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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분에 떡 구워먹는 노예 선민
겔 4:1-17(1-3,9-12)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에스겔서 4장으로 함께 합니다. 1절부터 17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군데를 읽겠습니다.
먼저 1절부터 3절까지 읽습니다.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그 다음에 9절부터 12절까지 읽습니다.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인분에 떡 구워먹는 노예 선민》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1장부터 3장까지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는 소명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가 이제 4장부터 본격적으로 에스겔의 예언활동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예언활동이 세 가지의 상징 행동으로 예언활동이 시작됩니다.
세 가지 상징 행동 중에 첫 번째 것은 토판 그러니까 진흙으로 만든 벽돌 같은데다가 예루살렘을 그립니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을 그린 그림에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사다리를 갖다 놓고 철판으로 막고 또 토성을 쌓습니다. 그러니까 성 높이만큼 성 바깥에다가 진흙 언덕을 쌓아가지고 그 언덕에서 쉽게 공격을 할 수 있게끔 그리고 공성퇴를 둘러칩니다. 공성퇴라는 것은 옛날에 성읍 문을 닫지 않습니까? 그럼 그 성읍 문을 부술 수 있는 그런 철퇴 같은 것 그런 것을 공성퇴라고 말하죠?
자, 이러한 그림을 그리면서 하나의 징조를 보이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에서는 390일 동안은 왼쪽으로 눕고 40일 동안은 오른쪽으로 누워라.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눕는다는 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범죄를 상징하는 날짜 수고 그 다음에 남왕국 유다를 향하여 40일 동안이라는 것은 그 40일 이라는 숫자가 일 년을 하루로 친 숫자로서 그 유다의 죄악의 날수를 상징하는 것이다 라는 것과,
마지막 상징이 바로 기근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390일 동안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하여 눕고 40일 동안은 남왕국 유다를 향하여 눕는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누워 지내는 동안에 하루 동안 곡식을 오늘 20세겔이라는 게 한 220g정도를 하루 동안 먹고 물도 하루에 먹는 물이 한 600cc정도로 하루를 지내면서 예루살렘에게 닥칠 기근을 예언을 하는데 떡을 만들어 먹을 때 어떻게 만들어 먹냐?
너의 인분을 가지고 인분을 말려서 그것을 불을 지펴서 그 인분에다가 불 지핀 것에 떡을 구워 먹어라.
그랬더니 에스겔이 깜짝 놀랍니다. “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주님! 내가 이제까지 제사장 가문에 태어난 제사장으로서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결하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하고 하도 에스겔이 펄쩍 뛰니까 “그러면 좋다. 인분 대신에 쇠똥으로 대신 구워 먹어라.”
야! 선지자 노릇도 못할 노릇이에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소똥도 그렇지?
왜 그러셨을까요?
이게 바로 390일, 40일 북왕국 이스라엘과 유다가 범죄했다고 그랬잖아요? 390년 40년.
그런데 그 범죄한 햇수 동안에 범죄한 내용이 뭐냐 하면 인분으로 불 지펴서 떡 구워먹는 거였다 이겁니다.
그러면 390년과 40년이라는 의미는 뭘까요? 여러분? 390년과 40년 범죄한 햇수라는 게.
390과 40을 합치면 430년이 됩니다. 430년이라는 것은 애굽에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생활을 하던 햇수에요. 440년이라는 숫자가 나오는 이유는 노예생활을 했기 때문에. 노예생활을 하는데 노예생활의 내용이 뭐냐?
내 똥으로 불 지펴서 떡 구워먹는 거였다 이겁니다. 그 노예생활의 내용이..
그러니까 4장에서 하는 지금 이 예언되고 있는 상징 행위에 내용들을 합쳐보는 겁니다.
390일 40일 모로 누워 지낸다는 이야기는 노예생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인분에 떡을 구워먹는 빈곤한 기근이 든 상태에서 인분에 떡을 구워먹는다는 것은 그 노예생활의 내용이 뭐였냐 하면 너무너무 빈곤한 상태로 내가 싼 인분을 가지고 떡을 구워먹는 생활이 노예생활의 내용이었다 이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노예생활은 그렇게 인분에 떡을 구워먹는 비참한 불결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모욕스러운 그러한 노예생활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이겁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으로 상징되는 내용 때문에 그렇게 노예생활을 했고 그렇게 더러운 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는 게 뭘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예루살렘이라는 성은 단순히 그 옛날에 있었던 하나의 성읍이 점령되었다 라는 의미를 갖는 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는 것이..
예루살렘이 포위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던 성전의 역할이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전이 끝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떤 결과를 빚어내느냐?
노예가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이고 노예가 되어서 무엇을 하며 사느냐? 열심히 노력하고 먹고 살려고 애쓰게 되는데 그게 인분에 떡을 구워먹는 삶의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성전이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 노예가 되어서 뭐하고 삽니까? 인분에 떡 구워먹고 삽니다.
이 내용을 얘기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 선택받은 백성들 남유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바로 이렇게 노예가 되어서 살았고 그리고 그 노예된 삶으로 그렇게 비참하고 더럽고 불결한 삶으로 살게 되었다 라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어요.
자,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왜 노예가 됩니까?
성전이 의미를 상실할 때 노예가 됩니다.
성전이 있다는 것이 여러분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이 성전이 있고 없고 성전이 있는 공간에서 사느냐 없는 공간에서 사느냐를 말하기 위해서 390년과 40년이라는 숫자를 등장시켜요.
사실은 유다의 범죄한 햇수가 40년 밖에 안 되는 게 아닙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을 지나서 르호보암 시대 때 남북 왕국으로 갈라져요. 그렇죠? 남북 왕국으로 갈라져서 진행돼서 북왕국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390년 북왕국의 범죄 햇수라는 것은 BC 930년에 북왕국이 갈라진 다음에 그 BC 930년부터 BC 538년까지 BC 538이 뭡니까? 1차 포로귀환 햇수에요.
그때까지를 잡으면 대충 392년이 됩니다. 얼추 맞아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전이 없이 살았어요. 북왕국 이스라엘은. 392년 동안.
포로 귀환해서 처음으로 한 게 뭐죠?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거니까.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 1차 포로가 BC 538년이니까 392년 동안 성전이 없이 살았던 것이고, 유다의 40년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게 BC 586년입니다. 그 BC 586년부터 1차 포로귀환까지 48년이에요. 얼추 40년대이지요. 그렇죠? 성전이 없이 산 거예요.
성전이 없는 공간에서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이렇게 노예로 전락해버리고 만다는 것이고 또 특별히 선민의 경우에는 이렇게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더 부여가 된다는 겁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없이 살아가는 것과 선민이 성전없이 살아가는 것은 훨씬 더 선민이 성전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추악하고 더 더러워질 수 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왜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느냐?
성전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시부모님이 오십니다. 오래간만에. 시부모님이 오시면 똑같이 가정주부가 며느리가 부엌에 들어가서 식사준비를 해요. 그러나 시부모님이 안 계실 때는 끼니 때가 되어가지고 그냥 하기 싫어서 할 수 없어서 식구들이 먹을 밥을 짓습니다. 생계를 위해 짓는 거예요.
그러나 시부모님이 오시면 똑같이 밥을 짓는 행위가 어떻게 달라집니까? 때가 되어서 내 가족들 끼니를 때울려고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시부모님이 원하시는 음식, 며칠 안 계시는 동안에 그분들이 좋아하시고 그분들이 원하시는 것 또 밖에 나가서 식사를 대접해도 맛 있을 것을 대접합니다.
그러니까 생계를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시부모님의 뜻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밥을 짓게 됩니다.
뭐가 다릅니까?
처음에는 생계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예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끌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시부모님이 오셨을 때는 시부모님의 뜻을 충족시켜 드립니다. 뜻을 충족시켜 드리기 위해서 밥을 짓는 동안에 그리고 밥을 짓고 식사하는 동안에 같이 생계는 저절로 해결이 되는 겁니다.생계를 위해서 애쓰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성전이 있는 곳에서 우리가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는 것에 주력하는 삶이 된다는 겁니다. 부모님이 오셨을 때 부모님의 뜻을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주목적이 되는 것처럼 첫 번째 목적이 되는 것처럼, 성전이 있는 곳에서 삶을 산다는 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목구멍을 지나서 배와 창자에까지 채웠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는 것이 성전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선민들의 삶의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전이 없어지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오늘 16절에 보면 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라는 말이 나와요.
의뢰하는 양식이라는 말은 의뢰하는 양식 요 두 단어를 합치게 되면 원래 원어의 뜻이 『떡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가 뭘 의미하지요?
우리 이사야서 36장 같은데 보면 애굽을 의뢰하려고 의지하려고 하는 그 상태를 애굽을 지팡이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려 하느냐? 너희가 의지하려는 지팡이인 애굽은 상한 갈대 지팡이다(사36:6) 이런 얘기를 해요.
또 열왕기하 18장 같은데서도 똑같이 애굽에 의지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상한 갈대지팡이라는 말이 나옵니다.(왕하18:21)
그러므로 떡의 지팡이라는 것은 떡을 의뢰하는 것이고 떡을 집고 의지하는 것이고 떡을 위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계를 위해 사는 삶 그게 바로 노예의 생활이라는 겁니다. 430년이라는 숫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성전없이 살아갈 때에 성전이 있을 때는 성전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성전에 임재하시는 그 하나님의 생각을 먹는 것이 주된 일이 되고 주된 업무가 되는 반면에, 성전이 없는 공간에서 삶을 살아갈 때는 생계를 위해서 노력하고 수고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인분에다가 떡을 구워먹는 것으로 상징을 합니까? 이 노예생활을.
인분이 뭐에요? 나에게서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인분에 불을 지핀다는 건 에너지를 말해요. 화력을 말해요.
우리에게서 나오는 에너지가 뭐에요? 수고와 노력입니다.
수고와 노력을 어디다 쏟습니까? 생계를 위해 쏟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나의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는 것 생계를 위한 나의 수고와 노력이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인분이라는 거예요. 그 수고와 노력이 단지 수고와 노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고와 노력이라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그게 인분이라는 겁니다. 무엇을 위한 나의 수고와 노력이? 생계를 위한 나의 수고와 노력이.
더군다나 선민이 입에 들어가는 떡을 위하여 노력하며 사는 것이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내 모든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다 쉽게 말하면 똥 싸는 것이고 그 똥 싸는 힘으로 그 불에다 구워서 겨우 겨우 얻어먹고 사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성전이 계시고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의 삶을 간섭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동안에 우리가 노력하고 수고해야 될 대상이 완전히 180도로 바뀐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계실 때와 안 계실 때가 어떻게 우리가 얻으려는 게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부모님이 집에 오셨을 때와 시부모님이 안 계시고 내가 낮 동안에 아이들하고 함께 방학 동안에 있을 때에 어떻게 그것이 같은 마음가짐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어요.
시부모님이 오신다는 것은 내 삶 전체가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부담스럽지요. 시부모님이.. 그렇지요? 먼지 하나 없어야 되고 질서정연해야 되고 음식은 시부모님 입에 맞게 해야 됩니다. 시부모님 안 계시면 내 마음대로지만.. 금방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삶의 내용과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는 그 이유가 완전히 바뀌어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뱃속까지 채우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과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생계를 떡을 위해서 떡으로 배를 채우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이거는 사실은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대체 살아가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해야 될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될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주야로 모세를 통하여 너에게 준 말씀을 묵상하라. 네 창자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라. 그러면 전쟁의 승리는 내가 가져다줄게.
다윗에게 말합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해라. 나라의 부흥을 가져다줄게. 그건 내 일이다.
생계는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있는 성전의 공간에서의 삶에서 내 생계는 하나님의 일이 되어버리고, 내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창자까지 채우는 일이 돼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에 보면 이 인분에 관한 얘기가 나와요.
신명기에 보면 신명기 23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진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진을 치고 있으면서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을 치르게 되는 상황이 됩니다. 광야에서도 전쟁이 일어났었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진중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십니다. 그때에 절대로 진중에서 대소변을 보면 안 됩니다. 진 바깥에 화장실을 만들어 놓고 일을 보고 흙으로 덮으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중에서 우리의 일을 보게 될 때 하나님은 떠나가실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떠나가실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해요.
이것을 오늘 본문으로 가져와서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어떤 내용이 됩니까?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을 위하여 우리가 노력을 쌀 때 우리의 수고를 싸 댈 때 그때 하나님은 도저히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가져다 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생계를 위한 노력은 우리가 똥 싸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일을 성공하겠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우리가 똥 싸는 겁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어요.
우리 기도하러 가서 우리의 사업과 우리의 건강과 이 세상의 삶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기도하면서 똥 싸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똥 싸는 거라구요. 기도라는 수고와 노력을 하면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냐 이겁니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어제 가마우지 얘기했어요. 가마우지 목줄을 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뱃속 창자까지 들어오기 위해서는 목줄을 풀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십자가 기도가 될 수 밖에 없어요. 십자가 기도를 통해서 줄을 풀어야 되는데 그 목을 졸라매는 목줄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그게 바로 생계에 대한 생각입니다. 생계가 바쁘게 돌아가는 거예요. 생계에 대한 노예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는 동안에 절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십자가를 붙잡고 드리는 기도시간 그리고 삶에서 격리되어 한가한 시간을 벌지 않고는 도저히 이 목줄을 풀고 노예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다.
내가 생계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나는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나의 삶의 영역에서 똥 싸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먹고 산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싼 인분에 불을 지펴서 떡을 구워 먹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말씀을 채우고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면서 팔복으로 배불러집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팔복으로 배불러진 다음에는 그 다음에 직장생활 똑같이 하는 거예요. 하나님 모르는 사람과 똑같이 합니다. 그러나 그 직장생활은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활동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생계를 위한 직장생활과 하나님의 활동으로서의 직장생활 어느 게 창조적이겠고 어느 게 더 복된 것이겠는가는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인분에 떡 구워먹는 노예 선민. 이게 바로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문제였다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생계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이 노예상태를 극복하세요. 삶의 현장에 대해서 죽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주님 따라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늘로 내 배를 채우신 다음에 하나님이 이 땅에서 가정과 직장과 내 시장과 사업현장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를 그냥 관찰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이 바쁜 삶의 와중에서 반드시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셔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며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삶과 생계를 전적으로 책임지시고 끌고 가는 축복된 삶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1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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