빙글리는 칭의사상을 중심으로한 복음적인 개혁사상을 루터와 공유한다. 칭의론에 있어서 루터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루터의 사상을 따랐다기 보다는 오히려 성서와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쯔빙글리는 성서에 나타난 복음과 교리자체에 자신의 사상의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인문주의의 방법을 따랐다는 것과, 원천 즉 성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쯔빙글리는 초대교회의 회중예배의 단순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서의 선례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진정한 의식에 덧붙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서의 절과 실례를 통해 모든 인간의 의식과 형식은 어떤 것이라도 배제하였고 모든 관습을 복음의 기준과 바울의 영감에 의해 판단하였다. 루터의 경우 복음의 본질이 바르게 이해되는 한 많은 전통적 의식을 지킬 수 있었으나 쯔빙글리는 성서를 교회예배 형식등 교회생활의 절대기준으로 여김으로써 그의 주장은 루터로부터 복음을 새로운 율법주의로 만든다는 비난을 받았다. 루터가 해석 적용을 위한 전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쯔빙글리는 전통의 완벽성을 부인하고 성서의 직접적이고 순수한 이해를 추구했다.
(2) 칼비니즘(Calvinizm)의 영향 제네바의 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개신교 신학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칼빈은 루터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강조했고 쯔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교회행정과 조직에 관하여 성서의 선례를 중시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적 행함이 타락한 데에서부터 근본적인 순수함을 회복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성서적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모든 믿음의 행위를 회복하고자함이다.“ 칼빈의 접근방법은 기본적으로 기능적인 것이었다. 성서의 형식의 목적은 복음을 선포하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러한 성서의 관습과 모형을 회복하자는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신교 전통은 그리스도교의 뿌리가운데 하나이다. 성서적 관습과 모형에 초점을 맞춘 개신교는 영국에서 크게 일어났으며 후대 Thomas Campbell, Alexander Campbell, Walter Scott, Barton W. Stone 같은 신학자들의 신학사상에 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3)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의 영향 종교개혁 시대의 뿌리는 스위스 개신교 전통으로 끝나지 않았고 영국에서 16세기 중반 무렵 시작된 청교도 운동으로 추적된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성서의 관습과 모형을 회복하는데 주된 초점을 맞추었고 나아가서 미국의 환원운동가들의 사상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문주의 학자들은 영국에서도 종교개혁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중세의 초대교회의 형태와 구조를 회복하려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은 무엇보다도 청교도 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가 남긴 유산이 바로 John Glas, Robert Sandeman, James Haldane 같은 18세기 환원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들로부터 19세기의 캠벨에 주요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긴 회복이념의 전통들과, 그외에도 처음 시대의 회복을 꿈꾸게 한 에덴과 같은 자연그대로의 나라, 임박한 천년왕국 시대 갈망, 교파의 다양성으로 인한 혼란,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실현 등의 많은 요인들을 상속받아 미국인들로하여금 ‘성서로 돌아가, 오직 성서만이 그들을 기독교 신앙과 관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 주었으며 이러한 영향들이 환원운동을 탄생시켰으며 19세기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하게된 역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2. 18세기의 계몽주의(Enlightenment)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신교 종교개혁에 확고한 뿌리를 두고 있음과 동시에 때로 ‘계몽주의’라고 불리우는 18세기 이성의 시대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17세기는 인류사회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새로운 발견, 새로운 견해(사상), 새로운 과학기술, 새로운 생활 수단을 가져온 서구 세계의 과학의 도상 시대였다. 이전 시대 사람은 인류의 삶, 건강,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해 왔다. 하지만 18세기가 되자 인간은 그들 자신의 이성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그들의 삶을 확장, 강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두드러졌다.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그들 자신의 능력을 날로 신뢰할 때부터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 신비와 주권에 의지하는 믿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는 17세기의 종교전쟁에 대한 반응으로서 시작되어 종교전쟁의 무절제한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러므로 18세기는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라고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이성주의가 어떻게 환원운동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이성주의자들 영국의 계몽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워지는 로드 허버트(Lord Herbert)에 의하면 종교전쟁의 진정한 원인은 성서의 개인적 해석으로 인한 종교적 불화이며, 하나님은 오직 한권의 책이 아닌 두권의 책에 권위를 부여하셨는데 이 두 번째 책이 모든 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종교적 신앙의 모든 기본을 가르쳐 주는 자연이라는 책이었다. 허버트는 자연은 도덕 질서의 존재와 옳고 그름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모든 종교의 핵심교리가 되므로 오직 성서만을 신앙의 근원으로 삼지말고 자연을 통한 신학을 발견할 수 있는 이성이라는 종교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즉 이성적인 사람이 동의할 수 있으며,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본질적인 종교로 돌아가 모든 전쟁과 분열을 매듭짓고 기독교 세계를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버트의 주장은 19세기 그리스도의 교회의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일치를 위한 허버트의 목적에는 동의하나 그 방법에 의문을 제기한 초자연적 이성주의자 죤 로크(John Locke)는 그의 저서 ‘관용론’에서 국가는 종교적 정통교리를 강요할 어떤 합법적인 권한도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국가의 법적인 관여를 차단하고, 종교전쟁의 원인을 사실상 제거하였다. 로크는 이성적인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으로 종교를 돌려 놓자고 하는 허버트의 제안을 수락하고 성서에 적용시켰을 뿐만아니라 허버트와 이신론으로 잊혀질뻔한 성서를 구해내었고 성서를 본질에 있어서 종교적 일치를 위한 기초를 놓았다. 로크가 본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는 메시아되신다는 믿음과 그가 명한 분명하고 확실한 명령에 대한 준수이다.
2)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이성적 기독교 신앙 이성적 기독교 신앙은 캠벨 부자(父子)와 관련된다. 먼저 1807년 아일랜드로부터 미국에 이주한 토마스 캠벨은 그가 작성한 문서 “선언과 제언”에서 허버트와 로크가 사용한 철학을 통해 종교분열의 문제를 다루며 기독교인에게 “성서에 분명하게 제시되어있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모습을 회복할 것과 오직 성서에 나타난 그런 관례들만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며 행할 규정이며 허락된 전례”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은 존 로크의 계몽사상을 관철했고, 기독교 일치의 가장 분명한 방법은 모든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본질로 종교를 환원시켜야 된다는 전통사상에 익숙했다. 그는 개신교의 청교도의 전통에서 물려받은 교회의 회복에 대한 철학을 이성의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계몽주의의 접근방법과 혼합한 계몽주의의 후예이다. 18세기에 팽배한 이성, 과학, 합리적 세계관은 뉴톤의 ‘자연의 인과법칙’과 데카르트의 ‘수학적 증거’의 사상이 팽배하게 되어 성서를 합리적인 책으로, 기독교 신앙의 과학적 형태의 이성적 근거에 기초해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성서나 하나님의 권위는 기독교 신앙을 합법화하지 못하며 최종적인 호소력은 이성이었다. 성서의 가르침이 이성적일 때 합법화될 수 있었고, 믿는 자들은 성서를 이성적 사실의 책, 다른 과학서적과 양립할 수 있는 책, 즉 성서는 추상적인 진리에 대한 책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상의 개요로 여기게 되었다. 19세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은 성서는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라 사실 수록이며, 종교는 ‘신성한 과학’이라고 여겼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캠벨의 성경관의 근본을 이루어 성경은 신학적 사실에 관한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사실들의 집합체로 정의했으며, 성령의 은사는 멈추었고 말씀에 의해서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활동한다고 말하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리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인 이성적 이해가 만연하게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두가지 근본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시켰다. 첫째 계몽주의는 기독교 일치의 확실한 방법은 종교를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으로 회복시키는 것이었고, 둘째 이성적인 성경의 사실들에 관해 이성적으로 명백하게 공식화되어지고, 이성적으로 변호되어지고, 예언되어진, 이성적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19세기 환원운동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캠벨은 개신교의 교파적 분리의 배경하에 모든 기독교 세계의 일치에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나아가 캠벨과 더불어 환원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18세기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깊게 받아 성서를 거룩한 생활의 지침서로 보기보다는 교회구조와 예배에 대한 청사진으로 보았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스톤-캠벨운동에 영향을 주었던 두가지 뿌리를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과 18세기의 계몽주의에서 찾아보았다. 우리(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무리 신약의 그리스도인일 뿐이며 교파나 개신교도인이 아니라고 주장을 내세워 배타적이거나 우월감을 가진다고 하드라도 우리의 뿌리는 16세기 개신교 전통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오직 성서”라는 주장은 강한 반 전통주의이며, 근원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고 누구든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모든 것은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또한 우리 선조들에게 기독교 일치의 확실한 방법은 종교를 모든 이성적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으로 회복시키고, 이성적인 성경의 “사실들”에 관해 이성적으로 명백하게 공식화되어지고, 이성적으로 변호되어지고, 예견되어진, 이성적 신앙의 중요성을 가르쳐 준 것이 18세기의 계몽주의 사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의 유산이 되었다. 이상에 열거한 두 주요 영향외에도 스코틀랜드의 독립교회운동과 재세례파의 복귀운동, 회중교회등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긴 회복이념의 전통과 그후의 미국의 인구팽창과 기술향상에 따른 산업혁명, 대각성운동등으로 말미암은 국내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의 실현과 교파의 다양성으로 인한 혼란등 교회와 사회의 양상속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으로 부각된 것이 캠벨. 스톤등에 의한 신약성서를 바탕으로한 교회 일치운동으로서 19세기초 미국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미국 환원운동의 주역인 스톤과 알렉산더 캠벨의 핵심적 환원사상을 간추려보고 오늘 우리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맺으려한다. 스톤은 켄터키에서 ‘자유’를 주제로한 그리스도인 운동을 주도하여 케인릿지 부흥집회에서 얻은 영적 체험으로 칼빈주의의 예정설과 투쟁했으며 세상과의 분리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삶의 양식의 회복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의 근본적인 주제는 초대교회의 재건보다 역사적 전통의 거부, 자유에 대한 이념, 천년왕국의 완성을 앞당기기 위한 초대교회의 회복이었다. 역사와 전통의 교회를 넘어선 초대교회만이 영광스러운 천년왕국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고 확신했다. 스톤은 회복의 과제를 위해 사도적 기초위의 일치를 요구했으나 전통의 창조보다는 전통에 대한 반론으로 이해했다. 전통에 의한 일치가 아닌 자유안에서의 일치였다. 즉 자유는 스톤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토마스 캠벨도 스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성서의 초대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고 모든 분열의 주원인인 기독교 역사와 전통을 버리는 것이었다. 초대 기독교 신앙의 회복이 기독교 일치의 완성을 의미했다. 이는 청교도들의 성서주의와 계몽주의의 교회일치사상의 결합이기도 하다. 알렉산더 캠벨은 이러한 부친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사도시대적 공동체의 합리적 조직적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작성한 “선언과 제언문”을 통해 개인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일치를 위한 성경적 해답을 찾게되었다. 신앙의 체계, 질서, 확신을 제시함으로써 캠벨은 남부 상반부에서 환원운동의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다. 스톤과 캠벨운동은 그들을 둘러싼 문화를 대함에 있어서 비슷한 비평적 시각을 가졌다. 그것은 초대 기독교 신앙의 회복을 통해 천년왕국이 도래할 수 있다는 확신과, 사도시대의 모형에 기초한 믿는 자들의 일치를 요구하는 사상으로서 교파다원주의에 대한 반응이었다. 캠벨은 교파 다원주의의 문제를 회복을 통한 일치로 해결코자했으나 기강이 무너지고 교파적 다양성가운데에서의 일치를 받아들이고 엄격한 환원사상을 완화하였다. 그러나 남부의 그리스도인은 캠벨의 “기독교인의 세례”에서 밝힌 환원이념을 고수해 종교 다원주의를 반대해 왔다. 캠벨은 청교도 사상과 계몽주의 사상을 하나의 신학적 근거로 혼합함으로써 불완전한 사상을 만들었고, 제자파 그리스도의 교회(Disciples of Christ)와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로 분열되었다. 이때 남부에서 스톤에 의해 전개된 형식과 조직을 갖추지 않았던 자유운동이 1823년이후 조직화된 캠벨신학에 흡수되면서 변화와 부흥을 가져왔다. 그들 사상의 핵심을 발전시켜주었던 교리, 형식, 구조는 그들의 생각에서 멀어졌고, 불완전한 전통이 그 자체의 전통이 되었고, 신학에 대한 거부는 하나의 근본적인 신학사상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교인 자신들은 역사와 전통을 지니지 않고 오직 성서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백성이라고 여기지만 전통에 대한 거부를 주요 전통으로 가지는 전통을 부인하는 또하나의 전통이 뿌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우리의 뿌리가 결코 세속적 문화적이지 않고 신성하고 성서적이며 초대교회의 회복을 마음에 그리며 어떠한 성서의 해석도 필요없이 하나님이 기록하신 말씀 그대로를 읽을 뿐이라는 우리의 전통에 서 있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신성한 뿌리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역사적 전통의 빛에서 해석되고 보존되었으며 소중한 가치의 틀안에 변호되어 온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역사와 전통을 벗어 날 수가 없으며 전통을 부인하고 경시하면 또다른 전통적인 경향에 내재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을 회피할 수 없음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의도적으로 전통에 참여하여 건전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전통에는 양면성이 있다. 전통은 그리스도인이 가야할 길을 타협과 왜곡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길을 지키고 보존해 주기도 한다. 전통과의 관계를 열어갈때 우리의 유한함과 불변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성찰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초대교회의 회복을 그리는 전통과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말씀그대로를 읽는 성서관을 가진다. 또한 역사와 무관하며 이 땅의 제도적 흐름과 변천에 관계없이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교회의 이러한 원형과 본질을 찾기 위한 회복운동이며, 분열된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일치운동을 환원의 기치로 삼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역사와 제도적 흐름의 변천과 상관없이 살아가며 인간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곳이라고 단정하며 교파와 그들의 인위적 전통과 제도와 교리는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고 배척해 왔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생각은 자기우월과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완벽주의로 나아가기 쉽다. 그것은 아직 한국에서 환원운동이 존재이유를 상실한 운동으로 교파화 또는 군소교파로 그 위상이 전락하여 취약한 상태에서 본래의 빛을 잃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긴장감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완전하심에 현재 참여하고 있지만 교회가 완전한 영광을 얻고, 티없고 주름잡힌 것이 하나도 없게 될 때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기앞에 영광스럽게 세우실”때이다.
이러한 완성을 향하여 한국에서 신약교회를 위한 환원운동이 역사속에서 신앙의 뿌리 옛적 길 곧 선한 길, 말씀이 가르치는 진리의 길을 파수하며 그 본질적 의미와 원래적 형태를 상실하지 않은 채 온전한 회복을 위해 전진하며, 세속적 뿌리의 전통을 회피하지 않고 긍정하며, 영광과 함께 영광의 부재도 함께 보며 끈임없이 신앙의 자유와 형제적 사랑과 교회의 일치를 위해 계속 투쟁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마지막 영광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것이며(빌 1:6), 우리의 심령이 진정한 평강을 얻을 것이다(렘 6:16).
< 참고문헌 > C. Leonard Allen, Richard T. Hughes 공저, 권순택 역, 우리의 뿌리를 찾아서, 서울, 도서출판 에덴아트컴, 1996. C. Leonard Allen, Richard T. Hughes, Michael R. Weed 공저, 권순택 역, 세속교회, 서울, 그리스도신학대학 출판부, 1996. M. H. Tucker 편저, 김익진 역, 환원운동의 역사, 서울, 태광출판사, 1987. 기준서, 환원사상(제 2호), 1985.
-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에서 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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